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자크

 


1. 개요
2. 명칭
3. 역사
3.1. 기원
3.2. 근대
3.3. 19세기 중엽~20세기 초반
3.4. 카자크 탄압에 대한 관점 차이
3.5.1. 관련 문서
3.6. 2차 대전 이후
5. 문화
6. 각종 매체의 카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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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러시아 제국의 카자크 기병.(컬러 복원)
적백내전 당시 백군 소속 돈 카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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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군 소속의 카자크인들. 독일 국방군 마크가 붙어 있다.
소련군의 카자크 예식복.(쿠반 카자크)[1]

1. 개요


러시아우크라이나 일대에 있었던 슬라브계 민족이자 군사집단. 다만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카자크는 그 기원을 달리하기에 별개의 집단이다.
민족적 기원보다는 특정한 지역에서 형성된 종족으로서, 전쟁에 기병대로 자주 나갔기에 일종의 군사민족이라고도 할 수 있다. 또한 이들은 주류 러시아인과 구분되는 문화를 유지했고 러시아 근현대 역사의 여러 전쟁에서 러시아군, 소련군 소속으로 정예 기마 군사집단으로 명성을 떨쳤다. 또한 우크라이나에서는 폴란드와 러시아에 저항하여 자유를 지켰다는 점에 주목해 오늘날 민족 정체성의 축을 차지하는 종족이라고 할 수 있다.

2. 명칭


러시아어로는 Казаки(카자키)라고 부르고, 원조인 우크라이나어로는 Козаки(코자키), 폴란드어로는 Kozacy(코자치) 체코어와 슬로바키아어로는 Kozáci(코자치), 벨라루스어로는 Козакі(코자키). 영어로는 Cossack(코삭, 코사크)라고 한다.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족과 발음이 비슷한데, 영어로는 어느정도 구별이 되지만 러시아어로는 Казаки와 Казахи로 한 글자 차이라 혼동하기 쉽다.[2] 그러나 카자크족은 슬라브계 민족이고, 카자흐는 튀르크계 민족이며, 둘은 별개의 종족이다.
일반적으로 학자들은 카자크에 대한 어원은 튀르크어로 '얽매이지 않은 자들'이란 뜻의 카자크(Qazaq)라고 본다. 이 설이 맞다면 카자흐스탄과 같은 어원이다. 그러나 그 밖에도 많은 설이 있다. 이를테면 유명한 사전 편찬자인 'В. 달리'는 '방랑하다', '떠돌아다니다'를 뜻하는 중앙아시아의 '카즈마크'에서 나왔다고 주장하면서 유목 생활을 한 키르기스인들은 자신을 '카즈마크'라고 불렀다고 하는 걸 그 근거로 삼는다.
골루봅스키와 같은 사학자들은 폴로베츠인들 사이에서 '수호자', '경비원'으로 쓰인 '카자크'란 단어가 러시아어로 쓰였다고 생각한다.[3] 폴란드어의 염소를 뜻하는 말인 코자(koza)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는데 그닥 지지를 못 받는다.

3. 역사



3.1. 기원



카자크의 형성 과정은 여러 복합적인 요인이 섞여 들어갔고, 형성 시기도 특정한 시기로 단순화하기는 어렵다. 그에 대해서 여러 학설이 나왔는데, 가장 이른 시기를 주장하는 사람은 '바실리 글라즈코프'로, 동로마, 이란, 아랍의 문헌에서 10세기에도 우크라이나 코사크가 스텝 지역에 존재했다는 주장을 펼친다. 이에 대해선 러시아의 사학자 카람진도 1223년 몽골군동유럽 침략 이전에도 존재했다고 언급하면서 힘을 보태고 있다.
본격적으로 코사크가 역사 속에서 주요한 세력으로 등장하는 것은 15세기다. 이 시기를 보통 '우크라이나의 코사크 시대', 짧게 '코사크 시대'라고 하기도 한다. 이 우크라이나 코사크들은 14세기 즈음에 형성됐다고 추측된다. 13세기 몽골 제국의 침략으로 키예프 공국과 여러 제후국이 사라지고 몇몇 슬라브 인들이 남부 러시아 스텝 지역으로 흘러들어가 반유목화가 된 것을 그 기원으로 잡기도 하고, 몽골군에서 떨어져 나간 타타르인들과 튀르크유목민족의 일부가 이 시기에 슬라브화가 되어 카자크를 형성했을 것이란 학설도 있다. 아마 코사크 집단의 기초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이 2가지의 민족 그룹이 가장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 후, 리투아니아 대공국 시절 동부 우크라이나를 유목민들로부터 자체적으로 방어하던 사람들과 모스크바 대공국폴란드 왕국에서 지주의 억압에서 피하고자 목숨 걸고 정부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스텝으로 들어온 사람들도 카자크 형성 과정에서 무시할 수 없다. 이러한 여러 민족, 여러 지역에서 온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뭉쳐 '자유인 그룹'을 형성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드네프르 강과 돈 강으로 하류로 내려가 자신들의 공동체를 만들어 그곳에서 반농반목 생활을 했다. 유목민의 침략 때문에 재산을 가지고 이동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해서 유목도 겸했으나, 우크라이나의 흑토 지대가 매우 비옥하여 농사가 쉽고 소출이 높았기 때문에 농업도 병행되었다. 14세기 말엽, 자포로제 코사크와 돈 카자크의 모태가 되는 공동체가 만들어졌다. 1380년, 이들 카자크들은 모스크바 대공국의 '드미트리 돈스코이' 대공에게 돈 강의 성모 이콘을 바치고 쿨리코보 전투에서 마마이에게 대항해 함께 싸웠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이들이 타타르에 대항한 슬라브족의 본격적인 첫 번째 반기라고 할 수 있는 쿨리코보 전투에 참전한 것으로 알 수 있듯이, 이들 자유인 집단은 드네프르 강에서 더 남쪽에 있는 크림 반도의 크림 타타르(크림 칸국)의 위협에 직접 노출돼 있었다. 킵차크 한국은 돈스코이 대공이 쿨리코보 전투에서 그들을 격파하고 이반 3세모스크바 대공국의 독립을 선언한 때부터 세력이 상당히 약화돼 있었지만 오스만 제국의 보호국이 되기도 한 크림 한국은 18세기 이전까지 러시아엔 무시할 수 없는 위협이었다.
남부에서 계속해 이들이 심각한 위협을 가하자, 이들 '자유인 집단'은 자체적인 무장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 시기에 이르면 전엔 농노의 의식이 머리에 들어 있던 자들 대신 자유로운 땅에서 자유인 의식을 갖춘 세대가 이들 집단의 지도 세대로 떠오르게 되고, 이 세대 교체는 독자적인 코사크 집단의 형성을 가속했다.
이들은 그 후 국경 지대 마을에서 반 자치 조직을 유지하며 정부의 통제를 받는 '국경 지대 카자크'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 왕국에서 용병으로 생계를 꾸려나가거나[4] 요새화된 그들만의 수도, 드네프르 강 유역의 자포로제 세치에서 경제적으로는 등록 코사크보다 궁핍하지만 자유롭고 독자적인 집단을 만들어 그들만의 공동체에서 생활하는 3가지 형태로 나뉘었다.
물론 자포로제 카자크가 폴란드군을 돕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엄연히 폴란드 국왕의 직속 봉신일뿐더러 오스만 제국우크라이나를 점령할 경우, 자신의 존재 자체가 위험해지기에 이들은 자발적으로 폴란드와 오스만간의 전쟁에서 폴란드를 돕기도 했다. 그리고 자포로제 카자크는 바다에서도 유명했는데, 이들은 자신들이 건조한 작은 배로 흑해의 제해권을 완벽히 장악했다. 또한 발트해 전쟁에서도 자신들이 건조한 배를 인력으로 북방까지 운송하여 명성을 떨쳤다.
용병 카자크는 비록 그들의 정교회 신앙과는 다른 가톨릭을 믿는 폴란드 정부의 통제를 받긴 했으나, 카자크 최대의 위협을 타타르와 오스만 제국으로 생각했기에 그렇게 큰 불만을 느끼진 않았다. '공생 관계'가 폴란드 정부와 등록 카자크의 관계를 가장 잘 표현하는 말이 될 것이다. 또한, 서로의 가치관과 사회가 달랐기에 이들 세 카자크 집단은 자주 반목을 했다고 한다.
당시 카자크의 이미지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 자포로제 코사크는 세치(Sicz)란 요새화된 마을에 거주했으며 헤트만(hetman)이라 불리는 단장 아래 일치단결한 공동체를 갖고 있었다. 카자크는 기본적으로 평등사회였기에, 단장은 많은 카자크들에게 존경을 받는 원로들 중 선출됐다. 평시엔 단장에게 농담 따먹기를 하기도 하고, 공개적으로 모욕하기도 했지만 전시엔 단장이 생사여탈권을 갖고 있었다. 또한 헤트만은 구성원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면 축출될 수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종신직이었다.
무지막지하면서도 재미있는 법으로도 유명했다. 빚을 갚지 못한 자에게는 누군가 대신 빚을 갚아줄 때까지 대포에 얼굴을 마주한 채 묶어둔다는 법이나, 물건을 훔친 자가 잡히면 마을 한복판에 묶어놓고 옆에 몽둥이를 놓아두는 형을 선고했다. 지나가는 사람마다 1대씩 치고 가라는 것이다. 그리고 동족 중 누군가가 노예로 끌려가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구해내야 한다는 불문율도 있었다.
타타르와 오스만 제국에 의한 위협이 많이 줄어들자, 폴란드는 코사크를 종교적 문제로 박해하기 시작했다. 상술했듯 폴란드는 가톨릭을 믿고 카자크는 동방정교회외 다른 종교를 믿었기 때문이다. 물론 일부 코사크는 동방 카톨릭 교회로 개종하기도 했지만 폴란드 지주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기본적으로 포기하지 않았고, 이러한 박해에 자유가 상징인 우크라이나 카자크들은 폴란드에 대한 거대한 투쟁을 시작한다.
그 투쟁은 마침내 모스크바이반 뇌제의 사망 이후 시작이 된 동란의 시대가 종료된 후 동부 우크라이나로 세력을 확대하기 시작했을 때, 우크라이나 카자크의 지도자인 보흐단 지노비 미하일로비치 흐멜니츠키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왕국에 대한 무장 봉기를 일으켰다가 밀리게 되자 모스크바로 귀순하면서 체결한 페레야슬라프 회의 덕분에 종식될 기미가 보이기 시작한다. 혼란에서 벗어난 로마노프 왕조가 우크라이나 코사크를 본격적으로 지원해주기 시작한 것이다.
흐멜니츠키가 코사크를 지도하는 짧은 시기, 그리고 그 이후로도 러시아 정부는 코사크에 대한 자치를 상당수 인정해주고 대신 몇 가지 의무를 수행하도록 했다. 카자크는 러시아 제국을 위해 군사력으로 그들의 의무를 다해주는 대신, 세금이나 부역, 농노제도에서 벗어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이들의 자치특권은 결국 얼마 가지 못해 박탈당했고 결국 예카테리나 2세 시기 자포르제 코사크의 특권은 소멸되고 러시아의 직할령으로 떨어지고 만다.

3.2. 근대


근대에 들어서 몇몇 카자크들은 러시아군에 합류해서 러시아시베리아 개척에 앞장서 토착민들과 전투를 벌였다. 가장 유명한 것은 물론 이 시기 이반 뇌제 시기에 이루어진 '예르마크'의 동방 원정으로, 예르마크는 전사했지만 시비르 칸국은 수도 튜멘도 잃고 마지막 칸 쿠춤이 살해되어 멸망했다.
이들의 광속과 같은 확장은 러시아 제국이 편하게 시베리아 개척을 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굳이 강요하지 않았는데도 이루어진 카자크의 야쿠츠크 개척이 가장 대표적인 사례이다. 야쿠츠크의 연교차는 약 섭씨 100도. 야쿠츠크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진짜 헬게이트다. 표트르 이바노비치 베케토프와 그의 동료 카자크 30명은 현재 서유럽과 비슷한 크기이지만, 그보다 훨씬 혹독한 야쿠츠크 지역을 미국 개척자들의 '''약 6배 속도로''' 개척했다고 한다.
또한, 포야르코프, 데지뇨프, 아르라소프 등 다른 카자크 지도자들의 주도하에 사할린, 오호츠크해, 서태평양 연안 등이 러시아 제국의 지도에 추가됐다. 러시아 정부는 이들에게 개척의 대가로 선물, , 무기, 화폐를 줬다고 한다. 이 시기에 지간스크, 베르호얀스크, 자시베르스크, 스렛네콜릠스크와 같은 도시들이 생겼다. 현지 박물관에선 이런 문건이 있다.

"12월 25일, 위대한 황제 미하일 표도로비치 로마노프가 온 나라에 선포하노니, 짐은 위대한 황자와 국가를 위해 종 된 이들과 함께 레나 강가에 도시를 세웠다. 짐이 오기 전, 레나 강과 야쿠츠크 땅엔 다른 도시가 없었다. 나 표트르는 야쿠츠크의 왕 마미코프의 진영 앞에 도시를 세웠다."

그리고 배를 타고 흑룡강을 타고 내려와 청나라 군대와도 전투를 벌이고 조선 효종나선정벌에서 조선군과 맞붙기도 했다. 카자크는 도 잘 탄다. 흑해에서 배를 타고 오스만 제국의 해안을 약탈하러 다녔을 정도고, 시베리아 동서를 왔다갔다하려면 종으로 흐르는 예니세이 강, 레나 강 등 큰 강과 지류들을 드나들어야 한다. 니콜라이 고골의 소설 타라스 불바에서도 배를 건조하며 원정을 준비하는 내용이 있을 정도다.
그러나 카자크들의 영토 확장에 흠결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미국 등 신대륙 국가에서 원주민들과 있었던 문제와 비슷하게, 카자크들은 영토 확장 과정에서 식량을 제대로 보급받지 못했기 때문에 시베리아에 살던 현지 주민들과 갈등을 빚고 문제를 일으켰다. 카자크들이 원주민들의 토지를 강탈하는 일이 빈번했으며 사적으로 착취하고 노예로 삼는 등, 잔인무도한 짓을 저질렀다. 제국 정부는 카자크와 시베리아 원주민 사이의 갈등으로 골머리를 썩혔고, 19세기 중엽이 돼서야 간신히 시베리아 원주민들과 화해할 수 있었다.
러시아 제국의 영토 확장 초창기엔 볼가 강 강가에 볼가 카자크가 생성됐으며 후에 더 넓은 지역으로 확장하면서 18세기부터 캅카스의 테레크 카자크, 우랄의 야이크 카자크, 바이칼 카자크, 우수리 카자크, 시베리아 카자크 등이 더 형성됐다.
아조프 카자크, 쿠반 카자크와 같이 우크라이나의 다른 지역에도 카자크 집단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이들 중 캅카스나 더 밖의 지역으로 진출한 카자크들은 그곳의 타민족, 특히 캅카스의 산사람들이나 여타 무슬림들의 영향을 많이 받기도 했다. 톨스토이의 <카자크인들>의 '테레크 카자크'가 대표적. 테레크 카자크의 무곡(舞曲). 캅카스 문화적 요소가 뚜렷하다
한편 정부와의 협력이 더 많아지는 동시에 정부와의 갈등도 심해져 갔다. 폴란드와의 관계처럼 종교 문제로 인한 갈등이 심하지는 않았지만,[5] 자유의 제약이 점점 강해지고, 농노들이 계속 카자크 마을로 도주하는 일이 발생하자, 카자크의 특권 중 몇 가지가 박탈되는 가운데 러시아 제국이 더 많은 봉사와 의무 이행을 요구하면서 자유로운 생활, 관습과 그 의무가 충돌하며 갈등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터키와의 관계도 갈등의 핵심 요소였다. 러시아 정부는 터키와 분쟁을 사서 겪고 싶진 않았다. 그러나 자치권이 있는 카자크들은 이슬람 터키를 매우 혐오해 자신들의 마음대로 터키 국경 지대를 침범하고 약탈하는 일이 잦아졌던 것이다. 이걸 러시아 정부는 제약을 가하려 하고 자유에 제약이 계속 심해지자, 많은 봉기가 일어났다.
특히 정부와의 협력이 본격화된 17세기와 18세기 러시아 역사에서 거대한 봉기는 카자크 주도하에 일어난 봉기에 농민 봉기나 다른 봉기가 함께 엮이면서 거대화된 경우가 많았다. 대표적으로 스테판 라진[6], 불라빈, 그리고 황제를 참칭했던 예멜리안 푸가초프의 봉기가 있다. 푸가초프의 난을 배경으로 알렉산드르 푸시킨대위의 딸을 집필했다.
또한 표트르 대제 시절엔 대북방전쟁에서 스웨덴의 칼 12세를 지원하기도 했다. 이때 카자크의 지도자는 이반 마제파인데 흐멜니츠키와 마찬가지로 우크라이나 화폐에 그 얼굴이 새겨져 있다. 바이런은 마제파란 시에서 그를 칭송했고, 러시아인 푸시킨은 이에 반발해 그의 서사시인 '폴타바'에서 마제파를 폭풍 디스한다.
어쨌든 많은 저항이 러시아 정부에 의해 진압됨에 따라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카자크는 차츰 러시아 사회에 흡수됐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카자크의 자유는 계속 축소됐다. 불라빈의 봉기 이후 돈 카자크의 자치는 소멸됐고, 푸가초프의 난으로 우크라이나 카자크의 중심지 자포로제 세치가 해체됐으며, 반란의 주역이던 야이크 카자크는 우랄 카자크로 개칭됐다.
그러나 이들은 여전히 많은 전쟁에 동원돼 그 용맹성을 떨쳤다. 러시아 차르의 근위대로도 활약하기도 했을 정도. 러시아 차르는 카자크에게 '카자크의 대수령' 칭호를 받아 겸임했다. 고용된 카자크는 그 대가로 황제의 친위세력으로 많은 혜택을 받아 그 숫자도 120만까지 늘어났다. 이런 배경으로 황제의 명령을 받아 체첸까지 달려가기도.
다른 열강과의 싸움에서도 카자크는 그 진가를 발휘했다.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 그리고 특히 1812년, 러시아를 침략한 나폴레옹에 맞서 나폴레옹 전쟁이 시작됐을 때, 카자크의 용맹성과 잔혹성은 같은 대불 동맹 연합군의 지휘관들도 학을 떼게 할 정도였다. 나폴레옹은 "카자크는 존재하는 모든 경기병 중에서 최고이다. 내가 그들을 우리 군대로 끌어들일 수만 있다면, 나는 세계를 정복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평하기도 했다.
나폴레옹에 맞선 1812년의 조국전쟁 시기에 카자크들이 유럽을 휩쓸며 카자크는 두나이를 넘었다(Їхав козак за Дунай)와 같은 카자크 민요들이 독일이나 프랑스와 같은 유럽으로 많이 전파됐다. 카자크는 두나이를 넘었다의 경우엔 폴란드의 <송골매>란 민요로 바뀌었고 독일에선 많은 고전파 음악가[7]들이 편곡하기도 했다. 러시아 제국 내외에서도, 심지어 그들과 접촉이 거의 없었던 서유럽에서도 카자크는 용맹과 잔혹함의 상징, 강대한 러시아 제국의 스팀롤러[8]의 전형적인 이미지로 자리매김하게 됐다.

3.3. 19세기 중엽~20세기 초반


1800년대 중엽을 지나면서 카자크간의 계층 분화가 진행되기 시작한다. 원래 카자크는 모두가 평등하게 땅을 경작했고, 누가 더 높은 계급인지, 아닌지에 대한 구분이 없이 모든 구성원이 평등했다.
그런데 앞서 설명한 여러 차례의 농민 봉기 이후 러시아 제국 정부는 카자크의 자유로운 기질을 억누르기 위해 그들을 군대식으로 서열화했고[9] 여러 특권을 박탈하는 대신 카자크의 상층부를 러시아 귀족으로 편입시키는 등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게다가 카자크들이 황제의 호위병 역할을 해주고, 많은 전쟁과 전역에 꾸준히 참여하자 카자크들에게 주어지는 토지가 급격히 늘어남과 동시에 알렉산드르 2세의 농노 해방령이 발표되면서 계층 분화에 기름을 부은 꼴이 됐다.
본격적으로 토지를 넓게 경작하는 부유한 카자크들과 적은 토지를 경작하거나 토지가 없는 가난한 카자크의 구분이 생기기 시작했고, 카자크 촌으로 과거 농노였던 사람들이 토지를 경작하기 위해 몰려오자 비 카자크 농민도 카자크 마을의 중요한 구성원이 됐다. 19세기 후반이 됐을 때, 카자크 마을엔 이미 카자크뿐만이 아니라 러시아인이나 바시키르, 타타르와 같은 여타 민족이 꽤 많은 비중을 차지하게 됐으나 이들은 상층 카자크의 토지를 경작하며 하층 카자크와 비슷한 처지에 있었다.[10]
알렉산드르 2세의 대개혁으로 토지 분배와 계층 분화가 일어나긴 했지만, 카자키들은 다른 러시아 농민들보다는 훨씬 여건이 좋았다. 카자키들은 원래부터 자유민들이었기에 대다수 러시아 농민들이 가지고 있던 농지와 목초지 부족 문제, 토지 상환금 납부 문제에서 자유로운 편이었고, 카자키 마을이 가진 토지 안정성은 다른 유럽 러시아 지역의 농민 마을들보다 훨씬 높았다. 또한 카자키들은 대개혁 이후에도 러시아 가축 시장의 큰 손으로 군림했으며 마을에선 상품 작물 재배와 와인 주조 등 상업적 농업이 성행했다. 그리고 카자키 마을은 대개혁 이후에도 그 규모가 축소되지 않았기에 카자키들은 대개혁의 충격을 잘 견뎌냈다고 할 수 있다.
러시아 제국 정부는 이러한 일련의 조치를 통해 카자크를 충분히 통제하고 이용할 수가 있었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 러시아 혁명 이전까지, 러시아 제국 내에서 민중들의 항거가 계속되고 사회주의 사상과 노동 운동, 반봉건 운동이 널리 퍼지게 되자 카자크는 시위 진압대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로 떠올랐다. 특히 1905년의 1차 러시아 혁명 당시, 시위대에게 말을 타고 달려드는 그들의 모습은 오랫동안 러시아 민중들에게 각인됐다. 세르게이 예이젠시테인의 영화 《전함 포템킨》에서의 카자크들이 잔인하고 악랄한 모습으로 그려진 건 우연이 아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고 러시아에 볼셰비키 지지파인 적군과 황제, 멘셰비키, 입헌민주당 지지파인 백군 사이에 내전이 벌어지자 카자크들도 둘 중 하나의 세력을 선택해야만 했다. 원래 공동생활을 하던 카자크 족도 이때 쯤이면 계급 분화가 어느 정도 벌어졌고, 대체로 귀족 계급 및 고위계층 카자크인은 반혁명군 편에, 빈농 계열 카자크인들은 소비에트 편에 선다.
그래서 대추장 아타만을 비롯한 여러 상층부는 백군 기병대로 활약, 계층 분화로 인해 하층민에 속하던 카자크도 많은 수가 세묜 부됸니 원수 휘하의 적군 기병대로 들어가 활약했다. 이 시기에 러시아인뿐만이 아니라 카자크간의 동족상잔이 자행됐다. 러시아 내전의 연장 선상에서 발발한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에선 카자크의 오랜 숙적이자 카자크와 함께 유럽 대륙 기병대의 투톱을 자랑하던 폴란드 기병대와 잦은 전투를 벌였다. 러시아 내전은 끝내 소비에트 정권의 승리로 끝났고, 패배한 백군 측의 카자크는 대부분 백군들의 말로가 그렇듯이 외국으로 망명하든, 추방당했든 결국 러시아를 떠났다.[11]
이 시기의 좌우 갈등으로 쉴 새 없이 죽어나간 카자크인들의 비극을 묘사한 작품으로 '고요한 돈강'이 있다. 이 소설의 주인공 멜레호프는 카자크족 빈민 출신으로, 혁명과 내전이 벌어지자 계속 백군과 소련군을 오락가락하면서 좌우 갈짓자 행보를 보여준다. 바로 이것이 혁명에 휘말린 카자크족을 상징하는 모습이었다. 이 책의 저자 '미하일 숄로호프'는 노벨문학상을 받았고, 이 작품은 1950년대에 컬러영화로도 만들어졌다. 한국에서도 냉전 말기에 소련 영화 수입금지가 풀리자 비디오로 출시됐다. 사람을 마음대로 동원할 수 있는 소련에서 만든 영화답게 크고 웅장한 스케일에 CG 없이 그냥 사람들을 동원했다. 참고로 이 책은 서슬이 퍼렇던 스탈린 시절에도 높이 평가받았는데, 주인공의 갈짓자 행보 때문에 공산당 측에서 많은 비판을 했음에도 워낙 문학성이 뛰어나서 숄로호프는 큰 문제가 없었다고 한다.
일단 내전기 카자크는 굉장히 복합적으로 다뤄야 할 문제다. 미국인 존 리드가 쓴 <세계를 뒤흔든 열흘>이란 러시아 혁명 르포에서 블라디미르 레닌이 보여준 카자크관과도 너무 다르다. 세계를 뒤흔든 열흘에 따르면 당시 블라디미르 레닌과 레프 트로츠키는 "토지 없는 카자크들", 즉 빈농 계열 카자크들이 자신들의 소비에트를 만들어 볼셰비키에 합류하라고 했다.
1932년 소련에 대기근이 닥쳤는데, 불행히도 이 기근이 카자크들에게 직격탄을 먹여 그 지역 인구의 2~30%가 사망했다. 이 기근은 사실 카자크족만 아니라 우크라이나 근방과 캅카즈 지역 전체, 그리고 러시아 전역을 덮친 것으로 그 원인에 대해선 분분하다.(우크라이나 대기근 참조) 스탈린이 의도적으로 기근을 조장했다는 주장도 있고 스탈린의 집단화 정책의 부작용+자연재해를 원인으로 들기도 한다.
어쨌든 소련 정부는 이 기근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노력하기는 커녕 얼마 없는 곡식들을 빼앗아 카자크족을 죽게 내버려둘 뿐만 아니라 겨울에 많은 카자크족들의 집을 부수고 협동농장에 부역하도록 했고, 이는 많은 카자크족들이 겨울에 아사하거나 얼어죽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들의 상황이 너무 참혹해 소련의 작가 미하일 숄로호프는 스탈린에게 상황 개선을 촉구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이오시프 스탈린은 사회주의 리얼리즘 레전설 작가의 청원을 어여삐 여겨 들어주는 척하긴 했지만, 결국 달라진 건 거의 없었다.
참고로 같은 시기 수 백년 동안 우크라이나 스텝 평원을 두고 이를 갈며 서로 치열하게 싸워 왔으며, 정교도 신앙의 반유목 군사 공동체로서 카자크를 탄생하게 했던 숙적, 크림 한국의 후예인 크림 타타르 또한 대규모 이주 정책에 시베리아 복판으로 민족째 끌려가 대략 반은 죽고, 반은 소련이 망할 때까지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여기에 제2차 세계 대전홀로코스트까지 맞아 그 일대 도시 문화를 주도했던 폴란드인, 유대인 엘리트 집단까지 쓸려나가면서 현대 우크라이나의 인구 구성, 특히 코사크와 타타르족이 활약했던 남부 평원은 전통적인 모습과 큰 차이가 있으며, 이에 따라 당연히 역사적 소유권 분쟁은 2014년 중반 현재 볼 수 있듯이 안드로메다로 빠질 수밖에 없다.
러시아 내전 이후 카자크는 군대의 불순요소가 될까봐 처음에 소련군의 입대가 거절됐으나, 하도 입대 허가 청원이 빗발치듯 하니 1936년 전격적으로 허용된다. 이에 따라 소련군엔 카자크족 기병부대가 편성되기 시작했다. 군인의 용맹성을 제일로 치는 카자크족의 전통상 많은 카자크족들이 군대에 입대했다. 그리고 카자크 관련 군가도 많이 작곡되기 시작한다. 카자크, 우리 카자크, 카자크의 노래, 베를린의 카자크 등이 이 시기에 작곡된 대표적인 카자크 소재의 군가들이다.

3.4. 카자크 탄압에 대한 관점 차이


카자크족이 소련 체제에서 어떤 대접을 받았는지는 친서방적이거나 반소적인 카자크족[12]과 친소적인 카자크족 간의 이야기가 매우 다르다. 친서방적이거나 반소성향의 카자크들은 카자크족이 다른 불온민족들처럼[13] 대대적인 탄압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이들이 주장하는 바로는 소비에트 정부 수립 직후부터 카자크의 민족성과 종교를 말살하려는 목적으로 수만명을 강제수용소에 집어넣고 죽였고, 스탈린 치하엔 반유목생활을 하는 이들을 억지로 잡아다가 콜호즈 등의 협동농장에 부역시켰다고 한다. 그래서 이러한 강압정책으로 사망한 카자크들은 약 30만 정도로 추정되며, 이래서 소련 당국에 대한 반감이 극심했다고 말한다. 특히 1930년대 중반부터 반소적인 카자크 부족들 사이에서 카자크족들의 국가를 세우자는 독립사상이 생겨 저항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친소적인 카자크족들의 주장은 탄압 자체를 부정하는 경우와 탄압은 있었지만 과장된 면이 있다는 주장으로 갈린다. 친소적인 카자크들은 1936년에 카자크족의 전면적인 입대[14]가 허용되면서 소련군에 입대하기도 했다.
러시아 내전기 및 소련 치하의 카자크에 대한 탄압은 관점에 차이에 따라 의견이 갈려서 이분법적으로 단순히 나뉠 수 없다. 코사크들마다 성향이 달랐기 때문인데 당장 위에 차르 정권은 역사적으로 코사크들을 러시아 내부의 소수 민족이나 사회주의자, 자유주의자 탄압에 특화된 내부 치안 부대로 중용했다고 나와 있고 이 와중에 많은 수의 카자크가 특히 돈 강과 우크라이나 유역의 데니킨에서 시베리아의 콜차크까지 백군의 중심에 있었다.

3.5. 제2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엔 중반기까진 별 활약이 없었으나 전쟁말기 에게 초가지붕의 지푸라기를 먹여가면서 3일 동안 쉬지 않고 말을 달려 허둥지둥 내빼는 독일군을 '''로''' 도륙하는 용맹함 으로 독일군과 소련군 모두를 질리게 했다고도 한다.
러시아 내전 시기부터 소련군 기병부대엔 카자크족 출신이 많았으며, 기병 총감인 세묜 부됸니 원수부터 카자크 출신이라 알려져 있었다.[15] 많은 카자크족들이 나폴레옹 전쟁 때처럼 소련군에 복무해서 싸웠다.
산하에 카자크 기병을 부대로 둔 소련군이반 코네프 원수는 바그라티온 작전에서 카자크족의 용맹을 묘사하면서 "걔네들은 항복하겠다고 든 독일군의 두 손까지 잘라버리더군..."이라고 이들의 용맹성을 묘사했다. 물론 덕분에 독일군도 카자크들에게 항복하면 어떤 꼴을 당할지 알고 있었기에 카자크들을 사로잡으면 대부분 사살했다. 카자크들이 이렇게 잔인한 전쟁범죄를 저지른 이유는 카자크들의 전근대적인 사고방식 탓도 있었지만 당시 독일군은 동부전선에서 집단 학살을 계획적으로 진행했었고 포로로 잡힐 시에 끔찍하게 죽을 것이란 공포감이 만연했던 이유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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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6월, 독소전쟁 승리 기념 퍼레이드에서 붉은 광장을 행진하는 카자크족 부대.
독일군에도 카자크가 있었다. 나치 독일독소전쟁에서 포로로 붙잡은 카자크들과 전향한 보수파 장군이 함께 2개 카자크 기병 사단을 창설했으며[16] 독일인인 헬무트 폰 판비츠 장군이 지휘했다. 이들은 러시아 혁명 이후 망명했다가 후에 독일에 붙은 카자크족 출신 러시아군 장군들에 호응하거나 소련의 문화적 억압에 대한 반감 때문에 독일 측에 부역했는데 독일은 이들을 완전히 믿지 못했기에 소련군에 대한 작전보단 후방의 빨치산을 진압하는 데 자주 동원했다. 대전 말기에 이들은 SS 15 카자크 기병군단으로 편입됐고 대소련 방어전에 투입됐다.
이들은 후퇴하는 독일군을 따라 독일 영내로 진입했고, 독일이 항복하자 오스트리아의 린츠에서 연합군에 항복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카자크들은 연합군에게 항복했으니 안전하다고 믿고 있었다. 아돌프 히틀러의 후임으로 독일 대통령이 된 카를 되니츠도 이런 기대를 하고, 독일이 연합군과 강화를 맺으면 그나마 소련에게 넘겨지는 것보다 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얄타 회담으로 소련과 협의된 영국군은 이들을 몽땅 스탈린에게 넘겨버렸다.
이들은 결국 넘겨지자마자 지휘관급 인물들은 모두 교수형에 쳐해졌고, 나머지는 시베리아로 끌려갔다가 니키타 흐루쇼프 집권 시대에 사면되거나 일부는 그 사면마저도 다시 취소됐다.
여기에 연합군은 소련 시민이 아니었던, 러시아 혁명 당시 난민으로서 이주해 한 세대가 넘은 카자크들까지 전부 다 넘겼다. 민간인 포함 5만명이나 된다.[17]
물론 독일 편에 선 카자크들도 나름의 입장이 있었다. 스탈린과 공산당은 순응하지 않는 카자크족들을 포함해 반대파를 매우 가혹하게 탄압했으며, 그런 상황에서 자기들 탄압하던 공산당원들을 무찌르고 좋았던 옛날로 돌아갈 수 있다는 감언이설을 들었으니 솔깃할 만도 했다. 소련 입장에선 그저 지옥에서 올라온 악마들과 손잡은 반역자들일 뿐이지만.
007 골든 아이가 바로 이때 배신당한 카자크족의 아들인 006 요원(숀 빈 役)이 소련과 영국을 상대로 벌이는 복수극을 다루고 있다.[18]

3.5.1. 관련 문서



3.6. 2차 대전 이후


카자크족은 2차 대전 때의 용맹으로 전투종족의 명성을 회복했지만, 소련군이 전후 대대적으로 기계화를 추진하면서 기병 병과 부대가 모두 기계화 보병, 혹은 기갑 부대 등지로 개편되자 기병 부대 담당 카자크족은 또 다시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됐고, 카자크족 부대는 해체됐다. 이와 함께 카자크족 자치공화국도 폐지됐다. 그래서 이들은 그저 이후 농민이나 일반 시민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소련 공화국 전역에서 카자크 부흥 운동이 일어나게 되고 1989년 소련 정부가 약소민족에 대한 탄압을 인정했다.
소련 해체 이후 1992년러시아에서 억압받은 민족에 대한 복권을 보장하는 법이 제정되자 카자크 부흥 운동은 더욱 탄력을 받았다. 카자크에 대한 일련의 법들이 제정됨은 물론 1996년~1998년 2년 동안 10개의 보이스코(1만 명 이상일 경우)와 3개의 관구(2천 명 이상), 4개의 개별 집단이 등록됐다. 2002년 인구조사에 따르면 14만 명이 러시아에 살고 있으며 95% 이상이 러시아 남부 관구에 살고 있다.
카자크는 또한 그들의 단합과 문화 복원, 전통전승 등을 위해 텔레비전 채널을 개통하거나 인터넷 방송을 만들고 자체적으로 영화를 만들기도 해 활발한 복원 운동을 벌이고 있다. 문화센터는 물론 카자크 자체 미인대회도 열리고 있을 정도. 이런 카자크 문화 강조 노력 중에서 가장 성공한 것 중 하나가 바로 쿠반 카자크 합창단이다. 유튜브에 동영상이 많이 있다.
특히 이들이 주로 거주하는 남부 관구는 캅카스 계통의 비슬라브 거주민이 상당히 많은 지역인데, 예로부터 이 지역의 다양한 민족들의 기질은 유명했는데 특히 체첸인들이 악명이 높았다.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로 끌려간 고려인들도 같은 처지로 그곳으로 끌려온 체첸인들에게 크게 학을 뗄 정도로. 그런데 이런 체첸인들이 유일하게 겁내는 사람들이 바로 카자크족들이라고 한다.[19] 그 영향으로 체첸 사태 당시 체첸 및 잉구세티야에 거주하던 카자크들인 테레크 카자크 공동체들은, 사태 당시 대규모 러시아인 탈출 혹은 추방으로 괴멸적인 피해를 입었다. 물론 아타만과 테레크 카자크 자체는 여전히 존속중이지만 그 숫자는 크게 감소했다.
러시아군에서의 대우 또한 매우 좋아졌다. 러시아 정부는 카자크족 대추장(아타만)에게는 원수의 계급을 수여했고, 군인의 용맹을 제일로 치는 카자크족들은 다시 군대로 들어가서 러시아가 관여하는 전쟁들의 선봉에 서고 있다. 특수부대 혹은 해외 원정군의 일원으로 체첸 전쟁이나, 남오세티야 전쟁에서 크게 활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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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크림 위기 당시 러시아군 소속의 카자크 병사들.

4. 전투민족


비슷한 시기 영국이 자기 식민지 중에서 지정한 전투민족(Martial Race)의 러시아판이 있다면 바로 이들이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들의 위대함은 시베리아의 개척에서 진가를 발휘한다. 16세기 이후 몽골로부터 독립한 러시아가 이들을 앞세워 시베리아를 차지하고 있던 몽골계 유목민족들을 모두 멸망시키고 시베리아 동쪽 끝까지 정복해 나간 것. 예니세이스크, 하바로프스크, 토볼스크 등의 시베리아의 도시들은 대부분 이들이 요새화한 정착지에서 기원하며 '예르마크 티모페예비치(Ермак Тимофеевич)'가 이끄는 카자크 부대는 1581년 사설원정대 주제에 시비르 칸국의 수도까지 정복해 시비르 영주로 인정받기도 했다.
더군다나 유목민족답지 않게 해적질에 나선 적도 있다. 사하이다치니가 수령으로 있던 17세기 초엔 차이키[20]란 소형선박을 300척 가량 건조한 후 그 선박을 가지고 흑해를 휩쓸었다. 오스만 제국의 수도 이스탄불 근교지역까지 약탈하고 크림 반도의 노예시장을 털고 그 곳을 지키던 14,000명의 병력을 몰살시켜 버릴 정도로 활약하는 통에 흑해는 한때 '카자크 해'로 불리기도 했다.
나중엔 메흐메트 4세[21]가 보낸 오스만 제국 원정군을 패배시키고선 메흐메트가 항복을 권고하는 편지를 보내자 어마어마한 욕설이 담긴 편지를 보내 보복했다. 다만 이들이 보냈다는 편지의 원본이 남아 있지 않고 18세기에 만들어진 사본만 현재 남아있어 그 사본이 원본을 얼마나 정확히 필사한 것인지를 따지고 들어가면 답을 할 수 없으며, 때문에 편지의 판본 또한 여러 개가 있다. 현재는 민간에서 전승되는 과정에서 과장됐거나 창작된 것으로 보는 시각이 많지만, 사실이야 어찌 됐든 19세기 러시아를 대표하는 화가 가운데 한 사람인 일리야 레핀이 이 이야기에 관심을 보여 그림을 그린 덕에, 이야기 자체는 널리 알려졌다.
그가 보낸 편지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Я, '''султан і владика Блискучої Порти, син Мухаммеда, брат Сонця і Місяця, внук і намісник Бога на землі, володар царств Македонського, Вавілонського, Єрусалимського, Великого і Малого Єгипту, цар над царями, володар над володарями, винятковий лицар, ніким непереможний воїн, невідступний хранитель гробу Ісуса Христа, попечитель самого Бога, надія і втіха мусульман, великий захисник християн''', повеліваю вам, запорозькі козаки, здатися мені добровільно і без жодного опору, і мене вашими нападами не змушувати перейматись.

'''술탄이자, 무함마드의 아들, 해와 달의 형제, 하느님의 손자이자 총독으로, 마케도니아와 바빌론, 예루살렘, 상하이집트 왕국의 지배자, 황제 중의 황제, 군주 중의 군주, 패배할 줄 모르는 훌륭한 기사, 예수 그리스도의 묘를 지키는 단호한 파수꾼,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받은 자, 무슬림들의 희망이자 기쁨, 그리스도교의 위대한 수호자로서''' 짐은 그대들 자포로제 카자크인들이 어떠한 저항 없이 자발적으로 짐에게 복종할 것과 무의미한 공격으로 짐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을 것을 명하노라.[22]

'''Султан турецький Мухаммед IV.'''

'''오스만의 술탄 메흐메트 4세.'''

이에 헤트만 이반 시르코(Іван Сірко, 1610~1680)를 비롯한 자포로제 카자크들은 술탄의 편지에 너무나 기쁜 나머지 정성과 마음과 혼을 담은 답장을 보냈는데...

'''Запорозькі козаки турецькому султану!'''

'''자포로제 카자크들이 튀르크술탄 새끼에게 보낸다!'''

Ти — шайтан турецький, проклятого чорта брат і товариш і самого Люцифера секретар!

"오오 술탄 새끼야, 튀르크놈 악마이며 빌어먹을 마귀들의 형제이자 친구이자, 사탄의 따까리 같은 놈아!

Який ти в чорта лицар, що голою сракою їжака не вб'єш?

니새끼는 대체 얼마나 병신같은 기사이길래 자기 헐벗은 엉덩이에 달라붙은 고슴도치 하나 죽이지 못하느냐?

Чорт висирає а твоє військо пожирає. Не будеш ти синів християнських під собою мати, твого війська ми не боїмось, землею і водою будем битися з тобою!

악마의 똥이자 니새끼 졸개들이 쳐먹는 짬밥같은 놈. 너 같은 개새끼는 절대로 그리스도인의 아들들을 상대하지 못한다. 우리는 결코 네 군대를 두려워 하지 않으며, 땅 위에서나 물 위에서나 승리해서 니새끼의 애미를 따먹고야 말 테다!

'''Вавілонський ти кухар, македонський колісник, єрусалимський бровирник, Олександрійський козолуп, Великого й Малого Єгипту свинар, вірменська свиня, татарський сагайдак, кам'янецький кат, подолянський злодіюка, і всього світу і підсвіту блазень, самого гаспида внук і нашого хуя крюк, а нашого Бога дурень. Свиняча морда, кобиляча срака, різницька собака, нехрещений лоб, мать твою вйоб!'''

'''니새끼는 바빌론의 식모, 마케도니아의 바퀴 제작자, 예루살렘의 양조꾼, 알렉산드리아의 염소랑 떡치는 새끼, 상하 이집트의 돼지치기, 아르메니아의 돼지새끼, 포돌리아의 도둑놈, 타타르의 남창, 카먀니츠의 망나니, 그리고 이 세상과 저승을 통틀어 가장 멍청한 놈이다. 주님 앞의 천치, 독사의 손자, 우리 좆의 경련, 돼지코, 암탕나귀 엉덩이, 도살장의 똥개이자 이교도 대가리 같은 새끼, 니애미나 실컷 따먹어라!'''

Отак тобі козаки відказали, плюгавче! Невгоден єсі матері вірних християн!

이것이 자포로제 분들께서 니새끼같이 미천한 놈에게 하사하는 답장이다! 니새끼는 그리스도인의 돼지를 몰 자격조차 못 된다!

Числа не знаєм, бо календаря не маєм, місяць в небі,

이제 우린 끝을 맺고자 하는데, 우린 날짜를 알지 못하고 달력도 갖고 있지 않다.

місяць в небі, рік у книзі, а день такий у же, як і у вас,

달은 하늘에 떠 있고, 년도는 책에 쓰여있고, 날짜는 니새끼가 있는 곳의 날짜와 똑같으니까.

поцілуй у голе гузно кожного з нас!

그러니 우리 궁둥짝에 입이나 맞추려무나!"

'''Підписали: Кошовий отаман Іван Сірко зо всім кошом запорізьким'''

'''코쇼비 오타만 이반 시르코와 자포로제의 형제들이'''[23]

[image]

''' '오스만 제국의 술탄 메흐메트 4세에게 답장을 보내는 자포로제의 코사크' '''

'''Reply of the Zaporozhian Cossacks to Sultan Mehmed IV of the Ottoman Empire'''

- 일리야 레핀(Ilya Repin) 그림 참고 - 위키피디아 사전[24]

[image]

'''위의 그림의 시리아 내전 참전 러시아군 버전'''


위의 그림이 움직이는 버전.
카자크의 이런 악명(?)은 대한제국에서도 유명했다.

아라사의 서북부에 가살극(코사크)이 있는데 그 사람들은 사납고도 악독하여 구라파 사람들이 두려워했다.

그들은 우리나라에 와전되어, '가살극 사람들은 퇴화되지 않은 꼬리가 있으며, 사람 고기를 식량으로 삼는다'고 소문났는데, 그들이 요즘 우리나라에 들어와 강토를 짓밟으며 남하하였다. 안주의 어느 백성이 암말을 잡아매고 편자를 박다가 갑자기 돌아다니던 아라사 병사를 만나자 말을 미처 풀지도 못하고 달아났다. 아라사 병사들이 이 암말을 보더니 돌아가며 음란한 짓을 하였다. (이 소문을 듣고)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이들이 가살극인데 성품이 가장 음탕해서, 부녀자를 만나면 늙었는지 젊었는지도 묻지 않고 문득 범한다.'''

'''숫양처럼 하루에 수십 번이나 교합하므로 그들이 지나가는 곳에는 부녀자의 그림자도 없었다."'''

그들은 또한 의심이 많아서, 늘 약탈하다가도 네댓 명이 모여있는 것을 보면 침입하지 못하며, 먹을 것을 보면 소나 말처럼 반드시 생채로 씹어먹었다. 그들은 말도 잘 타서 한번 휘파람을 불며 달리면 눈 깜짝할 사이에 10여 리를 달렸다. '''용모가 비록 사납게 생겼다고는 하지만 사람을 만나도 죽이지 않았으며, 도리어 부드러운 빛을 보였다.''' 그들을 볼 때마다 이를 가는 자는 오직 왜놈뿐이었다.

이때 왜군은 황해에 퍼져 있으면서 자기 나라의 식량과 기계 운반 말고는 통행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고는 다른 배를 타고 우리나라 사람으로 분장하여 평안도 지방을 드나들며 아라사를 정탐했는데, 아라사가 그것을 알고 엄히 수색하여 머리 깎은 자를 보면 그 자리에서 죽였다. 그래서 스님들 가운데 죽은 자가 수백 명이나 되었다.[25]

날씨가 추워서 사람들이 방한모를 썼는데, 아라사 군사들이 사람들을 만나면 칼 끝으로 모자를 벗겨 머리를 깎았는지 아닌 지를 조사했다.

-매천야록, 황현-


5. 문화


율 브리너 주연의 영화 '''대장 불리바'''로 더 잘 알려진 니콜라이 고골의 소설 <타라스 불바>에 의하면, 어린아이 같은 식성을 가지고 있었다. 메밀죽을 얼마를 쑤든 간에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먹고, 남아돌면 남아도는 만큼 몽땅 먹어치워 버린 것. 게다가 도 무진장 퍼마신다. <타라스 불바>에선 두꺼운 코트를 껴입고 땀을 뻘뻘 흘리는 한 카자크 남자가 나온다. 타라스 불바가 "왜 더운데 그렇게 옷을 껴입고 땀을 뻘뻘 흘리나? 꼭 삶은 문어 같군"이라고 한마디 하자, 그 남자의 대답이 가관이다. '''"벗을 수가 없어요! 이 옷마저 벗었다간 당장에 술로 맞바꿔 마셔버릴지도 모르니까요."''' 특히 고골은 우크라이나와 관련이 깊은 작가인지라, 우크라이나 카자크가 소설의 소재로 자주 등장한다.
'비이(Вий)'란 꽤 복잡한 소설이 있다. 대부분은 당시 부패하고 세속화된 정교회를 비판하는 내용으로, 호마가 마녀와 만나 벌어지는 사건을 그리는 단편소설이다. 또한 호마가 기도해줘야 하는 '''시체가 밤만 되면 살아난다'''. 이 '비이(Вий)'에서도 주인공 수도자 '호마 부르투스'가 코자크 족장의 마을에서 기도를 하게 되는 상황이 등장하는데, 이때 호마가 도망치려고 하자 족장이 "이 친구들, 보드카만 주면 '''네가 죽었는지도 모르고 두들겨 팰 텐데?''' 성공하면 금화 천 개, 실패하면 빠따 천 대야."라고 정중히 '''협박'''한다.
상술한 페레야슬라프 회의와 본격적으로 로마노프 왕조 러시아와 관계를 맺게 된 계기인 정교회만 해도 비슷한 사례가 있다. 1620년, 가톨릭 측의 정교회에 대한 공세가 절정에 달해 우크라이나 현지엔 신자들은 아직 많이 있어도 교회 구조와 주교좌는 텅텅 비었던 시절에 예루살렘 총대주교였던 테오파네스 3세가 모스크바 총대주교로 선출된 필라렛 로마노프의 주교 임명을 축성하러 모스크바 까지 가던 중, 키예프 근처에서 자포로제 코사크 한 일당에게 붙들렸다.
테오파네스 총대주교에게 코사크들이 루테니아 정교회 조직을 다시 만들고 사제들을 다시 축성해 달라면서 부탁하며 하는 말이, "목자를 필요로 하는 양떼가 여기 있는데 이들을 버리고 가는 건 기독교인답지 못합니다. 하물며 '''이런 위험천만한 지방을 총대주교 성하께서 여행하시데 중간에 맹수나 도적떼의 습격을 당하실 수 있어 걱정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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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4년 나폴레옹의 패배 이후 파리에 들어온 카자크들은 파리의 카페란 카페는 온통 전세를 내서 당시 프랑스엔 없던 보드카를 달라고 난리를 피우는가 하면, 성질도 급해서 '''"빨리빨리!"'''를 외치면서 음식을 재촉하곤 했다고 한다. 러시아어로 '(더)빨리!'를 브이스뜨러!(Быстро)라고 하는데, 여기서 간단한 식사를 빨리 할 수 있는, 카페와 식당의 중간 정도 성격을 가진 프랑스 식당이란 뜻의 '비스트로(Bistro)'가 탄생했다. 스탈 부인은 충격과 공포에 '''"파리에 코사크 기병이라니!"''' 라고 한탄하기도 했다. 이때 카자크 민요인 카자크는 두나이를 넘었다도 서유럽에 알려져서 베토벤 등 몇몇 작곡가들이 이를 모티브로 작곡하기도 했다.
전통적으로 카자크족 하면 머리꽁지만 남겨놓고 박박 민 머리와 긴 콧수염, 테트리스에서도 등장하는 따라하기 힘든 춤으로 유명하다. 그리고 보드카! 전통의상으로 루바슈카(рубашка)란 품이 넓은 셔츠와 파자마 비슷한 바지를 입는데 이건 말 타기에 특화된 복장이다. 카자크들은 오늘날에도 말 타는 법을 배우고, 실제로도 자주 타고 다닌다.
또 쿠반카(кубанка)라 불리는 털모자를 쓴다. 특히 '쿠반카'는 샤쉬카(шашка)라 불리는 기병도와 함께 카자크군의 상징으로 여겨져 오늘날까지도 의장용으로 사용하고 있다. 의외로 카자크들은 전통민요를 많이 갖고 있는데, 폴란드우크라이나에선 '반두라'라고 부르는 전통악기를 연주하는 카자크들을 쉽게 볼 수 있다.
많은 문학작품과 영화에서 카자크들이 등장하지만, 특히 추천할만한 작품은 역시 고골의 <대장 불리바>(원제: 타라스 불바), 그리고 폴란드의 예르지 호프만 감독의 영화 <불과 칼로써 - Ogniem i Mieczem)>가 있다. 본래 '헨릭 시엥키에비치'의 동명소설을 바탕으로 한 이 영화는 한국에도 개봉됐고, <007 골든 아이>와 <엑소시스트>에도 출연한 적 있는 여배우 '이자벨라 스코룹코(Izabella Skorupko)'가 주연을 맡은데다 고증까지 거의 완벽해서 대히트를 쳤지만 180분이나 되는 영화분량 때문인지 우리나라에선 영화의 거의 1/3이 잘려나갔다. 하지만 잘려나간 버전으로도 재미있는 영화다.
몇몇 우크라이나측 비평가들과 여론은 흐멜니츠키를 비롯한 카자크 지도자들과 자포로제 카자크의 반란을 일차원적으로 나쁘게 묘사하고 모멸했다고 이 영화를 비난했는데, 애초에 영화를 눈 뜨고 제대로 봤다면 나올 수가 없는 평이다. 비록 주인공 측은 한 결혼식을 앞둔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기병대원을 중심으로 한 폴란드인으로 나오지만, 흐멜니츠키는 나름 명분이나 인망도 있고, 카리스마도 대빵이며, 머리도 좋은 간지폭발 적군 두목으로 나오고, 폴란드 대영주들의 카자크들에 대한 오만과 잔인함 또한 제대로 묘사됐다. 카자크들 또한 이웃 폴란드인 지주들은 미워해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이란 국가 자체엔 나름 소속감이나 의리도 가지고 있으나 귀족들과의 충돌로 점차 감정의 골이 심해지는 모습을 나름 설득력 있게 묘사했고, 러시아와의 관계도 흔히 폴란드 일방적인 주장인 러시아 앞잽이 따위가 아니라 지극히 현실적인 관점에서 고민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오히려 2000년대 이후 나온 폴란드, 러시아, 터키, 우크라이나 같은 동유럽 일대 역사 영화들이야 말로 노골적으로 없었던 사건을 있었던 양 뻥치는 1612, 대놓고 그냥 관영 프로파간다인 정복자 1453 따위 같이 시각적으론 기술이 발전했으니 당연히 나아졌지만 내용 면에선 전부다 국뽕성 일방적인 조국 미화+이웃국가 악마화 첨철인 저질 국뽕 영화들 일색인 반면 불과 칼로써는 영상미 뿐만 아니라 내용 면에서도 훨씬 더 균형 잡혀 있다. 물론 애초에 '타자'로 인식해 버리는 오스만-타타르 쪽을 전형적인 무식한 남색가 후로게이 악마스럽게 묘사하는거야 어쩔 수 없다 해도.
[image]
전통악기 반두라(Bandura)를 연주하는 카자크족의 모습. 사진 속의 할아버지는 크림 반도에서 산다.[26] 이름은 Ostap Kindrachuk. 아내가 집을 보는 동안 여기저기를 떠돌며 악사 일로 돈을 번다. 몇몇 위키백과엔 반두라 소개용으로 사진이 실려있기도 하다.

'''Наливаймо, браття 자포로제 카자크의 민요'''

Наливаймо, браття,

Кришталеві чаші,

Щоб шаблі не брали,

Щоб кулі минали

Голівоньки наші.

Щоби Україна

Повік не плакала,

Щоби наша слава,

Козацькая слава,

Повік не пропала.

А козацька слава кровію полита,

Січена шаблями, рубана мечами,

Ще й сльозами вмита.

Наливаймо, браття, поки ще є сили,

Поки до схід сонця, поки до походу

Сурми не сурмили.

잔을 들어라, 형제들아

크리스탈 잔으로

우리들의 심장을,

칼이 찌르지 못하도록

총알이 꿰뚫지 못하도록.

그리하여 우크라이나여

결코 울지 마라.

그리하여 우리들의 영광은

카자크들의 영광은

결코 무너지지 않으리.

카자크들의 영광을 위해 피가 쏟아지고,

도끼에 토막나고, 칼에 쪼개지고,

눈물로 씻겨나가네.

노래하자, 형제들아

해가 솟을 때까지, 행진하기 전까지

피리소리는 멈추지 않는다.

※우크라이나어 전공자 분의 번역을 기다립니다.
수르마를 피리로 대체했습니다.

6. 각종 매체의 카자크


러시아 및 동유럽 일대의 기병유닛으로 등장한다.

6.1.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3


항목 참조

6.2. 토탈 워: 나폴레옹


러시아의 고유 창기병인데 취급이 안 좋다.[27] 울란보다 모든 능력치가 약간 낮은 대신에 유지비도 적어서 거의 울란의 하위호환 유닛이나 마찬가지다.
사실 유지비도 기병 치곤 적게 들고 기병종류 중 제일 싼 가격으로 훈련시킬 수 있기 기병대 물량으로 오스만을 쓸어버리거나 돈 없을 때 기병 수 채우기 좋다. 사실 약해도 할 역할은 충분히 한다.
잘 훈련되지 않은 약한 보병진에 후방에서 박으면 충분히 적 보병진을 분쇄할 수 있다. 또 적들의 경보병, 경기병들에게 꽤나 강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단 중기병처럼 방어 수치가 높은 유닛에게는 초반 돌격을 제외하고는 이득을 보기 힘들다. 아니, 볼 수 없다. 그냥 돌격력만 믿고 쓰는 기병이다. 또 다른 창기병들과도 싸우는건 좋지 않다. 근접공격이 겨우 '''4'''밖에 안 되기 때문이다.
전략적으론 정말 요긴하게 쓰인다. 기병으로만 병력을 구성할 경우 상당한 기동력을 보이고, 자동전투 시 기병들은 높은 전투력 수치가 부여돼[28] 있어 이기는 전투만 하게되는 이러한 부대에게 큰 시너지를 주지만 비싼 가격과 유지비로 망설여 지는데 코사크는 가격과 유지비가 값싸 손쉽게 부담없이 뽑아내 정찰, 증원병력 잘라먹기, 패퇴한 병력 끝장내기, 후방의 빈 도시 털기[29] 및 견제로 적 본대의 시선 돌리기, 아군 본대의 유연하고 빠른 병력 회전 돕기, 임시 치안유지 대타로 빠른 진군 돕기 등등 중반까지 여러 방법으로 적을 괴롭힌다.

6.3. Europa Universalis IV


( 영어 자막 )

O Sultan, Turkish devil, secretary to Lucifer himself.

You demand our surrender that we turn our back on a noble Christian King who has given us dominion over the steppes and recognized our power.

We give him our horses out of loyalty, for he has honored us.

We do not fear him.

and we do not fear you.

Babylonian scullion.

We can concede to you the respect you deserve - that of a horse's ass, a lowlife scoundrel, and dog.

For they are your peers in battle, and equals as rulers.

We, the Cossacks, defy you and your army.

We will battle you on land and sea.

May whatever god you worship have mercy on you.

We will have none.

( 자막 번역 )

오 술탄, 터키놈 악마이자 루시퍼의 비서여.

그대는 우리에게 항복을 요구해 우리의 고귀한 기독교의 왕에게 등을 돌리라고 했소. 우리의 힘을 인정해주고 대초원의 통치권을 약속한 왕에게 말이오.

그는 약속을 지켰고, 우리는 그에게 말과 칼을 바쳤소.

우리는 그를 두려워하지 않소. 그리고 그대도 두렵지 않소.

바빌론 쌍것아.

우리는 그대에게 마땅한 대접을 해줄 것이다 - 말궁둥이, 건달놈, 개새끼처럼 말이다.

이들이 당신이 전우라 부를 자들이며, 신하들도 똑같은 놈들 뿐이다.

우리, 코사크는, 네놈과 군대를 작살낼 것이다. 땅이든 바다든 나가 싸울 것이다.

그대가 섬기는 신이 무엇이건 간에 네놈에게 자비를 베풀길.

우리는 자비가 없으니.

- 위의 그림과 편지 내용을 토대로 만든 게임 유로파 유니버설리즈 4의 DLC 트레일러. 간지나는 목소리가 일품이다.
직접적으로 병종으로 등장하거는 것은 아니고, 코사크 DLC에서 추가된 계층 시스템에서, 동구권 테크를 가진 국가들이 스텝 프로빈스를 가지고 있다면 계층으로 등장한다. 카자크 계층에겐 오직 스텝 지형의 프로빈스만 수여할 수 있으며, 카자크가 통제중인 지역엔 인력 버프와 함께 적 소모율 +1%가 붙는다. 물론 계층이 다 그렇지만, 최소 자치도는 25%로 고정되며, 인력만 귀족계층과 동일하게 자치도와 상관없이 100% 수급된다. 카자크 계층을 잘 관리한 상태라면 상당한 수준의 기병 전투력 보너스[30]와 기병 유지비 감소를 얻을 수 있다.
카자크 계층에게선 카자크가 보유한 모든 프로빈스에서 프로빈스당 1연대씩 기병을 공짜로 뜯어오거나, 카자크 계층으로부터 육군 리더인 정복자를 선출하거나,[31] '''반값 육군 개혁가 조언자[32]를 가저올 수 있다.''' 모든 계층을 통틀어서 '''유일하게''' 군사 조언자를 제공하는 계층이 바로 카자크다.
최소 땅 개발도 지분 요구량이 있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똥땅이기 마련인 스텝지역만 주면 되는 등 비교적 단순한 구성을 가지고 있으나… '''훼이크다.''' 카자크 계층이 계층 재앙을 일으키면 딤미 계층처럼 '''수여받은 모든 땅을 가지고 독립한다.''' 거기다, 계층 중 유일하게 '''주변의 다른 나라와의 외교관계를 악화시키는 이벤트'''가 있다. 카자크가 국경을 넘어가서 깽판을 치는 이벤트인데, 카자크를 옹호하면 피해국과의 관계도가 50이나 떨어진다. 해당국의 편을 들어주면 카자크의 충성도가 15 포인트만큼 떨어진다. 참고로, 이 이벤트는 피해국 입장에서 민폐인데, 당사자가 카자크가 깽판치게 놔두는 선택지를 찍어버리면 이벤트가 걸린 프로빈스에 매우 해로운 변동치가 달린다. 괜히 관계도가 50이나 떨어지는 게 아닌 걸 당해보면 안다.
안그래도 괴랄한 기병전투력 보너스가 국가 아이디어로 있데 카자크 계층 보너스까지 받는 폴란드의 기병이 정말 무서운 이유. 국가 아이디어 개방 후, 귀족주의, 질, 마지막으로 첩보 아이디어를 찍고, 정책까지 틀어준 다음에, 카자크 계층 버프까지 받으면 거의 2배 수준으로 기병 전투력이 올라가는 무시무시한 광경을 볼 수 있다.

6.4. 인피니티(게임)


[image]
러시아 연방은 아리아드나 개척민 선정 당시 혹독한 던 행성의 기후와 환경들에 맞서기 위해 카자크인들의 여러가지 체제들을 참고해 그것들을 기반으로 사회 체계를 계획했고 그에 걸맞게 카자크계 군인 및 군인 가족들을 주로 뽑았다. 이들 카자크 개척민은 아리아드나에 성공적으로 정착했고 가장 거대한 국가로 성장해 아리아드나의 지배권을 쥐고 있다.
자세한 건 아리아드나타르타리 전단 참고.

[1] 쿠반 카자크는 러시아 내전 당시 소련을 지지한 카자크 중 상당수를 차지했다.[2] 그래서 러시아 제국 시대엔 카자흐인을 키르기스라고 부르고 지금의 키르기스는 카라 키르기즈라 불렸다. 물론 그 당사자들은 이런 용어를 쓰지 않았지만. 사실 지금의 키르기즈인과 카자흐인은 매우 밀접한 유목민 집단을 사는 지역별로 분류한 거라 이렇게 명칭이 혼용되기도 했던 것이다.[3] 미하일 숄로호프(2008), 숄로호프 단편선』 이항재(역), 민음사 268p~269p[4] 일반적으로 '등록 카자크'라고 부른다. 1590년, 약 3,000명의 등록 카자크가 존재했다. 이들 중 소수는 폴란드뿐만이 아니라 모스크바 대공국을 위해서도 봉사하기도 했다.[5] 이 당시 대다수 카자키들은 당시에 '구교도'라고 불리는 '전통의식파 정교회'를 믿었기에, 아예 다른 종파 가톨릭을 믿는 폴란드만큼은 아니었지만, 주류 러시아와도 종교적으로 차이가 좀 있긴 있었다. 러시아 제국 정부 입장에서 보면 카자키들 덕분에 영토를 확장하고 우수한 기병대를 얻을 수는 있었지만, 카자키들의 활동으로 구교도의 영향력이 확대되는 것은 찜찜한 일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제국 정부는 카자키들을 전례를 바꾼 정교로 개종시키려고 애썼지만, 큰 성과는 없었다.[6] 스텐카 라진이라고도 한다.[7] 대표적으로 루트비히 판 베토벤[8] 고통을 모르는 듯 묵묵히 유럽 대륙을 가로질러 진군하는 이미지.[9] 1775년 예카테리나 대제의 자포로제 세치 해체도 이런 조치의 일환이었다.[10] 카자키들은 이주민들에게 자신들이 가진 군사용 토지를 임대해줬고, 그 대가로 받은 임대 수익을 실용적으로 썼다.[11] 미국으로 간 이들이 미국의 '돈 카자크 합창단'을 이뤘다.[12] 러시아 내전 이래 공산정권을 피해 고국을 떠나 다른 곳에 정착했거나 그대로 남아서 소련의 탄압을 받았던 경우.[13] 소련 체제에 저항한 민족들을 일컫는 말로 대표적으로 체첸인우크라이나인이 불온민족으로 지정되었다. 지정된 민족들은 소련 내에서도 이동의 제약 및 지원이 적었으며 고위 진급 제한도 있었다. 반대로 우수 민족도 있었는데 대표적으로는 제정 러시아 때부터 친러적이였던 오세트인이 있다.[14] 이런 입대는 개별적 입대가 아니라 부족 전체가 1개 부대로 재편되는 것이다.[15] 사실은 카자크족 마을에서 자란 러시아인[16] 소련 카자크는 17개 사단.[17] 이 일련의 사건들을 "카자크 송환"(Repatriation of Cossacks), "카자크 배신"(Betrayal of the Cossacks), "린츠의 카자크 학살"(Massacre of Cossacks at Lienz)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18] " 부모님은 등산 사고로 사망했지만, 나의 부모님은 배신자 영국과 도살자 스탈린 사이에서 살아남으셨다. 결국은 수치심 속에서 함께 자살하셨다."[19] 반대로 코사크족들도 체첸인들을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고 인식했는지 남부 지역 전통 코사크 자장가엔 아기를 안심시켜서 재우기 위해 너희 아버지는 위대한 전사라서 체첸인들도 습격하지 못할 것이란 가사가 있다.[20] 러시아어로 바다갈매기란 뜻[21] 참고로 이 사람의 모후인 투르한 하티제 술탄이 우크라이나 출신인데, 오스만 제국으로 끌려오기 전엔 본래 '''카자크의 딸'''이었다는 야사가 있다.[22] 사실 패배했으면서도 항복을 권고한 술탄이 편지까지 이리 썼으니 욕먹을 짓을 하긴 했다. 술탄이 예수기독교를 언급한 것은 술탄은 어찌 됐든 간에 '예루살렘의 지배자'였기에 명목상으로나마 기독교의 수호자란 직위를 붙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위의 사건보다는 좀더 후대의 일이지만, 18-19세기 오스만 제국과 유럽 열강사이에 맺은 조약들을 보면, 항상 "오스만 제국 내의 기독교인의 권리 보호의 보장"이 명시된 걸 볼 수 있는데, 이걸 내건 유럽 열강의 명분은, '''"예루살렘도 니들 거고, 니네 황제는 로마 황제이자 예루살렘의 수호자기도 하지? 그럼 너네 기독교인 신민들의 권리도 지켜줘야지?"'''였다. 물론 목적은 따로 있었으니... 이후 프랑스, 러시아는 오스만 제국내 기독교인들의 처우를 문제 삼아 시시때때로 내정 간섭을 벌여왔다. 그리고 오스만 제국내의 그리스인과 아르메니아인, 마론파 기독교인의 봉기를 뒤에서 부추기고, 지원하는 등으로 오스만 제국을 와해시키는 공작을 했다.[23] 오타만(Otaman)은 카자크 지도자의 호칭. 지역에 따라 Ataman, Wataman, Vataman 등으로 조금씩 변하기도 한다. 이 카자크의 편지는 네티즌 'jager'가 번역한 것과 '골리앗'이 번역한 것이 있다(https://en.wikipedia.org/wiki/Reply_of_the_Zaporozhian_Cossacks). jager의 번역본은 의도적으로 욕을 생략, 순화한 게 많지만 골리앗의 번역본은 이러한 욕을 대체적으로 충실히 반영한 편이라 인터넷 상에선 이쪽이 더 널리 퍼져 있다. 이 문서에 올라온 것 역시 골리앗이 번역한 걸 퍼와서 약간 순화한 것으로 보인다. 정확하지 않을지도 모르니 맹신하진 말자.[24] 후에 러시아의 황제 알렉산드르 3세가 35000루블을 주고 이 그림을 구입했는데, 이는 당시까지 러시아 화가가 그린 그림 중 최고가에 팔린 것이라 한다.[25] 일본군은 모두 머리를 박박 깎았다.[26] 크림 사랑이 정말 각별하다. 비록 자신이 외국인일지라도, 죽기전에 마지막으로 내뱉는 말이 "아, 아름다운 크림이여!"(о, наш прекрасный Крим!) 일 거라고.[27] 사실 나폴레옹 전쟁 당시의 이들에 대한 평이 대체로 좋지 못했음을 감안해야 한다. 후퇴 중이던 나폴레옹의 입장에선 아픈데를 찔러대는 이들을 높이 평가할 수 있었겠지만, 정작 이들과 한편이었던 러시아, 프로이센 장군들의 입장에선 "전황이 불리할 때는 제대로 싸우지 않고 꽁무니나 빼는 주제에, 아군이 고생해서 승리하면 그제서야 돌격해서 전리품이나 챙기는 도적놈들"로 보이기에 충분했다.[28] 자동전투 시엔 적에 카운터칠 유닛이 있어도 전투력만으로 일괄적인 채점을 해 비교해 승률을 정하고 주사위를 던진다.[29] 털어놓곤 적 군대가 앞에 도달할 즈음에 그냥 다른 나라에 팔아버리면 적군은 이미 발목은 잡혔는데 탈환도 못해 영토에 구멍이 송송 난 상태가 된다. 어느 나라에 어느 도시를 팔 지는 신중히 선택하자.[30] 최대 15%. 기병 전투력 보너스 아이디어 효과 1개와 맞먹는다.[31] 당연하지만 개척관련 아이디어가 있어야한다.[32] 육군 사기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