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흥왕

 


'''시호'''
'''법흥왕(法興王)'''
'''존호'''
'''모즉지매금왕(牟卽智寐錦王)'''[1]
'''무즉지태왕(另卽智太王)'''[2]
'''성법흥대왕(聖法興大王)'''[3]
'''대성법왕(大聖法王)'''[4]
'''모태왕(募泰王)'''[5]
'''연호'''
건원(建元)
'''성씨'''
김(金)
[6]
''''''
모태(募泰), 모진(募秦), 모즉(牟卽), 무즉(另卽)
좌리지(佐利遲)[7]
원종(原宗)
'''왕후'''
보도부인(保刀夫人) 박씨
'''왕녀'''
지소부인(只召夫人)
'''부왕'''
지증왕
'''모후'''
연제부인(延帝夫人) 박씨
'''묘지'''
애공사 북봉(哀公寺 北峯)
'''생몰연도'''
음력
487년 ~ 540년 7월(52-53세)
'''재위기간'''
음력
514년 ~ 540년 7월 (26년)
1. 개요
2. 호칭
3. 즉위 이전
4. 업적
4.1. 중앙 집권 국가 체제 확립(율령 반포)
4.2. 불교 공인
4.3. 금관국(금관가야) 편입
4.4. 연호 제정
5. 이후
6. 평가
7. 삼국사기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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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라의 제23대 임금. 연호는 건원(建元).
지증왕연제부인의 아들이다. 왕비는 보도부인(保刀夫人).[8] 딸로 지소부인을 뒀는데, 지소부인은 법흥왕의 동생인 입종 갈문왕과 결혼해 아들로 삼맥종(진흥왕)과 숙흘종을 뒀다.
514년 왕위에 오르자마자 시법(諡法)을 제정하였고 520년 율령(律令, 형법과 행정법)으로 백관(百官)의 공복(公服)을 제정하는 등 지증왕을 이어 신라라는 국가의 체제를 완성시켰다. 지증왕이 즉위했을 때 이미 64세의 고령이었기 때문에 지증왕 시대의 업적들도 대부분 젊은 태자였던 법흥왕이 주도했을 개연성도 높다.
법흥에서 법이란 헌법이 아니라 불법(佛法), 즉 불교를 가리키며 신라에서 불교를 공인한 왕이다.
또한 지증왕 즉위 초기 기록인 포항 냉수리 신라비울진 봉평리 신라비에서 나타난 왕은 그저 6부의 일원에 불과하며[9] 공동 하교를 내릴 정도로 귀족과 동등한 위치에 놓인 왕권을 진흥왕 시기에 북한산비에 나타난 것처럼 단독 하교를 내릴 수 있게 할 정도로 왕권 강화의 토대를 닦은 인물이 법흥왕이기도 하다.

2. 호칭


한자 명칭이 원종(原宗), 음차 명칭이 모태(募泰), 모진(募秦), 모즉(牟卽)인걸 봐선 순우리말로 '맏이'라고 읽었는 듯.
매금(寐錦)이라는 단어는 『광개토대왕릉비』, 『중원 고구려비』, 『일본서기』, 『울진 봉평리 신라비』에 등장하는 군주의 칭호다. 『광개토대왕릉비』에는 "신라의 매금이 직접 와 조공을 바쳤다"라는 기록, 『중원 고구려비』에는 무려 6번이나 매금이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주로 고구려, 일본외국 기록에서 매금이라는 단어가 나오기 때문에 매금의 의미에 대해 "신라의 왕명이다", "아니다. 신라 밖에서 신라의 왕을 얕잡아 부르는 말이다" 등의 의견으로 갈리었으나 1988년 1월 발견된 『울진 봉평리 신라비』에 "갑진년 정월 15일, 탁부 모즉지 매금왕(啄部 牟卽智 寐錦王)"이라는 비문이 등장하며 법흥왕 때까지 신라 스스로 사용한 칭호임이 밝혀졌다.
매금이 비하 표현이라는 설이 있었지만 신라인이 남긴 금석문에서 매금이라는 단어를 쓰고 있으므로 존칭의 의미가 아닌 비하하는 의미는 결코 있을 수가 없다. 매금이 마립간의 동일 명칭이라면 지증왕 대에 칭호를 중국식 명칭인 으로 이미 통일했지만 법흥왕 대까지는 '매금(마립간) + 왕'이라고 합쳐 쓴 것이라 볼 수도 있다.

3. 즉위 이전


사실 법흥왕은 이미 아버지 지증왕 시절 부터 어느 정도 영향력을 행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소지 마립간이 40세 전후하여 죽음을 맞이한 것에 비해 그의 뒤를 잇는 지증왕의 즉위 시 나이가 64세로 고령이었다는 점에다 인척관계로 보면 그리 가깝지 않았다는 점을 본다면 지증왕에 있어서는 석연치 않은 왕위 계승이 있었음이 분명해보인다. 그런데 법흥왕의 나이를 생각해본다면 법흥왕은 지증왕이 50에 접어들 때에 낳은 아들이 되는데 지증왕이 그 이전에 혼인을 안했을리가 없고, 그 전에 자식이 없을리도 없다. 그럼에도 법흥왕은 장남으로 기록되어 있고, 이후 왕위에 올랐을 때 막강한 권한을 행사한다.
그래서 대체로 추정해본다면 법흥왕의 위치는 자신의 어머니에게서 영향력을 볼 수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법흥왕의 어머니 연제부인은 성씨가 박씨다. 눌지의 자손들은 눌지 형제들의 자손들을 왕비로 맞아들이고 있었다.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눌지 형제들의 자손에 속하는 지증왕의 부인이 박씨라는 점은 당시 여러 체계에서 꽤나 벗어난 경우가 된다. 하지만 지증왕이 미사흔계에 밀리고 있었던 복호계의 위치에서 생각해본다면 다른 왕비족을 맞아들여서 영향력 강화에 나섰다고 한다면 어느 정도 생각해볼 수 있는 가정이 된다.
실제로 연제부인은 신라 왕비로는 꽤나 특이하게 전설을 남기고 있다. 또한 법흥왕(추정), 진흥왕, 진지왕의 부인이 모두 박씨라는 점을 감안해본다면 복호계와 박씨의 연합은 충분히 유추해볼 수 있겠다.
이러한 과정들을 거쳐 법흥왕은 아버지의 나이가 70을 바라보는 시점에 접어들면서 외가인 박씨 집안의 도움을 받으며 본격적으로 본인의 입지를 다졌을 가능성이 높고, 자신의 동생인 김입종과 함께 왕권 강화에 어느 정도 나섰을 가능성이 높다. 당장에 김입종은 법흥왕 대에 신라 6부 중 한 부의 수장으로 올라가게 된다.

4. 업적



4.1. 중앙 집권 국가 체제 확립(율령 반포)


520년 1월 율령을 반포하고[10] 유리 이사금 때 6부에 17관등을 처음 둔 이래 율령으로써 17관등에 대한 정비를 완료하였고 신라 역사상 처음으로 붉은색과 자주색으로 관리의 공복을 제정하여 골품제를 확립시켰다. 531년 4월에 이찬 철부(哲夫)를 상대등(上大等)으로 임명했는데 이 또한 신라 역사상 처음 등장하는 관직명이다. 귀족의 대표를 상대등에 임명했다는 것이 되는데 이는 귀족을 관료제 체계에 포함시켰다는 의미가 된다. 신라의 왕은 사실 법흥왕 이전까지 신라 6부 중 하나인 탁부(啄部)의 지도자에 불과했지만[11] 이후 중앙 집권 체제를 공고히 하며 이후로는 모든 당대 기록에서 오로지 왕(王)으로 표현되게 된다. 그리고 군사력을 담당하는 전문 부서인 병부를 설치하였는데 병부 설치의 의미는 그 전까지는 왕실과 유력자들이 사병 비슷하게 사유하고 있던 병사를 이제는 국가 차원에서 소속시키고 다룬다는 의미가 있다. 신라라는 국가가 점차 조직적으로 변해가는 것. 521년에는 나제동맹 동맹국인 백제와 함께 중국 양나라에 사신을 보내는데 중국과의 외교전진부견과 교류한 이후 약 140년만이었다.
국가 경제의 기초인 농업에도 관심을 기울였는데 법흥왕 18년(531년) 제방을 수리하라는 명을 내렸다. 실제로 경상북도 영천시 금호읍 도남동에는 지금도 사용되는 신라 시대 저수지가 있는데(이름은 청제(菁堤), 현지인들은 청못이라고도 부른다) 여기서 법흥왕 23년(536년) 때 만들어진 '''영천 청제비''' 비석이 발견되기도 했다. 비석 앞면에는 저수지의 넓이와 높이, 만드는 데 동원된 사람 수, 담당자 이름 등이 기록되어 있고 뒷면에는 나중에 이 저수지를 수리할 때 추가로 적어놓은 내용이 써 있다. 당시의 비석이 발견된 건 이곳 뿐이지만 신라 각지에 이런 식으로 체계적으로 관리되는 저수지가 여럿 있었을 것이다.
538년에는 지방관이 가족을 데리고 부임할 수 있도록 교서를 내렸는데 신라의 지방 통치 제도가 조금씩 체제를 갖추는 것을 의미한다.

4.2. 불교 공인


나라의 체제를 정비하며 527년 처음으로 불법(佛法)을 공인하였는데 이것은 양나라의 승려 원표(元表)가 불교를 신라 왕실에 전해준 것이 불교 수용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다만 불교 자체는 이미 그 이전 시대에 이미 신라에 들어와 있었는데 소지 마립간의 사금갑 설화에 등장하는 승려고구려 출신 승려 묵호자 혹은 아도와 같이 법흥왕 이전에도 신라 일부, 특히 왕실에는 이미 불교가 어느 정도 받아들여져 있었다. 다만 귀족의 반대로 공인이 되지 않고 널리 퍼지지는 못한 상태였는데 법흥왕이 공식적으로 수용을 선포한 것으로 흰 의 기적으로 유명한 이차돈이 이 때의 사람이다. 이후 529년 살생을 금지시켰다.
신라는 귀족들이 고유 토착 종교의 제사장을 겸하고 있었던 까닭에 토속 종교의 영향력이 강했다. 중국과 가까워 비교적 일찍 불교를 받아들인 고구려나 백제와 달리 신라에 불교가 최초 전래된 시기도 아리송하고 공인 과정에서 강력한 반대로 피를 줄줄 흘렸던 것도 이러한 사연이 있다. 외래 종교를 들여와 토속 종교를 억누르는 것으로 제사장을 겸하고 있던 귀족 계층의 권위를 찍어 누를 수 있기 때문. 같은 과정을 거친 국가로 일본이 있는데 모노노베씨소가씨의 항쟁으로 시즌2를 찍는다.
법흥왕은 신라의 토착 종교 관련한 일곱 성지를 과거불이 주재하던 장소라고 선전하며 밀어버리고 을 짓는 국책 사업을 벌였는데 이 중에 유명한 것이 분황사, 사천왕사, 불국사. 당연히 귀족들의 반대도 심했고 짓던 절을 때려부쉈다가 다시 짓는 등의 진통을 겪었으나 법흥왕의 정책은 결과적으로 대성공이었다. 신라는 이후 100년도 안 되어 놀랄만한 불교 국가로 변신했으며 이 시기에 활동한 고승만 해도 원효, 의상, 대안, 명랑 등 수두룩 빽빽하다.
법흥왕 재위 당대에 남겨진 울주 천전리 서석 을묘명[12]안급이(安及以)라는 이름의 승려와 그의 일행이 왔다갔다는 내용인데 여기에서 법흥왕을 성법흥대왕(聖法興大王)이라 말하고 있다. 불교를 진행시킨 성스러운 대왕으로 높여주고 있는데 불교를 밀어준 왕이다보니 특히 불교계에서 그에 대한 칭송이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4.3. 금관국(금관가야) 편입


이후에 금관국[13]을 합병한다. 532년 금관국주(金官國主) 김구해(金仇亥)가 왕비와 세 아들인 큰 아들 김노종(奴宗), 둘째 아들 김무덕(武德), 막내 아들 김무력(武力)을 데리고 나라 창고에 있던 보물을 가지고 와서 항복하였다.
그 배경을 살펴보면 이미 김해 금관가야는 전성기가 지나 가야 지역의 주도권도 잃고 약화된 상태였고 신라와의 국력차는 넘사벽으로 벌어져 있었다. 529년에는 한국 사서에는 안 나오고 일본서기 케이타이 덴노 조에만 나오는 사건이 있는데 일본서기 특유의 과장을 빼고 핵심만 요약하면 임나(가야) 왕이 신라가 위협적이니 국에 지원군을 보내 달라고 했고[14] 신라는 상신(上臣) 이사부에게 3천 병력으로 토벌을 명한다. 왜국 측 오미노 케누(近江毛野)가 이사부의 군대를 보고 도망가자 이사부는 가야의 4개 도시를 빼앗고 백성들을 포로로 데려갔으며 4개 도시 중 금관국이 있는데 안 그래도 쇠퇴한 상태였던 금관국은 나라를 유지하기 힘든 피해를 입은 것으로 보인다.[15]
금관국의 항복 과정에 대해 삼국사기삼국유사가 차이가 있는데 삼국사기에서는 특별한 군사적 충돌 없이 순순히 항복한 것처럼 나오고 삼국유사 가락국기에서는 신라가 쳐들어오자 군을 이끌고 맞섰는데 병력 차이가 너무 커서 어쩔 수 없이 항복한 것으로 나오며 일본서기 긴메이 덴노 조에서는 예상치 못한 습격에 당했다는 식으로 나온다. 532년 구형왕이 항복하자 이에 정식으로 합병하여 금관군(金官郡)을 설치해 낙동강 유역을 확보하였다. 비교적 평화적으로 금관국을 흡수하면서 얻은 법흥왕의 또 다른 이득은 인재인데 구형왕의 막내 아들인 김무력은 진흥왕 시대에 신라에서 장군으로 활동하는데 본인도 활약했을 뿐 아니라 김무력은 김유신의 할아버지이기도 하다.
김해 금관국뿐 아니라 일본서기에서는 오늘날의 창원으로 비정되는 탁순국과 그 근처로 추정되는 탁기탄의 항복까지 법흥왕 때 받아낸 것으로 나온다. 이렇게 신라와 인접한 가야권 동쪽 몇몇 나라가 신라에 흡수되면서 나머지 가야 소국들은 대체로 친백제로 기울고 나머지 가야의 병합은 이후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를 크게 꺾은 후 진흥왕 시대에 완료된다.

4.4. 연호 제정


536년 연호를 건원(建元)이라 정하였는데 이는 신라에서 기록상으로 최초의 연호이다.

5. 이후


말년에 사실상 출가승려가 되어 법호를 법운(法雲), 자는 법공(法空)이라 했고 그 해(540년) 7월 붕어하여 시호를 법흥이라 하였다.
[image]
법흥왕릉은 법흥왕의 업적을 감안하면 일반적인 신라왕릉크고 아름다운 이미지와 대비되게 매우 작은 편인데, 신라 왕릉 형태의 초기 형 → 후기형 변천사를 따져보면 작지 않은 의미가 있다.
법흥왕의 뒤를 이어 법흥왕의 조카이자 외손자가 되는 삼맥종이 왕위에 올라 진흥왕이 되었다.

6. 평가


고대 국가로서의 신라가 체계화되는 시발점을 만든 왕으로 신라 역사에서 손꼽히는 명군이다.
지증왕에 이어서 삼국간의 전쟁이 소강 상태에 들어섰던 6세기 초반의 짧은 평화 기간 동안 강도높은 내정 개혁과 국력 증대, 왕권 강화, 금관가야 흡수 등 많은 업적을 쌓아 6세기 중후반 신라 전성기의 토대를 닦았으며, 진흥왕의 폭발적인 영토 확장도 이 때 쌓아둔 국력이 배경이 되었기에 가능했던 것으로 어떤 의미에서는 지증왕과 함께 내정 개혁으로 신라의 향후 500년을 결정지은 신라 역사상 중요한 임금 중 한 명이기도 하다.
국력을 신장시키고 다음 왕대에 전성기를 누리게 한 점이 여러모로 고구려소수림왕과 비슷하다.
하지만 숭유억불의 시대 조선시대에서는 고구려소수림왕, 백제침류왕과 함께 불교를 들여와 삼한을 어지럽힌 불교 삼형제로 꼽힌다(....)[16][17]

7. 삼국사기 기록


'''《삼국사기》 법흥왕 본기'''
一年 법흥왕이 즉위하다
三年春一月 신궁에 제사지내다
三年 용이 양산의 우물 안에 나타나다
四年夏四月 처음으로 '''병부를 설치'''하다
五年春二月 주산성을 쌓다
七年春一月 '''율령을 반포하고, 공복과 위계'''를 정하다
八年 에 사신을 보내서 토산물을 바치다
九年春三月 가야의 국왕이 혼인을 청하다
十一年秋九月 남쪽 변방 지역을 둘러보다
十二年春二月 대아찬 이등을 사벌주 군주로 삼다
十五年 '''불교를 처음으로 시행'''하다
十六年 살생을 금지하다
十八年春三月 제방을 수리하다
十八年夏四月 이찬 철부를 '''상대등'''으로 삼다
十九年 '''금관국이 항복'''하다
二十一年 상대등인 철부가 죽다
二十三年 처음으로 '''연호'''를 칭하다
二十五年春一月 지방관이 가족을 데리고 부임하는 것을 허락하다
二十七年秋七月 왕이 죽다
지증왕과 마찬가지로 기록은 소략한 편이나 율령 반포나 불교 공인과 같은 중요한 업적들이 다 적혀있다.
[1] 울진 봉평리 신라비에 등장.[2] 울주 천전리 각석 추명(追銘)에 등장. 另의 발음은 '영'이나, 진흥왕 순수비에서 '무력지(武力智)'로 나오는 인물이 다른 순수비에서는 另力智로 나온다는 사실로 볼 때 당시 신라에서 另이 '무'로도 읽혔으며, 另卽智는 '영즉지'보다는 '무즉지'일 가능성이 더 크다.[3] 울주 천전리 서석에 등장.[4] 삼국유사에서 인용한 향전(鄕傳, 중국기록이 아닌 이 땅에서 전래되어 내려온 기록을 말한다.)에서 등장한 이름. 이차돈이 처형을 당하기 전 한 말에서 법흥왕을 대성법왕이라 부르고 있다.[5] 양직공도에 양 무제 보통(普通) 2년(521)에 신라왕 모태(募泰)가 처음으로 백제 사신편에 붙어 사신을 보내 표(表)를 올리고 방물(方物. 특산품)을 바쳤음이 기록됨.[6] 『양서』 「신라전」에는 '모진(募秦)'으로(이후 『책부원귀』를 거쳐 『삼국사기』에 인용됨), 봉평신라비와 천전리에는 '모(무)즉지'로 등장한다. 흉노족 신라왕족설을 주장하는 사람들 중 일부는 이를 두고 경주 김씨 왕실과 모용선비와의 연관성을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현재 학계의 통설은 '''이때는 신라에 중국식의 성씨가 없었으며, 모진과 모즉지 모두 이름'''이라는 것이다. 성씨의 기본적인 역할이 가족 혹은 씨족 집단의 지표인데도, 당대 금석문을 기준으로 살펴볼 경우 부자 관계인 '지도로 갈문왕'(지증왕, 영일 냉수리비)과 형제 관계인 사부지(입종) 갈문왕과 그 자식인 삼맥종(심맥부지)(천전리 서석)에게 '김', '모', '무', '삼' 등 법흥왕과 같은 성씨로 볼 수 있는 요소가 전혀 나타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재 신라에서 성씨를 사용한 최초의 인물은 왕위에 즉위한 이후의 진흥왕이라고 본다.[7] 일본서기에만 나오는 법흥왕의 다른 이름 또는 호칭으로, 어원이 무엇이고 다른 이름들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일단 맨 마지막에 있는 遲는 존칭어미 智와 같은 것이어서 결국엔 '''佐利'''가 이름이다.[8] 사축부인(巳丑夫人), 파도부인(巴刀夫人)이라고도 한다. 保道라는 표기도 있다. 기록마다 김씨, 박씨 등으로 성이 엇갈리는데 한 건이라면 모르겠으나 왕비의 성은 이 기록 외에도 수없이 바뀐다. 그녀가 소지 마립간의 딸이라는 이야기가 유명한데 정사에서는 아버지가 누군지 나오지 않는다.[9] 신라 자체가 그 시작은 경주 6개 마을의 지배자들이 연합하여 세운 나라였다. 이런 성격은 박혁거세 설화에서도 잘 드러나있다.[10] 율령 반포 기록에 대해 일제강점기 일본 학자들부터 시작해 오랫동안 신빙성을 의심받기도 했었는데 524년에 새겨지고 1988년 발견된 울진 봉평리 신라비의 내용을 통해 이 시기에 세세하게 성문화된 법률을 통한 체계적인 지배(율령이 존재했다는 것)가 재확인됐다. 또한 지증왕 때인 503년에 세워진 포항 냉수리 신라비와 율령이 반포된 520년 이후인 524년에 세워진 울진 봉평리 신라비에서의 관등 기록 차이에서 520년 율령 반포를 통한 17관등의 완성 여부를 확인할 수 있다.[11] 사실 탁부 또는 훼부로 언급되는 금석문인 포항 중성리 신라비, 포항 냉수리 신라비, 울진 봉평리 신라비가 모두 지증왕에서 법흥왕 시기로 추정되어서 신라 왕 중에서도 내물왕계만 탁부 출신일 수도 있다.[12] 을묘년에 새겨져서 을묘명이라 한다. 을묘년은 법흥왕 22년(535년)이다.[13] 금관가야를 뜻한다. xx가야란 말은 한참 후대인 고려 태조 때부터나 사용된 말.[14] 왜국이 가야권과 유착되어 있었고 때때로 왜군이 남부 지방에 파견된 것은 광개토대왕릉비에도 나오는 이야기니 일본 측의 과장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15] 일본서기 기록을 531년 금관국 멸망 사건의 기년이 잘못되었다고 보기도 한다.[16] 조선왕조실록 등에 기록된 조선시대 당대의 과거 역사인물 평가는 여러모로 현대와는 다른 점이 많다. 예를 들면 신라의 경우 중대보다 하대 왕들이 대체로 평가가 더 좋다.[17] 물론 조선 시대 사람들이 불교를 많이 탄압했던 시기라고 생각하고 걸러들을 필요가 있다. 삼국 시대에 불교를 받아들인 것은 엄연히 왕권강화가 목적이었고 백성들의 민심을 진정시키기 위해서 받아들인 것인데다가 종교든 학문이든 국교로 지정한 이상 후대에 갈수록 타락하기 마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