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 쓰토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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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HK에서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등 야구 해설을 맡던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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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산 베어스 수석코치 시절.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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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바 롯데 감독으로서의 모습.
1. 개요
일본의 야구인. 선수 시절에는 세이부 라이온즈의 프랜차이즈 스타이자 포수로 일본시리즈에서만 8차례 우승에 기여했다. 은퇴 후 지도자로서 2004~2007시즌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감독, 2012시즌 KBO리그 두산 베어스 1군 수석코치, 2013~2017시즌 치바 롯데 마린즈 감독을 거쳐서 2019시즌부터는 주니치 드래곤즈의 수석코치를 맡고 있다.
2. 선수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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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마모토에서 학교를 다녔던 시절에는 외야수였으나, 발빠른 경쟁 학교 선수를 막기 위해 포수로 포지션이 변경되었다.
1980년 그의 모교였던 현립 구마모토공고[3] 는 그 유명한 아키야마 코지가 에이스로 군림했던 현립 야츠시로고교를 현대회 결승에서 꺾고 제 62회 일본 고교야구 전국대회(고시엔)에 출장했는데, 당시 세이부 감독이었던 네모토 리쿠오가 그의 포수 재능을 높게 사 세이부의 연고지인 사이타마현 도코로자와시에 있는 도코로자와고등학교로 전학을 간다. 그러고서는 동시에 세이부 구단의 직원으로 채용되어 낮에는 연습을 하고 밤에 학교에서 수업을 듣는 생활을 계속했는데, 이는 네모토 리쿠오 당시 단장의 주도하에 우수한 고등학교 선수를 입도선매하는 세이부 구단의 스카우트 전략으로 이러한 형식으로 혹시나 있을지 모르는 경쟁 팀의 스카우트 공세를 차단하기 위한 방법 중 하나였다.[4] 당시 세이부의 이런 전략은 드래프트 정신에 위배되는 행위로서 말이 많았다.
어쨌거나 반은 연습생 반은 학생 생활을 거쳐 1981년 드래프트 1순위로 세이부가 지명하여 1982년도에 세이부 라이온즈에 입단했으며, 포수 출신 모리 마사아키 감독 아래에서 기량을 갈고 닦아 2003년까지 '''22년 동안''' 세이부의 주전 안방마님으로 군림한, 일본프로야구의 손꼽히는 명포수. 다니시게 모토노부, 노무라 카츠야에 이어 일본프로야구 역대 포수 출장횟수 3위를 기록하고 있다.
포구시 일부러 소리가 나게 하려고 글러브의 얇은 웹부분으로 잡아온건 유명한 일화. 투수들이 들으면 내 공이 좋구나 생각하고 자신감이 붙는다는 이유로 그렇게 했다고 한다. 심판도 소리에 속아 판정이 너그러워지는건 덤이라나.
2327경기를 뛰었으며 골든 글러브 포수부분을 '''11회'''나 수상하였고 1263번의 수비 기회에서 무실책한 기록을 가지고 있다. 5번의 두자릿수 홈런 시즌을 포함해 통산 156홈런을 기록했고, 지금의 풍채로는 상상하기 어렵지만 젊었을 적엔 발도 빨라서 데뷔 3년차이자 첫 풀타임 시즌이었던 1984년에는 20도루(16실패)를 기록하는 등 5번의 두자릿 수 도루 시즌을 기록했다. 최종적으로는 일본프로야구 포수로서는 역대 최다인 134도루를 기록했다.
여담이지만, 1985년 일본시리즈 당시 세이부의 마지막 타자이기도 했다. 이토는 6차전 마지막 타석에서 타자로 나와 투수 땅볼로 아웃되면서 한신 타이거스의 첫 일본시리즈 우승을 결정지었다(...)
3. 지도자 시절
3.1. 세이부 라이온즈 코치, 감독 시절
세이부 황금시대를 이끈 수많은 프랜차이즈 스타들 중 세이부 구단에서 아예 미래의 감독감으로 찍고 키운 선수다. 팀 리더 이시게 히로미치, 팀의 주포였던 아키야마 코지, 기요하라 카즈히로, 팀 수비의 핵이었던 츠지 하츠히코, 에이스였던 쿠도 키미야스, 와타나베 히사노부, 카쿠 타이겐, 이시이 타케히로 등등을 줄줄이 트레이드 내지는 FA 등으로 떠나보내면서도[5] 은퇴할 때까지 끝까지 지켜낸 게 이토 쓰토무였다.
2001년 시즌이 끝나고 히가시오 오사무 감독이 자리에서 물러나자 세이부 구단은 이토를 은퇴시킨 후 곧바로 감독직에 앉히려고 했으나, 이토 본인이 선수생활 연장에 대한 의지가 강했던 데다가 제대로 된 지도자 수업을 받지 않고 바로 감독자리에 취임하는 것에 대해 부담을 느꼈기 때문에 우선 2년간 플레잉코치로 선임하며 선수 겸 종합코치로 지도자 수업을 받게끔 했다. 2년의 유예기간 동안 팀을 이끌 감독에는 이하라 하루키 작전코치가 선임되었다. 앞서 서술한 다른 선수들 같은 경우, 구단의 은퇴권고 및 코치직 제안을 거부하고 현역생활에 미련을 보이면 가차없이 방출해서 팀을 떠나는 것을 방관했던 것과 비교하면 천지차이. 그래서 세이부 황금시대의 주축 선수들 중에 온전하게 세이부에서 커리어를 마감한 선수가 거의 없다. 이토의 후임으로 부임한 와타나베 히사노부조차도 선수생활의 말년은 야쿠르트 스왈로즈, 대만프로야구로 이적하여 현역생활을 연장해야 했다.
이러한 사정으로 인해 현역 막바지인 2002년부터는 선수 겸 플레잉코치로 활동하였고, 2003년 시즌 후 공식적으로 선수 은퇴를 선언, 곧바로 세이부의 정식 감독으로 부임하였다. 이때 나이가 불과 42세로 상당히 젊었던 편.
감독으로 부임 후 첫번째 해인 2004년에는 시즌 시작 전 마쓰이 가즈오가 MLB 뉴욕 메츠로 이적, 외국인 타자 알렉스 카브레라가 부상으로 전반기를 날린 탓에 전력 유출이 발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세이부를 12년만에 일본시리즈 우승으로 이끌었다.''' 여담으로 이 때 일본시리즈 상대 팀인 주니치 드래곤즈의 감독은 오치아이 히로미츠였는데, 오치아이의 감독 스타일은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인 '오레류(オレ流)'로 알려져있던 데 비해, 이토는 이에 대비되어 세이부에서 엘리트 코스를 밟았기에 '레오류(レオ流)'로 알려졌다. 하지만 '정통파'라는 이미지와는 달리 와쿠이 히데아키, 키시 타카유키, 호아시 카즈유키, 카타오카 야스유키, 나카지마 히로유키, 나카무라 타케야 등 젊은 선수들을 중용하면서 팀의 세대교체를 도모하였다는 평가. 다른 팀으로 보내버린 황금시대의 주축 선수들 중에 지도자로 성공한 케이스가 거의 없는 현실에 비추어볼 때[6] 프랜차이즈 출신인 이토를 감독으로 선택한 세이부의 선택은 성공작인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현역시절부터 차기감독으로 찍어놓고 다른 스타들은 받지 못한 배려까지 해주는 편의를 베풀어줬건만, 부임 첫 해 우승한 걸 제외하면 나머지 시즌은 기대치에 미치지 못했다. 급기야 감독 취임 4년차인 2007년에는 주축 선수들의 부진, 부상으로 침체를 겪은데다가 교류전 10연패를 찍으며 일찌감치 하위권으로 떨어져 다시는 올라오지 못했고, 결국 팀이 26년 만의 B클래스인 리그 5위로 떨어지면서 세이부 감독에서 물러났다. 게다가 세이부를 떠나면서 구단 측이나 선수들과의 사이에 불협화음이 있었던 모양으로, 현재 이토와 세이부 구단과의 관계는 그다지 좋지 않은 상황.
여담으로 2007년 시즌 막판 구단으로부터 재계약 불가 통보를 받은 뒤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와 시즌 최종전을 가졌는데, 구단이 위로 메시지조차 보내지 않자 상대팀인 호크스의 오 사다하루 감독에게 "제가 돈을 드릴 테니, 선배님이 꽃다발을 사셔서 경기 전에 저한테 주십시오"라고 안습한 부탁을 했다고 한다(...)
3.2. 공백기
세이부 감독에서 물러난 후 NHK 해설위원, 스포츠 평론가 등으로 지냈고, 2009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는 일본 대표팀 수석코치를 맡기도 하였다. 2011년 초 LG 트윈스의 스프링캠프에 포수 인스트럭터로 초빙되어 한국 야구와 인연을 맺기도 했다.
3.3. 두산 베어스 코치 시절
2012년 시즌을 앞두고, 두산 베어스의 수석코치로 영입되었다. 초보 감독인 김진욱 감독을 보좌하기 위해 영입된 듯. 대표적으로 "진욱! 칙쇼! 내가 화장실 간 사이에 이혜천을 올리다니!" 드립 등(...) 2012년 DC 국내야구 갤러리 자짤에는 8개 구단 감독이 나왔는데 두산만 이토가 감독으로 나왔다.
하지만 두산에서는 정작 눈에 띄는 성과를 보여주지 못했다. 실제로 김진욱 감독을 비롯한 코칭스텝들과의 의견차이가 너무 커 갈등이 심했다고 한다. 사실 일본프로야구계에서도 고집세기로 유명하다고 알려진 사람이 물 건너 와서는 오죽했을까 싶다. 이에 대해 한국프로야구에 적응하려고 들지 않는단 소리도 있었다. 결국 여름에 접어든 이후로는 팀내에서 별다른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고, 최재훈 등의 일부 포수 유망주들에게 멘토 역할을 해준 것 빼고는 한 일이 없다고 한다. 정작 본인이 두산에 있었던 시절을 찍은 다큐멘터리에서는 육성한 포수로 양의지만 나온다.
그래도 최재훈을 자신을 뛰어넘을 선수라며 아끼고 가르침을 주었다고 한다. # 그리고 최재훈은 2013년 넥센과의 준플레이프 3차전에서 완벽한 도루저지로 승리에 공헌하였고 4차전에서는 한점 차로 끌려가던 와중에 역전 투런 홈런을 쳐서 두산을 구하자 두산팬들은 그의 안목에 감탄했다.
두산 베어스에 있던 시절을 이토 본인의 시점으로 찍어 다큐멘터리로 방송했는데, 김진욱 감독뿐만 아니라 전반적으로 두산 베어스 내에서 겉도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선수들과의 사이는 좋았다. 정말로 다큐멘터리 하나 찍고 갔다. 이 떡밥이 나오자마자 돡갤에서는 명불허전 빠가진욱이라면서 김진욱을 깠다.
2020년 11월 인터뷰에서 한국프로야구 생활이 좋은 경험이 됐다고 밝혔다.일본어 원문
3.4. 치바 롯데 마린즈 감독 시절
결국 2012년 시즌 이후 치바 롯데 마린즈의 새로운 감독으로 취임하여 자리를 옮겼다. 1년간 한국 관광하러 왔다는 설이 기정사실화된 듯. 그리고 치바 롯데는 개막전에서부터 7월까지 퍼시픽리그 1, 2위에서 왔다갔다 하며 마치 원래부터 강팀이었던 것 같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2011, 2012년의 약체팀이 대형 전력보강도 없이 하루아침에 강팀으로 바꿔버린 셈... 그걸 보는 두산팬들의 마음은 그저 씁쓸할 뿐. 두산 베어스 갤러리 등지에선 이런 유능한 분을 감독으로 올리는건 고사하고 그냥 일본으로 보내버린 프런트를 가루가 되도록 까고 있다. 사실 프런트보단 이토 쓰토무를 포수 인스트럭터 정도로 대한 코칭스태프들의 잘못이 더 크다고 봐야 한다. 근데 후반기 들어 힘이 점점 빠지면서 1위 라쿠텐과의 격차가 점점 커지더니 결국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에게 밀려 3위로 2013 정규시즌을 마감했다.
2014년, 신예 이시카와 아유무 말고는 죄다 폭망한 투수진, 외국인 타자 루이스 크루즈와 알프레도 데스파이네 말고는 밥값 못하는 타순에 허덕이며 4위로 시즌을 마무리했다.
2015년, 초중반 부진했지만,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의 괴물같은 13연패를 틈타 결국 3위자리를 차지하며 CS진출에 성공했다! 거기다가 클라이맥스 시리즈 퍼스트 스테이지에서 2위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까지 꺾었다! 이로써 계약을 연장하여 내년에도 얼굴을 볼 수 있을 듯하다. 하지만 호기롭게 2005년, 2010년의 하극상 재현을 선언하고 올라간 클라이맥스 시리즈 파이널 스테이지에서 쿠도 키미야스 감독의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에게 떡실신당하여 2015년 일본시리즈 진출은 실패.
2016년에도 비록 소프트뱅크, 닛폰햄의 양강체제에 밀렸지만 꾸준하게 3위자리를 사수하고 2년 연속으로 클라이맥스 시리즈 진출을 눈앞에 두고 있다. 모 그룹의 경영권 다툼 등으로 인한 빈약한 지원으로 보강도 소프트뱅크에서 방출당한 제이슨 스탠드리지와 도움이 거의 되지 않았던 야마이코 나바로 정도를 제외하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안정되게 팀을 이끈 수완을 평가받아서 구단에서 2년 계약연장을 제시했다. 그러나 이듬해 상황이 180도 돌변하게 될줄 누가 알았으랴?
롯데에서의 감독으로서 제2의 전성기가 찾아오나 했건만 2017년 시작부터 최악의 상황으로 시작하여 시즌 내내 바닥에서 놀고 있다. 시범경기에서 12승 3패로 1위를 차지했을 때만해도 최소한 포스트시즌은 갈 것처럼 보였으나 막상 시즌 뚜껑을 열어보니 팀타율, 팀방어율 등 뭐하나 제대로 굴러가는게 하나도 없고[7] 결국 8월 13일 세이부와의 홈경기를 앞두고 시즌이 끝난 후 사임하겠다고 밝혔다. 다만 전체적인 분위기는 전력보강은 커녕 아무것도 해주지 않는 구단 밑에서 때려치우려던 것을 억지로 더 지휘봉을 맡겨서 유임시켰음에도 구단이 전혀 개선의 기미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어느정도 동정론은 있는 상황이다. 8월 13일의 사임발표도 언론들이 "구단에서 유임 결정 가능성 높음"이라는 식의 추측성 보도가 난무하자 이대로는 팀 분위기만 더 흐트러진다면서 본인이 확실하게 끝맺음을 하겠다면서 원래 시즌 끝나고 하려던 것을 당겨서 한 것이다.
3.5. 주니치 드래곤즈 코치 시절
치바 롯데 감독에서 사임한 이후 NHK 야구해설가, 평론가로 복귀하였고 주니치 드래곤즈 차기 사령탑 후보로 급부상하였으나 주니치는 팀의 레전드 요다 츠요시를 신임감독으로 선임하였고 2인자인 수석코치에 내정되었다. 아마 감독경험이 많은 이토가 초보감독인 요다 신임 감독을 적극 도와준다는 명분으로 수석코치 자리를 주었고, 요다 감독이 성적이 신통치 않을 경우 차기감독으로 승격하지 않을까라는 의견이 대부분이다.
4. 여담
- 치바 롯데 마린즈 감독 시절 이대은과 한솥밥을 먹엇는데, 재밌게도 이대은이 해외 생활을 정리하고 군 복무까지 마친 뒤 kt wiz에 입단하면서 두산 시절 보좌했던 김진욱 당시 kt 감독이 이대은을 맡게 되는 듯 싶었으나, 김진욱은 정작 이대은을 한 경기도 써보지 못하고 감독직에서 물러나면서 인연이 빗나가고 말았다.
- 정의윤의 포텐이 터지기 전 '일본에서도 30홈런을 칠 수 있다'던 기요하라 가즈히로의 평가가 워낙 알려져있어서 그렇지, 먼저 그 포텐을 알아보고 기요하라에게 지켜보라고 한 장본인이 이토였다. 2011년 LG 스프링캠프에 인스트럭터로 참가했을 때, '당장이라도 일본에 데려가고 싶은 선수'로 정의윤을 꼽았을 정도.
- 고향은 구마모토 현인데, 2016년 고향에 지진이 일어났을 때, 당장에라도 구마모토로 가고 싶다는 발언을 하여 답답함을 호소했다.
- 2015년 책을 냈는데,두산 선수들의 먹성이 매우 좋다고(...) 써 놓았다. 식탐이 많다고 했는데, 스프링캠프 기간에 필요 이상으로 먹는 모습이 보여서 조절시키기도 했다는 언급이 있다. 회고록 내용
- 치바 롯데 감독직을 본의 아니게 사임하면서 김정후가 2018년 두산으로 입단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치바 롯데 구단 관계자가 일본 독립리그에서 전반기 뛰고 나면 뽑아주겠다고 했는데 막상 이토 감독이 성적부진으로 사임할 것이라는 설이 나오자 에이전트가 국내구단 테스트를 권유한 것.
- 1992년 일본시리즈를 앞두고 상대팀인 야쿠르트 스왈로즈에 대해 크게 의식하지는 않았으나[8] 선수들의 모습보다는 지휘봉을 잡고 있는 노무라 카츠야의 존재와 그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ID야구[9] 에 대해 걱정했다고 한다. 같이 배터리로 호흡했던 투수 쿠도도 같은 생각이었으며 이번 일본시리즈는 야쿠르트 선수들과 싸우는 게 아닌 야쿠르트 코칭스태프들과의 대결로 생각하고 임했다고 술회했다. 당시 기자들은 '모리 vs 노무라', '이토 vs 후루타'의 대결 구도로 몰아갔고 그 대결이 포수 포지션에 대한 관심을 높여서 기쁘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1992년 일본시리즈에서는 세이부가 우승을, 1993년 일본시리즈에서는 야쿠르트가 우승을 차지했다.
- 세이부에는 당시 쿠도, 와타나베 등 에이스 투수들이 넘쳐났지만 본인이 공을 받아본 투수들 중 최고의 투수로 꼽는 건 궈타이위엔이었다.
- 노무라는 이토와 후루타의 스타일이 전혀 다르다고 평했다. 후루타는 포수리드를 중시하고 포수의 의도대로 끌고 가는 편이고, 반면 이토는 투수의 의사를 존중하면서 자신의 성격을 지우는 유형이라고 했다. 이토는 이에 덧붙여서 백투백 우승을 노리는 팀의 경우는 자신의 스타일이, 챔프 자리에 처음 도전하는 팀의 경우는 후루타 같은 스타일이 어울린다고 했다. 이토의 경우 처음에는 포수 중심의 리드를 구사했으나 스타일을 바꿨다고 한다.
[1] 2012 스카우팅 리포트에선 최준석과 이토 코치가 장난치자 곰 2마리가 노는 모양새라고 적었다. [2] 선수시절에 획득한 것만 계산, 그 후 감독으로서 한 개 추가[3] 학교 동문으로 선수-감독 모두 성공한 가와카미 데쓰하루와 천재라 불렸던 마에다 토모노리가 있다.[4] 일본야구사에 남는 명프런트로서 이름을 날린 네모토 리쿠오였지만 그 방법이 반드시 정정당당하고 신사적인 것은 아니었다. 이렇게 당장 싹수가 보이는 고졸 선수는 프로입단 전에 구단 직원으로서 채용하는 형식으로, 가능성에 대해서 약간 의문이 드는 경우는 세이부 그룹 산하 프린스 호텔의 사회인 야구부에 입단시켜 타구단의 손길을 차단하는 탬퍼링에 가까운 방식도 불사하던 사람이었다.[5] 아키야마는 아예 구단이 주도적으로 트레이드를 했고, 이시게, 키요하라, 쿠도 등은 선수 본인이 FA로 팀을 떠나는 것을 거의 방관하다시피 할 정도였으며, 츠지는 기량 하락과 고액 연봉의 부담 때문에 방출시켰고,(이후 츠지는 야쿠르트로 이적한다.) 카쿠는 부상으로 성적이 제대로 나오지 않자 본인이 은퇴를 결정했다. 여담으로 그 후 카쿠는 고향의 대만프로야구에서 현역생활을 계속하기로 계획을 잡았으나, 검은 독수리 사건 등으로 대만 야구계가 뒤숭숭해지자 계획을 접고 그냥 은퇴했다.[6] 지도자로서 이토에 비견할만한 성공적인 커리어를 보낸 황금시대 OB는 구마모토 공고 시절부터 라이벌이었던 아키야마 코지, 이토와 오랫동안 배터리를 이루었던 와타나베 히사노부 정도밖에 없다. 2015년부터 호크스 감독을 맡은 쿠도 키미야스도 향후 커리어를 더 쌓는다면 포함할 수 있을듯.[7] 4월까지의 타율이 1할8푼6리(무려 50년만의 기록- 2경기 연속 무득점 포함 10경기 연속 3득점 이하에 두자릿수 득점은 단 한번도 없었다), 5월 2할2푼, 6월 2할4푼9리, 7월 2할2푼9리, 8월 2할6푼1리, 9월과 10월 2할4푼6리) 팀 홈런도 95개이며 스즈키 다이치의 11개가 최다. 그리고 있으나 마나한 외국인 타자들...오죽하면(얼마나 외국인 선수들이 못미더웠으면)이제 노후준비하러 미국으로 돌아간 윌리 모 페냐를 다시 데려왔을까... [8] 제비네가 센트럴리그 우승팀이지만 강하다거나 약하다는 인상은 없었다고 했다.[9] 상대방의 데이터, 자세, 성격, 버릇 등을 집요하게 분석하고 파고드는 야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