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상(동명이인)
1.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 사회주의자
李鉉相
2. 조선 정조~순조 때의 문신
李顯相
1770 ~ 1822
자는 상지(相之), 호는 태화(太華). 본관은 우계.
1798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정조가 직접 제시한 응제에 합격하여 바로 과거 시험에 응시자격이 주어졌다. 1800년(정조 24)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올랐다. 이후 순조 연간에 교서관과 성균관에서 주로 근무하였다.
춘추관기주관을 거쳐 그해 4월 13일 승문원에서 이문문신을 추가로 선발할 때 선발되었다. 그해 12월 교서관부정자가 되고 1801년(순조 2) 봉상시참봉, 교서관정자,
1802년 다시 교서관 저작, 교서관 박사, 봉상시주부 등을 역임했다. 1803년 교서관교리가 되고 1804년 다시 교서관교리, 1806년 또다시 교서관 교리가 되었다. 그 뒤 춘추관 기주관이 되고, 규장각 검서관, 교서관 정자, 봉상첨정(奉常僉正) 등을 지냈다. 1808년 다시 교서관 교리가 되었다가 1809년 봉상시첨정이 되었다.
1811년 1월의 통신사행의 사신으로는 정사 죽리 김이교(金履喬), 부사에 남진 이면구(南霞 李勉求), 제술관(製述官)은 이현상(李顯相), 정사 서기는 청산 김선신(淸山 金善臣), 종사 서기는 백옹 이명오(泊翁 李明五)가 참여하였다. 그해 6월 돌아왔다가 성균관전적이 되고, 이후 1811~1812년 도쿠가와 이에나리(德川家齊)의 쇼군 취임을 축하하는 통신사(通信使)가 파견될 때 제술관으로 김이교, 이면구 등을 수행하여 쓰시마 섬에 다녀왔다. 귀국후 성균관전적, 1812년(순조 12) 교서관판교, 형조좌랑을 거쳐 1813년 신창현감으로 나갔다. 그해 11월 30일 모친상으로 사직하였다. 1818년(손조 18년) 성균관전적을 거쳐 이듬해 교서관판교, 유곡도찰방(幽谷道察訪)이 되었다.
1819년(순조 19년) 일본에 통신사가 파견될 때 제술관으로 일본에 다녀왔다. 그 해 성균관 전적이 되었다. 1820년 문천군수를 거쳐 겸춘추관, 안변진관 병마동첨절제사에 이르렀다. 만년에는 족보 편찬 등 문중 행사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1822년(순조 22) 6월 24일 부인 풍양조씨가 사망했고, 같은 해 7월 14일 그도 사망했다.
1811년(순조 11)의 일본에 파견되는 조선 통신사의 제술관으로 다녀왔고 1811년 말 일본 도쿠가와 막부의 쇼군으로 도쿠가와이에나리가 취임하자 다시 파견되는 조선 통신사의 제술관으로 부산과 쓰시마를 거쳐 일본을 다녀왔다.
지방관으로는 신창현감과 문천군수 등을 지냈다.
3. 조선 영조 때의 왕족 출신 문신
李顯相
1680 ~ 1725.
자는 원보(元甫), 본관은 전주. 광평대군의 후손으로 청안군 이영의 10대 손이 된다.
1699년 증광사마시의 생원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고 1717년(숙종 43) 음서로 관직에 나가 경기전 참봉, 이듬해 상의원 직장 등을 지내고 1719년 청나라 사신을 영접하는 영접도감의 색낭청이 되었다가 병으로 직무를 볼 수 없어서 체직되었다.
1721년(경종 1) 예빈시별제, 공조좌랑을 거쳐 덕산현감으로 나갔다.1724년 세자익위사 사어, 영조 즉위 후 사재감주부를 거쳐 당진현감으로 나갔다가 그해 12월 23일 사퇴했다.
4. 학생 독립운동가
李賢相
1924 ~1968
학생 독립운동가로. 임시정부 요인 이승호의 아들이다.
항일 단체 조직을 준비하다가 동료가 검거되면서 실패, 만주를 거쳐 북경으로 망명했다가 뒤쫓아온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조선으로 압송되었다. 대전형무소에서 투옥 중 해방을 맞이하여 석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