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타르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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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어: Lothar III. (로타르 3세)
이탈리아어: Lotario II (III) (로타리오 2세/3세)
라틴어: Lotharius III (로타리우스 3세)
생몰: 1075~1137
재위: 1125~1137(독일 왕), 1133~1137(황제)
신성 로마 제국 주플린부르크 가의 황제.
1. 힘을 키우다
1075년 6월에 유복자로 태어났다. 로타르의 아버지인 주플린부르크의 게브하르트는 하인리히 4세 황제에 대항하는 전투에서 죽었다. 토지를 구매하거나 유산을 얻고 작센 도처에 결혼 동맹을 맺은 후에 로타르 3세는 빌룽, 노르트하임, 부르노넨 가문의 영지를 얻었고 북쪽 공작령의 우세한 토지 소유자가 되었다. 하인리히 5세가 아버지 하인리히 4세와 싸우기 위해 그의 도움을 받는 조건으로 1106년에 작센 공작이 되었다. 작위가 승진해서 대담해지고, 공작들에 대한 새로운 세금의 시행에 화난 로타르 3세는 하인리히 5세의 통치에 반대해 반란을 일으켰고 서임권 투쟁 동안 하인리히가 작센에 통치력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했다. 1115년에 벨페숄츠 전투에서 그의 군대는 황제의 군대를 이겼다.
1125년에 하인리히 5세가 죽자 로타르는 마인츠 대주교에 의해 완벽한 후계자이며 제국의 수상으로 보였다. 광대한 토지를 가진 지주로서 로타르는 힘을 가져왔으나 나이가 많고 아들이 없었으며 귀족의 잠재력이 없었다. 그래서 호엔슈타우펜 가문의 당주인 슈바벤 공작 프리드리히 2세와 논쟁을 벌인 후에 힘겹게 독일 왕으로 선출되었다. 그의 선출은 세습되는 승계의 개념으로부터 벗어났다는 것에서 주목을 받았다. 제국과 교황 사이의 복잡한 투쟁에 관해 다소 순진한 로타르는 교황의 확인 절차를 통해 나중에 로마에서 해석된 상징적인 행동에 대해 동의했다.
같은 해에 일어난 보헤미아와의 전쟁은 패배로 끝났다. 보헤미아 인들에 의해 투옥된 사람들 중에는 미래에 브란덴부르크 변경백이 되는 알브레히트가 있었다.
2. 슈타우펜과의 분쟁
로타르 3세의 치세 동안, 벨프 가와 프리드리히 2세와 그의 동생 프랑켄 공작 콘라트가 이끄는 슈타우펜 가 사이에 승계권 분쟁이 벌어졌다. 슈타우펜 가는 잘리어 가의 사유지와 하인리히 4세와 하인리히 5세가 소유했던 왕실 영토를 요구했다. 레겐스부르크에서 회의를 열어 귀족들의 인정을 받아 왕실 영토를 차지하려는 로타르의 시도는 슈타우펜 집안의 반발을 불러왔다. 슈바벤의 프리드리히 2세는 제국 파면의 벌을 받았고 콘라트는 프랑켄을 빼았겼다. 그리고 브루고뉴의 관리자는 취링겐 가문의 콘라트에게 전해졌다.
슈타우펜 가는 많은 제국 도시들과 오스트리아, 슈바벤 공작령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이들은 로타르에 대항하여 콘라트 3세를 대립왕으로 선출했다. 1128년에 콘라트 3세는 밀라노 대주교에게 왕관을 받아 이탈리아의 왕이 되었다. 로타르는 콘라트가 이탈리아로 떠난 것과 자원이 부족한 것을 이용하여 슈타우펜 가를 공격했다. 반대편에 서서 지원하던 강력한 두 도시 뉘른베르크와 슈파이어가 1129년에 함락당했다. 콘라트는 이탈리아에서 아무런 위치도 세우지 못해 실패했고 1130년에 아무런 소득없이 돌아와 로타르 3세가 승리하게 되었다.
3. 교황과의 관계
1130년에 두 명의 교황이 선출되자 양 세력은 로타르의 지원을 요청했다. 로타르 3세는 상황을 이용해 교황에 대한 황제의 힘을 다시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