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차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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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등
내사(內史)
직위
사인(舍人)[1]
성씨
박(朴)[2] / 김(金)[3] / 석(昔) [4]
이름
이차돈(異次頓) / 처도(處道)[5]
염촉(猒觸)[6]
염촉(厭觸)[7][8] / 이차(異次) / 이처(伊處)[9]
거차돈(居次頓)[10]
아버지
김습보
생몰연도
502년 혹은 506년[11] ~527년 8월 5일
1. 개요
2. 생애
2.1. 흰색 피의 의미
3. 순교 이후의 영향과 평가
4. 관련 기록
5. 이차돈묘
6.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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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라승려로 이름은 염촉(厭髑) 혹은 거차돈(居次頓)이라고도 불린다. 속성(속가에서의 성씨)은 박씨(朴氏) 또는 김씨(金氏)인데 일반인들은 아마도 다들 성이 이씨고 이름이 차돈인 것으로 알고 있을 것이지만[12] 삼국유사에 나와 있는 대로라면 이 + 차돈이 아니라 성이 박 or 김이고 이름이 이차돈이다. 비슷한 사례로 이사부, 박제상이 있다.
신라가 불교 국가가 되고 이후 시대에도 계속 한국 불교가 이어지는 데 큰 역할을 한 인물로 신라 당대에도 신라십성 중 한 명이기도 했다.

2. 생애


신라 법흥왕 시대의 인물로 지금으로 치면 대통령 비서실에 해당하는 사인(舍人) 직책을 맡고 법흥왕의 측근으로 일하는 사람이었다.
불교가 국가적으로 공인되기 전의 신라에는 고유 신앙이 강하게 뿌리내려 있었다. 박혁거세김알지하늘에서 내려왔다거나 알에서 태어났다거나 계룡이 지켜줬다던지 하는 신화에서 신라에 천신 신앙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런 하늘의 후손이라는 사상은 배타적인 선민사상이 포함될 수밖에 없었고 신라의 정복으로 복속된 피정복민들은 신라에 공감하고 흡수되기 어려웠다. 신라가 경주영남을 넘어 큰 국가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이런 부분은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었다.
당시 기존의 토착 신앙을 고수하며 외래 종교인 불교의 국교화를 반대하던 주류파들에 맞서서 이차돈은 사실상 혼자서 법흥왕의 불교 도입을 지지하고 있었다.[13] 그러나 귀족들이 불교 도입을 워낙 반대하는 통에 골머리를 심하게 앓았다. 여기까지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이 일치하나 이후 이야기는 조금 다르다.
  • 삼국유사에서는 법흥왕 14년(527)에 22세였던 이차돈이 고민하던 왕에게 가서 "저의 을 베시면 됩니다."라고 한다. 이에 고민하는 법흥왕에게 "저의 목을 베어 왕의 위엄을 살리면 신하들도 더이상 반대하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조언한다. 결국 법흥왕은 이를 받아들이고 신하들 주위로 군대를 배치해놓고 "왕의 사찰을 짓는데 일부러 지체시키는 자가 누구냐"고 하자 겁에 질린 신하들이 이차돈을 지목해 이차돈은 왕을 거스른 죄로 목이 베인다. 이차돈의 목을 베자 흰 젖이 한 길이나 솟구쳐 올랐고 하늘을 가리며 온 땅이 흔들리며 꽃비가 내렸다. 그리고 북산[14]의 서쪽 고개에 장사 지내주고 좋은 땅을 골라 이차돈을 위로하는 절인 자추사(刺楸寺)[15]를 지어주었다고 한다.
  • 삼국사기에서는 법흥왕 15년(528)에 이차돈이 왕에게 "저의 목을 베어 사람들을 진정시키고 불교를 일으키소서"라는 조언을 하였다. 이를 받아들인 왕이 신하들을 모아놓고 불교 도입과 관련되어 질문을 하자 신하들이 "중죄를 내려도 우리는 반대할 겁니다."라며 고집을 꺽지 않는다. 이때 이차돈이 "불교의 심오함을 모르는 신하들이 잘못되었습니다."라며 나섰고 이에 법흥왕이 "다른 사람은 다 NO인데 너만 YES구나."[16]라며 목을 베어 버린다. 그리고 목에서 흰 피가 솟자 더이상 신하들이 불교를 헐뜯지 않았다고 나와 있다.
  • 해동고승전에는 법흥왕 16년(529)에 26세였던 이차돈이 법흥왕에게 "소신이 대왕의 명을 구실로 사찰을 건립할 것이니 대신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입니다. 그때 대왕께서 소신의 목을 치시면 이적이 일어날 것인즉 이로써 불법을 세우소서."하고 진언했다. 이에 법흥왕은 처음에는 " 없는 사람을 차마 죽일 수 없다"고 반대했지만 결국은 이차돈의 제안에 어쩔 수 없이 승낙했다. 그 다음날 이차돈은 "대왕의 명을 받들어 사찰을 짓겠다"고 천경림(天鏡林) 나무를 마구 베었는데[17] 귀족들이 가만둘 리가 없었다. 결국 이차돈은 국문을 받았는데 법흥왕은 "네가 왕명을 사칭했으니 마땅히 목을 쳐야 한다"면서 참수형을 내린다. 이차돈은 처형 전에 "내가 죽을 때 이적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과연 이차돈이 참수되니 그 목에서 흰색 가 솟아나오고 꽃비가 내리고 땅이 요동치는 등의 이적이 일어나 많은 사람들이 놀랐고 이로 인해 불교가 공인되었다고 한다.
  • 이차돈 순교비에는 염촉이 찾아와 왕을 설득하고 이후 궁궐을 찬 사람들로 사방을 방비하게 한 위압적인 모습을 보이면서 신하들에게 "내가 불법을 믿고 절을 지으려고 하니까 반역을 꾀한 놈이 있다던데?"라고 묻는다. 이에 신하들은 "저희는 절대로 반역을 꾀한 적이 없습니다."라며 벌벌 떠는데 이차돈만은 왕의 말에 답하지 않았다. 이에 법흥왕이 이차돈을 불러 불러 목을 베었는데 흰 젖이 하늘로 치솟고 꽃비가 내리며 땅이 울렸다고 한다.

2.1. 흰색 피의 의미


불교의 가르침에 따르면 아라한(阿羅漢)이라는 이상(理想)의 경지에 이르기까지는 수다원(須陀洹), 사다함(斯陀含), 아나함(阿那含) 등 위계(位階)가 있다. 이때 각 단계별로 많은 신체적 변화와 능력이 생기는데 능엄경의 유가수련증험설(瑜伽修煉證驗說)에 따르면 "3번째 아나함의 경지에 오르면 붉은 피가 하얀 기름으로 변한다"는 내용이 있다.
과학적으로 보면 척수액이나 하얀 음식물이 뿜어져 나온 것일 가능성이 높고,[18] 고지혈증 때문에 혈액 내 지방 함량이 높아 굳어진 결과일 수도 있다. 그리고 중국발 기사지만 하얀색에 가까운 혈액을 가진 사람도 있었으니 허무맹랑하지만은 않다. 그래서 평소에 상처나 코피 등으로 자신의 피가 흰 색이란 걸 알았던 이차돈이 불교 공인을 위해 본인을 희생해 기적을 연출한 것일 수도 있겠다.
그리스도교에서도 이와 비슷한 사례가 있는데, 알렉산드리아의 카타리나 성녀가 참수당할 때 잘린 목에서 피 대신 우유가 솟아나왔다고 전해진다.

3. 순교 이후의 영향과 평가


처음 불교가 공인되는 데는 귀족들의 반대로 이렇게 험난했지만, 이차돈의 순교 이후 신라는 빛의 속도로 독실한 불교국가로 탈바꿈했다. 바로 법흥왕 다음 왕인 진흥왕은 말년에 스스로 머리를 깎고 승려처럼 하고 다녔고, 아들들과 친척의 이름을 석가모니의 가족 이름으로 지어버릴 정도였다. 보편종교의 힘으로 백성들의 사상을 통합해 국왕을 중심으로 일사불란한 행정군사체제를 갖출 수 있었고, 이는 진흥왕대의 폭발적인 국력 신장과 나아가 삼국통일전쟁 승리까지 바라보는 원동력이 됐다. 이런 결과를 보면 이차돈의 순교로 확실하게 역사가 바뀐 셈이다.
조선시대 유학자 양촌 권근은 "이차돈이 불교를 위하여 간교한 계략을 꾸며 실행하니, 이 때문에 신라의 종교문제가 커졌다"고 부정적으로 동국사략에 기록했다. 반면 승려 일연을 비롯한 불교계 측에서는 불교 이전 신라의 수준 낮은 토착신앙을 비판하며, 불교신앙을 받아들였음을 긍정적으로 평했다. 역시 종교적ㆍ정치적 입장에 따라 해석이 각양각색이다.

4. 관련 기록


이때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염촉(猒髑)이었다. (그는) 임금의 얼굴을 우러러 쳐다보고 울분이 나서 먹는 것도 잊은 채 엎드려 임금께 천천히 아뢰었다. “보잘것없는 제가 생각건대 임금께서 큰 뜻을 가지고 계신 듯합니다. 옛사람의 말에 나무꾼에게도 계책을 물어본다고 하였으니, 제게도 물어 보시기를 원하옵니다.”

(중략)

목을 벴을 때 목 가운데에서 흰 젖이 한 장(丈)이나 솟구치니, 이때 하늘에서는 꽃비가 내리고 땅이 흔들렸다. 사람들은 서글프게 울었고 동요하면서 불안해 하였다. 길에는 곡(哭)소리가 이어졌고 우물에는 완전히 발길이 멎었으며, 눈물을 흘리면서 염을 마쳤다. 시신은 북산(北山)에 안장하고 서산(西山)에 사당을 세웠다.

이차돈 순교비』 中


가까운 신하인 이차돈(異次頓)【혹은 처도(處道)라고도 한다.】이 아뢰었다.

“바라건대 저의 목을 베어 뭇 사람들의 분분한 논의를 진정시키십시오.”

(중략)

목을 베자, 잘린 곳에서 피가 솟았는데 그 빛깔이 우유처럼 희었다. 사람들이 이를 괴이하게 여겨 다시는 불사를 헐뜯지 않았다.【이는 김대문(金大問)의 『계림잡전(鷄林雜傳)』기록에 의거한 것인데, 한나마(韓奈麻) 김용행(金用行)이 지은 「아도화상비(我道和尙碑)」의 기록과는 자못 다르다.】

삼국사기제4권 신라본기 제4 법흥왕


신라본기(新羅本紀)에 이르기를, 법흥대왕(法興大王) 즉위 14년[19]

에 소신(小臣) 이차돈(異次頓)이 불법을 위하여 제 몸을 없앴다

삼국유사》 권3 흥법 원종흥법 염촉멸신


16년(529)에 이르러 내사(內史) 사인(舍人)인 박염촉(朴厭觸) 혹은 이차돈(異次頓), 혹은 거차돈(居次頓)이라 함은 나이가 26세로 정직한 사람이었다. 마음이 진실하고 생각이 깊어서 의로운 것을 보면 용기를 떨쳤다. 왕의 큰 소원을 돕고자 하여 가만히 아뢰었다. “폐하께서 만약 불교를 일으키고자 하신다면 청하옵건대 신이 거짓으로 왕명이라 하여 유사에게 전하되, ‘왕께서 불사(佛事)를 창건하려 하신다.’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면 신하들은 반드시 간할 것이니, 이때 왕께서는 바로 칙령을 내려 ‘나는 그런 영을 내린 일이 없는데 누가 거짓으로 왕명이라 꾸며대었는가?’ 하십시오. 그러면 그들은 반드시 신(臣)의 죄를 추궁할 것입니다. 그때에 만일 왕께서 그 신하들의 아룀이 옳다고 하신다면 그들은 복종할 것입니다.” 하였다.

해동고승전권1 석법공


5. 이차돈묘


2019년 8월 TBC의 보도를 통해 소금강산 백률사 인근 100여m 떨어진 지점에서 이차돈의 무덤과 사당을 발견하였음이 드러났다. ##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재는, 전문가가 아닌 이상 그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많이 훼손되어 있다. 게다가 그의 관으로 추정되는 곳은 이미 도굴된 상태고, 그의 시체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이다. 그래도 수천년이라는 세월이 지난 것을 감안하면, 저거라도 발견한 게 다행이다.

6.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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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7년 5월 5일 KBS1에서 부처님오신날 특집드라마 <이차돈>이 방영됐는데, 극본은 김운경, 연출은 이종한 PD가 맡았으며 이차돈 역은 배우 김기복이 맡았다.

[1] 김용행(金用行)이 지은 아도비(阿道碑)에 언급되는 관직으로 삼국사기에서는 기록되지 않았다.[2]삼국유사》, 《해동고승전》의 기록.[3] 《삼국유사》에서는 그의 아버지가 지증왕의 아버지 습보갈문왕의 후손이라는 기록이 있다.[4] 역시 삼국유사에 기록 된 아도비에 따르면 석씨 마지막 임금인 흘해 이사금(걸해대왕/乞解大王)에게 공한(功漢)이라는 이름의 아들이 있었다. # 공한의 아들이 길승(吉升)이고 길승의 아들이 바로 이차돈이라고 한다. 삼국사기엔 흘해의 아들이 없어서 내물 마립간이 뒤를 이었다고 하는데, 훗날의 소지 마립간에게 분명히 아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지증왕이 왕위에 오른 것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을 듯하다.[5] 이상 《삼국사기》의 기록.[6] 신라 당대(헌강왕)에 만들어진 이차돈 순교비의 기록.[7]삼국유사》의 기록. 삼국유사의 각주에 따르면 "같은 말이라도 기록하는 사람의 편의에 따라 비슷한 발음의 한자를 써 넣는다"고 기록해 두었다. "이차(異次)는 방언(고유어)이며, 한자로 쓰면 염(厭)이 된다"고 기록해 두었다.[8] '염(厭)'은 '염세적(厭世的)' 등에 쓰이는 '싫어하다'라는 의미이고, 중세 국어의 '잋다'라는 말이 '피곤해하다'라는 의미임을 생각해 보면, '이차(異次)'는 어간 '잋-'의 옛 어형에 해당될 수 있다. 즉 '차(次)'는 '잋-'의 음절 끝 [tsʰ\]에 해당하는 표기인 것. 다만 '싫어하다'와 '피곤해하다'의 의미가 미묘하게 다른 게 문제라면 문제. 다만 영어에서도 tired가 이런 두 가지 뜻으로 쓰이는 것을 보면, 아주 연관성이 없는 것은 아닐 수도 있다.[9] 이상 《삼국유사》의 기록[10]해동고승전》의 기록.[11] 해동고승전에 따르면 "529년 죽임을 당할 때 나이가 26세"라 하였고, 삼국유사에서는 "527년에 22살이던 이차돈이 죽음을 맞이했다"고 기록되어 있다.[12] 당장 이 문서 제일 위의 그림 파일명도 'pic_leechadon_01.jpg'로 되어 있다. 성씨를 이씨로 보아 '이(李)'에 해당되는 가장 흔한 로마자 표기인 'Lee'를 써서 옮긴 것.[13] 소지 마립간사금갑 설화에 등장하는 승려나 고구려 출신 승려 묵호자 혹은 아도와 같이 법흥왕 이전에도 신라 일부, 특히 왕실에는 이미 불교가 어느 정도 받아들여져 있었다.[14] 오늘날 경상북도 경주시 북쪽 소금강산 서쪽고개에 떨어졌다고 한다.[15] 오늘날 백률사로 추정한다.[16] “여러 사람들의 말이 단단하여 이를 깨뜨릴 수가 없구나. 너만 홀로 다른 말을 하니 양쪽 모두를 따를 수는 없다.(衆人之言 牢不可破 汝獨異言 不能兩從 )”[17] 삼국유사에서는 천경림의 나무를 벤 때가 527년이라고 기록하고 이차돈의 죽음과는 무관하다고 서술했다.[18] IS의 많은 참살 영상 중 피가 아니라 하얀색 액체가 먼저 뿜어져 나오는 영상도 있었다.[19]삼국사기》에는 법흥왕 15년에 있던 일로 기록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