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통신사

 

朝鮮通信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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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상세
3. 영향
4. 규모
5. 목적 및 활동
6. 역대 조선 통신사
7. 민화와 논란
8. 대중매체에서
9. 관련 단체
10. 관련 문서


1. 개요


조선 후기에 조선에서 일본으로 보낸 외교 사절단.
당시에는 '통신'에 믿음으로 통한다는 뜻은 없었으며 '국왕의 뜻을 전하는 사절단'이라는 뜻이다.
보통은 1607년 이후 조선이 에도 막부에 파견한 사절만 가리키나 연구자에 따라서는 조선 전기에 파견된 사절도 포함시키기도 하며, 실제로 실록을 찾아보면 태종대부터 '통신사' 가 파견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일본에서 조선에 파견한 '일본국왕사(日本国王使)'[1]의 일본과 맞추기 위해 '조선통신사(朝鮮通信使)'라고 부르고 있을 뿐 정확한 명칭은 '通信使(통신사)'로, 조선에서 '조선 통신사' 라는 호칭을 쓴 적은 없다.[2]

2. 상세


임진왜란 이전 무로마치 막부 시절에는 딱히 규칙을 정해놓지 않고 몇 번 오갔고 오닌의 난 이후로 일본 전역이 전란에 빠지며 중앙정부가 지방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기 때문에 오우치 등 지방 다이묘가 따로 조선에 공물을 바치고 교류하기도 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을 통일해 전국시대를 끝내고,이후 임진왜란을 일으킨 직후에는 당연히 일본과 외교가 단절됐다.
그러다 전쟁이 끝난 지 채 10년밖에 안 된 1607년 그동안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자신의 정권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와는 상관없다는 언급을 하며 먼저 국교 재개를 수차례 요구한 끝에 조선 조정이 이를 받아들여 국교를 재개한다. 이후 포로 교환 및 정보 수집 목적으로 3회에 걸쳐 사명당을 비롯한 '회답겸쇄환사(回答兼刷還使)'라는 사절을 파견한다. 조선에선 원수였던 일본과 화해하는 게 달갑지는 않더라도 관계를 정상화하지 않으면 언젠가 다시 문제가 생길지 모른다는 생각도 있었고, 또 후금(후일의 청나라)이 날이 갈수록 강성해지니 후방에 있는 일본과 좋게 지낼 겸 임진왜란의 전범인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세력을 멸망시킨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어떤 사람인지는 살펴볼 필요가 있었다. 도쿠가와 입장에선 새로 집권하긴 했지만 1615년 오사카 전투 이전까지는 도요토미 파벌을 완전히 제압하지는 못한 상태라서 국제적으로 인정받아 명분을 쌓을 필요가 있었던데다가 조선을 공격할 생각도 없었으므로 친밀한 관계를 맺는 게 이득이었다.
그 후 1811년까지 일본의 요청을 받아들여 회답겸쇄환사가 3번, 통신사가 9번 파견되었다. 처음에는 쇼군의 아들이 태어난 것을 축하한다거나 태평성대가 오래 유지되는 것을 축하한다는 등 갖가지 명목으로 파견되었지만 회답겸쇄환사까지 포함하여 6회째인 1655년부터 새로운 쇼군의 취임을 축하한다는 명목으로 보내졌는데, 쇼군은 스스로 물러나지 않는 한 종신직이었으므로 비정기적으로 파견될 수밖에 없었다. 조선통신사는 한양을 출발해 육로로 동래까지 간 다음 배를 타고 오사카, 강을 거슬러 교토까지 가서 에도까지 이동했다[3].
이 과정에서 서로 시를 지어주고 물건을 교환하거나 마상재 같은 공연을 선보였으며, 통신사의 행렬을 그림이나 기행문 등으로 기록하는 등 파생된 문화 교류가 많아 가치가 높다. 한일 양국은 이것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공동 등재를 추진하여, 2017년 10월 세계기록유산 등재가 확정되었다.
마이너 버전(?)으로 류큐 왕국에서 보낸 사절단인 류큐사절(琉球使節)이 있으며, 이들의 에도 방문을 에도노보리(江戸上り)라고 했다. 류큐 왕국은 당시 일본 본토와 달리 청나라와 적극적으로 교류하고 있었기 때문에 중국의 사정을 궁금해했던 많은 일본인들이 관심을 가졌다.[4]
조선 중후기 일본어 교재인 첩해신어는 동래 왜관에서 조선 통신사 관련 준비 작업을 하는 것을 주제로 대사가 짜여 있다. 저자 강우성부터가 조선 통신사에 몇 번 갔다왔던 사람. 실제 조선 통신사의 세세한 부분을 그대로 작성하여 관련 연구에 참고되기도 한다.
조선에서 일본으로 통신사를 보낸 것처럼 역으로 일본에서도 조선으로 사신단이 왔지만 이들은 조선 수도 한양까지는 가지 않고 부산 동래부까지만 왔다 갔다. 임진왜란의 기억으로 조선은 도쿠가와 정권도 완전히 믿지 못했는데 일본 사신단이 한양으로 가면서 지리를 익혀둘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대신 조선 정부는 사신을 맞이하는 동래를 도호부로 높여 중요시했다.

3.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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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한양에서 에도까지 왕복하는 데 대략 8개월에서 1년 가량 걸렸는데[6], 바다를 건널 때 자칫 태풍이라도 만나는 날에는 배가 뒤집혀 '''전원 끔살'''당할 수도 있었고[7] 도중에 왜구들의 습격을 받을 수도 있었기 때문에[8] 통신사들은 일본으로 떠나기 전에 제발 무사히 다녀올 수 있도록 출항지인 부산 영가대에서 용왕에게 해신제를 지내는 것이 관례였으며, 통신사로 파견되는 것을 꺼리는 사람들도 많았다[9]. 한편으로는 새로운 경험이 하고 싶어서 일부러 자원한 사례도 있었다[10].
일본에선 조선 통신사가 지나갈 때마다 지역 전체가 들썩이고 유행이 바뀐다 할 정도로 파장이 대단했다. 통신사의 서예작품을 얻으려고 성황이었고, 일본인들이 통신사의 하인들에게 다가가서 글자 하나만 써 달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통신사들의 사행록을 읽어 보면 일본 측의 요청을 다 들어주기가 대단히 힘들었다거나 도저히 당해낼 수가 없었다는 식의 기록이 곳곳에 있고,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려 주는 것을 전담하는 사람들은 잠도 제대로 못 자거나 일이 너무 힘들다고 울기도 했다고도 쓰여 있다. 그나마도 통신사에게 글이나 그림을 요구하는 일을 도중에서 독점하며 이득을 챙기려는 대마도주가 통제한 것이 그런 수준이었으니 그야말로 대단했던 것. 통신사가 준 사소한 선물이 일본의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기도 하고, 통신사 일행과의 접견으로 중국의 소식을 전해듣기도 했다. 초기(17세기)에는 쇼군이 조선 통신사를 맞이하기 위해 사용한 비용이 '''100만 냥'''이나 되었다. 당시 '''막부의 1년 수입은 76만~77만 냥에 불과'''했다.[11]. 그러자 일본 내에선 이에 반발하는 '국학파'라는 세력이 생겨날 정도. 사행이 거듭되면서 소요되는 비용이 점차 줄어들었고 마지막 사행 당시에는 아예 대마도에서 국서를 교환하는 형식으로 간략화되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융숭한 접대를 받았는데, 실제로 통신사들의 사행록을 읽어 보면 'ㅁㅁ에서 묵었다. ... 호화로운 대접을 받았다/사치스러운 것이 비할 데가 없었다' 라는 식의 기록을 무척 많이 접할 수 있다.
에도 시대도쿠가와 막부쇄국정책 때문에 오히려 이전의 센코쿠 시대보다 외국과의 교류가 줄어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거창하게 들어오는 외국 사신이다 보니 볼만한 화제거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일부 극우 일본인들 가운데에는 조선에서 일본으로 사절을 파견한 반면 일본에서 조선으로 파견하지는 않았으니 "조선이 일본에게 조공을 했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는데, 일단 진짜 조공이라도 천자국도 칙사를 제후국에 보내기 때문에 전제부터 틀렸다. 그리고 조선은 에도에 보내는데 일본이 한양에 안(못) 보낸 이유를 따져보면, 무로마치 시대 일본도 한양까지 외교 사절을 파견하기는 했으며 따라서 조선 전기까지는 한양에 동평관이라는 일본 사신 전용 숙소가 있었다. 그런데 일본 사신들이 왕래했던 길이 임진왜란 때 그대로 침공로가 되는 바람에 조선 조정은 안보 차원에서 일본인이 동래의 왜관과 그 주변 일정 반경을 벗어나는 것을 엄금하게 되었고[12], 그는 일본 사신도 예외가 아니었다. 즉 오늘날로 치면 대한민국이 일본에 파견하는 외교관은 총리를 만나고 돌아오는 반면 일본 외교관은 부산광역시장하고만 이야기하다 오는 것으로, 일본의 사절보다 조선의 통신사가 훨씬 격이 높았던 셈이다. 그런데 통신사보다는 일본 사절이 파견된 횟수가 훨씬 많았으며, 그러다 보니 일본에 대한 조선의 지식이 늘 한 박자 늦었다는 연구도 있다. #

4. 규모


정사, 부사, 종사관 등의 삼사(三使)와 당상역관 미만의 하인 등은 정해진 수가 없어서, 각 사행마다 총 인원은 제각각이었다. 역대 최소 인원은 1624년 사행 당시의 300명, 최대 인원은 1711년의 500명이었으며, 보통 4백명 대.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중엽까지 일본은 통신사 접대에 상상을 초월하는 예산을 투입했다. 이 문제 때문에 민란이 발생하기까지 했으며, 옥스퍼드 대학 제임스 루이스 교수의 추산에 따르면 당시 일본 쌀 수확량의 12%가 소요되었을 정도.
다만 최후의 사행인 1811년에는 규모가 줄어들어 336명이 파견되었는데, 정조 11년(1787) 도쿠가와 이에나리가 취임했으나 당시 막부의 재정이 바닥을 치고 있었기에 실권자인 마츠다이라 사다노부에 의해 에도가 아닌 쓰시마에서 통신사를 맞이하기를 희망했고(1794), 마찬가지로 살림이 어려웠으나 전례(前禮)를 중시하던 조선은 17년간 거부하다가 순조 11년(1811) 와서야 승인했기 때문이다.

5. 목적 및 활동


얼핏보면 별 의미가 없어 보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속해온 이유는 양국이 전부 이익이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조선 입장에서는 먼저 가장 가까운 나라와 교린을 맺는 것이 국제관계의 도리라는 점도 있었고,[13] 서로 교린관계를 나누면서 혹시 모를 일본의 군사적 위협을 덜자는 점도 있었다. 비록 쇼군이 새로 즉위할 때 파견되는 경우가 많았지 외교 문제가 발생할 때 곧바로 보낸 것이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통신사는 쇼군이나 일본의 대신들과 직접 협상하여 외교 안건을 해결할 수 있었다[14]. 또한 일본의 지형과 풍속 등을 살펴 왜구가 조선을 약탈하거나 도요토미 히데요시 당시 일본이 조선을 침공했을때 같은 비상사태를 대비한다는 목적도 있었고, 1회성 사건이기는 했지만 수행 무관들을 통해 일본을 통해 들어오는 서양의 신무기를 몰래 구하는 작전이 펼쳐지기도 했고, 고구마가 조선에 전래된 것도 1763년 당시 통신정사였던 조엄의 덕이었다.
일본 입장에서도 도쿠가와 막부가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권력임을 선전하는 정치적인 성과를 얻고 공공연하게 막부의 권력이 중국에도 알려질 수 있게 되니 중국과의 교섭에도 유리하게 작용시킬 수 있었다. 또한 일본 국내에서는 백성들에게 조선 통신사를 조공사절로 선전하여 일본이 마치 조선을 종속국으로 거느리고 있는 양 왜곡하며 국가적 자부심을 높였고,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에게는 조선은 일본에 조공을 바치는 종속국이라고 속여 네덜란드가 조선과 직접 교역하는 것을 차단하는 효과도 있었다(#).[15] 일본 입장에서는 무엇보다도 일본 막부의 수도인 에도에 파견하는 유일한 공식 사절단이라는 의미가 있었으며 서적같은 조선의 선진문물도 같이 들여보낼 수 있었으니 이점에 있어서도 분명 이득이었다. 그탓인지 같이 왜구를 토벌하는 유화적 제스처도 행했다.
재미있는 점은 조선 통신사의 수행원으로 따라 간 자들이 남긴 기행 기록 가운데 외국인이기에 쓸 수 있었던 민감한 내용들이 담겨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일본의 정치구조를 간파하고 이를 바탕으로 일본의 먼 미래 정세까지 예측했다. 특히 덴노의 조정이 있는 교토의 경우 덴노의 조정과 관백(쇼군)의 막부를 각각 왕자(王者)와 패자(覇者)라 인식했다. 대놓고 막부, 도쿠가와 쇼군들을 왕망이나 조조로 비유하기도 했고, 몇몇 일본 지식인들이 덴노구게 앞에서 존왕론을 강의하거나 토막(討幕, 막부 전복)을 꾀했다는 이유로 막부에 적발되어 처형되는 사건도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기록에는 또한 정통성을 갖춘 진정한 군주인 덴노가 무사들을 뒤에 거느린 힘 있는 권신(權臣)에 불과한 쇼군의 힘 앞에 눌려 실권을 빼앗긴 것에 비분강개하던 당대 교토 지식인들의 모습도 함께 담겨 있다. 일본인들은 막부코렁탕이 두려워 이런 솔직한 기록들을 남길 수 없었지만, 제3자인 조선 통신사 일행들은 외국에서 온 사신단이었으니 거리낄 것이 없었다. 자국의 군주가 하는 욕 한마디도 꼼꼼하게 기록하는 문화가 발달해있어서 가능한 행위.
성대중이나 남옥, 조명채, 원중거 등 실제 그들을 만나 대화를 나눠본 조선 통신사 수행원들은 그 주고 받은 이야기를 기행문에 적고 한결같이 "지금의 막부가 언젠가 힘이 쇠약해지고 그때까지 숨죽이고 있던 무리들이 움직일 때가 오면 분명 덴노를 둘러싸고 국권을 쟁탈하려는 자들이 나타날 것이다"고 판단했고, 그 예상은 약 백여 년 뒤에 존황양이, 대정봉환, 무진전쟁이라는 형태로 적중했다. 아울러 원중거는 이런 상황이 되면 조선에도 자칫 피해가 올 수 있을 거라며 미리 대비를 해 둬야 한다고 말했지만, 메이지 유신으로 일본의 권력이 통일될때 조선은 스스로 무너지고 있었고 결국 경술국치로 끝을 맞이했다.(#)
조선통신사로 파견된 인물 가운데 일종의 기행문인 사행록을 남긴 인물도 많은데, 이는 당시 일본 사회의 면면을 볼 수 있는 제3자의 자료로서 일본에서도 활발히 연구되고 있으며 중국에서도 명이나 청을 주제로 통신사와 일본 측 인사가 주고받은 대화를 연구 대상으로 삼으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6. 역대 조선 통신사


''' 역대 조선 통신사 '''
'''순서'''
'''연도'''
'''정사'''
'''부사'''
'''종사관'''
'''총인원'''
'''목적 및 특징'''
'''사행록'''[16]
초대
1607년
(선조 40=게이쵸(慶長) 12)
여우길
(呂祐吉)
경섬
(慶暹)
정호관
(丁好寬)
467명
국교 회복
해사록 (경섬)
2대
1617년
(광해군 9=겐나(元和) 3)
오윤겸
(吳允謙)[17]
박재
(朴梓)
이경직
(李景稷)
428명
오사카 전투 직후 방문
동사상일록 (오윤겸)
동사일기 (박재)
부상록 (이경직)
3대
1624년
(인조 2=칸에이(寬永) 1)
정구립
(鄭口岦)
강홍중
(姜弘重)
신계영
(辛啓榮)
300명
(역대 최소 인원)
도쿠가와 이에미츠 취임
동사록 (강홍중)
4대
1636년
(인조 14=칸에이 13)
임광
(任絖)
김세렴
(金世濂)
황호
(黃帍)
475명
병자호란 중 방문[18]
병자일본일기 (임광)
해사록 (김세렴)
사상록 (김세렴)
동사록 (황호)
5대
1643년
(인조 21=칸에이 20)
윤순지
(尹順之)
조경
(趙絅)
신유
(申濡)
462명
도쿠가와 이에츠나 탄생
동사록 (조경)
해사록 (신유)
계미동사일기 (미상)
6대
1655년
(효종 6=메이레키(明曆) 1)
조형
(趙珩)
유창
(兪瑒)
남용익
(南龍翼)
488명
도쿠가와 이에츠나 취임[19]
부상일기 (조형)
부상록 (남용익)
일본기행 (이동로)
7대
1682년
(숙종 8=텐나(天和) 2)
윤지완
(尹趾完)
이언강
(李彦綱)
박경준
(朴慶俊)
475명
도쿠가와 츠나요시 취임
동사일록 (김지남)
동사록 (홍우재)[20]
8대
1711년
(숙종 37=쇼토쿠(正德) 1)
조태억
(趙泰億)[21]
임수간
(任守幹)
이방언
(李邦彦)
500명
(역대 최대 규모)
도쿠가와 이에노부 취임[22]
동사록 (조태억)
동사록 (임수간)
동사록 (김현문)
9대
1719년
(숙종 45=교호(亨保) 4)
홍치중
(洪致中)
황선
(黃璿)
이명언
(李明彦)
479명
도쿠가와 요시무네 취임[23]
해사일록 (홍치중)
해유록 (신유한)
부상기행 (정후교)
부상록 (김흡)
10대
1748년
(영조 24=칸엔(寬延) 1)[24]
홍계희
(洪啓禧)
남태기
(南泰耆)
조명채
(曺命采)
475명
도쿠가와 이에시게 취임
봉사일본견문록 (조명채)
수사일록 (홍경해)
일본일기 (미상)
일관요고 (미상)
11대
1763년
(영조 39=메이와(明和) 1)
조엄
(趙曮)[25]
이인배
(李仁培)
김상익
(金相翊)
472명[26]
도쿠가와 이에하루 취임
해사일기 (조엄)
일관기 (남옥)
사상기 (성대중)
일본록 (성대중)
승사록 (원중거)
화국지 (원중거)
일동장유가 (김인겸)
동사록 (민혜수)
동사일기 (오대령)
계미수사록 (미상)[27]
12대
1811년
(순조 11=분카(文化) 8)
김이교
(金履喬)[28]
이면구
(李勉求)
없음
336명
도쿠가와 이에나리 취임.
대마도에서 이루어짐.
마지막 통신사.

신미통신일록 (김이교)
도유록 (김선신)
동사록 (유상필)

7. 민화와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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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8년경 와타나베 젠우에몬이 조선통신사가 요도 번(현대 교토후시미구 일대)을 방문한것을 묘사한 민화를 그렸고, 그것이 2004년 교토에서 다시 발굴되었다.
근데 그 중 한 장면이 문제가 되었는데, 통신사 두 명이 닭을 들고 있고 주변 일본인들이 어지럽게 모여 있는데 몇몇 일본인들이 뭔가 싸우는 듯한 동작을 보인 것이다. 따라서 발굴 당시에 "조선 통신사가 닭을 훔치는 것을 보고 주변의 일본인들이 제지하려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조선통신사는 닭 도둑질이나 하는 한심한 사신들이었다"라는 주장이 인조이재팬 등지에서 제기되었다.
반면 닭을 훔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주변에서 놀고 있던 아이들[29]을 묘사한 것이며, 그 사이를 우연히 근처에서 날뛰는 닭을 잡은 통신사가 지나갔던 것 뿐이라는 반론도 있다. 최초 발견 당시 관련자 등은 이 해석을 지지하고 있다.
하지만 '통신사는 도둑질이나 하는 한심한 사신들이었다' 라는 말은 지나친 것이지만, 통신사를 수행하는 조선인들의 기강이 문란했던 적이 없던 것은 아니다. 가령 1682년에 역관으로서 일본에 다녀와 사행록을 남긴 홍우재와 김지남은 조선 측이 빌미를 제공하여 일본인과 싸움을 벌이는 적이 많음을 개탄하기도 했고[30], 1763년의 정사였던 조엄은 아예 출발하기 이전부터 이러저러한 행동을 하지 말 것을 당부하는 글을 한문 뿐 아니라 한글로까지 써서 수행원들에게 뿌리기도 했다.
유튜브에 올라온 조선통신사와 관련한 영상들의 일본인들은 여전히 위 민화를 근거로 주장하며 조선 통신사를 '''닭 도둑 조공 사절'''로 여기려 들고있다.[31] 심지어 그것들이 베스트 댓글[32]이다. 한국에서도 일본과 관련한 중립적인 기사나 영상의 댓글 중에 반일감정이 묻어나는 악의적인 글들이 제법 있는 것을 생각하면, 군중 심리와 익명성의 영향이 큰 댓글만으로 일본의 여론을 파악하는 것은 신중해야하는 일이다. 그러나 이런 면모들은 조선통신사에 관심 갖는 일본인들이 대체적으로, 혹은 적잖이 통신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상적 좋은 의미로 양국의 교류와 우호, 내적으로 실리적 목적을 두고 이루어진 조선 통신사 파견은 이처럼 현대에 들어 한 국가의 우월성을 주장하는 근거로 왜곡되고 있다.[33] 이 현상의 뿌리에는 조선통신사를 '조공 사절'로 여기려 들었던 일본 측의 거만한 옛 태도와 함부로 일본인을 멸시하려드는, 소수 조선인 통신사의 문란한 기강[34]이 함께 만들어내고만 문제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8. 대중매체에서


아오이 도쿠가와 삼대에서 1607년 통신사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알현하고 국서를 전달하는 이야기가 오다 노부나가의 아들에 의해 오사카의 도요토미 가에 알려진다. 더불어 그 국서에는 이에야스가 '일본국 국왕 전하'라고 표시되어 있다고 말한다. 이에 요도도노가 분노한다.[35] 10년 뒤 1617년, 오윤겸을 정사로 하는 통신사가 쇼군 히데타다를 알현하는 장면이 나오며 17년 뒤 정구립을 정사로 한 통신사가 도쿠가와 이에미츠를 알현하게 된다.

히데타다가 통신사를 접견하는 장면. 일본 드라마임에도 불구하고 통신사 역을 맡은 배우의 한국어가 매우 매끄럽고[36] 조선에 대한 고증도 꽤 잘 되어 있다. 사모를 쓰는 방식이 칸무리처럼 머리 위에 아슬아슬하게 걸치는 모양새[37]인 것만 빼면 거의 완벽하다. 다만 이것 외에는 고증 오류가 많은데, 일단 통신사가 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어 교토에서 에도로 돌아가는 기한을 늦추기까지 했던 히데타다가 측근에게 '조선 사절이 왜 온 거냐' 라고 묻고 있고, 정사 오윤겸의 동사상일록에 따르면 히데타다와 삼사(三使)는 서로 술을 다섯 잔 마시는 의식을 행한 것으로 되어 있는 반면 여기에서는 국서만 전달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물론 드라마이기 때문에 왜 통신사가 왔는지 시청자들에게 설명할 필요가 있을 뿐더러, 의식까지 일일히 보여주기에는 러닝타임이 짧다는 문제 등등이 겹쳐서 의도적으로 알고도 무시한 오류로 보인다. 어느 정도 현실적인 문제로 인한 작품적 허용에 가깝다고 봐 줘도 될 듯.
8대 쇼군 요시무네 20화에서도 조태억을 정사로 하는 통신사가 쇼군을 알현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효게모노에서는 히데요시를 마주하여 대화하고 가장 좋은 찻잔에 차를 대접하나, 도기 기술에서 앞선 백자를 선물로 내놓으며 히데요시를 디스한다.
한국에서는 불멸의 이순신이나 징비록 등 임진왜란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나 소설 등에서 황윤길을 정사, 김성일을 부사로 파견한 통신사가 으레 언급되지만, 이 때의 사행도 통신사에 포함시키는 경우가 있고[38] 에도 막부 창건 이후의 사행만 통신사로 보는 경우가 있는지라 조금 애매하다.

9. 관련 단체


  • (사)조선통신사문화사업회

10. 관련 문서



[1] 일본에서 보낸 사신은 실질적으로는 막부의 사신이거나 쓰시마를 포함한 각번의 사신이었지만, 조선에서 자신들보다 격이 낮다고 여긴 이들의 이름으로 보내면 상대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본 국왕의 사신이라는 형식을 취했다. 중국으로 보낼 때도 마찬가지였으며, 임진왜란 이후 1609년 류큐를 합병한 뒤에는 류큐 사신이라고 칭하기도 했다.[2] 조선 시대에 파견된 통신사라는 것을 교육하기 위해 후대에 '조선'이라는 말이 앞에 추가된 것으로 추정된다.[3] 1636년, 1643년, 1655년 한정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사당이 있는 닛코까지 올라가기도 했다.[4] 조선의 경우엔 소중화를 내세우면서 청과 적극적으로 교류하지 않았기에 중국의 사정이 궁금했던 일본 입장에서는 류큐가 나았다.[5] 에도가 끝이 아니고 닛코까지 이어지는 것은, 그곳에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사당인 도쇼구가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전체 열 두 번의 통신사 중 닛코까지 갔던 것은 4~6차 뿐.[6] 특히나 부산에서 오사카까지 가는 동안 시간이 많이 걸렸는데, 아직 엔진이나 증기기관이 아니라 돛과 노를 썼으니 당연하지만 파도가 높거나 역풍이 부는 날에는 나아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사행록을 보면 이 때문에 몇날 며칠 동안 같은 마을에 머무니 답답하다는 구절이 많이 보이며, 이 정도면 갈 만 하지 않느냐는 통신사 측과 충분히 위험하니 내일 떠나자는 대마도 측의 언쟁도 적잖게 일어났다.[7] 끔살은 아니더라도 대단히 위험한 일임은 분명했으며, 실제로 역대 통신사들의 사행록에서 부산을 출발하여 대마도까지 가는 날의 기록을 읽어보면 물살이 심히 높아 배에 탄 사람들이 구토를 하고 난리를 쳤다는 부분이 자주 발견된다. 뿐만 아니라 통신사가 탄 배가 파손되거나, 예정된 항로를 벗어나 다른 항구에 잠시 정박하거나, 배들 가운데 한 척이 부산으로 다시 떠밀려가 먼저 대마도에 도착한 일행들이 발을 동동 구르거나 하는 일도 잦았다.[8] “소 긴의 배에 탄 여러 사람들이 ‘그들은 해적입니다’라고 말했다. 우리 모두는 두려운 마음이 들어 돛을 멈추고 나아가지 못했다. 우리는 작은 배를 돌려보내 호송선을 부르도록 한 다음 갑옷을 입고 을 잡았다… 나도 갑옷을 입고 호송선을 기다렸다.” (책 '조선통신사의 일본견문록’, 강재언 저) 조선통신사가 본 중세 일본의 기상천외한 풍습 3가지[9] 1682년 통신사행의 종사관 자리를 예로 들면 본래 이언강이 임명되었으나 4품직으로 승진했다는 이유로 부사로 다시 임명되고 종사관에는 박치도가 임명되었다. 여기까지는 문제가 없는데, 박치도에게 지병이 있다는 이유로 임영으로 교체. 임영은 노부모를 봉양해야 한다는 이유로 신엽으로 교체. 그리고 신엽은 코피가 나는 병이 있다는 이유로 다시 박경준으로 바뀌었다. 한편 생명의 위협(?)은 오히려 삼사(三使)보다는 하인이나 격군 등 낮은 신분이 더 많이 느꼈을 것이다. 통신사들의 사행록을 보면 누가 죽었으니 안됐다는 식의 기록이 가끔 발견되며, 사행 도중에 죽은 사람은 어떻게 조선으로 돌려보낸다는 식의 규정도 비공식적으로나마 있었다.[10] 1763년 통신사행에 서기로 파견된 원중거를 예로 들 수 있다. 그는 원래 일본에 갈 뜻이 없었다가 통신 부사로 임명된 자가 간곡히 부탁하는 것을 물리치지 못해 지원하게 되었는데, 나중에 부사가 교체되었다는 말을 듣고도 물러나지 않았다. 그의 저작인 '승사록' 에는 원래 가지 않으려 했는데 '문득 하늘 끝을 살피고자 하는 생각이 들어서' 지원했다고 되어 있다.[11] <일본근세사>, 이계황, 116쪽[12] 정해진 규정을 어기고 왜관 주변을 벗어나는 것을 난출(闌出)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자주 일어나는 바람에 조선 조정의 골치를 썩이기도 했다. 심지어 일본인들이 조선 조정에 강력히 요구할 일이 있을 때 일부러 난출을 감행하여 관심을 끌었다는 연구도 있는데, 오늘날에도 한두 명도 아니고 수십 명의 건장한 외국인이 무기를 들고 시청 앞까지 쳐들어간다면 신문 1면에 실리게 된다.[13] 사대교린이라고 중국에 사대하고 주변국과 잘 지내는 교린이 조선의 외교방침이었다.[14] 가령 1711년 통신사의 경우 왜관에서 일본인과 조선인 사이에 일어나는 충돌을 줄이기 위해 신묘약조를 체결했다.[15] 반대로 헨드릭 하멜 표류 사건에서는 조선에게 네덜란드가 자국의 속국이라고 주장했다. 물론 조선은 일본측의 이 같은 주장을 전혀 믿지 않았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일본이 하멜일행을 조선에 억류한것은 자국 속국민의 불법억류이므로 법적으로 문제가 된다고 따져들자 조선측에서는 "쟤네들 서양 기리시탄인데 너넨 기리시탄들 다 잡아 죽이잖아? 근데 무슨놈의 속국이냐. 우린 인도주의적으로 그들을 보호한것뿐이다라며 반응했고, 결국 일본이 없던일로 하자고 퉁치게 되었다.[16] 일단 영조 대에 '해행총재' 라고 해서 역대 사행록을 모두 정리한 서적이 출간된 바 있으나 누락된 것도 적지 않고, 최근에도 간혹 가다가 사행록이 새로 발견되고 있다.[17] 인조때 영의정까지 했던 사람이다.[18] 다만 병자호란이 일어나서 일본에 통신사를 파견했던 것은 아니고, 오히려 통신사는 조선에 돌아온 뒤 전쟁이 있었고 망극한 일이 있었음을 알게 된다. 통신사를 파견했던 명목은 '오랫동안 태평성대를 누리는 것을 축하한다' 라는 명목. 더불어 이때 조선 통신사의 닛코 참배가 처음으로 이루어졌는데, '구경' 이나 '관광' 이 아니라 '참배' 인 것은 여기에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사당인 도쇼구가 있기 때문. 처음이니만치 통신사 측에서는 에도까지 올 줄 알았지 닛코라는 곳까지 갈 줄은 몰랐던데다 도쿠가와의 사당에 참배를 하러 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완강히 거부했지만 결국 억지로 끌려가다시피 했으며, 그런 만큼 도쇼구에 대해 대단히 부정적으로 기록했다. 하지만 조선 측에서는 이후 닛코 참배에 적극적인 자세를 보여 종을 내려주거나 국왕의 어필(사실은 왕족이 쓴 것)을 내려주거나 했다. 끝으로 이전까지는 '회답 겸 쇄환사' 라는 이름으로 파견되었고 통신사라는 이름이 정식으로 붙은 것은 이것이 처음으로 정식 통신사로서는 처음인 만큼 조선과 일본 사이의 이런 저런 외교 형식이 새로 정해졌는데, 일본의 쇼군을 대군이라고 부르기로 정한 것도 이 때다.[19] 이 때부터 쇼군이 취임하면 통신사가 파견되는 것으로 정해지며, 닛코 참배가 마지막으로 이루어진 사행이기도 하다.[20] 역대 통신사행 가운데 삼사가 쓴 사행록이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은 유일한 사례다. 김지남은 중국어 역관이었고, 홍우재는 일본어 역관. 다만 역관들이 남긴 사행록이니만큼, 통신사행에 파견된 역관들의 활동을 연구하는 데 유용하다.[21] 소론의 주요 대신으로 조태구, 조태채의 친척이다.[22] 당시 일본의 유력한 대신이었던 아라이 하쿠세키라는 인물이 일본이 통신사에게 너무 저자세를 취하는데다 낭비가 너무 심하다는 이유로 통신사를 맞이하는 각종 의식을 대대적으로 뜯어고치기로 결정을 내렸는데, 문제는 이것이 조선에 일절 통보하지 않고 마음대로 저지른 일이라는 것. 이 때문에 통신사는 갑작스럽게 의례를 변경할 수 없다고 격렬하게 반박했으나 결국 적잖게 타협하는 것으로 결론내렸는데, 이 때문에 조선에 돌아와 '왕명을 욕되게 했다' 라는 이유로 처벌을 받기에 이른다. 하지만 아라이의 의례 개변은 일본 내에서도 지나치다는 평을 받기도 했고, 결국 1712년에 도쿠가와 이에노부가 세상을 떠나면서 그가 실각하자 통신사를 맞이하는 의식은 거의 대부분 1711년 이전의 것으로 복구되었다.[23] 이에 따라 단임한 도쿠가와 이에츠구는 제외되었다.[24] 사실 조선 통신사의 방문 때의 연호는 칸엔 이전에 엔쿄(延享) 5년이었는데, 모모조노 덴노의 즉위로 개원한 것이다. 원래 덴노는 즉위 직후인 4월 25일 개원을 시도했으나, 도쿠가와 이에츠구의 제사와 통신사 방문 등의 이유로 7월 12일로 개원을 미뤄야 했다.[25] 고구마를 들여온 그 사람이다.[26] 일본 본토에 간 마지막 통신사. 서기관으로 따라간 김인겸이라는 사람이 쓴 기행문 형식의 시인 '일동장유가' 라는 작품이 전해지는데, 고등학교 문학 시간이나 언어영역 등에서 가끔 소재로 쓸 때가 있다. 또한 통신사 서열 3위 서장관이던 '청성잡기'의 저자 성대중이 쓴 기행문 '일본록' 이 '부사산 비파호를 날 듯이 건너' 라는 제목으로 정리되어 출간되어 있고 서기였던 원중거가 쓴 '승사록' 과 '화국지' 가 각각 '조선 후기 지식인, 일본과 만나다', '와신상담의 마음으로 일본을 기록하다' 라는 이름으로 나와 있으니 관심 있는 분을 읽어 보실 것.[27] 역대 통신사행 가운데 가장 많은 사행록이 남은 경우로, 이 때문에 조선과 일본 간 문화 교류의 황금기였다는 평가도 받는다.[28] 8자흉언사건을 일으켜 벽파를 재기불능으로 빠뜨린 인물이다. 일본 화가가 통신사로 온 김이교와 이면구 일행을 그린 그림이 남아있다.[29] 특히 우측에 죽도(?)를 든 일본서민을 단순히 칼싸움놀이로 해석하느냐 아니냐에 따라.[30] 가령 홍우재의 『동사록』 1682년 7월 1일조에는 '우리 일행 중의 하인배들이 금령을 지키지 않고 함부로 출입하다가 왜인과 싸우는 일이 있었는데, 그 책임이 우리들에게 있으니 마음 아프기가 이를 수 없었다.' 라는 부분이 있고, 같은 해 9월 25일조에도 '우리 측의 병졸이 대마도주의 행렬을 범하여 그들이 이를 책망하며 말에서 내리라고 하니 그 병졸이 군중(軍中)의 행렬에 있어서 범(犯)한 것이 없다고 하여 서로 말다툼하다가 심지어는 서로 때리는 데까지 이르렀다. 피차에 함께 죄를 조사한 후 대마도주의 행렬은 앞서거나 뒤에 서도록 하여 우리 행렬과 더불어 혼란되어 뒤섞이는 폐단이 없도록 했다.' 라는 구절이 있다.[31] 근데 조공 사절이 상국의 닭을 훔치고 민폐를 끼치는데 별 항의를 안했다는 건 이상한 일이다.[32] 일본어로 업로드된, 조선통신사를 재현한 행렬에 ''''조선은 당시 휘어진 칼(곡도)을 만드는 기술조차 없었다''''는 황당한 댓글들이 공감을 얻는 판이다. 조선 환도의 역사를 조금만 알아도 이런 소리는 할 수 없다.[33] 그러나 막부 역시도 내부적으로는 조선 통신사를 조공사절로 속였던 만큼 일본 한정으로는 이것이 단지 현대에만 벌어진 일이라고 할 수는 없다.[34] 다시 한번 유의해야할 점은, 통신사의 기강에 문제가 있었던 적은 있지만 그것이 닭을 훔치는, 어처구니 없는 행동을 했다는 사실을 나타내지는 않는다. 닭을 훔쳤다는 주장은 한마디로 별다른 근거도 없이 저 그림보고 '훔치는 장면 아니냐'는 소리가 나온 것이다.[35] 그녀는 통신사가 오사카 성의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알현하는 게 마땅하다고 생각했지만, 측근들은 조선으로서는 임진년, 정유년 침략으로 인한 원한이 있으니 도요토미의 후계자를 만나고 싶어할 리가 없다고 충고한다. 덧붙여 히데요리 알현은 실제로도 시도되었으나 실패했던 일.[36] 발음에서 일본어 특유의 억양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것으로 보아 실제 한국인을 섭외한 것일 확률이 높다.[37] 이렇게 살짝 모자를 삐딱하게 쓴 이유는 당대 일본의 기본 헤어스타일인 촌마게 때문인데, 당연히 이런 문화가 없는 조선인에게는 이렇게 사모를 쓸 이유가 전혀 없다.[38] 이 경우 신숙주가 파견된 경우 등 조선 전기의 사행도 모두 포함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