이시하라 요시유키

 


[image]
히로시마 도요 카프 No.31
이시하라 요시유키 (石原慶幸)
'''생년월일'''
1979년 9월 7일
'''국적'''
일본
'''출신지'''
기후현 안파치 군 스노마타 정
(現 기후현 오오가키 시)
'''포지션'''
포수
'''투타'''
우투우타
'''학력'''
기후 현립 기후 상업 고등학교
토호쿠 복지 대학
'''프로입단'''
2001년 드래프트 4위
'''소속팀'''
히로시마 도요 카프 (2002~)
1. 소개
2. 프로 입단 전
3. 프로 입단 후
4. 연도별 성적


1. 소개


일본의 야구선수. 프로에 들어와 줄곧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서 뛰고 있는 베테랑 포수다. 명포수로 이름을 날린 이토 쓰토무는 이시하라에 대해 "12개 구단 중에서 포구는 최고 수준"이라 극찬할 정도로 수비가 좋은 포수. 어깨도 강한 편으로 도루저지율도 나름 괜찮았다. 지금은 깨졌지만 한때는 통산 수치가 3할이었을 정도.

2. 프로 입단 전


기후 현립 기후 상업 고등학교에 입학해 포수로 뛰면서 2학년 하계 코시엔에 진출했지만 2차전에서 오사카의 최고 야구명문 고등학교[1]였던 PL학원 고등학교에게 패배했다. 3학년 때도 하계 코시엔에 진출하여 1차전에서 본인의 고시엔 첫 안타를 기록했지만 그 시합에서 패배하고 말았다. 이 당시 고교 통산 57홈런을 기록하며 강타자의 면모를 보였었다.
그 뒤 토호쿠 복지대학으로 진학하여 3학년 때 시드니 올림픽 일본 국가대표 후보로 발탁되었고, 2001년 드래프트에서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 4위로 지명되어 입단했다.

3. 프로 입단 후


자신의 첫 프로시즌인 2002년에는 고작 5경기밖에 출전하지 못했지만, 출전한 첫 경기에선 그 해 최우수 중간계투상을 받은 야쿠르트 스왈로즈의 이시이 히로토시를 상대로 프로 첫 안타를 때려내기도 했다.
2003년에는 점점 출장 기회가 많아져 116경기에 출전해 팀의 경쟁자들을 앞지르는 모습을 보였다. 타율은 .213으로 매우 낮았지만 4개의 홈런이 만루홈런 2개와 2점+3점 홈런이었고, 강한 어깨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타니시게 모토노부의 기록을 뛰어넘는 도루 저지율(.319)을 보였다.
2004년에는 8번 포수로 프로 첫 개막전 선발로 나서, 5시합을 제외한 그해 시즌의 모든 시합에 출장했으며 타율 .288과 개인 첫 시즌 100안타를 기록하여 전년도보다 타격이 더더욱 향상. 수비에서도 변함없는 좋은 모습을 보이며 포수로서 실력이 더더욱 좋아진 모습을 모였다.
2005년 시범경기에서 자신이 친 파울타구에 왼손을 맞아 부상을 당해 개막전 출전은 무산되었다. 이후 5월 말에 복귀하긴 했지만 눈에 띄는 활약은 보여주지 못했고, 결국에는 경쟁에서 밀려 쿠라 요시카즈에게 주전포수 자리를 빼앗기고 말았다. 이후로 한동안 쿠라와 주전포수 경쟁을 하게 된다.
2006년에도 타격은 신통치 못해, 초반에는 잘나가나 싶더니 5월 말 즈음에는 점점 떨어져 타율이 2할 언저리에 이르른다. 특히 득점권에서는 1할대를 기록하는 등 부진했는데, 특히 만루 상황에서는 6번 중 4번을 병살타로 장식하는 등 몹시 부진했다. 같은 해 9월 7일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전에서는 10회말 2사 만루 수비상황에서 '''끝내기 타격방해'''를 저지르고 말았다. 일본 프로야구 역사상 31년만에 있는 일이었는데, 이 날이 하필 '''본인의 생일'''이어서 더욱 씁쓸했을 듯하다(...) 이시하라는 "나가카와 카츠히로에게 미안하다.[2]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소감을 남겼다. 마티 브라운 감독 역시 "저런 플레이는 처음 본다" 라고 말하기도 했다.
2007년엔 타격 성적이 전년도보다 나아졌지만 여전히 쿠라와 주전경쟁을 하느라 주전 자리를 온전히 확보하진 못했다. 5월 8일 주니치 드래곤즈 전에선 당시 등판시킬 계투진의 부진으로 그 대용 삼아 불펜 투구를 하기도 했다. 다만 등판은 결국 없었다. 10월 1일, 주니치 드래곤즈전에서는 8회말 1사 3루에서 스퀴즈 번트를 감행하다가 실패해 버리기도 했다.
2008년엔 타격부진에 빠진 쿠라를 밀어내고 다시 주전포수 자리를 확보하는데 성공했고, 4년 만에 규정타석 도달과 시즌 100안타를 기록했고 홈런, 타점도 9홈런 50타점을 기록하면서 커리어 하이(특히 타점)를 기록했다. 2009년에는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일본 대표팀에 발탁되어 2라운드 대한민국 전에 출전하기도 했다. 귀국 후에는 팀의 주장으로 선정되었다. 그해 시즌에는 타율이 .206으로 매우 낮았지만 규정타석에도 도달하고, 생애 유일의 두 자릿수 홈런(10홈런)도 기록하고, 끝내기 홈런도 기록하는 등 의외의 한 방을 쳐주는 모습을 보였다. 또한 2008년~2009년엔 본인 인생 처음으로 올스타전에, 그것도 2년 연속 출장하였다. 여담으로 히로시마 포수가 두 자릿수 홈런을 기록한 건 카프의 첫 센트럴리그, 일본시리즈 우승 당시의 주전포수였던 미즈누마 시로[3]가 1976년 11홈런을 친 이래 33년만의 일이었다.
2010년에는 2년만에 타율이 2할 5푼을 넘기는 등 전반적으로 컨택이 좋아진 모습이었다. 또한 마에다 켄타와 함께 최우수 배터리상도 수상하기도 했다. 이해 시즌에 FA권리를 취득했지만 FA선언을 하지 않고 구단과 3년 계약(연봉 1억엔)을 맺었다.
2011년 5월 14일 요미우리 자이언츠전에서는 끝내기 사구(死球)를 기록했다. 또한 이 해 3번째로 올스타전에 출전하기도 했다.
2012년 6월 14일, 1000경기 출장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같은 해 7월 17일 주니치 드래곤즈전에서는 이와세 히토키를 상대로 끝내기 스퀴즈 번트를 쳐 팀의 5연승을 이끌었다. 센트럴리그 사상 18년만에 처음 있는 일.
2013년에는 3년 만에 120경기 이상 출전을 달성했다. 타율은 .248에 불과했지만 사사구를 45개나 골라내 출루율은 타율보다 1할 가까이 높은 .350을 기록했고 홈런과 타점도 지난 2년보다 더 높은 성적을 기록했다. 9월 17일, A클래스가 걸린 한신 타이거스와의 경기에서는 자신의 통산 4번째 끝내기 홈런을 날려 팀의 4년 만의 7연승을 이끌었고, 이 해 팀은 16년만에 A클래스를 기록하여 클라이맥스 시리즈에 진출했다. 이사하라 개인으로는 마에다 켄타와 함께 최우수 배터리상을 수상했고, 2번째 FA를 맞아 구단과 3년 총액 3억 엔의 계약을 맺었다. 여담으로 이 해 이시하라의 등장곡은 싸이강남스타일이었다.
2014년 이후에는 공격형 포수 아이자와 츠바사의 성장으로 주전 포수 자리에서 내려왔고 크리스 존슨, 쿠로다 히로키 등이 선발로 등판하는 시합에서 주로 선발 포수를 맡게 되었다.
2016년엔 쿠로다 히로키, 노무라 유스케 등과 배터리를 짜며 다시 주전포수 자리를 차지했고, 중간에 부상으로 잠깐 이탈하기도 했으나 3년 만에 100시합 이상 출장하는 기록을 세우며 비록 타격성적은 전반기에 1할대로 까먹는 바람에 .202 0홈런 17타점으로 많이 저조했지만, 수비 등에서 꾸준히 팀을 지탱하며 카프가 25년 만에 센트럴리그 우승을 달성하는데 일조하였고 본인 인생 처음으로 베스트나인골든글러브를 획득했다.[4] 그러나 일본시리즈에선 내내 무안타에 머무르는 바람에 팀의 패퇴에 일조하고 말았다.
이후론 다시 주전포수 자리를 아이자와에게 넘겨 주었으나 현재까지 백업 포수이자 크리스 존슨의 전담 포수로써 계속해서 뛰고 있으며, 2017년엔 통산 1500시합 출장 기록을 달성했고 2018년엔 히로시마 도요 카프 포수로써는 사상 첫 통산 1천안타를 기록했다. 통산 1천안타는 38세 8개월에 세운 기록으로 사상 최연장 기록이다.

4. 연도별 성적


역대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볼넷
출루율
장타율
OPS
2002
히로시마 도요 카프
5
10
.300
3
0
0
0
0
1
0
0
.300
.300
.600
2003
116
305
.213
65
14
2
4
21
19
0
17
.268
.311
.580
2004
135
396
.288
114
22
0
6
35
32
0
21
.336
.389
.725
2005
74
174
.241
42
6
0
2
12
13
0
11
.298
.310
.609
2006
85
240
.221
53
9
0
3
11
17
2
15
.276
.296
.572
2007
89
256
.281
72
12
0
3
15
24
2
16
.338
.363
.701
2008
123
422
.265
112
19
0
9
50
36
6
22
.302
.374
.676
2009
124
364
.206
75
15
1
10
37
31
2
39
.287
.335
.622
2010
122
369
.263
97
19
0
8
41
33
4
29
.321
.379
.700
2011
110
299
.201
60
10
0
4
27
15
2
22
.262
.274
.536
2012
77
217
.240
52
15
0
1
22
22
0
22
.311
.323
.634
2013
121
327
.248
81
9
0
7
35
32
0
45
.350
.339
.689
2014
80
193
.192
37
8
0
4
19
17
1
21
.274
.295
.569
2015
83
216
.241
52
6
0
2
12
15
1
14
.287
.296
.583
2016
106
243
.202
49
7
0
0
17
19
4
29
.296
.230
.526
통산

1450
4031
.239
964
171
3
63
354
326
24
323
.303
.330
.633
[1] 현재는 재정 문제와 계속되어 터졌던 폭력 논란 등으로 인해 부원수가 감소하여 야구부가 휴부에 들어갔다.[2] 당시 등판한 투수가 나가카와 카츠히로였다.[3] 에나츠의 21구를 잡았던 그 포수 맞다.[4] 다만 베스트나인은 타격 성적에서 보다시피 사실상 우승 프리미엄으로 준 거나 다름없는지라 논란이 될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