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노첸시오 2세
제164대 교황.
전임 교황 호노리오 2세가 선종할 무렵, 바티칸에서 떠오르던 차기 교황 후보자는 결단력 있는 개혁가 성향의 피에르토 피에르레오니 추기경이었다. 그는 피에르 아발라르와 같이 수학하였고, 클뤼니 수도원의 수도자로서 학문적 명성이 높았다. 하지만 그는 결국 선출되지 못하고 당시 산 안젤로 성당의 부제급 추기경이었던 그레고리오 파파레스키가 인노첸시오 2세로 등극한다.
그 이유는 당대 로마의 정치 상황에 있었다. 당시의 로마는 피에르레오니와 프랑지파니라는 두 가문의 대립이 지속되는 상태였고, 이들은 교황 선출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전임 교황이었던 호노리오 2세는 프랑지파니 파벌에 속해 있었는데, 피에르토 추기경은 피에르레오니 가문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피에르토 추기경은 인노첸시오 2세에 불복하여 대립교황 아나클레토 2세로 등극한다. 초반에는 로마 시민들을 대상으로 막대한 돈을 뿌린 피에르레오니 파벌이 유리했고, 결국 아나클레토 2세가 로마를 손에 넣고 인노첸시오는 로마를 떠나야 했다.
하지만 로마 외의 지역에서는 인노첸시오 2세의 인기가 더 많았다. 그는 가는 곳마다 환영을 받았고, 당시 교회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했던 크렐르보의 성 베르나르도가 인노첸시오 2세를 지지했다. 그는 아나클레토 2세의 출신이었던 클뤼니 수도원이 초기의 개혁적 성향을 버리고 타락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나클레토 2세를 몰아낼 결정적인 한 방이 부족한 상태였는데, 이를 타개하기 위해 양 측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로타르 3세를 끌어들이고자 했다. 당시의 로타르 3세는 호엔슈타우펜 가문과 권력 투쟁을 벌이고 있었고, 아직 로마에서 황제의 대관식을 치르지 못한 상태였다. 아나클레토 2세는 호엔슈타우펜 가문의 수장 콘라드를 파문하겠다는 제안을 했지만 로타르 3세는 시큰둥했다.
결국 아나클레토 2세는 제국 황제가 아닌 로마 아래의 시칠리아 백작 로지에르 2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는 로지에르 2세를 시칠리아 왕국의 왕으로 임명해 힘을 실어주었다. 이를 보고 로타르 3세는 인노첸시오 2세를 지지했다.[1] 로타르 3세는 1132년 로마로 진군하였으나 로마 전역을 점령하지는 못했다. 그리고 로타르 3세는 1133년 6월에 대관식을 하고 본국으로 튀어버린다(...) 결국 인노첸시오 2세는 다시 도망쳐야 했다.
대치 국면은 1135년에 전환을 맞는다. 동로마 제국이 점유했던 이탈리아 남부를 점령하고 약탈하던 시칠리아 왕국의 로지에르 2세를 몰아내기 위해 동로마 황제 요안니스 2세가 로타르 3세에게 돈을 지원할 테니 로지에르 2세를 몰아내 달라는 요청을 보낸 것이었다. 내부 권력 투쟁에서 승리한 당시의 로타르 3세는 1136년에 대군을 이끌고 로마로 향했다. 하지만 로지에르 2세는 로타르 3세가 고령이라는 점을 이용하여 지연전을 펼쳐 생각보다 잘 버텨냈다. 결국 로타르 3세는 티롤 지방에서 사망한다. 하지만 문제는 몇 달 뒤에 아나클레토 2세가 선종해버렸다는 것(...) 명분을 잃어버린 로지에르 2세는 인노첸시오 2세를 공식적을 인정함으로써 대립을 끝내고자 했다. 하지만 인노첸시오 2세는 좋은 조건을 무시하고 시칠리아 왕국을 공격한다. 하지만 여기서 져서(...) 인노첸시오 2세는 로지에르 2세의 시칠리아 왕국 왕위를 공인해야 했다.
결국 대립교황을 몰아냈지만 상처만 남은 인노첸시오 2세의 남은 치세는 그다지 행복하지 못했다. 로마 사람들은 인노첸시오 2세를 항상 아나클레토 2세에 비해 낮게 평가했고, 그 동안의 대립은 북이탈리아의 여러 도시들이 본격적으로 자치를 추구할 여유를 주었다. 심지어 막판에는 로마에서 원로원이 부활하기까지 했다.
[1] 로타르 3세는 과거 보름스 협약에서 축소된 황제의 주교 서임권을 되찾고자 하는 딜을 걸었지만, 베르나르도를 중심으로 결집한 교회의 압력으로 결국 대관식을 받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