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리야 레핀

 


일리야 예피모비치 레핀( Илья́ Ефи́мович Ре́пин)
(1844년 8월 5일 ~ 1930년 10월 29일)
1. 개요
2. 레핀의 유명 작품들


1. 개요


19세기 러시아 사실주의 예술을 대표하는 화가이자 인물화의 거장.
1844년 우크라이나의 작은 도시 츄구예프에서 한 하급군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미술에 재능을 보여 상트 페테르부르크 미술아카데미[1]에서 이반 크람스코이에게 교육을 받았다. 1871년 성서를 주제로 한 <야이로 딸의 부활>로 바실리 플레노프와 공동으로 아카데미 졸업작품전에서 금상을 받았다 그는 이것으로 일급 공식화가 자격을 취득했고 우수 연수생으로 6년간 해외 유학의 기회를 잡았다.
1873년 5월 유럽여행을 떠났다가 1876년 예정보다 일찍 귀국하여 <볼가 강의 배 끄는 인부들>, <성직자>,<황녀 소피아 알렉세예브나>, <쿠르스크 현의 십자가 행렬> 등을 발표하였다.19세기 후반 러시아 미술은 로맨틱,네오클래식적 접근을 털어내고 리얼리즘을 중시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었다. 레핀은 바실리 페로프. 바실리 수리코프 등과 함께 <이동전람파>를 구성해 러시아 사회가 안고 있는 정치적,사회적 모순들을 사실주의적인 묘사를 통하여 민중들에게 알리기 위해 러시아 전역을 순회하며 대부분 궁핍하고 고통을 받으면서도 인내하며 사는 민중들의 모습과. 도시 노동자들과 민중들을 계몽하는 인텔리들의 모습을 주로 그렸다.
초상화에도 일가견이 있었는데, 톨스토이, 고골, 투르게네프 등의 저명한 러시아 문학가들은 물론이고 왕족과 귀족, 우아한 상류사회 여성 등 문화계의 거의 모든 유명 인사들이 레핀의 모델이 되었다. 1894년 레핀은 상트페테르부르크 미술 아카데미의 교수로 임명되어 1907년 교수직에서 은퇴할 때까지 학생지도에 전념했다. 1901년에는 러시아 국가 의회 100주년을 기념하여 대형 프로젝트를 의뢰받아. <1901년 5월 7일 국가의회 100주년 기념회의>를 그렸다. 그 후 오른손 관절의 통증으로 인해 왼손으로 그리려고 노력했지만 이전의 명성에 걸맞는 작품에는 미치지 못했다는 평을 받았다. 54세 나이인 1898년, 러시아령 핀란드의 쿠오칼라(Kuokkala)로 이주한[2] 레핀은 이후의 생애 대부분을 쿠오칼라에서 보냈고 1930년 9월 29일 그곳에서 8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3]
레핀 본인은 사회주의 운동에는 큰 관여를 하지 않았지만 이후 소련 정권에서 레핀은 상당한 위치를 차지했다. 레핀의 화풍을 이어받은 인사들이 이미 소련 미술계의 주요 인사로 활동하였고, 무엇보다 레핀의 리얼리즘(사실주의) 화풍은 이후 소련의 사회주의 리얼리즘으로 잘 이어지면서 소련 미술가들 사이에서 견본으로 다만 레핀 본인의 정치적 성향은 소련의 사회주의와는 거리가 멀었는데 차르제가 무너지고 공화정이 들어선 러시아 혁명 당시 2월 혁명에는 지지를 보냈으나 볼셰비키의 10월 혁명은 회의적으로 보았고 핀란드가 독립하고 소련 정권이 수립된 이후 소비에트 당국자들이 수차례 귀국을 권유했지만 이를 거절하고 사망할 때까지 핀란드에 남있다. 다만 소련 당국이 자신에게 성의를 보여준점을 감안해서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에 작품전시회를 여는것은 허용했고 작품 몇점도 기증하기는 했다.

2. 레핀의 유명 작품들


''' '볼가 강의 배 끄는 인부들' '''
'''(Бурлаки на Волге)'''
1873년, 상트페테르부르크 러시아박물관 소장
볼가 강에서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배를 인력으로 끌고 가는 농민들의 고된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린 작품으로 레핀의 리얼리즘 대표작으로 알려져 있다.

''' '폭군 이반, 아들을 죽이다. 1581년 11월 16일' '''
'''(Иван Грозный и сын его Иван 16 ноября 1581 года)'''
1885년, 모스크바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소장
이반 4세가 자신의 황태자인 이반을 지팡이로 폭행해서 죽인 장면을 상상해서 그린 작품이다. 제목의 '1581년 11월 16일'은 이반 4세가 이 일을 저지른 날짜이다. 이 그림을 그리기 전 알렉산드르 2세가 폭탄 테러로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 일로 러시아 사회는 큰 충격에 빠졌고 레핀도 예외가 아니었다. 레핀은 여기서 영감을 얻어서 이 이반 4세의 일화를 통해 그 광기와 공포의 감정을 비판적으로 묘사한 것이다. 이반 4세의 모델은 시장에서 허드렛일을 하던 어느 노인의 얼굴을 레핀이 발견해서 따왔고, 황태자 이반의 모델은 당시 레핀이 매우 아꼈던 작가인 프세블로드 가르쉰(Всеволод Гаршин)의 얼굴에서 따왔다.
그런데 레핀의 의도와는 다르게, 이 그림은 러시아에서 이반 4세를 재평가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이전까지 이반 4세는 단순히 난폭한 폭군이란 평가만 받았었다. 그러나 이 그림에서는 이반 4세를 대단히 역동적이고 생생하게 묘사해서 '인간미'를 느끼게 할 정도였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이반 4세의 또다른 모습을 바라보게 되었고, 그가 단순한 폭군이 아닌 입체적인 면모를 가진 군주라는 재평가를 내리게 된 계기가 된 것.

''' '오스만 제국의 술탄 메흐메트 4세에게 답장을 보내는 자포로제의 코사크' '''
(Запорожцы пишут письмо турецкому султану)'''
1891년, 상트페테르부르크 러시아박물관 소장
오스만 제국메흐메트 4세카자크 족에게 항복을 권고하는 편지를 보내자, 이에 대해 어마어마한 쌍욕이 담긴 답장을 보내서 복수했다는 유명한 이야기를 묘사한 그림이다. 해당 이야기의 자세한 내용은 카자크 문서 참조.

''' '노보데비치 수도원에 유폐된 소피아 공주' '''
'''(Царевна Софья Алексеевна в Новодевичьем монастыре)'''
1879년
표트르 1세의 이복누나인 소피아 알렉세예브나 공주가 표트르에 대항하는 역모를 꾸미다 발각되어 수도원에 유폐된 모습을 그렸다. 창 밖에 보이는 것은 소피아의 부하가 교수형을 당한 시신. 하지만 소피아의 표정과 태도는 패배에도 불구하고 굴복하지 않는 의지력과 당당함이 배어나오고 있다.
[1] 이후 레핀의 이름을 본따 레핀 아카데미라 명명되었다. 흔히 말하는 레핀대.[2] 1918년 핀란드가 러시아에서 떨어져 나가 졸지에 레핀은 핀란드인이 되었다. 러시아 내전 때 이곳에서는 러시아 적군, 백군이 치열히 싸웠으며 핀란드 통치하에도 러시아인들이 더 많았다.[3] 쿠오칼라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러시아로 편입되어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일부가 되었는데 1948년 레핀의 업적을 기려 레피노(Репино)로 이름이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