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평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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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전기의 왕족. 세종대왕과 소헌왕후의 5남이며 전주이씨 광평대군파의 파시조이다.
불행히도 20세로 요절했다. 아들 영순군이 태어난 지 5개월 되었을 때라고 한다. 실록에는 창진(瘡疹)을 앓다가 죽었다고 되어 있는데, 이는 '천연두'를 의미한다.
비록 짧은 생을 살다가 젊은 나이에 일찍 세상을 떠났으나 사후에 후손들이 많이 번창하였다.
2. 생애
1436년(세종 19년) 제1차 왕자의 난 때 사망하여 자손이 끊어진 무안대군 방번의 사후 양자[3] 가 되었다. 1437년(세종20년)엔 신효창[4] 이란 인물의 서자인 신근지를 벼슬길에 올려달라는 청탁(!)을 받고 넷째 형 임영대군과 함께 세종에게 청탁했는데[5] 이후 이게 문제가 돼서 신효창과 신근지 둘다 벼슬 자리에서 박탈 당한다. 왕자가 벼슬 청탁을 받는 사건은 조선 초기에는 매우 흔했다(...). 그러나 창진으로 인해 1444년 12월 8일에 20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
세종대왕은 놀라 슬퍼하며 수라를 끊고 3일 동안 정사를 폐하였으며, 저자는 점포의 문을 닫는 등 조야가 모두 슬퍼하였다.# 또한 광평대군 사후 1개월 후에 세종대왕과 소헌왕후의 7남 평원대군도 죽어 세종 내외의 상심은 더욱 커졌다.
구전으로 또 다른 사망 원인이 전해져 내려온다. 이른바 '생선 가시'로 인한 죽음. 이는 위기탈출 넘버원에서 생선 가시에 대한 죽음의 사례로 든 적이 있다. 이 야사에 따르면 세종대왕이 관상쟁이를 불러서 여덟 대군의 관상을 보았는데, 관상쟁이가 광평대군의 관상을 보고 "귀골로 뛰어난 재질과 복록을 갖추었으나 안타깝게도 오래 살지 못하고 '''굶어서 돌아가실 상'''"이라고 말했다. 세종은 그 말에 웃으면서 "어찌 왕자가 굶어서 죽을 리가 있는가" 하고 오히려 광평대군에게 경기도 광주 의 넓은 땅을 사패지로 주었다고 한다.[6] 헌데 광평대군은 그만 식사 때 준치의 가시가 목에 깊숙히 걸려 빼지 못하여[7] 도지고, 또한 창진(瘡疹)이 겹쳐 식사를 하지 못하다가 사망했다. 이는 야사집인 용재총화에 기록되어 있다.
3. 가족과 후손
3.1. 외아들 영순군
비록 요절하긴 했지만 그가 사망할 당시 갓난아기였던 외아들 영순군을 통해 가계가 이어지게 된다. 대부분의 명문가들이 흔히 그렇 듯 양자를 들이거나 조카가 대를 잇는 일 없이 광평대군가는 정말 정직하게 장남에 장남으로만 대가 이어진 희귀한 사례에 속한다.
자손이 귀했으나, 중간에 대가 끊기지 않고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광평대군묘와 종가는 현재 서울특별시 강남구 수서동에 있으며, 이 곳이 광평대군이 사패지로 받았던 옛 광주 땅이다. 여기에는 광평대군 묘만 아니라 광평대군 후손들의 묘들도 있으며 무안대군 방번의 후사를 이었기 때문에 광평대군 묘역에는 무안대군의 묘도 있다. 강남구 일원동, 수서동 일대를 지나는 도로명으로 그의 군호를 딴 '광평로'가 있으며, 수서동과 송파구 가락동을 잇는 다리인 '광평교' 역시 그의 군호에서 따온 것이다.
묘역 옆에는 필경재(必敬齋)라는 고급 한식당(코스요리)이 있다. 천주교 수서동 성당 오른편에 보이는 한옥이다. 성종 때 광평대군의 증손인 이천수가 건립한 99칸짜리 집이었으나 세월이 지나면서 많이 손상되었는데, 1994년 복원하여 한식당으로 개조했다. 아무 때나 먹는 일상 식사류를 파는 집은 아니고, 상견례, 어른의 생신, 돌잔치, 중요한 손님의 접대 등에 이용할 만한 음식점이다. 값도 무척 비싸고 예약이 필수이니 헛걸음하지 않도록 주의. 근데 저 음식점이 종가집 행세[8] 를 한다고 해서 종중에서 싫어한다는 이야기가 있다고 한다.
광평대군의 아들 영순군은 할아버지 세종대왕의 특별한 당부로, 문종대에는 사촌 단종과 같이 궁중에서 자라났다. 숙부 세조에게도 총애를 받고 종친부의 가장 높은 품계인 현록대부에 제수되었다. 주특기는 회계. 27살의 나이로 요절했으나 슬하에 3형제를 두어 자손 번영에는 무리가 없었다. 청상과부 엄마 신씨는 불교에 뜻을 두어 신하들의 탄핵을 받았으며, 영순군 사후 쌍과부 최씨도 석가모니를 모시는데 열심이어서 자주 구설에 올랐다.
영순군 본인은 조선 역사상 최연소 영의정인 구성군 이준과 함께 종친 중의 인재로 명성이 높았다고 한다. 더구나 성종이 즉위하고 얼마 되지 않아 갑작스럽게 병사했기 때문에, 구성군처럼 화를 당하지 않았다. 예종 시기 때 궁을 지키던 무사들이 "주상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후사는 영순군이 뒤를 이을 것이다"라고 대화를 하다가 적발당해 참형을 당한 적이 있었다. 당시 신하들이 영순군에게도 처벌을 가할 것을 주장했으나 예종이 영순군을 변호해 줘서 처벌을 면했다.
3.2. 기타 자손
자손이 아주 풍성하지는 않지만 제법 번성하여 훗날 이백연(李白淵)[9] 은 예종의 장남이자 요절한 인성대군의 봉사손이 되었다. 뒷날 낙동염라로 유명한 이경하[11] 와 그의 아들들인 대한제국 때의 관료 이범진과, 이범윤, 그의 손자이자 헤이그 특사의 한 사람인 이위종, 그리고 독립군 장군이자 국무총리를 지낸 이범석과 청와대 비서실장을 지낸 이원종, 그리고 아주대학교병원의 의사 이국종은 모두 이 사람의 후손이다. 이범진과 이범석은 광평대군의 17대손이고 이위종과 이원종, 이국종은 광평대군의 18대손이다. 또한 서애 류성룡의 아내 역시 광평대군의 후손으로 전해진다.
특이하게 조선 '''후기''' 들어 광평대군의 자손 일부가 왕실의 종친으로 입양 가 편입 된 경우가 있었는데 대표적으로 선조의 13남이자 막내아들[12] 영성군 이계의 독자 회원군 이윤이 아들을 두지 못해 광평대군의 8대손 이홍[13] 이 양자가 되어 함평군에 봉해졌다. 영성군부터 회원군까지 독자로 이어져왔기에 현재 전주 이씨 영성군파는 실제로는 대부분 광평대군의 후손이다. 또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형 흥인군 이최응의 외아들 완영군 이재긍 또한 아들이 없어 광평대군의 18대손 이지용[14] 을 입양했고 이지용 또한 자신의 장손을 다른 광평대군의 19대손에서 들였다.
4. 뿌리깊은 나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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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떠하냐, 괜찮은 글자 아니더냐? 너라면 그걸 포기할 수 있겠느냐?"'''
'''"세상은 아바마마께 성군이라 하지. 헌데 아느냐? 아바마마께도 태종대왕의 피가 흐르고 있다. 태종대왕의 피는 여기에도 흐르고 있으니까!"'''
배우는 서준영[16]
드라마에서, 세자나 수양대군, 안평대군 등의 쟁쟁한 형들을 제치고 세종의 아들 중 유일하게 등장했다. 부왕 세종의 계획을 은밀하게 돕고 있다. 세종의 이상한 행동에도 불구하고 믿고 따르고 있다.
사실 드라마가 정도전 사후 48년(1446년)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니, 1444년에 사망한 광평대군은 나올 수 없어야 정상이다.[17]
14회 말미에 밀본에게 소이와 보쌈당하는 도중 몸에 상처가 나 고통에 시달리지만, 강채윤이 가리온을 불러와 치료를 받은 덕분에 무사히 살아남았다. 세종대왕을 아직까지도 믿지 못하고 자신을 인질로 삼은 강채윤에게 세종의 진심과 새로운 문자의 필요성에 대해 열변을 토한다. 새로운 문자 28자만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을 이야기해줘, 강채윤을 세종의 사람으로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리고 자신과 세종의 설득에 마음이 움직인 강채윤의 도움으로, 무사히 궁에 돌아온다.
따지고 보면 병풍이나 다름없었다가 세종대왕의 원대한 뜻과 각오를 말하고 똘복이를 설득해주는 어마어마한 역할로 커졌다.
하지만 19회에서 한글을 배포하기 위해 활자소에 있다가 정기준에게 그 사실이 알려지고, 윤평에게 납치당하고 만다. 역병과도 같은 이 글자를 막기 위해 정기준은 이 글자를 아는 모두를 죽이고 자신도 그 뒤를 따른다고 했으며, 굳건한 세종대왕을 동요시키기 위해 결국 광평대군을 살해해 버리고 그 시신을 궁으로 보냈다.
참고로 2011년 '''12월 7일''' 20화에서 광평대군이 사망했는데 실제 역사 속 광평대군은 1444년 '''12월 7일''' 사망했다.[18] 비록 양력 - 음력 차이가 있긴 하지만 제작진이 의도적으로 날짜를 맞춘 것일 수도 있다.
이미 1446년이 배경이라면 이미 2년 전에 죽은 사람이 이리저리 돌아다닌 것인데, 공주의 남자의 온녕군이 그랬듯 '''죽은 사람이니까 부담 없었기 때문'''일 가능성이 제일 높다.
[1] 군호는 경기도 광주(廣州)에서 유래했다.[2] 발해 성왕과 이름이 겹친다.[3] 계보상으로 무안대군과 광평대군은 조손(祖孫) 관계이다. 이 경우에는 양자라고 불리는 건 말이 안 되는 이야기이고 시양손(侍養孫)이나 봉사손(奉祀孫)이라고 불러야 맞는 이야기가 된다. 참고로 전주이씨 대동종약원 측에서도 이 경우를 봉사손이라고 부르고 있다.[4] 광평대군에겐 "처서삼촌"이 된다.[5] 그래서 신근지를 병조에 보내여 시험치게 했는데 통과는 되긴했다.[6] 여기에는 세종대왕이 혹시 몰라서 준 것으로도 살이 붙여지기도 한다. 즉 광평대군이 절대 굶어죽을 일이 없도록 아예 땅을 넉넉하게 주어 액운 자체를 없애버리려는 의도였다는 것.[7] 실제로 준치는 가시 많은 물고기다.[8] 진짜 종가집은 광평대군 묘 옆에 있다.[9] 영순군의 손자인 서성군(瑞城君) 이옹(李滃)의 11대손[10] 광평대군파보에에서는 정안부정(定安副正)으로 되어 있음[11] 영순군의 손자인 안정부정(安定副正)[10] 이천수(李千壽)의 13대손[12] 흔히 영창대군이 막내 아들로 알려져 있는데 영성군이 막내다. 영창대군과 동갑이긴 하지만 생일이 느리다.[13] 영순군의 손자인 임정부정(臨汀副正) 이수정(李壽定)의 5대손[14] 안정부정(安定副正) 이천수(李千壽)의 14대손이며, 앞서 언급한 이경하하고 계보상으로 13촌 조카 관계에 있다.[15] 강채윤의 '새 글은 몇 자냐.'라는 질문, 아니 비웃음에 관한 대답.[16] 재미있게도 대왕 세종에서는 둘째 형인 '''수양대군''' 역을 맡았다.[17] 그런데 중반 심종수의 대사에선 정도전 사후 45년이라고 한다? 작가가 뒤늦게 수정을 한 것인지, 그저 실수인지.[18] 세종 26년(1444년) 12월 7일에 광평대군 이여(李璵)가 졸(卒)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