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와세 히토키

 

[image]
이와세 히토키(岩瀬仁紀)
'''생년월일'''
1974년 11월 10일
'''국적'''
일본
'''출신지'''
아이치현 니시오 시
'''포지션'''
투수
'''투타'''
좌투좌타
'''프로입단'''
1998년 드래프트 2위
'''소속팀'''
'''주니치 드래곤즈 (1999~2018)'''[1]
'''지도자'''
주니치 드래곤즈 1군 투수코치 (2018)
'''일본시리즈 우승 반지'''
'''2007'''
<color=#373a3c> '''1999~2000년 센트럴리그 최우수 중간계투[2]'''
1998년
오치아이 에이지
(주니치 드래곤즈)
19.70RP

'''이와세 히토키'''
'''(주니치 드래곤즈)'''
'''28.15RP(1999년)
26.20RP(2000년)'''

2001년
키즈카 아츠시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28.40RP
<color=#373a3c> '''2003년 센트럴리그 최우수 중간계투[3]'''
2002년
이시이 히로토시
(야쿠르트 스왈로즈)
34.60RP

'''이와세 히토키'''
'''(주니치 드래곤즈)'''
'''31.15RP'''

2004년
오카모토 신야
(주니치 드래곤즈)
24.80RP
<color=#373a3c> '''2005~2006년 센트럴리그 최다 세이브 투수'''
타이틀 시상재개[4]

'''이와세 히토키'''
'''(주니치 드래곤즈)'''
'''46세이브[A](2005년)
40세이브(2006년)'''

2007년
후지카와 큐지
(한신 타이거스)
46세이브[A]
<color=#373a3c> '''2009~2010년 센트럴리그 최다 세이브 투수'''
2008년
마크 크룬
(요미우리 자이언츠)
41세이브

'''이와세 히토키'''
'''(주니치 드래곤즈)'''
'''41세이브(2009년)
42세이브(2010년)'''

2011년
후지카와 큐지
(한신 타이거스)
41세이브
<color=#373a3c> '''2012년 센트럴리그 최다 세이브 투수'''
2011년
후지카와 큐지
(한신 타이거스)
41세이브

'''이와세 히토키'''
'''(주니치 드래곤즈)'''
토니 바넷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
'''33세이브'''

2013년
니시무라 켄타로
(요미우리 자이언츠)
42세이브
1. 소개
2. 베이징 올림픽의 악몽
3. 올림픽 이후
4. 기타
5. 연도별 주요 성적


1. 소개


일본을 대표하는 마무리 투수. '''일본프로야구 통산 최다경기 등판 기록'''(1002경기)과 '''일본프로야구 통산 세이브 기록'''(407세이브)의 보유자이다.
프로 데뷔 후 줄곧 불펜 투수로 활약했다. 데뷔 시즌이었던 1999년 이와세 히토키-오치아이 에이지-이상훈-선동열로 이어지는 황금 불펜진을 구축해 루키 때부터 한국팬들에게 어느 정도 인지도가 있었다.[5] 2003년까지 계투로 뛰다가 기존 마무리였던 오츠카 아키노리메이저 리그 베이스볼로 이적하고 오치아이 히로미츠 감독이 부임한 2004년부터 마무리 투수로 전향하였다. 마무리 전향 후에는 하술할 활약을 하며 주니치와 리그를 대표하는 마무리 투수로 활약했고 2004년과 2006년의 리그 우승, 그리고 2007년 일본시리즈에서 팀의 53년만의 일본시리즈 우승의 주역[6]이 되며 주니치 황금기의 간판스타로 활약했다.
'''일본프로야구 커리어 최다 세이브'''와 '''일본프로야구 국내선수 단일시즌 최다 세이브'''[7] 기록을 가졌으며 유일한 '''일본프로야구 1000경기, 400세이브''' 투수다. 단 여섯 명뿐인 '''일본프로야구 통산 200세이브'''의 위업을 달성한 투수 중 유일한 좌완이기도 하다.[8]
2009년까지 기준으로 11년 동안 '''1점대''' 평균자책점만 여섯 차례를 기록하고, 3점대를 기록한 시즌도 '''단 한번'''일 만큼 안정된 활약을 펼치면서 일본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다. 여기에 데뷔 시즌부터 '''15시즌 연속 50경기 이상 등판''' 기록을 이어오고 끝내 유일무이한 '''1천경기 등판''' 기록까지 거머쥔 철완이다. 2010년 이후에는 슬슬 노쇠화가 눈에 보여[9] 주니치에서 후임 마무리를 열심히 키웠...지만, 2014년까지도 주니치의 주전 마무리는 여전히 이와세였다.
스타일은 전형적인 일본인 기교파 투수. 힘으로 윽박지르는 스타일의 마무리가 유행하는 요즘 대세에도 빠른 공보다는 정교한 컨트롤과 예리한 각의 슬라이더[10], 싱커, 스플리터 등 변화구 위주의 피칭을 구사하며, 털리는 날도 심하게 털리는 경우가 거의 없을 만큼 투구의 기복도 작다.

2. 베이징 올림픽의 악몽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야구호시노 센이치 감독의 신임을 얻으며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의 마무리투수로 발탁되었다. 그러나 이것이 이와세의 흑역사가 될 줄은 누가 알았으랴.
우선 본선 리그 한국전 첫경기에서 동점 상황에 중계 등판했으나 대타로 기용된 '''좌타''' 김현수에게 적시타를 맞으며 역전, 3루수 무라타 슈이치와 포수 아베 신노스케의 실책과 더불어 3실점으로 패전. [11] 그래도 이때까지는 다들 '상대가 상대이기도 했고[12] 야구 하다 보면 질 수도 있지...'라는 반응이었다.
그리고 리그전 종료 후 준결승전에서 다시 만난 한국. 이미 본선 리그의 4패 중 홀로 2패[13]를 기록할 만큼 부진한 지라 준결승에서 어떻게든 그 굴욕을 씻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8회, 2:2 동점 상황에서 후지카와 큐지의 다음 투수로 등판했으나 또다시 '''좌타자 이용규'''에게 안타를 맞고 1사 1루 상황에서 당시 국민역적이라 불리던 '''좌타자 이승엽'''을 만났다. 여태껏 이승엽과 상대한 성적이 상당히 좋았지만, 이 타석에서 '''역전 우월 투런 홈런을 헌납했다.'''[14] 그리고 다음타자 김동주한테 안타 하나 더 맞고결국 와쿠이 히데아키로 교체되었다.
결국 이후 G.G.사토의 실책성 플레이 등이 나오며 일본이 스코어 6:2로 패배했고, 일본의 결승 진출도 좌절되었다(…).
경기 후 그에 대한 양국 네티즌의 평가는 극과 극을 이루었다. 한국은 우리에게 귀중한 승리를 두 번씩이나 안겨 준 그에게 '''전주 이씨''', '''한국팀의 숨겨진 병역브로커'''의 칭호를 부여했고, 일본에서는 '저거 혹시 한국에서 보낸 스파이 아니냐?' 라는 뜻의 イ・ワセ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을 부여했다[15].
이와세의 베이징 올림픽 최종 성적은 '''0승 3패 10실점에 평균자책점은 자그마치 13.75'''. 이 기록이 얼마나 처참한 위업이냐면, '''일본팀의 총 전적이 4승 5패에 총 실점은 28점'''이다. 한마디로 '''팀 총 실점의 1/3 이상을 이와세 혼자서 내준''' 것이다. 그것도 '''마무리 투수'''가.

3. 올림픽 이후


이 영향으로 인해 2008 시즌에는 무려(…) 2.94이나 되는 시즌 평균자책점을 찍으면서 결국 통산 평균자책점도 다시 2점대로 올라갔다. 올림픽이 끝나고 리그로 복귀한 뒤에도 리그전 후반에 등판하여 이승엽과 재대결한 적이 있는데, 오치아이 히로미츠 감독이 '''1루가 찬 상황인데도 고의사구 사인'''을 내는 바람에 고의사구로 걸러 버린 애처로운 에피소드도 있었다. 해설자들은 이와세의 트라우마를 염려한 감독의 배려라고 애써 변호하였지만 글쎄(…).[16]
그 뒤 메이저 진출을 포기하고 연봉 4억 3,000만 엔으로 계약하였다. 그후 2009시즌에는 2.12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함과 동시에 '''구원왕'''까지 획득하면서 다시 주니치의 수호신의 위엄을 되찾았다.
이후 2010년 시즌도 세이브를 차곡차곡 쌓으면서 구원왕을 차지하긴 했는데, 블론세이브 개수가 생각보다 좀 있고 평균자책점임창용에 비해 높은 편인 데다가 임창용의 소속팀인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와 이와세의 소속팀인 주니치 드래곤즈의 전력 차이를 생각하면 결국 세이브 숫자를 제외하고는 임창용에게 밀렸다라는 평가가 일본 내에서도 정설. 성적만 놓고 보면 2008, 2010 시즌이 그의 흑역사에 가깝게 된 셈이다.
2011년 6월 16일 다카쓰 신고를 제치고 일본 통산 세이브 1위에 등극했다. 9월 4일에는 일본 통산 300세이브를 달성하였다.
2013년 4월 18일 야쿠르트와 치른 경기에서는 일본 통산 350세이브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달성하였다. 이렇게 이와세가 기록의 사나이가 된 탓에 이와세가 은퇴라도 하지 않는 이상 아사오 타쿠야는 영원히 마무리로 가는 길이 막힌 채 특급 셋업맨으로 남아있을 기세다...
2014년 7월 27일 요미우리전에서 일본 통산 400세이브를 달성하였다. 하지만 이해에는 아래에서도 보이듯 정말 오래간만에 3점대 방어율을 기록하고 등판 경기 수도 30경기대로 줄어들었다. 결국 후반기에는 마무리 자리를 영건 후쿠타니 고지에게 넘겨주게 되었다.
2015년에는 부상으로 인해 단 한 차례도 등판하지 못했다. 이로 말미암아 연봉도 2억 5천만 엔에서 83%나 깎인 5천만 엔에 사인했다.
2015 시즌 후 일본프로야구 현역 선수 중 차고령자가 되었다. 시즌 시작 시점에 이와세의 나이 순위는 '''11위'''였으나 앞에 있던 10명 중 하마의 번장을 제외한 모든 선수가 은퇴선언을 했다. 때문에 이와세는 드디어 노인정 주니치의 최고령 선수가 되었다! 나이 마흔이 넘도록 아직 팀 내에 선배들이 남아 있었다는 사실이 주니치가 얼마나 세대교체가 더뎠는지를 대변한다.
2016년 전반기 종료 시점에서 일본 프로야구 1군에 등록된 선수 중에서는 최고령 선수였다.[17] 아직 미우라 다이스케가 1군에 등판하지 못했기 때문. 하지만 5경기에서 평균자책점 12.00을 기록하는 부진을 겪으며 2군에 내려갔다.
2017년에는 드디어 재기에 성공한 모습. 마무리 자리는 후쿠타니를 거쳐 사이드암 투수인 다지마 신지에게 넘겨준 지 오래고 주로 왼손 원 포인트 릴리프로서 활동하며 오래간만에 50경기 등판을 넘길 페이스이다. 6월 23일 요미우리전에서 9회 1:0으로 앞선 2사 1,2루 상황에서 등판, 대타 카메이 요시유키를 2루수 땅볼로 잡아내어 세이브를 기록, 통산 세이브 기록을 403으로 늘렸다. 단 방어율이 4점대까지 치솟는 등 그다지 안정적인 계투라고 하기는 어렵다. 그리고 8월 6일 일본신기록인 950경기 출장을 달성했다.
여담으로 경기는 요미우리의 주루실수[18]로 인해 이와세는 아베 신노스케[19]를 상대하지 않고 견제구만 두 번 던져서 아주 쉽게 경기를 끝냈다(...) https://youtu.be/Z5b1He8ew2I
현역 선수 최고령 만 42세, 프로 19년차의 베테랑 투수는 2017년 8월 6일 요미우리와 치른 원정 경기에서 9회에 1점차 리드 상황에서 등판하며 통산 출장 경기를 950경기로 늘렸다. 이는 종전 최다 기록인 요네다 데쓰야의 일본프로야구 1시즌 최다 등판 기록(949경기)를 경신하는 순간이었다. 무실점으로 세이브를 기록하며 자신이 가진 일본프로야구 통산 최다 세이브기록도 404로 늘렸다.
2017년 시즌이 종료된 현재 954경기 등판, 57승 51패 404세이브를 기록하고 있다. 또한 컴백상 수상과 더불어 연봉도 2500만엔 증가한 7500만엔에 계약을 갱신했다.
2018 시즌부터 투수코치 직을 겸임할 예정이다. 시즌 뒤 현역에서 완전히 물러나고 코치직에 전념할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서서히 본인의 커리어를 마무리해가는가 했더니 닛폰햄에서 FA로 데려온 오노 쇼타의 보상선수와 관련하여 충격적인 카더라가 보도되었는데[20] 구단에서 "남의 팀 레전드에 투수코치 겸직이고 이제 은퇴도 얼마 안 남았는데 설마 데려가겠어?"라고 배짱을 부리고 이와세를 보호선수 명단에서 제외했는데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가 돼버렸고, 규정에 따라서 사실을 통보받은 이와세는 "이제와서 팀을 떠날 바에야 은퇴를 하겠다"라고 강경한 자세를 보였다고 한다. 그제와서 허겁지겁 닛폰햄에게 이와세의 의중을 전달하면서 사정을 봐달라고 굽실굽실한 끝에 발표된 액수에 웃돈을 얹어주고 무마했다고 한다. 물론 매체가 매체고 정보제공자에 대한 정보도 불확실한지라 다들 도쿄스포츠 특유의 찌라시 기사라고 생각해서 반향은 미미했지만 후에 산케이스포츠가 확인사살함으로써 사실로 드러났다. 닛폰햄이 주니치로부터 보상선수 명단을 받았을 때 "우리가 상상했던 이상으로 흥미있는 명단이다."라는 반응을 보였었고[21] 바로 보상선수를 지명할 것처럼 해놓고서는 해를 한참 넘긴 후에 고작 금전으로 보상을 받겠다는 발표에 다들 의아해하는 반응이었는데, 그 흥미있는 명단의 정체가 이와세였고 물밑에서 삽질을 덮느라고 주니치 구단측에서 동분서주하느리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었다는 얘기다. 만약 사실이라면 NPB 통산 최다 세이브 기록을 쌓으면서 평생을 몸바쳐온 구단에 말년에 뒤통수를 맞고 애먼 구단에 가서 커리어를 마감하거나 강제은퇴를 할 뻔 한 사태로 전체 선수단에게 미칠 부정적인 파급효과는 상상도 하기 힘들 정도인 대 사건이며 현재의 주니치가 얼마나 답이 없는 구단인지 증명하는 해프닝이라 하겠다.
어찌 되었건 주니치에 남은 이와세는 나이는 못 속이는지 시범경기에서 3구 연속 피홈런을 허용하는등 부진한 모습을 보였으나, 개막이후 주니치의 답 없는 투수진에서 1군 등록되어 2018년 5월 2일 야쿠르트와의 원정경기(메이지 진구구장)에서 9회 말 등판하여 세이브 갯수를 405개로 늘렸다.
5월24일 기준 평균자책점 2.25, WHIP0.83으로 시범경기때의 부진을 털어내고 74년생 이와세는 주니치 불펜의 한 축으로 활약하고 있다...
다만 6월들어 갑자기 후임 마무리 타지마와 더불어 다량실점하는 모습을 자주 보여주며 평균자책점이 5점대까지 치솟아버렸다.
2018년 9월 16일 그의 일본프로야구 통산 998번째 경기인 거인 도쿄돔 원정에서 중간계투로 등판해 후쿠타니가 만들어놓은 만루 투 아웃 상황에서 좌완 원포인트로 나와 아베 신노스케에게 생애 첫 만루홈런을 허용했다.
9월 26일 팀 동료 아라키 마사히로, 아사오 타쿠야와 더불어 시즌 종료 후 은퇴하겠다고 선언하면서 드디어 길고도 길었던 선수생활을 마치게 되었다. 그리고 9월 28일 '''NPB 통산 1000경기 등판'''을 달성했다!
2019년에 은퇴경기를 위해 임시로 육성선수 계약을 맺었다.그리고 3월 2일 치바 롯데 마린즈와의 시범경기에 선발등판하여 1번 타자 이노우에 세이야 [22]를 삼진으로 잡아내면서 마운드를 떠나게 되었다.
은퇴 후에는 CBC와 주니치스포츠의 해설자로 가게 되었다.

4. 기타


의외로 대학 시절에는 뛰어난 타격의 외야수였다. 아이치 대학 리그 역대 2위인 통산 124안타를 기록했고, 0.323 9홈런 64타점을 기록하며 대학 야구 국가대표팀에 선발될 정도. 다만 사회인 시절 완전히 투수로 전향했고 프로에서는 주로 구원 투수로 뛴 탓에 타격을 거의 하지 않았다. 프로 통산 타격성적은 54타석 48타수 10안타(2루타 1개) 3타점 타 .208 출 .250 장 .229 OPS .479 으로 표본은 적으나 투수로서는 그럭저럭 괜찮은 타격. 쓸만한 대타도 죄다 써 버린 후반전에 타석에서도 나름 쏠쏠하게 활약해 주었다.
신인 시절인 99년 로베르토 페타지니에게 빈볼을 던졌는데 페타지니가 달려들자 마자 빛의 속도로 줄행랑을 치기도 했다. 온화한 성격으로 알려진 페타지니였지만 이 때는 페타지니도 일본 리그 첫 해였기 때문인지 팀원들 대다수가 덕아웃에서 달려나와 말려도 분을 삭이지 못하는 모습[23]을 보였는데, 와카마츠 츠토무 감독이 뜯어말리자 진정을 찾는 모습을 보였다.
NPB 공식전에 등판한 1천경기 중 딱 한 경기를 선발 투수로 출장한 적이 있다. 2000년 10월 8일 히로시마 도요 카프와의 경기에 선발등판해 7이닝 7피안타 1자책점의 호투를 펼치며 승리투수가 되었으며 당연히 이는 이와세 커리어 유일의 선발승[24]이다. 이 승리로 데뷔시즌에 이은 2년 연속 10승(!) 투수가 되는 것을 확정지었다.

5. 연도별 주요 성적


역대기록(NPB)
년도
소속팀
경기수


홀드
세이브
ERA
피안타
피홈런
볼넷
HBP
사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이닝
WHIP
1999
주니치 드래곤즈
65
10
2
-
1
1.57
67
3
22
2
24
73
16
13
74⅓
1.20
2000
58
10
5
-
1
1.90
66
3
28
1
29
65
20
17
80⅓
1.17
2001
61
8
3
-
0
3.30
51
3
16
3
19
62
23
23
62⅔
1.07
2002
52
4
2
-
0
1.06
38
2
15
3
18
66
8
7
59⅔
0.89
2003
58
5
2
-
4
1.41
47
3
12
1
13
69
10
10
63⅔
0.93
2004
60
2
3
-
22
2.80
53
4
14
3
17
53
20
20
63⅓
1.04
2005
60
1
2
2
46[25]
1.88
51
0
8
2
10
52
12
12
57⅓
1.03
2006
56
2
2
5
40
1.30
40
3
8
0
8
44
8
8
55⅓
0.87
2007
61
2
4
3
43
2.44
53
3
9
0
9
50
18
16
59
1.05
2008
51
3
3
5
36
2.94
55
2
10
0
10
41
16
16
49
1.33
2009
54
2
3
1
41
2.12
41
2
13
2
15
34
11
11
46⅔
1.16
2010
54
1
3
3
42
2.25
47
1
13
2
15
41
12
12
48
1.25
2011
56
0
1
7
37
1.48
50
1
10
2
12
45
12
8
48⅔
1.23
2012
54
1
3
6
33
2.29
44
3
13
2
15
30
15
13
51
1.12
2013
55
2
3
8
36
1.86
48
2
19
1
20
37
16
11
53⅓
1.26
2014
34
1
2
4
20
3.52
37
1
10
0
10
18
12
12
30⅔
1.53
2015
1군 기록 없음
2016
15
0
2
2
0
6.10
14
1
3
0
3
5
8
7
10⅓
1.65
2017
50
3
6
26
2
4.79
37
2
14
1
15
28
19
19
35⅔
1.43
2018
48
2
0
10
3
4.63
28
3
7
5
12
28
18
18
35
1.01
통산
NPB 19시즌
1002
59
51
82
407
2.31
867
42
244
30
274
813
274
253
985
1.13


[1] 2019년 3월에 은퇴경기를 위해 육성선수 계약을 잠깐 맺는다. 따라서 공식적으로는 2019년에도 하루뿐이지만 주니치 소속인 셈.[2] 이때의 수상기준은 지금의 홀드가 아닌(이 당시엔 퍼시픽 리그에서만 사용중이었다) '''릴리프 포인트(RP)'''라는, 당시 센트럴 리그에서만 독자적으로 사용한 중간계투 평가 수치였다. 릴리프 포인트에 관해선 홀드(야구)의 해당 항목 참고.[3] 이때의 수상기준은 지금의 홀드가 아닌(이 당시엔 퍼시픽 리그에서만 사용중이었다) '''릴리프 포인트(RP)'''라는, 당시 센트럴 리그에서만 독자적으로 사용한 중간계투 평가 수치였다. 릴리프 포인트에 관해선 홀드(야구)의 해당 항목 참고.[4] 2004년 이후 세이브 포인트 제가 폐지되면서 최우수 구원투수 타이틀이 폐지되고, 1974~1975년까지(퍼시픽리그는 1976년까지) 시상하던 최다 세이브 투수 타이틀이 부활했다.[A] A B 센트럴리그 최다 시즌 세이브 기록.[5] 선동렬이 1999년 급격한 노쇠화를 드러내며 이름값으로 마무리 한다는 소리 듣다가 시즌 끝나고 은퇴, 1998년 무리한 선발도전으로 부진한 이상훈은 이해에 불펜에서 밥값하고 미국 진출 했기때문에 딱 한해만 볼 수 있었다.[6] 우승이 결정된 5차전에서는 8회까지 퍼펙트 피칭을 이어가던 선발 야마이 다이스케 다음으로 등판해 한 이닝을 삼자범퇴로 막아내며 일본프로야구 사상 유일무이한 합작 퍼펙트 게임(비공식)을 기록하기도 했다. 이 경기의 뒷이야기는 퍼펙트 게임(야구)와 2007년 일본시리즈 항목에 서술되어있다. [7] 2006년의 46세이브로 07년의 후지카와 큐지와 타이이며 현재까지도 일본인 선수 / 센트럴리그 기록. 2017년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데니스 사파테의 54세이브에 의해 갱신되기 전까지는 일본프로야구 전체 단일시즌 세이브 기록이기도 했다. 참고로 사파테의 기록은 아시아 기록이기도 하다.[8] 이와세 외에 사사키 가즈히로, 다카쓰 신고, 후지카와 큐지, 고바야시 마사히데, 데니스 사파테만이 멤버인 클럽. 참고로 에나쓰 유타카는 통산 193세이브로 이 클럽에 7개 차이로 가입하지 못했다. 참고로, 명구회 가입기준은 250세이브 이상이다.[9] 물론 수준급의 실력이었다.[10] 커터로 분류되기도 한다.[11] 이와세는 통산 좌타자 피안타율 '''1할대'''를 자랑하는 자타 공인 좌타 킬러다. 다만 김현수가 좌타임에도 불구하고 좌완에게 강하다는 사실을 호시노 감독이 간과했을 뿐.[12] 당시 김현수는 0.357의 고타율을 기록하며 2008년 시즌 수위타자에 등극했다.[13] 한국전과 미국전에서 기록.[14] 훗날 인터뷰에서 윤석민 曰 "이와세 공이요, 되게 치기 쉽대요. ( 누가 말했는지는 영상에서 나레이션과 겹쳐 잘 들리지 않음.) 근데 마침 이와세가 나와주는 거예요ㅋㅋ 그래서 '야, 이와세 나왔다. 이거 치자'."[15] 한국 이름을 표기하는 식으로 이 와세라고 쓴 것. 즉, 이와세더러 '''"넌 일본인도 아니다"'''라는 소리.[16] 이승엽은 타격감이 물올라서 한신 타이거즈를 시원하게 조지는 중이었다.[17] 심지어 같은 센트럴리그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감독인 다카하시 요시노부보다도 한 살이 많다![18] 호수비로 외야플라이가 잡히면서 안타일 줄 알고 뛰었던 1루주자가 2루를 밟고 지나는 것까지는 좋았으나 다시 1루로 돌아가며 2루를 밟지 않았다.... 이 실책의 주인공은 외야수 시게노부 신노스케.[19] 이와세보다 이 상황을 먼저 눈치챘다.[20] 일본의 대표적인 찌라시인 도쿄스포츠(줄여서 도스포, 인터넷 사이트에서는 東スポWeb 이라고만 나오기 때문에 일본 사정을 잘 모르는 한국의 기레기들이 보통 '동스포'니 '히가시 스포츠'니 하는 식으로 오독을 하는 매체이다. 참고로 이 매체의 위상을 알기쉽게 비유하자면 NPB의 더 선이라고 보면 된다. 즉 산 더미 같은 '아님 말고'식 기사 속에 어쩌다 한줌 진실이 숨어있는 격)에서 보도한 내용이라 신빙성에 의심이 가기는 한다.[21] 당시 양팀 팬들의 반응은 노인정 구단에서 자리 못잡고 백업역할만 하다가 어느덧 30줄에 접어들어 남주긴 아깝고 데리고 있자니 애매해진 1군 벤치급 노망주들이 상당수 포함된 것으로 예측했었다.[22] 일본프로야구 최중량 일본인 타자이다(...)[23] 이 사건으로부터 11년 전에 주니치의 미야시타 투수를 실제로 줘팬 적이 있던 워렌 크로마티는, 그 사건 이후 호시노 센이치 주니치 감독이 주니치 감독 시절 투수들에게 빈볼을 맞춰도 약한 모습을 보이지 말라고 절대 모자를 벗거나 사과하는 모양을 보이지 말라는 지시를 했다는 말을 들었다는 증언을 남겼다.[24] NPB 통산 50승 이상을 거둔 투수 중 선발등판이 아예 없는 투수는 이가라시 료타가 유일하다.[25] 단일 시즌 최다 세이브 기록이었으나 2017시즌 소프트뱅크의 마무리 데니스 사파테에 의해 갱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