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조

 


'''순조 관련 틀'''
[ 펼치기 · 접기 ]








'''대한제국 황실 2대조'''
'''순조 숙황제 | 純祖 肅皇帝'''

'''조선 제23대 국왕'''
'''순조 | 純祖'''

[image]순조 추정 어진[1]
'''순조선각연덕현도경인순희문안무정헌경성효대왕
純祖宣恪淵德顯道景仁純禧文安武靖憲敬成孝大王'''

'''순조연덕현도경인순희체성응명흠광석경계천배극융원
돈휴의행소륜희화준렬대중지정홍훈철모건시태형창운홍기
고명박후강건수정계통수력건공유범문안무정영경성효숙황제
純祖淵德顯道景仁純禧體聖凝命欽光錫慶繼天配極隆元
敦休懿行昭倫熙化峻烈大中至正洪勳哲謨乾始泰亨昌運弘基
高明博厚剛健粹精啓統垂曆建功裕範文安武靖英敬成孝肅皇帝
'''

<colbgcolor=#bf1400><colcolor=#ffd400> '''묘호'''
순종(純宗)[2] → '''순조(純祖)'''
'''존호'''
'''조선'''
연덕현도경인순희
(淵德顯道景仁純禧)
'''대한제국'''
체성응명흠광석경계천배극융원돈휴의행소륜희화준렬대중지정홍훈철모건시태형창운홍기고명박후강건수정계통수력건공유범
(體聖凝命欽光錫慶繼天配極隆元敦休懿行昭倫熙化峻烈大中至正洪勳哲謨乾始泰亨昌運弘基高明博厚剛健粹精啓統垂曆建功裕範)
'''시호'''
'''조선'''
문안무정헌경성효대왕
(文安武靖憲敬成孝大王)
'''대한제국'''
문안무정영경성효숙황제
(文安武靖英敬成孝肅皇帝)
''''''
[3]
'''출생'''
1790년 7월 29일 (음력 6월 18일[4])
조선 한성부(한양) 창경궁 집복헌
'''즉위'''
1800년 8월 23일 (음력 7월 4일)
조선 한성부 창덕궁 인정문
'''사망'''
1834년 12월 13일 (음력 11월 13일)
(44년 4개월 15일 / 16,207일)

조선 한성부 한성 경희궁 회상전
'''능묘'''
인릉(仁陵)
'''재위'''
'''조선 왕세자'''
1800년 1월 10일 ~ 1800년 8월 23일
(음력 1800년 1월 1일 ~ 1800년 7월 4일)
'''조선 국왕'''
1800년 8월 23일 ~ 1834년 12월 13일
(음력 1800년 7월 4일 ~ 1834년 11월 13일)
(34년 3개월 21일 / 12,530일)

[ 펼치기 · 접기 ]
<colbgcolor=#bf1400><colcolor=#ffd400> '''본관'''
전주(全州)
''''''
공(玜)
''''''
공보(公寶)
''''''
순재(純齋)
'''전호'''
효성전(孝成殿)
'''부모'''
부왕 정조
모후 효의왕후 김씨
생모 수빈 박씨
'''부인'''
순원왕후 김씨

1. 개요
2. 생애
2.1. 갑작스러운 즉위
2.2. 무기력했던 친정 시기
2.3. 세자 대리청정과 그 후
3. 즉위 이후의 여파
3.1. 사후
3.1.1. 묘호와 시호
3.1.2. 묘호 개정
3.1.3. 능묘
5. 평가 - 골든타임을 놓아버린 무기력한 군주
6. 개인적인 면
7. 여담
8. 대중매체
9. 가계
9.1. 순조가 등장한 작품
9.1.1. 드라마
9.1.2. 영화
10. 관련 항목

[clearfix]

1. 개요


조선의 제23대 국왕이자 대한제국의 추존 황제. 묘호는 순조(純祖), 시호는 숙황제(肅皇帝), 휘는 공(玜), 자는 공보(公寶).
정조차남으로 어머니는 박준원의 딸인 정조의 마지막 간택 후궁현목유빈 박씨(수빈 박씨)이다. 고종 태황제 때 2대조인 양할아버지로서 대한제국의 추존 황제로 격상됐다.

2. 생애



2.1. 갑작스러운 즉위


1800년 정조가 갑자기 승하해 11살에 즉위하는 바람에 조선 역사상 2번째로 어린 나이에 즉위했다. 당대에는 가장 어린 나이다. 기록을 깬 사람은 순조의 손자인 헌종. 한마디로 순조는 어린 왕의 대명사인 단종보다도 어린 나이에 즉위했다. 또한 순조는 상왕(태종)이 있었던 세종을 제외한다면 가장 짧은 세자 시절을 보낸 임금이기도 한데 서장자였기 때문이다. 세자 책봉조차도 정조의 건강 악화에 의해 급작스럽게 이루어졌다. 1800년 2월 세자로 책봉되고 6월에 아버지인 정조가 죽자마자 왕위에 올랐으니 4달 동안만 세자 시절을 보낸 셈이다. 참고로 세종은 2달간 세자 지위에 있었고 아버지인 정조는 세손임에도 13년 동안 동궁 생활을 하였다.
당시 조선 왕실에서 가장 큰 어른이었던 영조의 계비이자 대왕대비 정순왕후 김씨[5]수렴청정을 했다. 정순왕후는 1805년 사망시까지 자신의 친정인 경주 김씨노론 벽파의 이익을 대변하는 역할을 뒷배로서 수행했고 신유박해천주교 박해 사건을 크게 일으키기도 하여 은언군과 은언군의 아내(상산군부인 송씨)까지 천주교를 통해 역모로 몰아서 죽이기도 한 사람이 바로 정순왕후 김씨다.[6] 이때 이미 몰락해 소수만 남아있는 남인은 나락으로 떨어졌고[7], 남아있던 시파도 타격을 입었다.
천주교에 대한 정순왕후의 태도와 오가작통법 시행은 순조실록에서 찾을 수 있다.

대왕 대비가 하교하기를,

"선왕(先王)께서는 매번 정학(正學)이 밝아지면 사학(邪學)은 저절로 종식될 것이라고 하셨다. 지금 듣건대, 이른바 사학이 옛날과 다름이 없어서 서울에서부터 기호(畿湖)에 이르기까지 날로 더욱 치성(熾盛)해지고 있다고 한다. 사람이 사람 구실을 하는 것은 인륜이 있기 때문이며, 나라가 나라 꼴이 되는 것은 교화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이른바 사학은 어버이도 없고 임금도 없어서 인륜을 무너뜨리고 교화에 배치되어 저절로 이적(夷狄)과 금수(禽獸)의 지경에 돌아가고 있는데, 저 어리석은 백성들이 점점 물들고 어그러져서 마치 어린 아기가 우물에 빠져들어가는 것 같으니, 이 어찌 측은하게 여겨 상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감사와 수령은 자세히 효유하여 사학을 하는 자들로 하여금 번연히 깨우쳐 마음을 돌이켜 개혁하게 하고, 사학을 하지 않는 자들로 하여금 두려워하며 징계하여 우리 선왕께서 위육(位育)하시는 풍성한 공렬을 저버리는 일이 없도록 하라. 이와 같이 엄금한 후에도 개전하지 않는 무리가 있으면, 마땅히 역률(逆律)로 종사(從事)할 것이다. 수령은 각기 그 지경 안에서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을 닦아 밝히고, 그 통내(統內)에서 만일 사학을 하는 무리가 있으면 통수(統首)가 관가에 고하여 징계하여 다스리되, 마땅히 의벌(劓罰)을 시행하여 진멸함으로써 유종(遺種)이 없도록 하라. 그리고 이 하교를 가지고 묘당(廟堂)에서는 거듭 밝혀서 경외(京外)에 지위(知委) 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보다 앞서 서양국(西洋國)에서는 이른바 야소(耶蘇)의 천주학(天主學)이 있었는데, 대개 천당(天堂)과 지옥(地獄)의 이야기로 현혹시켜, 부모를 존경하지 않고 윤리(倫理)를 업신여기며 강상(綱常)을 어지럽혔으니, 이교(異敎) 가운데 가장 윤기(倫紀)가 없는 것이었다. 그 책이 중국에서 우리 나라에 유전(流傳)되었는데, 더러 빠져들어 어그러지는 자가 있었으므로, 정조조에서 법으로 엄금하였었다. 그러나 아직도 법망에서 빠져 나간 여얼이 사람들을 불러 모아 강습하여 점차 서로 오염시켜서 포청(捕廳)에 붙잡히는 자들이 많이 있었으므로, 이러한 하교가 있었던 것이다.[출처]

해석을 하자면, 정순왕후는 쇠락하는 조선을 나름대로 지탱하기 위해 인륜을 모르는 천주교 신자를 개종하게 하고, 안 따르면 처벌하란 것이다. 오가작통법 관련해서도 질서를 다 잡기 위해서 다시 시행했다. 그래도 유화책도 펼쳐서 6,6000명의 공노비를 해방하고 서얼허통(庶孼許通)을 시행해서 기존 신분제도의 변화를 추진했다.
이후 순조의 장인이자 한때 정조의 충신이었던 노론의 온건 시파 김조순을 중심으로 한 안동 김씨(安東 金氏)가 이들을 몰아내고 60년 장기 집권의 서막을 연다. 이른바 세도정치의 시작이다. 이후 세도정치는 무너져가던 조선의 멸망을 가속화하는 촉매제 역할을 했다.
한편 아내 순원왕후는 아버지 정조가 직접 간택한 비로써[8], 1800년 2월 26일 비공식 세자빈이 되었다. 4월 29일 재간택되어 비공식 왕비가 되었지만, 정조가 혼례를 치르기 전 죽어서 혼례를 못 치렀다. 결국 이 문제의 끝은 계증조모 정순왕후가 선왕이 간택했다며 결국 순조 즉위 2년 뒤 정식으로 왕비가 되었다.

2.2. 무기력했던 친정 시기


순조의 치세에는 난세의 시작이었다. 1811년 평안도에서 홍경래의 난이 일어났으며 1832년에는 영국[9] 상선 암허스트호가 최초로 조선에 와 통상을 요구하기도 했다.[10] 물론 이전에도 다른 이양선이 왔지만 교역을 청한 것은 처음이었다.[11]
순조는 뒤에 즉위하는 헌종, 철종과는 달리 나이나 혈통으로나 압도적인 우위에 있었으므로[12] 순조 본인의 권한은 강한 편[13]이었고 정치적 판단 능력도 뛰어났다. 하지만 대왕대비 정순왕후 김씨가 죽음으로써 수렴청정이 끝난 후에도 재위 기간 내내 을 달고 살게 되었는데다가 홍경래의 난으로 엄청난 충격을 받으면서 지독할 정도의 무기력함을 보인다.
순조는 즉위 초까지만 해도 노론 벽파 숙청에 앞장서는 등 상당히 의욕적이었고 순조 11년(1811년)에 홍경래의 난이 터지기 전까진 열심히 정사를 보았다.[14]
홍경래의 난까지 터진 다음엔 김재찬, 남공철, 심상규, 이시수 등 노회한 신료들이 가득 차 있는 비변사에 국정의 대부분을 맡기면서 세도 가문들이 국정을 마음대로 운영할 수 있게 되었다. 그나마 김조순이 살아있던 시절엔 김재찬 등 안동 김씨의 입김이 닿는 대신들을 통한 간접적 막후 통치를 했으나 순조 32년 김조순 사후 김조순의 아들과 조카들이 권력을 잡으면서 안동 김씨가 아예 모든 것을 다 먹어버리는 우리가 아는 방식의 '''세도 정치'''가 된다.[15]
남인, 벽파 숙청은 홍경래의 난 이후 순조의 업무 거부가 겹치면서 조선 후기의 세도정치 참사로 이어졌다.[16]
숙종 ~ 영조로 이어지는 지속적인 왕권 강화와 한 당파의 일당전제화로 인한 당파 정치의 붕괴[17]는 왕에게 지나치게 많은 권한을 몰아주다 보니 왕이 조금이라도 관리를 안 하면 문제가 생기게 되는데, 영조와 정조는 이런 점에서는 상당히 신경을 써서 권세가 강한 신하들이 나오기는 했어도 왕이 신하들을 제어해 사고가 나는 것을 막아 왔지만, 순조가 관리에 손을 놓자 그 붕 뜬 통제가 세도 가문들에 넘어가면서 조선 정계는 가문간 암투와 비리가 난무하는 개 막장으로 변해가게 된다.

2.3. 세자 대리청정과 그 후


아들 효명세자가 매우 영특해 순조 나름대로 기대를 걸고 있었으며, 신하들 앞에서 스스로 무능한 임금임을 자처하며 세자에게 양위 선언을 여러번 하기도 하였다. 한 가지 재밌는 것은 대개 양위니 대리청정이니 소리가 나오면 온 나라가 뒤집혀서 전교를 거두어달라는 결사반대를 외치곤 하지만, 효명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명하자 온 신하들의 종사(宗嗣)의 무궁무진한 복이라고 침이 마르게 칭찬을 했다는 것이다. 아마도 영조 시절 순조의 아버지 정조의 대리청정를 극렬히 반대하다 죽은 홍인한을 크게 의식해서인 듯 하기도 하고, 대신들이 순조가 진짜로 통치에 별 의지가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인 듯 하다. 여러가지로 봐서 순조는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에 비하면 통치욕이 그리 있던 사람은 아니었고, 정말로 적당히 은퇴하고 좀 쉬고 싶었던 모양이다.
효명세자는 똑부러진 일 처리로 무너져 가던 조정의 기강을 바로 잡으며 신하들과 순조의 기대를 한몸에 샀지만 불과 2년 좀 넘어서 '''병에 걸려 일찍 죽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순조의 두 딸도 사망했는데, 이로 인한 충격 탓인지 다리에 난 종기#s-1가 악화되어 순조도 얼마 후에 사망했다. 이 때문에 왕위는 순조의 장손이자 효명세자의 아들인 8살 헌종이 이었다. 사실 이전에도 병으로 건강은 좋지 않은 상태였는데, 한의학자들은 순조의 증세가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홧병이라고 본다. 이때 재야에 있던 정약용을 불러다가 치료를 하려 했으나 정약용이 미처 오기도 전에 사망했다. 효명세자가 위독할 때에도 너무 늦어서 정약용이 오기 전에 사망한 적이 있었다.
순조 말년엔 안동 김씨에 거슬리는 벽파들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이 시작되는데 대표적인 것이 추사 김정희아버지인 김노경 등이다. 이에 순조는 '''"우리가 백성#s-1들 먹여살리려고 정치하는데 오늘 나는 어찌 죽이거나 탄핵하는 말 말곤 한마디도 들은 게 없냐?"'''라고 탄식하기도 했고 막판에 왕권을 휘둘러 김노경 등을 석방하고 안동 김씨 반대파들을 대거 풀어주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순조가 안동 김씨를 제어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순조 32년 이후의 실록은 김조순의 장남 김홍근이 군국의 사무를 맡았다는 말이 나오는 판국이었으며, 다음 해 음력 11월 28일에는 창덕궁 대조전을 포함한 궁 전체가 인조반정 이래 최초로 깡그리 불타버렸다. 1803년 이미 인정전이 소실되어 다음 해 복구한 상황이었다. 1820년에 그려진 동궐도는 이 불타기 전의 창덕궁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순조 개인은 국정을 위한 연감인 <만기요람>(萬記曜覽)을 편찬하는 등 그다지 무능한 왕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그러나 부지런함과 물려받은 재능에도 불구, 무엇보다 세도 가문에 적극적인 견제를 할 의지가 없었다.
말년에는 얼굴에 웃음이 사라졌다고 하며, 원래 있던 지병들이 자식들의 연이은 사망으로 깊어진 뒤 소화불능 등의 여러 질병을 앓다가 1834년 승하했다.

3. 즉위 이후의 여파


순조조에는 안동 김씨로 대표되는[18] 척신들이나 단일 세력이 등장했다. 순조가 선왕들과 달리 신하들을 단속하는데 신경쓰지 않았던 점도 크다. 영조 초기에는 과열된 붕당 (노론VS소론/남인)으로 조정이 거의 피바다가 되었고 영조 후기에는 척신 정치로 귀결되었지만 영조는 초기에는 완론 탕평책, 후기에는 압도적인 왕권을 바탕으로 제어했다. 정조 시절에는 준론 탕평책으로 남인, 시파벽파의 피비린내 나는 싸움이 이어졌지만 정조가 채제공김종수 등을 동시에 우대하면서 지속적 관리를 하여 조정의 균형이 무너지지는 않았다.
또 그동안 축적되었던 '''삼정의 문란'''과 같은 제도적 모순이 한꺼번에 폭발하여 곡산 민란, 홍경래의 난, 쌀 폭동을 비롯한 농민 봉기가 자주 일어나게 된다. 물론 제대로 폭발한 것은 철종 말이었지만. 여러모로 순조 시기는 조선의 쇠퇴가 명확해지는 시기였다고 볼 수 있다.
참고로 쌀 폭동은 순조 말년에 한양의 쌀 상인들이 쌀을 가져다놓고도 없다면서 팔지 않으며 쌀값으로 농간을 부리다가 분노한 한양 주민들이 쌀 폭동을 일으켜 싸전(쌀가게)들을 약탈한 사건이다. 이에 순조는 분위기가 하도 흉흉해서 폭동 주모자 7인과 함께폭동의 원인제공을 한 여각 상인 2명도 처형하여 민심을 달래야 했다.[19]
국사#s-1 교과서에서는 세도 정치기의 3왕(헌종, 철종)과 묶여 굉장히 안습한 취급을 받지만, 헌종과 철종의 재위 기간을 합쳐도 순조보다 훨씬 짧다. 헌종 15년, 철종 14년인데 반해 순조는 장장 34년(1800~1834)을 재위했다. 자세한 사항은 세도정치 문서 참조.

3.1. 사후



3.1.1. 묘호와 시호


  • 조선왕조
    • 묘호: 순종(純宗) → 순조(純祖)
    • 시호: 연덕현도경인순희문안무정헌경성효대왕(淵德顯道景仁純禧文安武靖憲敬成孝大王)
  • 대한제국
    • 시호:연덕현도경인순희체성응명흠광석경계천배극융원돈휴의행소륜희화준렬대중지정홍훈철모건시태형창운홍기고명박후강건수정계통수력건공유범문안무정영경성효숙황제(淵德顯道景仁純禧體聖凝命欽光錫慶繼天配極隆元敦休懿行昭倫熙化峻烈大中至正洪勳哲謨乾始泰亨昌運弘基高明博厚剛健粹精啓統垂曆建功裕範文安武靖英敬成孝肅皇帝)
처음 올린 묘호는 순종(純宗), 시호는 성효대왕(成孝大王). 이후 철종 때 묘호가 순조(純祖)로 개정되었고, 대한제국 고종 때 양할아버지 및 2대조로서 황제로 격상(추존)되면서 시호가 개정되어 최종적으로 '순조 숙황제'가 되었다.

3.1.2. 묘호 개정


원래 묘호는 '순종'이었으나 홍경래의 난을 진압하고 서학(천주교(가톨릭))을 탄압해 이단을 물리쳤다는 이유로 철종 8년(1857)에 순조로 묘호가 격상되었다. 영조와 정조의 묘호도 원래는 영종·정종으로, 영조는 고종 때 여러 공이 많다는 이유로, 정조고종대한제국을 수립・선포하면서 자신의 3대조라는 이유로 묘호를 황제로 추존해 바꾸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매우 특이한 일이다. 이는 철종이 헌종의 아저씨뻘이지만 순조의 양자가 되어 왕통(王統)을 이었으므로, 양아버지를 높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고종 역시 순조의 아들인 효명세자(文祖翼皇帝)의 양아들로 들어갔기에, 순조는 여러모로 인조, 효종, 현종, 숙종 - 영조, 정조의 유일한 직계(직통) 계승자로서 대접받을 수밖에 없었다.



3.1.3. 능묘


순조의 능은 서울특별시 서초구 내곡동에 있는 인릉(仁陵)으로 근처에 16대조 할아버지인 태종원경왕후의 능인 헌릉이 있어서 헌인릉(獻仁陵)이라고 불린다. 헌인릉 묘역을 나오면 주차장을 사이에 두고 왼편으로 어떤 건물이 보이는데 그 건물로 들어가는 길에 표지도 없고 안내 표석 같은 것도 없다. 그 건물이 다름 아닌 '''국정원(NIS)'''. 처음에 순조는 죽은 후 파주 지역에 묻혔지만 철종 때에 지금의 위치로 옮겨졌고, 천장 이듬해 순원 왕후가 죽자 합장되어 현재 인릉을 가보면 합장릉의 형식을 띄고 있다.
참고로 장소가 장소인지라 순조의 인릉(仁陵)에서 함부로 사진을 촬영하면 제지받는다. 능침이나 정자각 등은 찍어도 상관없는데 ''''국정원'이 있는 방향으로 카메라를 함부로 돌려서 찍지 말 것.''' 까딱하다간 국정원 직원들에게 트집잡혀 코렁탕찰지게 먹을 수 있다. 그런데 같은 능역으로 묶은 태종의 헌릉에서는 인릉처럼 제지를 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헌릉은 자유롭게 촬영해도 되고, 인릉에서만 보안상에 유념, 주의해서 사진을 촬영하면 된다.
헌릉과 함께 능침 앞까지 올라갈 수 있는 계단이 있어서 능을 가까이서 감상할 수 있기는 한데, 위치가 위치라서 그런지 헌릉처럼 코앞에서 감상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다. 약간 멀리 떨어져서 능을 볼 수 있는 수준.

4. 어진


[image]
[image]
[image]
부산 용두산 대화재 당시 반소된 순조의 어진들
일제강점기 당시 순조의 어진은 원유관본 2점, 익선관본 대본, 소본 각각 1점으로 총 4점이 전해져오고 있었지만 1954년 12월에 발생한 대화재로 인해 큰 피해를 입었다. 순조 어진의 경우도 다른 어진들과 동일하게 돌돌 말려진 상태에서 화마에 휩싸였으며 불을 끄려고 물을 끼얹은 탓에 위 어진들을 자세히 보면 표제의 붉은 부분이나 색소 등이 다른 곳으로 번진 걸 확인할 수 있다. 모든 어진이 '''얼굴'''을 포함해서 반 이상이 타버리는 바람이 완벽한 복원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이 불운은 먼저 저세상으로 간 아들에게까지 이어지고 말았다.
왼쪽 어진은 이후에 모사된 고종 황제의 어진과 유사하게 원유관에 강사포를 착용한 형태로 1830년 당시 41세였던 순조를 모사한 것이다. 표제 바로 앞에는 고종에 의해 황제로 추존된 직후 부가된 붉은 비단이 보인다. 가운데 어진은 경운궁 내 선원전의 화재의 영향으로 1900년에 왼쪽 어진을 그대로 모사한 이모본이다. 전체적으로 큰 차이점은 없지만 강사포의 색상이 더 붉게 표현되었고 음영도 강하게 처리되어 있다. 얼굴 부분이 완전히 없어진 왼쪽 어진과는 달리 이 어진은 그나마 구레나룻 부분만큼은 남아있다.
오른쪽 어진은 훼손 상태가 '''훨씬 더 심각해''' 화문석의 일부만 남아있으며 표제도 중간중간이 타버려서 일부만 판독할 수 있다. 그러나 남아있는 표제부분과 1935년에 작성된 관련 서류를 검토한 결과 이 어진은 순조의 익선관본 '''대본'''이라는 것을 최종 확정할 수 있었다.
가운데 어진을 제외한 나머지 어진들은 훼손 상태가 심각한 탓에 보존처리만 마치고 그동안 국립고궁박물관의 수장고에 보관되어왔다가 2019년 하반기에야 부분적으로 공개되었다.
[image]
순조 추정 어진
위 어진은 반신상의 어진으로 순조의 익선관본 소본으로 '''추정'''되는 어진이다. 신원미상의 어진으로 남은 까닭은 당연히 대화재의 영향으로 표제가 타버린 탓에(...) (다만 순조의 어진일 가능성은 크다.) 만약 이 어진이 순조의 어진이라면 아직 수염이 많지 않은 얼굴로 미루어 보아 채 스무 살도 안 된 1808년경에 모사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만약 위 어진이 순조의 어진으로 최종판정된다면 순조의 어진은 다른 조선왕들과는 달리 유일하게 결본(缺本)이 없는 어진으로 평가받을 수 있을 것이다. 상기했듯 대화재 직전까지 순조의 어진 수는 총 4본이었으니 말이다.
[image]
[image]
선원보감에 실린 순조 초상화
열성어진에 실린 순조 초상화
선원보감과 열성어진에서 실린 초상화가 있어 순조의 용모를 대략 추측을 할 수 있다. 해당 초상화에서도 불타버린 어진에서 확인이 가능한 구레나룻과 흡사한 모양을 보인다.
실록에서 순조의 용모를 묘사한 대목을 보자.
왕은 자표(姿表)가 특이하여 넓은 이마와 높은 콧마루에 네모난 입과 겹턱을 가졌는데 용안(龍顔)은 불그레하고 체상(體相)은 풍만하고도 장대(莊大)하였다. 그리하여 바라보면 엄연(儼然)한 위엄이 있어 두려움을 느끼게 하였는데, 앞으로 나아가면 온화하게 덕이 있어 친근함을 느끼게 하였다.
- 순조실록, 순조 대왕 묘지문(誌文)
기록을 토대로 볼 때 순조는 일반적인 미남상은 아니지만 나이 들수록 멋들어지고 푸근해지는 그런 외모인 것 같다. 또한 기록을 보면 정조와 닮은 얼굴일 가능성이 크다.[20]

5. 평가 - 골든타임을 놓아버린 무기력한 군주


순조의 통치는 두드러지는 붕괴가 아닌 장장 34년간 진행된 평화로운, 그러나 서서히 조선의 몰락이라는 늪으로 빠져드는 침체기였다.
정조의 무력한 어린 아들 이미지와 병약했다는 이유로 존재감이 매우 옅지만, 연구가 계속 되면서 박약한 의지로 조선의 멸망을 가속화한 암군(暗君)으로 평가된다. 즉 크게 보자면 이후 '''일제강점기'''에 대한 책임까지도 가지고 있는 암군. 치세 중반부터 정무에 손을 놨다는 점에서 만력제와 비슷하다는 평가도 있다. 물론 만력제는 차원이 다른 파업 황제라...

순조는 중흥군주 뒤의 수성군주의 입장에 있었단 점에서도 그의 무기력함이 가지는 부정적 의미는 커진다. 사실 그의 시대는 조선을 살릴 마지막 시대였다. 선대로부터 (심지어 증조할머니에게도) 물려받은 강력한 왕권, 우수한 두뇌와 늠름한 체구, 하지만 청년기를 넘기면서부터 급격히 쇠약해졌으며 옥사로 피를 보기를 싫어했다.
순조가 권력투쟁(암투)을 싫어했다는 점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었다. 권력투쟁을 지양한 군주로는 세종대왕(!)이라는 선례도 있다. 실제로 세종도 옥사를 벌이거나 기존의 옥사를 새로 뒤집지 않았다.[21] 두 왕 모두 신뢰받는 대신들을 (비리가 있어도) 중용하였고, 말년에는 똑똑한 세자와 대신들[22]에게 나라일을 맡겼다. 그러나 그 똑똑한 세자(문종/효명세자)는 요절하면서 왕실은 어린 계승자(단종/헌종)를 맞이하게 되었고, 이들 역시 단명하는 바람에 방계의 인물이 즉위하게 되고 나라는 훈신, 척신에 의해 기강이 급속도로 무너졌다.
정조와 순조가 태종과 세종의 사례와 결정적으로 달랐던 점은 단순히 창업 초기와 중흥기의 차이가 아니었다. '''바로 외척에 안일했던 것이었다.''' 영조 시대, 아니 어쩌면 선조 말년 ~ 효종 때부터 느슨해진 외척에 대한 경계는 기어이 세도정치의 파탄으로 점철되었던 것이다. 순조의 의지 부족도 한 몫하겠지만. 그래서 인터넷상에서 순조와 세종의 공통점이 '하위호환'이란 표현으로 돌아 다닌 바 있으나, 세종대왕에게 비기기엔 순조는 하위호환이란 말은 매우 부족하다. 실패한 리메이크라면 모를까.
세종이 임질로 사망한 것에 결부해, 순조가 매독으로 죽었다는 글들이 사실인 것마냥 돌아다니는데 매독 썰은 그냥 카더라 수준의 이야기지 정확한 근거가 있는 글이 절대 아니다. 아예 이런 식으로 인터넷 카더라 글들을 복붙한 수준 낮은 기사까지 버젓이 실리지만, 위키러들은 이런데 현혹되지 말자.
전술하였듯이 이 시기에는 이양선들도 들어와서 통상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당시엔 단순 통상 요구일 뿐 무력 시위도 없었기 때문에, 조선에게도 개화하기 가장 좋은 골든타임이기도 하였다는 평가도 있다.[23] 허나 순조와 고관대작들은 이 기회를 기회라고 여기지도 못했으며, 이 점도 순조에 대한 부정적 평가를 한 수 보태게 된다.

6. 개인적인 면


[image]
순조임금의 어릴적 글씨
  • 담배에 대해서는 아버지 정조와는 다르게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던 왕으로 우리나라 애들은 젖만 떼면 담배를 찾아서 문다고 얘기했다고 한다. 정확히는 조선왕조실록 1808년 11월 19일자에도 담배에 대한 기사가 나온다. 순조는 "담배가 소화를 돕는다, 담 치료에 좋다 하는데 확실히 모르겠다. 다만 담배를 피우는 것이 고질병이 되어 남녀노소 누구나 즐기고, 젖먹이를 면한 어린 아이들까지 담배를 배워 황죽(荒竹)으로 피운다."며 개탄을 했다. 아버지인 정조와는 많이 다른 면모. 또한 의외로 담배의 중독성에 대해서는 아주 정확하게 꼬집고 있다.
  • 의외로 평등적인 모습도 보인다. (이건 국사교과서에도 나오는 내용이다) "아무리 날 때부터 정해진 신분이 있다고들 하나, 과인이 보기엔 다 똑같은 백성들이다"라는[24] 논리로 1801년 나라에 속한 6만 5천명의 공노비를 해방시키라는 어명을 내렸는데, 노비 신분이 없어진 갑오개혁(1894) 때와 비교하면 무려 1세기 이른 정책이다. 근데 이건 정순왕후의 수렴 시기에 내려진 것이니 사실상 정순왕후의 정책이라 보는 것이 타당하다. 심지어 정순왕후 김씨를 반동으로 폄하하는 이덕일 계열에서도 "정조의 개혁정책을 전면 부정하는 반동정치를 했으니 민심을 무마하려면 이 정도는 했어야 했을 것."이라고 인정한다. [25]
  • 순조의 생모 수빈 박씨(현목유빈 박씨)는 아들의 즉위를 살아서 본 유일한 조선 후궁이었다. 순조가 즉위하고도 20년도 넘게 지켜봤다. 순조는 어머니를 왕비로 추숭하진 못했지만, 어머니의 빈전인 사당을 높이고 상복을 오래 입는 등 최대한의 예의를 깍듯히 지켰다. 순조가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시행한 몇 안 되는 일 중 하나였다(...).[26]
  • 조선의 마지막 공주덕온공주(德溫公主, 1822년 ~ 1844년, 순조의 3녀)가 순조의 딸이다. 그 뒤로는 왕의 적녀(嫡女)가 태어나지 않거나, 태어나더라도 공주로 봉해지기 전에 죽었다. 서녀까지 포함하더라도 이 뒤에 옹주로 봉해진 이는 철종의 유일한 자녀였던 영혜옹주와 고종의 고명딸 덕혜옹주 뿐이다.
  • 후손들이 죄다 요절하는 비극을 겪은 왕이기도 하다. 상기한 효명세자(22세)를 비롯해서 명온공주(23세), 복온공주(15세), 덕온공주(23세), 영온옹주(13세) 등이 모조리 요절한 데다가 손자였던 헌종까지 23세로 요절했다[27]. 순조의 자녀 가운데 순조보다 늦게 세상을 떠난 이는 덕온공주뿐이었는데, 그나마도 23세로 임신 중에 급체로 요절했다.

7. 여담


  • 조선왕조실록에서 16대조 할아버지 이래 간간이 언급됐던 거북선이 마지막으로 언급된 것이 이 때이다.(순조 11권, 8년(1808년 무진 / 청 가경(嘉慶) 13년) 1월 10일(정미) 2번째 기사) 고종 실록에서 거북선이 다시 언급되긴 하지만, 고종 및 순종 실록은 일본에 의한 조작된 기록과 허구가 많기 때문에 '실록'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 이 왕의 재위 기간이던 1832년(순조 32년)에 통상을 요구한 이양선에 대한 기록이 최초로 등장한다. 영국 상선 암허스트 호에 관한 기록이 바로 그것. 당시 영국의 왕은 윌리엄 4세였다.
  • 상당히 인생이 안습한 왕이다. 할아버지증조할아버지에의해 뒤주에 갇혀 사망했고 아버지는 먼치킨인 탓에 늘 비교되었고, 재위 중 홍경래의 난이 터지거나 정조 말기부터 내재되어 있던 국가적인 문제들이 계속 수면 위로 올라오는 등 재위 기간을 안습으로 보냈다. 또 자식들을 자신보다 먼저 떠나보내는 등 가족사에서도 안습하기 그지없다.[28] 총명하고 혁신적이던 아들도 젊은 나이에 사망했고 손자인 헌종도 23세에 요절했는데, 그 이유가 이 양반이 벌여 놓은 일들을 수습하거나 이 사람이 남긴 세도 가문을 조지던 와중에 생긴 과로 때문이었다.
  • 어렸을 적 일화 중에 냉면과 관련한 사연이 있다. 어려서 즉위한 순조는 종종 야밤에 달구경을 하곤 했는데 어느날에는 갑자기 냉면을 먹고자 했다. 한밤중이라 수라간에 연락을 넣기 보다는 그 당시 이미 성행하고 있는 저자거리의 냉면 가게에서 냉면을 사오도록 시켰다. 이에 시위 무관들이 궁 밖으로 나가 냉면을 사왔는데 이때 순조의 배려로 왕은 물론 모시고 있는 내관, 궁녀, 무관들의 몫까지 모두 사왔다. 그런데 무관 중 한 명이 냉면에 곁들여 먹을 목적으로 돼지고기 수육을 따로 사서 복귀했는데 이를 본 순조는 '저 자는 따로 먹을 것이 있으니 주지 마라.'라고 명하며 냉면을 먹지 못하게 했다. 아무래도 혼자만 더 맛있게 먹을 궁리를 한 무관이 어린 왕의 눈에는 곱게 보이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 일화는 헌종대에서 고종대까지 관직생활을 했던 이유원(李裕元)이 쓴 임하필기(林下筆記)에 나오는 내용으로 이미 이때부터 냉면과 수육을 왕실은 물론 일반 대중들 사이에서 널리 퍼져 밤에도 야식으로 사먹을 수 있을 정도였고 그 자리에서 먹지 않고 테이크 아웃으로 포장해서 가져 가는것도 가능했음을 알려주는 꽤 의미가 있는 사례다. 출처 1. 출처 2.
  • 유독 순조 때 궁궐 화재가 많이 일어났다. 1803년(순조 3년)에는 창덕궁 인정전이 불에 타서 전소되었고, 1829년(순조 29년)에는 경희궁에서 화재가 일어나 융복전, 회상전, 집경당, 사현각 등 상당수의 전각이 불에 타버렸다. 바로 이듬해인 1830년(순조 30년)에는 창경궁환경전에서 불이 나 통명전, 함인정, 경춘전 등 400여 칸의 전각이 전소되었다. 그리고 대미를 장식(?)하듯 1833년(순조 33년)에는 또다시 창덕궁에서 불이나면서 희정당, 대조전, 징광루, 옥합당, 양심합 등의 370여 칸이 전소되었다. 경복궁은 폐허만 남아있고 덕수궁은 아직 임금의 궁궐로서 사용되지 않았다는 점을 생각하면 궁궐 화재로 그랜드 슬램을 달성한 셈.

8. 대중매체


  •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 꽤 부정적인 평을 받는 왕이기도 한데, 가장 큰 문제로 정치적 무관심이 심했다는 점을 깐다. 민생에 관심을 가진 점에서는 긍정적으로 보긴 하나 정작 그것을 실행할 신하들을 관리하는 데에는 소홀했다며 부지런했지만 중요한 것을 놓쳐버린 처신이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순조의 손자인 헌종도 세도 정치로 왕권이 크게 위축된 상황에서 20세가 되자 한때 안동 김씨에게 위협감을 줄 정도로 과감한 공세를 취했던 걸 보면, 순조가 세도 정치에 왕권이 위축돼서 못했다기보다는 그냥 하기 싫었다는 느낌을 준다. 순조의 이러한 태도가 되려 안동 김씨의 세력이 더 확장되었고, 세도 정치 기간을 늘린 꼴이 되었다는 지적이 있다. 결론적으로 본인의 무기력함과 더불어 신하들 관리도 제대로 못한 암군에 가깝다.
  • 박시백 화백은 아버지 정조와 마찬가지로 열성어진의 초상화와 실록의 기록을 바탕으로 순조의 얼굴을 묘사했는데, 초상화보다 비교적 젊고, 살집이 더 오른 후덕한 이미지로 그렸다. 그리고 나이가 먹을수록 눈 밑의 다크 서클이 진해져서 기운이 빠져 보인다. 나이가 들면서 병환에 시달리고 정치에 대한 의욕을 잃어버린 무기력한 모습을 표현하려는 듯.

9. 가계


  • 증조할아버지: 영조 이금
  • 증조할머니: 영빈 이씨
  • 할아버지: 장조 의황제(사도세자) 이선
  • 할머니: 헌경의황후 홍씨
  • 왕후: 순원숙황후 안동 김씨(1789년 ~ 1857년)
    • 장자(적장자): 문조 익황제(효명세자)(1809년 ~ 1830년) - 조졸
    • 장녀(적장녀): 명온공주(明溫公主, 1810년 ~ 1832년). 안동 김씨 동녕위(東寧尉) 김현근(金賢根)에게 하가(下嫁).
    • 3녀(적차녀): 복온공주(福溫公主, 1818년 ~ 1832년). 안동 김씨 창녕위(昌寧尉) 김병주(金炳疇)에게 하가.
    • 차자(적차자): 왕자(1820년 2월 23일 ~ 1820년 5월 26일) - 조졸
    • 4녀(적3녀): 덕온공주(1822년 ~ 1844년). 해평 윤씨 남녕위(南寧尉) 윤의선(尹宜善)에게 하가.
  • 후궁: 숙의 밀양 박씨
    • 차녀(서장녀): 영온옹주(永溫翁主, 1817년 ~ 1829년). 순조가 후궁에게서 낳은 유일한 자녀. 태어나면서부터 병약했고 말도 잘 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복오빠인 효명세자는 옹주를 가엾이 여겨 잘 돌봐주었으나, 옹주는 겨우 12살의 나이에 요절하고 말았다. 효명세자는 이 이복 여동생의 죽음을 무척 슬퍼했다고 한다.
자식복이 없는 수준을 넘어서 처참하다. 순조가 1834년에 죽었는데, 아들은 물론이고 딸까지 '''5명이나 순조 생전에 죽었다'''. 심지어 막내 덕온공주도 순조 생전에 죽지 않았을 뿐,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 자식 한명만 죽어도 부모된 입장으로서 피가 말리는 기분인데, 순조 입장에서는 그걸 5번이나 겪어야 했으니 비통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1832년에 애지중지하던 두 딸마저 요절해버리자 '왕의 얼굴에 미소가 사라졌다'는 기록이 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순조마저도 세상을 등진 데에는 자식들의 연속된 요절이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9.1. 순조가 등장한 작품



9.1.1. 드라마



9.1.2. 영화



10. 관련 항목


[1] 6.25 전쟁 이후 대화재에서 반소되어 표제가 타버려 신원 미상의 어진이지만 순조일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자세히 보면 입술과 콧수염이 살짝 보인다[2] 철종 8년 '조'로 격상되기 전의 묘호.[3] 대한제국 설립과 황제 추존과 동시에 폐지[4] 친할머니 혜경궁 홍씨와 생일(일자)이 똑같은데, 당시 실록을 보면 이런 경우가 조선 왕조에서 유일했던 것 같다. 1791년 6월 18일에는 혜경궁의 생일과 순조의 첫 돌을 맞아 잔치도 크게 열고 백성들에게까지 떡을 돌렸다고 한다.[5] 순조에게는 증조할머니인 셈.[6] 주문모, 이가환, 이승훈, 정약종을 처형했고, 이미 죽은 체제공과 남인의 거물 중 한 명인 정약용을 삭탈관직했다.[7] 남인은 숙종의 환국 후 서서히 몰락해 소수만 중앙 정계에 남아있고, 지방에 많이 있었다. 세도정치로 붕당 정치가 무색해진 흥선대원군 때가 돼서야 등용.[출처] 순조실록 2권, 1년 10일 정해 첫번째 기사[8] 어린 세자를 걱정하던 정조는 안동 김씨 수장 김조순의 딸을 간택하기로 하는데, 장녀인 순원왕후가 뽑힌 것.[9] 이때 이들은 자신들을 '영길리국'(英吉里國)이라 칭했다. 잉글랜드한자로 음차한 것.[10] 하지만 이때 조선은 청나라의 속국이라는 핑계로 교역을 거부하고 그들이 요구한 물자와 식량을 제공하고 빨리 내보내는데 급급했다.[11] 암허스트호의 선원들 중 1명이 한자를 잘 알아 글을 써서 대화할 수 있었지만 그 이전의 이양선에는 한자를 아는 사람이 없어 해당 지역 수령들은 이들에게 손짓과 발짓으로 떠나라고 암묵적으로 요구하였고 이양선들 역시 교역 요구가 목적이 아닌 해양 탐사를 목적으로 했기 때문에 별다른 마찰이나 충돌없이 빨리 철수하고 떠났다.[12] 헌종과 비교해보면 헌종이 혈통은 더 나았을지 모르나 나이는 헌종보다 많았고 혈통으로는 철종보다 훨씬 앞섰다.[13] 자기 가족들 및 종친들과 관련된 문제에 있어서는 나름대로 목소리를 크게 냈고 관철시킨 것도 많다.[14] 다만 벽파 숙청 이후 열심히 정사를 본 기간에도 국정 장악엔 별 관심이 없어 조정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거의 손을 놓고 있었다는 평가조차 있다.[15] 안동 김씨가 본격적으로 권력욕을 드러내는 것은 헌종 조부터다.[16] 물론 만력제처럼 일체 국정을 거부한 것은 아니었다. 자신의 몸이 병약하자 세자에게 사실상 전권을 대리청정으로 맡기고, 세자가 죽은 후에는 다시 정사에 나섰다.[17] 신하들에게 꼼짝 못하는 임금들로 묘사되는 사극과는 달리 실제로는 조선 후기 왕들은 후견 세력이 미미했던 철종을 제외하면 지속적인 당파 싸움을 이용한 환국(정당교체)을 통해 왕권이 지속적으로 강해졌고, 영조 시절에는 아예 서슬 퍼런 태종 시절에도 왕에게 대들던 근성을 보이던 사관들이 임금에게 벌벌 기는 상황까지 연출된다.[18] 말은 '대표되는'이라고 썼으나, 사실 거의 모두 안동 김씨였다.[19] 원래는 주모자 7인만 죽였는데 형조가 들끓어오르던 민심을 파악하고 "쟤네들이 주모자도 죽었으니 원인을 발생시킨 놈들도 죽여야 한다고 난리랍니다!"라고 아뢰고 남공철도 "나라 사람들이 다 죽여야 한다고 하면 법조문에 없더라도 죽여야 합니다."라고 해서 강상 상인 1명과 시전 상인 1명을 본보기로 공개 처형했다.[20] 실제로 정조의 외모를 묘사한 기록에는 높은 코와 네모난 입에 겹진 턱을 가졌다고 한다.[21] 세종은 자기 때문에 숙청당한 장인 심온의 복권을 끝끝내 거부했으며, 순조는 벽파 경주 김씨들을 석방하긴 했으나 옥사를 뒤집어 새로운 옥사를 낳을 수 있는 김일주의 상소 등을 물리쳤다.[22] 조선 조 최고의 정승인 황희, 맹사성보다는 못하지만 김조순만 해도 스팩이나 평판으로서는 황희에 밀리지는 않았다. 처신이란 측면에서는 황희보다 나은 점도 있었다.[23] 이는 최근에 등장한 평가가 아니라 이동원 전 외교부 장관 등도 일찌감치 제기했던 주장이다. 이동원 장관의 경우 회고록에서 로드 암허스트호를 직접적으로 거론했다.[24]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자신이 보기에는 다 똑같다는 것이다. 이는 자신 아래에 모든 존재는 그냥 백성이라는 전형적인 전제군주제 시각이다. 다르게 말하면 그 만큼 순조의 영향력이 막강했음을 시사한다.[25] 아마도 얘기하고 싶던 것은 정조가 노비제에 부정적이었고 이를 공노비 혁파라는 방식으로 계승하는 척을 했다는 식인 것으로 보인다. 사노비를 혁파하자니 사대부들을 비롯한 노비를 가진 자들이 반대할테니 꼼수로 공노비도 노비니까 공노비를 혁파하자는 식으로 어차피 공노비는 국가소유이니 그 국가를 이끌고 있는 자신이 결정하면 얼마든지 행할 수 있는 문제다.[26] 심지어 반대하는 신하들을 여러가지 이유를 대며 줄줄이 유배 보내기도 했다.[27] 순조는 큰딸의 죽음에 직접 명온공주의 집에 행차하였다.[28] 이를 두고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선 이어진 자식들의 죽음을 거론하면서 '왕의 얼굴에는 웃음이 사라졌다'고 평했다.


분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