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철

 




'''학교법인 성균관대학 이사장'''
5대
이원혁

'''6대
이병철'''

7대
민관식
'''삼성그룹 초대 회장'''
'''이병철
李秉喆 | Lee Byung-chul
'''[1]
'''출생'''
1910년 2월 12일
경상남도 의령군 정곡면 중교리 장내마을[2] #
'''사망'''
1987년 11월 19일 (향년 77세)
서울특별시 용산구 이태원동
'''본관'''
경주 이씨 판전공파 사정공파 39세[3]
'''직업'''
기업인
'''경력'''
삼성그룹 설립자 겸 초대 회장 (1938~1966)
삼성그룹 초대 회장 복직 (1968~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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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
호암(湖巖)[57]
'''신체'''
167cm | 몸무게 60kg
'''혈액형'''
AB형
'''학력'''
지수공립보통학교 (전학) → 수송공립보통학교[58] (졸업)
중동학교 (졸업)
와세다대학 (정치경제학 / 중퇴)
'''병역'''
해당 사항 없음.
'''종교'''
유교불교원불교
'''성좌·지지'''
사수자리 / 토끼띠
'''부모'''
아버지 이찬우, 어머니 권재림
'''형제자매'''
첫째누나 이명점, 이병각, 둘째누나 이병윤
'''배우자'''
박두을
'''자녀'''
'''슬하 4남 6녀'''
장녀 이인희
장남 이맹희
차남 이창희
차녀 이숙희
삼녀 이순희
사녀 이덕희
삼남 이건희
오녀 이명희
사남 이태휘
육녀 이혜자

1. 개요
2. 생애
2.1. 삼성전자 설립
2.2. 반도체 산업 진출
2.3. 별세
3. 사업철학
3.1. 인재 관리
4. 경쟁자들
5. 생가
6. 대중 매체에서의 등장
7. 여담
7.1. 수집덕후
8. 가계도
9. 수상경력
10. 저서
11. 관련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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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기업인. 삼성의 창업주이자 초대 회장이다. 전자산업의 불모지였던 한국의 '''반도체 산업을 일으킨 양대 주역.'''[4] 이후 이병철의 아들인 이건희가 아버지가 시작한 반도체 산업을 본격적으로 부흥시켰으며, 오늘날의 삼성을 일구었다.
지금의 '''삼성''', '''CJ그룹''', '''신세계그룹'''이 '''모두 이병철로부터 비롯되어'''[5], 소위 '범 삼성가'라 불리며 현재도 대한민국 재계에서 거대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2. 생애


경주 이씨 판전공파의 지방 양반가 출신으로, 할아버지 때 만석꾼의 집안이 돼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1922년 3월 지수공립보통학교에 편입했다가 그해 9월 경성부 수송공립보통학교에 전학하여 졸업하였으며#, 서울 종로의 중동학교를 졸업하고 이어 와세다대학 정치경제학과에 합격했으나, 건강 때문에 중퇴하고 귀국한다.
고향에서 건강을 회복한 뒤 다시 상경해 2년간 그저 부친의 송금을 받으며 지냈다.[6] 하릴없이 낙향해서도 집안일은 부친과 형이 했고 본인은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직접 일본에서 상업 작물 종자를 들여오고, 개량돈(豚)과 씨앗닭도 들여왔으나, 취미 수준이었다고 한다. 결국 이웃 친구들과 골패(도박의 일종)에 빠졌다. 한밤중까지 도박이 계속되어 늘 달그림자를 밟으며 집으로 돌아오는 일이 빈번했다.
그러다가 이미 네 아이[7]의 아버지로서 26세의 그에게 전환기가 찾아온다. 방문을 열고 달빛에 비친 아이들의 자는 모습을 보는 순간, '''악몽에서 깨어난 듯한 심정'''을 받았다고 한다. 허송세월을 자책하고 밤새 독립운동을 할까, 일본 공무원이 될까, 사업을 할까 등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들을 생각해 봤다고 한다. 결국 사업으로 정한다. 먼 훗날 인터뷰에서 이 때가 헛된 시간이 아니라 오히려 삼성을 만드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회고했다.

'''어떠한 인생에도 낭비라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실업자가 10년 동안 무엇 하나 하는 일 없이 낚시로 소일했다고 칩시다. 그 10년이 낭비였는지 아닌지, 그것은 10년 후에 그 사람이 무엇을 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낚시를 하면서 반드시 무엇인가 느낀 것이 있을 것입니다. 실업자 생활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견뎌 나가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내면도 많이 달라질 것입니다. 헛되게 세월을 보낸다고 하더라도 무엇인가 남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헛되게 세월을 보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 훗날 소중한 체험으로 그것을 살리느냐에 있습니다.'''


이후 부친에게 지원받은 쌀 300석분의 토지를 기반으로 사업을 일으켜 1936년 마산에서 협동정미소 창업을 시작[8]으로 운수업에도 진출하였으며, 1938년 대구 서문시장조홍제, 허정구 등과 함께 삼성상회를 설립하고, 1942년에는 조선양조를 인수하였다.[9] 초기에는 부동산 투기로 많은 돈을 벌었으나, 태평양 전쟁이 터지며 사업이 몰락하고 부동산 투기를 다시는 하지 않았다고 한다. 다행히 부동산 외의 사업은 건실하게 운영되고 있었고, 경제적 흐름을 통해 일제의 패망을 짐작하는 대국적 안목과 수완으로 재기하기에 이른다.
해방 이후 6.25 전쟁이 벌어지자, 초기엔 전쟁이 금방 끝날 것으로 판단하고 서울에 있었으나, 북한이 서울을 점령하자 90일간 북한군을 피해다니는 신세가 된다. 이때 전시 체제로 점령 지역 시민들의 살림살이를 징발하는 북한을 보며 이들이 겉으로 내세우는 공산주의에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삼성물산처럼 물자를 쌓아둔 창고가 있는 경우는 아무래도 더 손해를 봤을 것으로 보인다. 이후 운전기사 위대식의 헌신으로 서울을 간신히 탈출하였으며[10], 대구 과수원과 양조장, 삼성상회의 종잣돈으로 1951년 부산광역시에서 삼성물산을 설립, 전쟁으로 사방에 널리게 된 고철을 수집한다.
그리고 이 고철을 2차 대전의 물자징발(物資徵發) 여파로 쇠가 부족했던 일본[11]에 팔고, 다시 일본에서 벌어들인 달러로 중국에서 설탕비료를 수입해 국내 시장에 공급, 사업 6개월 만에 삼성물산은 10억 원이 넘는 이익을 올렸으며 1년 뒤에는 무려 60억 원의 재산을 쌓으면서 단숨에 재기에 성공한다. 고철 수집 사업을 시작할 무렵, 전쟁 전에 중국에 수출한 면실박(棉實粕, 목화씨에서 기름을 짜내고 남은 깻묵) 대금 3만 달러가 도착해 다시 든든한 자본금을 갖춰 사업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도 호재였다. 게다가, 전쟁이 끝난 이후에는 전국 곳곳에 널려 있던 구리 탄피들을 긁어모아 이를 재수출하는 사업까지 하면서 돈을 갈쿠리로 쓸어담았다고 한다.
이렇게 삼성물산에서 모은 자금으로 1953년에는 제일제당(CJ그룹의 전신), 1954년 제일모직을 설립하면서 본격적인 그룹 규모의 사업을 펼치기 시작하였다. 당시만 해도 '''손님에게 설탕을 탄 물을 대접'''할만큼, 시장에서 고급 기호품으로 귀하신 몸 대접을 받는 설탕 값을 낮추는 데[12] 기여했으며, 양복 사업은 품질관리 부족[13]+이미 시장을 선점한 외국제품의 영향으로 고전을 면치 못했으나 1957년 정부의 모직물 수입 금지조치 수혜 등을 입으며 국내 시장에서 성장하게 된다.
1940 ~ 1950년대에 갖은 시행착오를 거쳐오다 50년대 후반부터 뒤늦게 성장가도에 오른 정주영 회장과 달리, 상술했듯 40년대 광복 전후부터 목돈을 벌어 50년대 한국전쟁 시기엔 위기를 기회로 만들었고, 덕분에 이승만 정권 시기엔 이미 국내 제1의 재벌로 성장한 기업인이 되었다. 선친(先親)이 독립협회 활동을 하면서 이승만과 친분이 있었던 것도 도움이 되었는데, 이 회장이 내세운 '사업보국(事業報國)'의 기치가 생필품의 국산화를 고민하던 당시 정권의 이해관계와도 맞물려 기세를 올렸다고 볼 수 있다. 제일모직 완공식 땐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방문해 '의피창생(衣被創生, 옷이 새로운 삶을 만든다)'이라는 휘호를 써주기도 했다. 또 당시 국내에서 필요로 하는 한 해 비료 양은 40만 톤이었지만, 충주와 나주에서[14] 생산되는 비료는 6만 톤에 불과해 당시 정부로부터 달러 지원을 약속받으며 비료 공장 설립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다.[15]
그러나 1960년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몰락하며 비료공장 설립은 수포로 돌아간다. 이후 부정축재와 탈세 혐의로 검찰에 연행되어 벌금 50억을 내며 한숨을 돌리려던 찰나,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61년 5.16 쿠데타가 일어난다. 당시 쿠데타의 명분을 정당화하기 위한 보여주기식으로 경제인 11명이 부정축재자로 구속되었는데, 재계 1위 기업인인 이병철은 당연히 '부정축재자 1호'로 불렸다. 군사정권은 이병철 등을 부패 혐의로 몰았으나 경제 운용과 성장을 위해 이들과 타협하였고, 이 회장도 군사정권과 협력 관계를 갖게 된다. 비료공장 설립도 재개한다. 다만 지방의 명망 있는 양반가 출신으로 유교적인 소양을 중시했던 이 회장은, 초창기까지만 해도 反기득권적 성향이 강했던 박정희와 사이가 그다지 좋진 않았다고 한다. 화폐개혁 당시 일화도 있고 해서 이를 "불가근 불가원(不可近 不可遠)"[16]의 관계에 가까웠다고 평하는 이도 있다.
하여튼 10년의 곡절 끝에 울산에 백만평 부지를 매입해 비료 공장이 당시 세계 최대 규모인 연 36만 톤[17] 생산이 가능한 사업장으로 완공된 즈음 삼성에 또 한번의 시련이 닥친다. 이른바 사카린 밀수 사건이 터진 것. 이 일로 국민적 공분이 일자, 이병철은 책임을 진다는 명목하에 자신은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고 사실상 반강제적으로 한국비료공장(한비)과 경주 최씨 가문에게 기증(寄贈) 받았던 대구대학교(영남대학교 전신)를 정부에 넘기게 된다.[18] 그렇게 한동안 삼성그룹 경영은 장남 이맹희가 이끌게 되지만, 1968년 다시 복귀한다. 그리고 이때 밉보였는지 장남 이맹희와 차남 이창희는 후계 구도에서 밀려나고, 막내아들(삼남) 이건희삼성그룹의 차기 수장으로 지명된다.[19][20]
이런 과정 속에서 정권에 부정축재자로 몰려 조사를 받고 대중에 일방적으로 비난받는 일을 겪은 후, 정계에 진출하려는 뜻을 품고 몇몇 명망 있는 인사들에게 조언을 구하기도 했으나 이내 포기했다고 한다. 대신 그에 대한 대안 확보의 차원에서 언론사를 설립했는데, 이때 만들어진 것이 TBC 동양방송(1964년)과 중앙일보(1965년)다.[21] 중앙일보는 현재까지 남아있지만 TBC는 1980년 전두환이 등장하면서 KBS로 통폐합돼 KBS 2TV, KBS 2FM 등으로 전환된다.[22] 신군부에 의해 동양방송이 강제적으로 통폐합되었을 때 당시 방송계에선 이 회장이 분해서 눈물을 흘렸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지만, 이맹희의 회고록에 따르면 이병철은 한국비료 헌납 때도, 언론통폐합 때도 기복(起伏)을 드러내지 않고 다음날 출근해 집무실에서 일을 봤다고 한다. 다만 언론통폐합 땐 이미 두 사람의 사이가 틀어졌을 때라 신빙성에 의문이 가는 회고긴 하다. 아들 안 보는데서 울었을 수도 있고... 하여튼 그 와중에도 다른 사업으로의 진출을 위해 정보를 수집하고 공부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일찍이 한일은행·상업은행·조흥은행 등과 안국화재·동방생명 등을 인수하였고, 1961년 초대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을 역임하였다.[23] 1966년 대한암협회 회장으로 있으면서 고려병원을 설립하였다. 삼성장학회를 설립하고 대구대학[24]성균관대학교 이사장을 지냈다. 이후 삼성전자·삼성전기 등을 통해 첨단 전자통신 및 반도체 기술 발전에 영향을 끼쳤으며 삼성종합건설주식회사를 설립하는 등 삼성그룹을 성장시켰다.

2.1. 삼성전자 설립


이병철 회장이 삼성전자를 설립할 시기 박정희 정부는 미국과 사이가 안좋아서 자주 격돌했었다. 이 당시 한국은 기술력이 부족했는데, 기술은 미국이 절대 주지않았다. 그래서 대신 일본에 가서 기술을 배워왔다. 당시 일본은 미국한테 얻어터질 때였다. 일본이 경제성장을 너무 많이 하니까 미국이 일본은 맨날 견제했다. 그때 박정희 정부가 일본에 접근해서 '''"야 너네 힘들지? 너네가 경제성장으로 달러가 많이 들어오니까 엔화의 가치가 올라가서 엔고가 되면 제조업 인건비가 올라가서 일본 제품의 가격이 올라가고 일본 제품의 경쟁력이 떨어지게 되. 그러니까 간단한 조립은 한국에서 생산하는게 어때? 우리 인건비 싸."''' 이런식으로 일본을 설득해냈다.[25] 그래서 일본기업들이 한국에 진출에서 간단한 조립공장들을 한국에 지었다. 그리고 한국인들은 기술을 열심히 배웠다.
이때 한국이 일본에서 기술을 배우기 위해 도시바히타치등 일본의 전자제품의 생산라인을 방문했는데, 생산라인은 비밀이다. 생산라인이 어떻게 배치되서 어떻게 물건을 만드는가는 비밀이다. 하지만 한국기업들이 하청업자다 보니까 대충 어떻게 움직이는지 흐름을 알아야 했다. 그래서 한국 시찰단이 방문할때 일본에서 다 몸수색을 했다. 녹음기, 종이, 연필 다 압수하고 오로지 눈으로만 보게 했다.
그래서 삼성에서 어떤 방법을 썼냐면 '''시찰단을 엄청 많이 보냈다. 시찰단 개개인에게 각자 'A에서 B구간', 'C에서 D구간'등 담당자를 정해서 외우게 했다. 시찰한다음. 호텔에 모여서 적었다.''' '내가 맡은 분야는 이런 기계가 있었습니다' 이런식으로 적었다. 삼성전자는 이렇게 탄생했고, 그렇게 우역곡절 끝에 배운 기술로 오늘날의 삼성전자는 일본의 모든 전자기업들을 합쳐도 못이기는 글로벌 기업이 되었다.

2.2. 반도체 산업 진출


1982년 수술의 고비를 넘기고 만 72세 노구의 몸으로 이병철은 2년 전, 일본 후지(富土) 화학 회장인 이나바 슈조(稻葉秀三) 박사와의 대담 중 나온 반도체에 관한 발언을 염두에 두고[26], 미국의 반도체 산업 시찰(視察)에 나선다. 그리고 실리콘밸리의 젊은이들을 보며 반도체 사업 투자를 결심한다. 사실 삼성의 반도체 산업 진출은 이때가 처음은 아니라 1974년 이병철의 3남 이건희가 반도체 산업 진출을 위해 사재를 털어 한국반도체를 인수했다가 경영 위기를 맞자, 이병철이 삼성전자로 하여금 한국반도체를 인수하여 회생시키는[27] 과정에서 반도체 사업을 이미 겪어본 바 있었다. 그 후 몇 년 동안 일본, 한국의 반도체 전문가들의 말을 경청하며 정보를 입수해 반도체 산업의 전망을 예측해 내린 결정이었다. 하지만 이미 미국, 일본 업체들이 선점한 상황에서, '''세계 1등 수준이 되어야 승부를 걸 수 있는 사업'''에 뛰어든다는 건 그때나 지금이나 도박과 다름없었다.
1970년대에 삼성전자가 수원에 새 공장을 지을 때 43만평 규모로 지으려고 했는데 이 때 임원들이 회사 규모에 비해 공장 부지가 너무 크다고 반대하자 이병철은 이렇게 말하며 43만평을 고집했다.

일본 히다치 공장이 40만 평인데, 그것보다는 커야 하지 않겠노? 우리가 사업을 했으면 언제고 일본 기업을 이겨야 될 거 아니가? 그러니 저기보다 3만 평이라도 더 커야 하는 건 당연한 거 아이가? 안 그렇노? 어디 내 말이 틀렸노?#

하지만, 반도체 시장의 진입 장벽은 높았다. 1984년 10월, 미국 마이크론 테크놀로지사가 삼성 반도체에서 겨우 수출하기 시작한 64K D램 가격을 기존 3달러에서 1달러 80센트로 인하한 것을 시작으로, 일본 기업들이 덤핑 공세에 나서며 가격이 30센트로 폭락한 것. 이에 삼성이 20센트 가격으로 대응하면서 84년 한 해에만 1,300억 원의[28] 적자를 보게 되었다. 직원들이 '''"지금이라도 손을 떼야 한다."'''고 수차례 건의하였으나, 이병철은 '''"내 눈엔 돈이 보여."'''라 말하며 꿋꿋이 밀어붙였다. 64K D램 가격이 폭락했지만, 다른 1,000여종의 반도체는 이익이 나는 만큼, 앓는 얘기를 자제하고 계속 공장의 생산라인 증설에 나서며 신제품 개발에 나선 것이다.
1984년 10월, 악몽의 덤핑 공세가 시작되었지만, 동시에 업계에서 기적이라 부른 256K D램 개발에 성공하고, 86년에는 1Mb D램을 출시하면서 전환점을 맞이한다. 비록 개발 전후에 적자를 보더라도, 확고한 기술력과 관리능력이 갖춰진 이상, 사업이 본 궤도에 오르는 건 시간 문제였기 때문. 특히 256K D램 제품은 시장 출시 1년 만에 세계 D램 시장의 1/10을 점유, 64K D램으로 적자를 보는 와중에도 삼성전자는 시장에서 반석(盤石)에 올라설 수 있었으며, 이후 이건희 대에 이르러선 미국, 일본의 선두주자들을 차례로 추월하고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게 된다.[29]
1986년 1Mb D램 개발에 성공했지만 1Mb짜리를 최초로 개발했던 도시바와는 2년의 기술격차가 있었기 때문에# 1987년에는 "우리나라 반도체는 일본 것을 베꼈다"는 보도가 나왔고 이를 본 이병철은 분노하여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으로 가서 진대제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일본 것 베꼈다는 게 사실이가? 기껏 남의 거 베끼라고 평생을 건 반도체 사업을 시작한 줄 아나? 영국은 증기기관 하나를 개발해서 세계를 제패했다. 우리 반도체도 그런 역할 하라고 시작한 거 아이가?#

이에 진대제는 16Mb D램은 반드시 독자 개발해서 다시는 모방했다는 얘기가 나오지 않게 하겠다고 약속했고 삼성전자는 1989년에 16Mb D램을 1위 기업과의 기술 격차를 1개월까지 줄이며 세계 2번째로 개발하고, 1992년에는 64Mb D램을 세계 최초로 개발하는데 성공했다. 그 이후로 256Mb, 1Gb D램을 모두 세계 최초로 개발했다.#

2.3. 별세


생전에 흡연을 즐겼던 것이 원인이 되어 폐암이 발병해[30] 10년 가까운 투병 생활 끝에 1987년 11월 19일 저녁 5시 5분, 서울 이태원동 자택에서 77세로 별세하였다. 하지만, 암 발견 초기부터 관련 질병 자료를 다방면으로 수집해 치료에 활용하며 관리한 덕분인지 투병 중에도 반도체 산업 진출 등 왕성한 활동을 했다.
사후 이태원동 자택에 빈소가 차려져 노태우 민정당 총재와 이재형 국회의장, 이민우 전 신민당 총재, 이동찬 코오롱그룹 회장 등 각계 인사들이 조문했으며, 정부는 그에게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하고 11월 23일 호암아트홀에서 영결식을 거행한 뒤 유해는 용인자연농원(현 에버랜드) 부지에 안장되었다. 다만 본인 의지와 달리, 위치가 삼성물산 구역으로 되어있다 보니 후손들의 배임 논란이 있다.#
여담으로 폐암은 유전될 수 있는데, 큰 아들인 이맹희 전 회장도 폐암으로 세상을 떴으며, 삼남인 이건희 회장도 폐질환과 심근경색으로 별세했다. 또 이병철의 대를 잇는 범 삼성가에는 일반인보다 약한 폐와 샤르코-마리-투스 병[31][32] 이 유전으로 전해진다고 한다. 그래서 이건희는 삼성병원에 입원 전까지 겨울에는 주로 하와이 별장으로 떠나있었으며, 이재용 부회장 집의 공기 상태는 하와이 별장에 준할 만큼 맑게 해놓는다는 소문도 있다.

3. 사업철학


호암자전에서 "올바른 정치를 권장하고 나쁜 정치를 못하도록 하며 정치보다 더 강한 힘으로 사회의 조화와 안정에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를 생각한 끝에 종합 매스컴의 창설을 결심했다"며 동양방송중앙일보의 설립 배경을 밝히기도 했다.
자신이 세운 원리원칙은 무조건 지키는 워커홀릭이었다고 한다. 정해진 스케줄을 무조건 지켜서 이 회장이 출근해 결재를 하다 펜을 딱 놓는 시간은 오후 12시30분 점심식사 시간이었다고. 딱히 정해진 출근 시간에 출근하지 않고 심지어 귀빈들 맡는 영빈관 격인 승지원이나 자택에서 일을 보기도 한 아들 이건희 회장과는 다른 부분.
이병철 역시 그 시절 상당수 기업가들의 어두운 면모라고 할 수 있는 실권자에 뒷돈 대는 버릇은 근절하지 못한듯 하다 다만 시절이 시절인지라 반강압적인 부분도 있는걸 감안해야 한다.
노동조합을 굉장히 싫어했기 때문에 이상적인 삼성의 무노조 원칙을 만든 사람이기도 하다.(참고로 경쟁 관계인 정주영도 노동조합을 굉장히 싫어했다.) 노동조합은 빨갱이 새끼들이나 만드는 것으로 노조 자체가 모든 임직원들에게 피해를 끼쳐 회사를 패망하게 할 수 있다는 사상을 가지고 있었기에 노조를 강력히 금지시켰다. 사실 이병철 본인은 노조가 없어도 될만큼 직원들을 최대한 우대해주겠다는 속사정이 있었다지만, 이 우대라는 기준도 주관적일 뿐더러 애초에 합법적인 일이 아니기에 핀트가 어긋나는 부분. 결국 사회의 지탄을 받다 손자인 이재용 부회장이 2010~2020년대 무노조 경영 원칙을 포기하고 노조 설립을 허용해 건전한 노사문화를 만들겠다고 발표하면서 사실상 끝난다.
사업을 통해 사회에 이바지한다는 사업보국의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의 이러한 경영이념을 집대성한 호암자전에서는 '무한탐구'와 '무한정진'의 태도를 기업하는 사람이 갖춰야 할 자세라고 언급했다.

3.1. 인재 관리


"조직이 사람을 움직이는 기업은 망하지만, 사람이 조직을 움직이는 기업은 발전한다."

"내 경험으로 보면 입사 1, 2년이 지나면 신입사원의 5%는 탈락하고 30%는 우수한 인재가 된다. 문제는 나머지 65%의 사람이다. 반 수 이상을 점하는 이들은 환경과 지도 여하에 의해 좌우된다. '''조직력이란 바로 이들을 인재로 만들어나가는 힘'''이다."

"국가의 발전이 유능한 지도자에게 달려 있다면 기업의 발전은 유능한 경영자에게 달려 있습니다. 내 일생의 80%는 인재를 모으고 교육시키는 데 시간을 보냈습니다. 내가 키운 인재들이 성장하면서 두각을 나타내고 좋은 업적을 쌓은 것을 볼 때 고맙고, 반갑고, 아름다워 보입니다."

"말하는 걸 배우는 데는 2년이 걸렸지만, 말하지 않는 법을 익히는 데는 60년이 걸렸습니다."

생전의 이병철은 "내 생애의 80%는 사람을 뽑고 관리하는 데 보냈다."고 말할 정도로 인재 선발과 관리를 매우 중시했으며, 평소 이렇게 눈여겨 봐뒀다가 일을 맡긴 사람들 덕분에 위기에서 벗어나기도 하였다. 6.25 전쟁으로 생명의 위기를 겪었지만[33], 충직한 운전사 위대식[34]의 도움으로 암달러 시장에서 달러를 구해 가족들과 서울 삼성물산공사의 임직원들이 무사히 피난할 수 있었고, 서울의 사업 기반이 한 순간에 북한군에게 몰수되어 빈털털이가 되었지만, 대구의 과수원과 양조장, 삼성상회를 건실하게 경영했던 이창업이[35] 건넨 3억 원으로 재기할 종잣돈을 마련할 수 있었다.
제일모직 공장을 지을 때는 와세다(早稻田) 재학 시절에 읽고 충격을 받은 <여공애사(女工哀事)>의 영향으로 사원들의 기숙사를 짓는 데도 공을 들였으며[36], 1980년 언론통폐합으로 TBC 사원들이 오갈 데가 없어지자, 원하는 계열사로 이직할 수 있도록 조치하기도 하였다. 1965년에는 5.16 직후 처형당할 뻔했던 홍진기 전 법무부 장관을 포섭해 중앙일보를 창간, 일찌감치 자사(自社)에 우호적(友好的)인 언론을 만드는 안목을 발휘하기도 했다. 그리고, 비록 고용된 사장이지만, 전직 국무위원이자 수재로 유명했던 홍진기를 대하는 데 소홀함이 없었으며, 나중에는 사돈 관계까지 맺게 된다.[37][38]
1956년 삼성물산이 대졸 신입사원을 공개채용한 이래 1987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사원 선발 최종면접에 반드시 참여하는 것으로 유명했는데, 회장이 O를 친 사람은 반드시 채용, < > 표시를 하면 면접 위원들이 알아서 처리할 사람(이게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X표는 뽑지 말아야 할 사람이었다는 후문이다. 지원자의 신발이 더러운 것을 보고 면접장에서 쫓아냈다는 말도 있다. 또 카더라에 따르면 관상을 봤는지 회장 옆에 일본의 골상학(骨相學) 전문가나 국내 유명 관상가가[39] 동석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 사람이 범죄를 저지를 만한(...) 인물인지 여부를 판별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고..
이병철 창업주의 인사방침은 지역주의, 온정주의(溫情主義)가 배제된 철저한 '''능력주의'''였으며, 경영실적이 나쁜 사장은 가차없이 인사 조치되었다. 생전에 실제로 발언한 인재관은 다음과 같다.
> 사람은 그릇의 크기만큼 일한다. 사장은 사장의 그릇이 있으며, 상무는 상무의 그릇이 있다. 사장의 그릇이 안 되는 사람을 사장에 앉혔을 경우에는 그 사람도 죽고 그 직책도 죽는다.
즉, 결국은 실적 + 사람 됨됨이라는 어찌보면 당연한 이야기이다.
어느 기업이든 최고경영자를 잘 두어야 기업이 잘 굴러간다고 확신했기 때문에, 신입사원을 뽑은 후에는 가급적 본인이 생각하는 최고경영자의 요건을 충족시킬만한 능력을 갖추도록 교육에 무척 신경썼다고 한다. 그 요건이란 '''1. 덕망을 갖춘 훌륭한 인격자여야 한다. 2. 탁월한 지도력을 갖고 있어야 한다. 3. 신망(信望)을 받는 인물이어야 한다. 4. 창조성이 풍부한 인물이어야 한다. 5. 분명한 판단력이 있어야 한다. 6. 추진력이 있어야 한다. 7. 책임을 질 줄 알아야 한다.'''

Q : 이 회장은 경영철학에서 인재 육성이 중요과제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방법은 무엇입니까?

A : 지금 삼성그룹은 10만 명 정도의 종업원이 있습니다. 이들에게 무엇보다도 먼저 정신교육을 중요시하도록 하기 위해 의무라든가 사람 됨됨이를 입사(入社) 때부터 훈련시키고 있습니다. 그룹 내에는 4개의 사원연수소를 갖추고 그중에는 외국어를 전문으로 가르치는 연수원도 마련돼 있습니다. 한국에서 배운 것은 기초일 뿐이고, '''입사 후 교육을 통해 성장'''케 한다는 생각입니다.

출처: 1984년 5월 22일자 일본 경제전문지 <<재계>>의 창간 30주년 특집호에서, 이병철과 반도체 투자를 결심한 당시 상황을 대담(對談)한 내용을 엮은 것이다.

사람 욕심이 많아 '''삼성의 최고 자산은 인재'''라고 말할 정도로 인재 양성에 아낌없이 투자했다. 진대제, 이윤우를 비롯해 이임성(일본 샤프전자 고문), 이상준(미국 자일록 기술개발 책임자), 이일복(전 인텔 근무), 이종길(미국 인터실, 사이너텍 CMOS 제조수율 개선 기술자), 박용의(미 웨스턴디지털, 인텔사 메모리 설계 기술자)로 대표되는 박사급 인재들을 모셔왔고, 초창기 미국에서 생활하듯 청바지 차림으로 '''첫 출근'''을 한 황창규를 용인하며, 그를 나무라려 하는 임원을 말리기도 했다.

4. 경쟁자들



1986년 생전 사장단 회의 + 인터뷰.
5살 연하로 활동시기가 비슷하기도 하고 삼성과 함께 한국 재계의 양대산맥을 이루는 현대그룹의 수장으로서, 반도체, 중공업, 유통업(백화점), 건설업 등지의 분야에서 팽팽한 경쟁을 벌여왔다. 두 사람 모두 1류를 추구하고 1등이 되어야 살아남는 승부의 갈림길에 수없이 서봤다는 공통점이 있었지만, 회사를 이끌어가는 형태는, 세심-치밀한 사전준비[40] 끝에 착수해 성취해내는 이병철과, 저돌적이고 돌격형으로 목표를 달성하고 마는 정주영이 서로 달랐다. 노조 문제에서도 대표적인 강성노조로 거듭난(?) 현대그룹과 2010년대까진 무노조 원칙이 이어진 삼성이라 재미있는 부분.[41] 여담으로 국제적인 운동경기 유치전에서는 정주영의 저돌, 돌격형이 더 잘 통했는지, 정 씨와 롯데 유창순 사장이 주축이 되어 1981년 서울올림픽 유치에 성공한 것과 달리, 호암은 국제대회 유치전에서 실패를 맛본 후, 후원 및 지원하는 방향으로 돌아선다. 삼남 이건희가 IOC 위원 신분으로 평창동계올림픽 유치전에 관여해 성공한 건 훗날의 일.
이병철과는 띠동갑(1922년생)으로, 신중하고 심사숙고하는 면모, 사전에 철저히 공부해 사업에 뛰어들어 시행착오를 줄이는 모습이 호암과 흡사한 데가 있었다고 한다.[42] 유통업(백화점), 숙박업(호텔), 그리고 식품업(제일제당 백설햄)에서 롯데의 신격호와 경쟁을 벌였다. 삼성그룹이 원래 국수제조업으로 출발했고, 설탕을 만드는 제일제당이 식품사업에도 뛰어든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호암이 에버랜드의 전신인 용인자연농원을 세운 후 일본에서 들여온 돼지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햄을 만들어 팔게 되었는데, 롯데 역시 신격호의 동생 신준호 사장이 롯데햄우유 법인을 설립해 햄 및 소시지를 가공-생산하면서, 이병철 vs 신격호 두 사람은 일종의 대리전을 치르게 된다.[43] 제일제당이 백설햄으로 승부를 걸었다면 롯데는 롯데햄을 출시해 승부를 걸고, 1987년 제일제당이 미국 호멜사의 햄인 스팸(SPAM)을 라이선스 생산하게 되자, 이에 롯데햄은 토종 브랜드 로스팜으로 맞불을 놓는 등 경쟁과 생존을 위해 끊임없이 변신해온 두 기업은 현재도 국내의 식품업계 1, 2위를 다투고 있다.
백화점과 호텔 사업 경쟁은 이미 삼성 산하의 업체들이 선점한 상황이었지만, 일본에서 사업을 하면서 '''"유통*숙박업 = 좋은 입지의 부동산 찾기"'''라는 걸 체득한 신격호 회장이 직접 업무를 챙겨, 국내 주요 역세권 부지를 매입하는 전략을 전격 실행, 시장의 신흥 강자로 떠오른다. 1979년 12월, 이미 가장 실속 있는 땅을 차지하고 있는 회사가 된 (주)롯데쇼핑이, 6년 전에 건립된 37층 규모의 롯데호텔 서울[44] 인근에 국내 최대 규모의 단일 쇼핑센터 본점을[45] 세우며, 신세계백화점, 미도파 백화점의 독주 구도를 깨뜨리고 선두 자리를 차지, 새로이 시장의 판도를 주도해나가게 된 것. 이후 가세하는 현대그룹, 뉴코아, 그랜드 백화점과 함께 경쟁하며 본격 국내의 소비문화를 선도하게 된다. 1991년에는 롯데백화점 매출이 업계 총매출의 1/3에 해당하는 1조 원을 기록하기도 했다.
호텔롯데는, 신 회장이 주목(朱木), 코린트 양식의 기둥, 자판기 설치까지 꼼꼼하게 챙기고, 현장에서 차츰 독자적인 운영 노하우를 개발해, 설립 23년차인 1995년에는 총 50만 명의 외국인이 투숙해 3억3천만 불의 외화를 벌어들였으며, 현재에도 호텔신라와 함께 끊임없는 선두경쟁을 벌이고 있다. 1990년대 후반에는 운영 기법 관련 로열티를 0원으로 할 만큼 노하우가 축적된 상태. 돌다리도 두들겨보며 건너는 안정 중시의 보수적인 경영 방식으로, 현대 정주영 회장같은 화끈한 모습은 보기 어렵지만, 이 내실경영으로 IMF 사태의 파고를 넘기고 이후에도 유통업계의 1인자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대우그룹을 이끌었던 김우중과도 경쟁관계였다. 다만, 동향이자[46] 아들뻘(1936년생)인 김우중이 평소 호암을 깍듯이 모셨던 덕분에 두 사람의 사이는 매우 원만했으며, 김우중이 정계 투신 및 선거 출마를 상의해오자, 그를 극구 말리기도 했다.[47]
이병철 같은 치밀한 계획성은 없었지만, 정점에 오른 대인관계 능력과 홍보 감각, 회사 전용기를 써가면서까지 전문가를 초청해 조언을 구하며 공부하는 자세로 뭇 사람들의 마음을 사며 회사를 대기업으로 끌어올린 사람이기도 하다. 삼성과 현대그룹에서도 사업장이 있는 지역민들을 돕는 방안을 실천에 옮겼지만, 그 결과물을 '''알리는 측면'''에서는, 지식인들과 젊은 대학생들, 지역민들의 호감을 산[48] 대우의 그것에 미치지 못한 측면이 있다.
대우그룹이 파산하기 전까지 중공업, 건설, 백색가전 부문에서 각축을 벌였으며, 1997 ~ 98년 경영난에 봉착한 쌍용자동차를 인수할 때는 (부채를 떠안는 대신) 상징적 의미로 '''1원 인수'''를 제안한 삼성과 달리, 소정의 보상액수를 지불하며 경영권을 확보하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1999년 대우그룹이 법정관리 및 일부 분할매각 과정을 거치는 곡절을 겪으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면서, 결과론적이지만 이때 삼성이 쌍용차를 인수했더라면, 무쏘, 액티언의 스포츠형이 지금처럼 법규정 때문에 별도로 트렁크 부분을 붙이는 형태가 아닌 완전한 일체형으로 출시되고, 중국이나 인도 신흥업체의 기술연수원 신세가 아닌 국내자동차 업계의 (현대-기아차) 독과점 구조를 막는 한 축이 되었을 거라는 아쉬움을 표하는 의견도 일부 있긴 하다.

5. 생가


경상남도 의령군 정곡면 중교리에 이 회장의 생가가 보존되어 있다. 대구광역시 중구 인교동 달성공원 건너편에 있는 옛 삼성상회터에는 삼성상회 실물을 1:250으로 축소한 청동 모형이 설치되어 있다. 근처 오토바이골목 안에 이 회장의 고택이 있는데, 삼성상회 사업을 할 때 거주했던 곳이다. CJ의 역사관에는 홀로그램으로 이 회장의 흉상을 구현해 놓았다.
그 외 삼성그룹에서 옛 제일모직 공장 부지에 기부채납대구오페라하우스에는 이 회장의 동상을 설치해 놓았으며, 근처 도로의 명칭도 호암로로 변경하였다.[49] 이 회장이 건설자금을 지원했다는 혜화동 경주이씨중앙화수회회관 앞에도 이 회장 흉상이 있다. 또한 삼성그룹이 운영하는 성균관대학교에도 이 회장의 호를 딴 호암관이 있다.

6. 대중 매체에서의 등장


MBC드라마 영웅시대에서 전광렬이 청년 역, 정욱이 장년 역을 연기했다.(드라마 배역은 ‘국대호’) 정욱의 경우, 제3공화국에서도 이병철 역을 맡은 경험이 있어 작중 라이벌격인 정주영 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강렬함이 부족한 이병철 회장의 캐릭터 구성에도 별다른 어려움을 느끼지 않은 듯하다.[50] 다만 정욱은 아들의 다단계 사기행위에 이 회장 연기경험을 이용, 이 회장과의 관계를 강조하는 등 협조하는 바람에 구속당하였던 흑역사를 표출하였다.(...)
직접적으로 출연한건 아니지만 SBS드라마 야인시대 1화, 최종화, MBC드라마 영웅시대 56화, 제3공화국 23화에는 국회의사당에서 김두한사카린 밀수 사건에 대해 이를 두둔하는듯한 박정희 정권 인사들에게[51] 오물을 투척하는 장면을 내보였다.

7. 여담


  • 라이벌인 현대그룹 회장보다 여자 관계는 점잖았다지만, 일본인 소실은 이병철과의 사이에서 1남 1녀를 남기는 등 그 존재가 분명하다.[52] 당대 제일 부호의 가족사였던 만큼 세간의 관심이 컸으며, 훗날 김영하, 박봉성 같은 만화가들이 여기서 모티브를 딴 기업만화를 그리기도 하였다.
  • 타계 한 달 전 박희봉(1924~1988, 세례명 이시도로) 절두산성당 신부에게 "신(神)이 존재한다면 왜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가?"라는 물음부터 "지구의 종말(終末)은 오는가?"까지 여러 철학적 질문을 던졌다고 한다.# 다만 이후 건강이 악화되어 답은 듣지 못하고 타계하고 말았다고. 참고로 이병철 회장은 유교불교원불교 신자였다.
  • 1980년대 한국 3대 부자였다. 당시 한국에서 10억 달러 이상의 자산가는 단 3명이었는데, 바로 이병철과 정주영, 신격호.[53]
  • 영남 출신이라 호남 사람들을 배척했다는 루머도 있으나[54], 애초에 며느리이자 이건희 회장의 아내인 홍라희 여사부터가 호남 출신이다.[55] 오히려 군사정권 시절에도 호남 지역 수재들이 삼성 임원이 된 경우는 생각보다 많았다고 한다. 일례로, 1998년 국민의 정부 출범 후 사장단에 새로 발탁된 몇몇 호남 출신 인사들은 이병철 창업주 시절에 입사해, 성과를 쌓아 임원까지 승진했던 사람들이었다. 이들 역시 세간의 루머와 다르게 의외로 지역색이 옅었다며 놀라워했다는 후문. 사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아무리 회사에서 사내 정치가 중요하다지만 지역 단위에서부터 파벌이 갈라져 버리면 회사 분열은 순식간이므로 지역 감정을 줄이는 것이 도덕성 이전에 경영 면에서도 좋다. 당연한 말이지만, 얼마나 일을 잘 하느냐가 문제지 출신 지역은 전혀 상관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 가끔 인터넷에 이병철이 이완용 후손이라는 포스팅이나 그림이 떠돌기도 하는데(디시인사이드 정보전사 글이라든지), 물론 이완용 후손 중에 이병철이라는 사람이 있지만, 그 이병철과 기업가 이병철은 동명이인일 뿐이다. 일단 이완용은 우봉 이씨, 이쪽은 경주 이씨라서 본관부터 다르다.
  • 1983년에 한국을 방문한 스티브 잡스와 사업에 대한 논의를 한 적이 있다고 한다. 당시의 잡스는 태블릿 컴퓨터를 만들고 싶어했는데, 삼성이 그 부품을 조달할 수 있는 협력사가 될 수 있는지 물어본 것. 이병철은 잡스와의 만남 이후 그에 대해 'IBM과 맞설 수 있는 인물'이라는 평가를 내렸다고 한다. #
  • '이건희 스토리'라는 책을 보면 이병철 회장은 양복도 일반 브랜드 양복이 아니라 도쿄의 한 골목에 있는 어느 개인 양복점에서 맞춤식으로 지은 양복만을 입었고, 만년필은 항상 워터맨을 썼는데 수십 개를 사서 쓰다가 그중에서도 가장 필기감이 좋은 것들만 찾아서 썼을 정도로 일류에 대한 자기만의 철학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한 이념은 현재의 삼성그룹을 비롯한 범 삼성그룹에도 이어지고 있다. 엘리베이터도 탑승감이 좋은 독일제 티센크루프엘리베이터만 쓴다고.
  • 이병철은 평소에 일본의 경제 평론가인 하세가와 게이타로를 만나 "한국인은 결코 자질이 나쁜 국민이 아니다. 우수한 국민이다. 단지 역사와 시스템 결함 때문에 격차가 벌어진 것이다. 그러니 반드시 격차를 메울 수 있다, 일본을 따라잡을 수 있다.", "하세가와상, 당신은 일본인이라 유쾌하게 들리지 않겠지만 일본을 능가하고 싶은 것이 내 진심이요. 참 힘들지만 회사를 키우면 언젠가 대등하게 (일본과) 정면에서 이야기할 날이 올지 모릅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7.1. 수집덕후


고미술품에 조예가 깊고 욕심도 많았다고 한다. 호암미술관에 있거나 현재 한남동 리움미술관으로 옮겨진 어마어마한 국보급 문화재들은 이병철 회장이 주도적으로 모은 것들. 다만 이들 중에는 도굴품으로 의심되는 것을 사들인 것도 상당수라는 소문이 고고학계에 퍼져 있다.(...) 심지어 신라 불교 사리유물이나 금림왕 같은 가야금관 유물 도굴과 연결되었다는 소문도 있다. 이병철 회장의 형 이병각[56]이 장물 취득 혐의로 구속되는 일도 있었다고. 이에 대해 미술계 일부에서는 한국 고미술품들이 해외로 흘러가느니 차라리 삼성가에 있는게 낫지 않냐는 소리도 있지만, 애초에 도굴범들을 후원하고 사주했다는 얘기도 있어서(...) 군사정권 시절 고고학계가 자금난에 허덕일 때 일부 도굴꾼들이 고급 장비를 갖췄기에 이런 얘기가 나오기도 했다.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는 잭을 동원한 도굴꾼과 나무 전신주를 사용하던 교수들의 모습이 대조적으로 그려진다. 여튼 사실여부를 떠나 그만큼 삼성가에서 열을 올리며 모은 미술품이 엄청나다는 소리.
심지어는 그 수집벽을 셋째 며느리인 홍라희에게 계승시켰는데, 박물관 설립 전부터 3달 동안 인사동에 나가서 골동품을 사오라고 시킨 것. 당시 돈으로 10만 원 상한으로 매일 골동품을 사오라고 시켰는데, 당시 국립대 등록금이 5만 원이었다니 2010년대 기준으로 매일 대략 500만 원어치의 골동품을 사오라고 시킨 셈.(...)
재벌로는 이례적으로 황룡사지 발굴 현장에 연락도 없이 찾아왔다는 이야기도 있다. 당시 발굴단에게 단지 터의 크기를 물어보고는 당시 돈 3만 원을 선물하고 떠났다고 한다.
수집 뿐만 아니라 나무도 정말 좋아했는데, 공장부지 안에 있는 나무마다 번호를 붙혀 관리하게 했고, 나무그늘 밑에 맥문동을 심어서 지피식물로 활용하는 지혜를 보여준 인물로 약용식물로 쓰이던 맥문동이 조경식물로 활용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또한 태산목을 특히 좋아해 이병철 생가와 제일모직부지에도 태산목을 심어놓았다.

8. 가계도




9. 수상경력


  • 금탑산업훈장 (1969)
  • 세계최고 경영인상 (1979)
  • 국민훈장 무궁화장 / 훈일등서보장(일본) (1987)

10. 저서


  • 호암자전 - 중앙일보사. 1986.(초판) / 나남. 2014.(재판)

11. 관련 자료


[1] 원래 이름은 이병길 (李秉吉)인데 '吉'자를 더 붙여서 이병철(李秉喆)로 개명했다는 얘기가 있다. 잡을 병(秉) 쌍길 철(喆)[2] 경주 이씨 판전공파 사정공파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이진우도 이 마을 출신이다.[3] 경주 이씨 39세손 '相'자 항렬인데, 경주이씨 59세손 秉 항렬을 썼다.[4] 다른 한명은 아들인 이건희 회장[5] 다만 위의 사업체 대부분 이병철 사후 뿔뿔이 흩어졌다. 이외에도 차남 이창희의 고명딸인 이혜진이 이끄는 래딕스글로비즈(나쵸와 치즈소스로 유명한 아미고도 이 회사 산하 브랜드다.) 및 래딕스플렉스와 그녀의 남편인 조명희가 이끄는 디엠퓨어텍, 3녀 이순희의 아들인 김상용이 이끄는 알머스(前 영보엔지니어링) 등도 범 삼성가에 속하며 이들도 삼성 등과 상부상조하고 있다.[6] 이병철의 자서전인 '호암자전' 내용에 따르면 취직 같은 것을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하는 걸로 봐서, 딱히 이렇다 할 계획을 세워두고 상경하지는 않은 것 같다.[7] 이인희, 이맹희, 이창희, 이숙희.[8] 창업을 위해 조선식산은행 마산지점에서도 대출을 받았다. 당시 이병철에게 대출을 인가해준 담당자는 패전 후 일본에서 변호사를 하였다. 이병철은 이 사람을 찾아서 "당신 덕분에 삼성 그룹이 있을 수 있었다"며 봉투 하나를 내밀었는데 이 봉투를 받은 담당자는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9] 커피로 유명한 동서식품을 키워낸 김재명 전 제일제당 사장이 이때 삼성으로 합류, 이병철과 30여 년 동안 동고동락한다. 동서식품은 원래 1967년 이병철의 장남 이맹희가 커피사업을 연구해 제일제당의 커피사업부로 출발할 예정으로, 맥스웰하우스 동아시아 판권을 갖고있는 일본 맥스웰하우스의 책임자 야마모토와 합작 직전까지 갔었다. 그러나 서정귀를 지원한 이후락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7년 뒤 제일제당의 임원들이 자금을 출자하여 사업장을 인수해, 대기업으로 육성한다.[10] 덕분인지 위대식은 운전기사였음에도 삼성그룹 내에서 이사 대우를 받았으며, 그가 사망하자 이병철이 호암미술관의 자기 무덤 옆에 묻어주라 할 정도로 신임이 대단했다고 한다. 이병철은 면접에서 관상을 볼 정도로 관상을 중요하게 생각했는데, 유명한 관상가가 위대식의 관상이 주인에게 충성하고 목숨을 구해주는 좋은 관상이라고 하고 위대식의 헌신으로 목숨을 구한 후 관상을 대단히 중요하게 여겨 면접에서도 활용했다고 한다. 또한 풍수지리에도 관심이 많아 후손들의 번영을 위해 자신의 호를 딴 호암미술관과 자신의 묘를 최고 수준의 지관을 통해 명당을 골라서 정했는데, 그런 자신의 무덤 옆에 묻어주라고 한 것은 위대식의 후손들도 함께 번영을 누리자는 이병철의 최대의 신임을 보여준 것으로 이병철 옆에 묻힌 것은 부인 박두을 여사 외에는 다른 임원들은 전무하여 위대식이 유일하다. 이병철의 위대식에 대한 신임이 가족과 같은 수준이었다는 것.[11] 무기를 만들기 위해 자국령 내에 있는 금속이라는 금속을 닥치는 대로 강제로 끌어 모았고, 전쟁터에서 다 날려 먹었다.[12] 근당 300환 → 50환.[13] 설비 자체는 유럽에서 괜찮은 것을 이것저것 골라 들여왔기 때문에 어디다 내놓아도 부족함이 없었다. 다만, 물건 만드는 공정관리와 사후 관리에 대한 인식이 철저하지 못했던 시절이라 공들인 것에 비해 결과물이 기대에 미치지 못했던 것. 1987년 이병철 사후 전권(全權)을 잡은 이건희가 품질 중시로의 패러다임 전환을 외치면서 '''마무리'''를 유독 강조했던 것도, 이런 측면에서 생각해볼 수 있다.[14] 방위산업체이자 이란-이라크 전쟁 시기 급성장한 아시아자동차를 설립한 이문환이 독일인들의 공장을 인수, 확장한 것이다.[15] 다만 박정희 시대 관료 오원철은 삼성이 비료공장을 설립하기 위해 국내비료수요를 멋대로 해석하였다고 주장하기도 했다.[16] 조선 후기의 거상 임상옥이 한 말로 정계, 관계와는 멀리도 가까이도 않으며 일정한 거리를 둔다는 얘기.[17] 이병철이 1950년대 비료공장 설립 계획을 세울 때 최대 규모의 비료 공장이 연 18만 톤 규모였다.[18] 사카린 밀수 사건에 비자금 조성 목적으로 정권도 개입했다는 이맹희 말을 따르자면, 그야말로 삼성 혼자 독박 쓴 것도 모자라 억울하게 까지 뜯긴 격. 당시 한국비료는 첫 해 매출액이 그룹 전체 매출액의 30%에 이를 정도로 삼성 입장에서도 알짜배기 기업이었다. 그런 기업과 대학을 책임을 진다면서 사회 기부도 아닌 정부에 준다는 것도 영 이해는 안가는 대목. 사족으로, 이때 헌납한 한국 비료는 1994년 이건희가 2,300억 원에 다시 인수했고, 영남대학교는 박정희가 돈 한푼 안 들이고 지금도 사학주처럼 기록되어 있다. 박근혜이사장을 맡기도 했다.[19] 이때 차남 이창희가 반발해 1969~1970년 정권 인사들을 끼고 부친을 몰아내려는 시도도 하였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당연히 눈밖에 난 이창희는 그룹에서 쫓겨나듯 했으나, 훗날 부친에게 용서를 구했으며, 이게 일부 받아들여졌는지 이병철은 산하의 몇몇 업체를 운영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었다고 한다.[20] 하지만, 성정이 불같았던 장남은 선친 생전에 갈등에 대한 용서를 구하지 않았으며, 호암이 이맹희 회장에 대해 사석에서 안타까움을 보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맹희는 1987년에 이루어진 인터뷰에서(이맹희 인터뷰로 검색하면 찾을 수 있다), 이를 후회하고 있다는 소회를 밝히기도 했다. 참고로 제일제당이 삼성그룹에서 완전히 분사(分社)한 건 이병철 사후 이건희 체제가 확립된 1993년이다. 참고로 이때 형제간에도 사이가 틀어졌는지 2010년대 이맹희, 이건희간 말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다.[21] 다만 동양방송과 중앙일보를 창업한 것은 이병철이지만 두 매체를 실질적으로 키워낸 사람은 이병철의 사돈이었던 홍진기였다. 현재 중앙일보는 계열 분리를 통해 삼성의 울타리를 벗어났지만, 현재도 중앙일보를 지배하는 중앙그룹홍진기의 손자 홍정도가 소유하고 있다.[22] 다만 2009년 미디어법 개정에 의한 신문·방송겸영 허용 덕에, TBC는 2011년 12월 1일 31년 만에 JTBC로 재개국한다.[23] 훗날 손자인 이재용 대에 이르러 삼성은 2017년 전경련을 탈퇴한다.[24] 지금의 대구대학교와는 다른 대학이며, 영남대학교의 전신 중 하나이다. 현재의 영남대학교는 이 대구대학과 청구대학이 통합한 학교다. "한수(漢水) 이남 제일의 대학을 만들겠다."는 포부를 밝히며 유명한 경주 최씨 일가와 협력하였으나, 현실은 여기서도 박정희와는 악연. 더불어 최씨 일가 지못미.[25] 한국이 1990년대 이후 인건비가 오르자 중국에 공장 지어서 아웃소싱한거랑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26] “일본 기업은 반도체·컴퓨터·신소재·광통신·유전공학·우주·해양공학 등 부가가치가 높은 첨단기술 분야로의 전환을 도모하고 있고, 특히 반도체 및 그 주변의 기계공업에 치중해 왔다. 정부도 이를 적극적으로 뒷받침하여 전략산업으로 육성했다. 그 결과 수출은 획기적으로 늘고 외화수입은 급증했다. 일본의 살길은 바로 경박단소(輕薄短小)의 첨단기술산업에 달려 있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이런 일화를 보면 사실 이병철 회장이 당시 고도성장을 하던 일본통이었던 것도 반도체 진출을 상대적으로 빨리 결정하는데 도움을 줬다고 볼 수 있겠다.[27] 닷컴버블 사태로 IT 산업이 휘청거렸던 2001년, 이건희의 장남 이재용 삼성 상무도 부친과 같은 과정으로 설립한 회사 일부를 겨우 건지는 뼈아픈 경험을 하게 된다. 다만 이재용 상무가 설립한 회사 중 e-learning 업체인 크래듀는 예상 외로 선전하며 자격증 바람, 당시 정부가 페달을 밟던 지식 정보사회로의 전환 과정상 수혜를 누리며, 시장을 선점한 휴넷과 업계 선두를 다투는 선도 기업으로 성장했다. 2016년부로 사명을 멀티캠퍼스로 변경한 상태.[28] 80년대 초중반 1,300억 원이면 2010년대 중반의 4,000억원 수준이다. ※ 생활물가의 경우는, 81년 → 07년 국내 짜장면 지수 등이 약 25배 차이가 난다. 하지만, 이를 일률적으로 다른 분야에 적용하는 건 무리.[29] 이병철의 별세 17년 뒤인 2004년에는 반도체 외 TV와 휴대폰 사업까지 성공하면서 80~90년대 전자제품의 세계 최강자였던 소니시가총액을 제칠 만큼 사세(社勢)가 커지게 된다. # 다만 사실 소니는 1990년대 중반 이전까지는 시가총액 기준으로 엄청나게 큰 기업은 아니었다. 마쓰시타 전기, NEC, 히타치 등이 규모 면에서는 더 큰 기업이었고, 단지 소니는 워크맨처럼 좀 더 혁신적인 제품을 내놓는다는 브랜드 이미지 때문에 세계적으로 유명했던 것이었다. 지금은 다 쇠락하고 일본에선 토요타 자동차가 킹왕짱인 형국이지만.[30] 진찰을 맡은 일본인 의사가 '''"가벼운 질환이 있는데, 수술이 필요할 수도 있다."'''고 완곡하게 말하는 걸 듣고 눈치를 챘다고 한다.[31] 약어로는 CMT, 손과 발의 근육이 위축돼 점점 기형화되는 희귀병. 부인 박두을 여사 집안의 유전질환으로 알려졌으며 현재 이재현 회장이 이 병을 심각하게 앓고 있다. 이부진 사장도 이 병의 인자가 있어 발병할 수도 있다고 한다.[32] 이부진 사장이 오빠인 이재용과 경영권 분쟁이 내부적으로 있다고 알려질 정도로 자신이 사장직에 오른 호텔신라나 이 사장이 사실상 경영을 책임지고 있는 걸로 알려진 삼성에버랜드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다는 뜻을 노골적으로 내비쳐왔다고 하지만 샤르코-마리-투스 병의 인자가 있어 발병 할 수도 있다는 것이 원인이 되어 회사내부에서의 반발도 심해 오빠 이재용에 대한 경영권 분쟁에서 멀어졌다고 한다. 한 기업을 이끌려면 경영에 대한 수완도 중요하지만 장기적으로 끌고나갈만한 건강한 체질도 중요하다는 것이다.[33] 이 무렵 이병철이 서울에서 타고 다닌 쉐보레 승용차도 빼앗겼는데, 박헌영이 혜화동 로터리에서 그 차를 타고 갔다는 소문도 있다.[34] 훗날 이사급 대우를 받는 운전기사로 장안의 화제가 된 사람이다.[35] 처음엔 이병철의 와세다 대학 선배 이순근이 전문경영인을 맡아 삼성상회를 확장하는 데 공헌했지만 월북을 했던 고로(사실 이 당시 대구는 지금과 달리 조선의 모스크바라고 불릴 정도로 사회주의 성향이 강한 지역이었다), 이 시점에서는 이창업이 맡아 운영하고 있었다. 이병철이 서울 사업으로 신경쓰지 못한 몇 년 동안 대구 사업장에서는 청주(淸酒) 월계관과 삼성 사이다 판매로 큰 돈을 벌었다고.[36] 실제로는 최저임금도 주지 않으며 여직공들을 부려먹었다는 비판 역시 있지만, 이런 대우조차 타 업체들에 비하면 나은 것이었다고 한다.[37] 홍진기의 딸이 이건희의 아내인 홍라희다. 이후 이건희 회장 후계 체제 과정에서 장인인 홍진기가 이병철 회장에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심지어는 이건희의 한국반도체 인수에 대해서도 이병철 생전 부친의 눈 밖에 날 행동을 전혀 하지 않았다며, 배후에 (홍진기의 영향을 받은) 이병철이 있었을 것이라 의심하는 시선도 있을 정도. 두 형이 아버지가 다시는 삼성에 돌아오지 않을거라고 믿고 적극적으로 독자경영을 하다가 날라갔는데 이건희가 독자적 판단으로 한국반도체를 인수했다고 보기 어렵다는 요지.[38] 하지만, 차남은 군부에 이병철의 비위를 밀고하는 행위를 저지르고, 장남은 이를 암묵적으로 묵인했다는 의심을 받은 점도 고려될 필요가 있다. 비록 <호암자전>에는 자식들에게 흠이 될 부분이나 칭찬하는 대목이 거의 없지만(호암이 후계자 이건희를 직접 언급하는 대목도 "의욕이 있었다." 정도로 간략하게 묘사됐다), 일본 업계에서 분석한 삼성 반도체 개발 성공 요인을 인용한 대목에는 '(이건희의) 한국 반도체 운영 경험'도 명시되어 있다. 이맹희의 회고에 따르면 호암과 일민(홍진기)은 서로를 어려워하며 존경하는 사이였다고 한다. 영향력 행사와 관련지을 수 있는 건 장인이 경영수업을 해준 건데, 이건희의 증언에 따르면, 법률, 사회문화, 역사, 문학을 현재 사례와 비교하면서 가르치는 케이스 스터디 방식의 교육을 해줬다고.[39] 삼성에서는 공식적으로 말하지 않았지만, 이 관상가가 강연 자리에서 밝혀 세간에 알려졌다.[40] 사업착수 전에 검토하는 큰 줄기 항목만 90가지였다고 한다.[41] 더 나아가 정주영은 통일국민당 대선 후보 시절 '''재벌 해체, 국가보안법 폐지, 초중등 무료 급식''' 등 지금 봐도 파격적인 공약들을 제시해 재벌 회장의 이미지를 깨는데 이바지(?)하기도 했다.[42] 다만, 호암처럼 입사 후 교육에 심혈을 기울여 길러낸 인재들에게 위임하는 스타일은 아니고, 아이디어가 괜찮은 사원들의 의견을 경청해 반영하는 수준이었던 듯하다. 우위를 나누기보단 스타일 차이라고 봐야 할듯.[43] 롯데그룹의 상징성이 있는 제과업은 제일제당이 적극 뛰어들지 않고, 대신 해태그룹이 라이벌 구도를 형성해, 두 회사에서 운영하는 야구단 간에 트레이드도 하지 않았을 만큼, 치열한 경쟁이 일어났다. [44] 높이 152m로 63빌딩 건설 전까지 국내 최고층 건물이었다.[45] 1970년대에는 서울 4대문 안에 백화점 신설이 불허되었기 때문에 일종의 꼼수로 명칭을 백화점이 아닌 쇼핑센터라 하였다. 시장명을 백화점으로 바꾼건 개점 9년 뒤인 1988년 11월.[46] 대구에서 나고, 부산에서 신문배달을 하며 중학교를 다녔다.[47] 이 선거 출마 건으로 김우중이 호암에게 서운한 감정을 비추기도 했으나, 오래 가지는 않았다고.[48] 선친의 고향인 제주도(선친의 활동 당시에는 전라남도의 행정구역), 호남, 충청 등지에 병원을 짓거나, 무등 야구장 건설에 제일 많은 지원금을 쾌척하면서 지역민들의 호감을 샀으며, 전국 대학교수들의 연구 비용을 지원하고 결과물을 대우학술재단에서 책으로 편찬하였다. 배에 의료장비를 싣고 외진 섬을 돌며 진료하는 의료 봉사활동으로 인심을 얻기도 하였다.[49] 323(-1)번이 다니는 남침산네거리와 홈플러스 대구점 사이의 도로.[50] 사실, 이보다 앞서 1983년 MBC에서 방영된 드라마 야망의 25시에서 정욱은 이병철을 모티브로 한 ‘최일제’란 배역으로 출연했었다. 이때 정욱은 직접 이병철 회장을 만나 본인이 쓰던 안경과 ‘운둔근(運鈍根; 우둔하면서도 끈기 있게 기다리는 사람에게 운이 온다)’이라고 쓴 친필휘호를 선물받았다고 하며 이는 영웅시대에서 그대로 사용되었다[51] 정일권 총리, 장기영 부총리, 김정렴 재무부 장관, 민복기 법무부 장관 등.[52] 장남 이맹희의 자서전에 의하면, 이맹희와 2남 이창희가 일본에서 유학하던 시절에 이병철의 일본인 소실 집에서 지냈는데, 두 사람이 너무 많이 먹어서 생활비가 부족하다고(...) 소실이 싫은 소리를 했다고 한다. 두 아들이 한국에 돌아왔을 때 친모이자 이병철의 본부인인 박두을 여사에게 이런 사실을 말하자, 박두을 여사가 소실의 행동을 괘씸하게 여겼다고 한다.[53] 다만 포브스는 재일교포였던 신격호를 일본인 시게미츠 타케오로 분류했다. 참고로 신격호는 1980년대 일본 버블경제 버프로 세계 부자 순위 4위였다고. 그러나 버블이 꺼지며 많이 내려가고 재산의 상당부분을 자식들에게 물려줘서 2010년대엔 국내 40위 안에 드는 수준이었다.[54] 이 헛소문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병철이 '전라도 사람은 뽑지 말며 뽑더라도 요직에 앉히지 말라'는 말을 남겼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물론 이 역시 근거 없는 허위사실이다.[55] 애초에 이름인 ‘라희(羅喜)’부터가 전주에서 태어난 딸을 위해 부모가 ‘전라도에서 얻은 기쁨’이란 뜻으로 지었다고 한다.[56] 현재 롯데푸드의 모체가 되는 일동산업의 창업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