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차돈 순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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異次頓 殉敎碑. 고대 신라시대, 불교를 제창하다 527년(신라 법흥왕 14년)에 순교한 이차돈(異次頓)을 기념하기 위하여 817년(신라 헌덕왕 9년)에 경상북도 경주시 백률사에 건립했던 통일신라 시기의 추모 비석.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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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이 1.04m, 각 면의 너비 29㎝.
817년(신라 헌덕왕 9년)에 이차돈의 순교를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비석으로, 원래는 1,200여년의 세월 동안 백률사 자리에 세워져 있었으나 문화재 보호 차원에서 1914년 경주 시내의 고적보존회로 이관하였고, 이 고적보존회가 1926년 조선총독부박물관 경주분관으로 바뀌었다가 광복 후에 국립박물관 경주분관을 거쳐 1975년 지금의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승격되면서 지금의 위치에 자리잡았다.
이 비석은 화강암제의 육면 기둥으로 방형의 석재 윗면을 육각형의 복련(覆蓮)으로 새긴 대좌 위에 세워져 있으며, 원래는 당위에 지붕 모양의 옥개석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나 이 옥개석은 현재 전하지 않고 있다. 육각형 모양의 비석 면 중 제1면에는 이차돈의 순교 장면을 부조해놓았는데 땅이 진동하고 꽃비가 내리는 가운데 잘린 목에서 피가 솟아오르는 장면이 간결하면서도 극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제2~6면에는 정간(井間)을 치고 각 정간에 자경 3㎝의 글자를 새겨 넣었다.
삼국유사 권3 염촉멸신조(厭觸滅身條)의 기사에 의하면 이 비석이 세워진 연도는 817년(신라 헌덕왕 9년)이다.
비석에 새겨진 비문은 심하게 마멸되어 읽기 어려우나 다행히도 글자가 마모되기 전에 이 석당기를 목판에 새긴 법첩(法帖)인 흥린군신각금생서(興隣君新刻金生書)와 원화첩(元和帖)이 현재까지 전하고 있어 비석 내용을 모두 알 수 있다. 그 내용은 법흥왕이 백성들을 위하여 불법(佛法)을 일으키려고 하자 이차돈이 고의로 잘못을 범한 것으로 꾸며 자신의 목을 치게 하여 순교한 일, 그의 목을 베자 목에서 흰 우유(白乳)가 한 마장이나 솟구치면서 하늘에서 꽃비가 내리고 땅이 흔들린 일,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며 장례를 치르고 사당을 세운 일 등이 묘사되어 있다.
현존하는 한국의 불교 공인과 관련된 사료로는 가장 오래된 것이며, 특히 제1면의 조각을 통해 통일신라시대의 복식 및 조각사를 연구하는 데도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2014년 2월 3일 문화재청에서 보물 지정을 예고하였다.연합뉴스 : 농경문 청동기·이차돈 순교비 보물지정 예고, 뉴시스 : '경주 이차돈 순교비' 보물 지정 예고, 서울신문 : 농경문 청동기·이차돈 순교비 보물 예고, 국민일보 : 농경문 청동기·이차돈 순교비 보물로 지정 하지만 워낙 보물 등재 예정 문화재가 밀려 있는 상황이라 2019년 12월 현재까지도 아직 지정 대기 중이다.
1. 개요
異次頓 殉敎碑. 고대 신라시대, 불교를 제창하다 527년(신라 법흥왕 14년)에 순교한 이차돈(異次頓)을 기념하기 위하여 817년(신라 헌덕왕 9년)에 경상북도 경주시 백률사에 건립했던 통일신라 시기의 추모 비석.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2.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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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이 1.04m, 각 면의 너비 29㎝.
817년(신라 헌덕왕 9년)에 이차돈의 순교를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비석으로, 원래는 1,200여년의 세월 동안 백률사 자리에 세워져 있었으나 문화재 보호 차원에서 1914년 경주 시내의 고적보존회로 이관하였고, 이 고적보존회가 1926년 조선총독부박물관 경주분관으로 바뀌었다가 광복 후에 국립박물관 경주분관을 거쳐 1975년 지금의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승격되면서 지금의 위치에 자리잡았다.
이 비석은 화강암제의 육면 기둥으로 방형의 석재 윗면을 육각형의 복련(覆蓮)으로 새긴 대좌 위에 세워져 있으며, 원래는 당위에 지붕 모양의 옥개석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나 이 옥개석은 현재 전하지 않고 있다. 육각형 모양의 비석 면 중 제1면에는 이차돈의 순교 장면을 부조해놓았는데 땅이 진동하고 꽃비가 내리는 가운데 잘린 목에서 피가 솟아오르는 장면이 간결하면서도 극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제2~6면에는 정간(井間)을 치고 각 정간에 자경 3㎝의 글자를 새겨 넣었다.
삼국유사 권3 염촉멸신조(厭觸滅身條)의 기사에 의하면 이 비석이 세워진 연도는 817년(신라 헌덕왕 9년)이다.
비석에 새겨진 비문은 심하게 마멸되어 읽기 어려우나 다행히도 글자가 마모되기 전에 이 석당기를 목판에 새긴 법첩(法帖)인 흥린군신각금생서(興隣君新刻金生書)와 원화첩(元和帖)이 현재까지 전하고 있어 비석 내용을 모두 알 수 있다. 그 내용은 법흥왕이 백성들을 위하여 불법(佛法)을 일으키려고 하자 이차돈이 고의로 잘못을 범한 것으로 꾸며 자신의 목을 치게 하여 순교한 일, 그의 목을 베자 목에서 흰 우유(白乳)가 한 마장이나 솟구치면서 하늘에서 꽃비가 내리고 땅이 흔들린 일,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며 장례를 치르고 사당을 세운 일 등이 묘사되어 있다.
현존하는 한국의 불교 공인과 관련된 사료로는 가장 오래된 것이며, 특히 제1면의 조각을 통해 통일신라시대의 복식 및 조각사를 연구하는 데도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2014년 2월 3일 문화재청에서 보물 지정을 예고하였다.연합뉴스 : 농경문 청동기·이차돈 순교비 보물지정 예고, 뉴시스 : '경주 이차돈 순교비' 보물 지정 예고, 서울신문 : 농경문 청동기·이차돈 순교비 보물 예고, 국민일보 : 농경문 청동기·이차돈 순교비 보물로 지정 하지만 워낙 보물 등재 예정 문화재가 밀려 있는 상황이라 2019년 12월 현재까지도 아직 지정 대기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