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드르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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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알렉산드르 니콜라예비치 로마노프
(Александр Николаевич Романов)
'''출생'''
1818년 4월 29일
러시아 제국 모스크바 크렘린
'''사망'''
1881년 3월 13일
러시아 제국 상트페테르부르크 겨울 궁전
'''재위'''
러시아 제국의 황제
1855년 3월 2일 ~ 1881년 3월 13일
'''배우자'''
헤센의 마리 (1841년 결혼 / 1880년 사망)
예카테리나 돌고루코바 (귀천상혼)
'''자녀'''
알렉산드라, 니콜라이, 알렉산드르 3세, 블라디미르, 알렉세이, 마리아, 세르게이, 파벨, 유리, 예카테리나
'''아버지'''
니콜라이 1세
'''어머니'''
프로이센의 샤를로테
'''형제'''
마리아, 올가, 알렉산드라, 콘스탄틴, 니콜라이, 미하일
1. 개요
2. 생애
3. 알렉산드르 2세의 대개혁
3.1. 농노 해방
3.1.1. 농노 해방 이전의 러시아 농촌의 상황
3.1.2. 농노 해방의 배경
3.1.3. 농노 해방의 과정
3.1.4. 농노 해방의 의의
3.1.5. 농노 해방의 한계
3.1.6. 농노 해방 이후의 귀족들이 겪은 변화
3.2. 지방 통치 제도 개혁
3.2.1. 젬스트보
3.2.2. 도시 자치
3.3. 재정 개혁
3.4. 사법 개혁
3.5. 교육 개혁
3.6. 군제 개혁
3.7. 개혁의 한계와 반개혁
4. 알렉산드르 2세 치세의 러시아 경제
4.1. 산업 혁명
4.1.1. 러시아 산업 혁명의 배경과 초기 산업 혁명
4.1.2. 초기 산업 혁명의 한계
4.1.3. 알렉산드르 2세 시기의 산업 혁명
4.2. 각 지역의 산업화와 경제 성장
4.3. 수공업의 변화
4.4. 노동자의 삶
4.5. 금융과 무역
4.6. 인프라의 확장
4.7. 농노 해방 이후의 농업
5. 영토 문제
5.1. 태평양 방면
5.2. 캅카스 방면
5.3. 중앙아시아 방면
6. 대외 관계
6.1. 러-독 관계
7. 로리스멜리코프의 헌법과 암살
8. 개인적인 면
9. 참고 문헌
10. 가족 관계


1. 개요


러시아 제국의 제12대 차르이자 폴란드 입헌왕국의 제3대, 그리고 마지막 국왕으로 자유주의적인 개혁 정책을 추진하였다. 비록 개혁은 그의 암살 이후 후계자인 알렉산드르 3세의 반동정치로 좌절되었고 여러가지 문제가 있는 불충분한 개혁이라는 평가를 받았으나, 현대에 와서는 표트르 대제와 마찬가지로 러시아를 변화시키려 했던 '''러시아 최후의 명군'''으로 재평가되고 있다.

2. 생애


1818년 4월 29일, 당시 황제 알렉산드르 1세의 동생이었던 니콜라이 1세와 프로이센의 샤를로테 공주(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선황 니콜라이 1세크림 전쟁 중이었던 1855년 3월 2일에 죽었고 알렉산드르 니콜라예비치 황태자가 알렉산드르 2세로 즉위했다. 당시 러시아의 전세가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기 때문에 전쟁의 종결을 위해 노력했고, 1856년 파리 조약으로 전쟁을 끝낼 수 있었다.
전쟁 중 러시아의 낙후상을 절감한 알렉산드르 2세는 러시아 제국군의 근대적 개혁을 위해서는 곧 국가 체제 전반의 개혁이 필요하다고 느끼고, 특히 러시아에 남아 있던 중세적 자취인 농노제를 폐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 결과 나온 것이 유명한 농노 해방령.

3. 알렉산드르 2세의 대개혁



3.1. 농노 해방



3.1.1. 농노 해방 이전의 러시아 농촌의 상황


19세기 중반, 러시아의 인구 6,700만 명 중 5천만 명은 농민이었고 5천만 농민 중에서 4천만 명은 농노, 나머지 1천만 명은 일부 자유 농민과 특수 계층이었다. 농노 중에서도 1,800만 명은 국가에 예속된 '국가 농민', 2,200만 명은 지주에게 예속된 '사유지 농노'였다. 국가 농민은 사유지 농노보다 더 나은 대우를 받고 경제력과 토지 보유량도 더 좋았으며 이들을 통제하는 관료들도 지주보다는 관대했다. 그러나 국가 농민은 사회적 지위가 낮고 토지에 예속당한 처지였으며 때문에 니콜라이 1세가 칙령을 선포하기 전까지는 차르가 신하들에게 땅을 하사할 때 같이 하사되면서 사유지 농노가 될 위험성이 있었다.
사유지 농노는 마을에 살면서 소작료와 부역을 바치는 이들과 지주의 집에서 먹고 자면서 지주에게 봉사하는 '가내 농노[1]'로 나뉜다. 제국 정부는 지주들이 농노를 노예처럼 다루어도 방관했으며 사유지 농노는 국가에 납세와 국방의 의무를 이행해도 보호를 받지 못했다. 경제적으로 지주는 농노를 담보물로 잡을 수 있고 마음대로 매매할 수도 있었다. 같은 시기 미국의 흑인 노예들이 당했던 것처럼, 가족 구성원들을 따로 떼어내서 하나씩 팔아버리는 잔혹한 일도 자주 벌어졌다. 또한 농노에 대한 사법권도 가지고 있어서 시베리아 유형과 체형을 포함한 무제한적인 형벌을 가할 수 있었다.
경제적으로 농노들은 지주에게 분여지를 제공받아 농사를 짓고 생계를 유지하는 대신, 수확량의 평균 30%에서 50% 사이를 공조로 바치고(오브로크)[2] (대부분의 경우) 1주일에 3일 이상 지주의 직영지에 나가서 일해주는 부역(바르시치나)을 할 의무가 있었다. 그리고 지역마다 의무의 형태는 상이해서, 중부와 북부의 비흑토지대 지주들은 공조를 선호한 반면에 비옥한 남부 흑토지대의 지주들은 부역을 선호했다. 비흑토지대는 토지의 생산력이 낮아서 수확량이 적었기 때문에 부역보다는 소작료를 받는 게 더 이득이었고[3], 흑토지대는 토지 생산력이 높아서 비흑토지대와는 반대로 부역이 더 좋았다.[4] 둘 다를 요구하는 경우도 많았으며 중부 러시아는 둘의 비중이 비슷한 수준이었다.
사회적으로 농민들은 농민 공동체(мир/미르, община/옵시나)에 속했다. 미르는 각 가정의 노동력을 기준으로 토지를 배분하고, 그만큼의 의무도 부과했다. 몇 년 주기로 토지를 정기적으로 재분배하면서 구성원들의 공동 생활을 이끌고 공동 경작을 주도했다. 그리고 미르는 마을의 행정과 복지 업무도 맡았으며 마을 공금을 이용해 학교나 병원을 짓거나 도로와 기반 시설을 관리했다. 그러나 미르는 농민들의 자치 조직인 동시에 지주와 국가의 지배도구라는 이중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지주와 정부가 미르를 이용해서 농민들을 통제했던 것이다.
러시아는 19세기 전반부터 곡물을 수출 하기 위해 경작지를 많이 늘리고, 주곡인 호밀뿐만 아니라 감자사탕무, 포도주의 생산도 크게 증가해서 감자는 4배, 포도주는 3배 늘어나고, 가장 중요한 수출 작물인 밀의 생산량도 크게 증가했다. 러시아에서는 호밀을 주로 먹고 밀을 수출했는데, 호밀은 기후나 토질을 잘 따지지 않고, 키우는 것도 어렵지 않아서 농민들은 호밀을 많이 심었다. 그리고 저장 기간도 길어서 농민들은 호밀을 주식으로 먹었다. 호밀로 보드카맥주, 크바스를 빚을 수 있었던 것도 장점이었다. 그런데 예카테리나 2세의 치세에 크림 반도와 남부 우크라이나 지역을 장악해서 수출 항구가 생기자 러시아에서는 서유럽에 밀을 팔면 많은 돈을 남길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했고, 지주들도 밀 판매가 큰 돈을 벌 기회라는 것을 알아서 지대로 밀을 요구하고 지주 직영지에도 밀을 심었다. 러시아의 농민들은 밀을 식량으로 쓰기보다는 지주에게 바치거나 판매하기 위한 목적으로 심었다.
하지만 러시아의 농업은 비효율적인 농노제에 기반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질적인 성장은 더뎠다. 러시아는 농업 기술의 진보가 느리고 생산성의 증가가 지나치게 낮았다. 러시아의 토양과 기후가 농사 짓기에 나쁘단 것을 감안해도 유럽과 농업 생산성을 비교하면 너무 낮았다. 한편으로 곡물 수출과 생산량 증가로 인해 생긴 이익은 지주들이 독차지했다. 일부 지주들은 19세기 전반부터 이들은 외국의 농기계과 새로운 경작법, 좋은 종자와 좋은 육종의 가축들을 도입하는 식으로 영농 기술과 경작 방식을 개선하고 농노보다 훨씬 효율이 좋은 자유 노동자들을 고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자유 노동자들의 수가 부족하고 대다수의 지주들은 혁신을 받아들이지 않고 농노를 더 착취해서 수입을 올리려 했기에 이러한 변화는 러시아 전역으로 확산되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의 농업 생산성이 제자리인데도 불구하고 곡물 수출량은 계속 늘어났는데, 이것은 경작지를 늘린 것과 지주들이 곡물 수출로 이익을 보기 위해 농노들을 착취했던 것 때문에 가능했다. 그래서 러시아에서는 농작물 생산량이 증가해도 농업 경제가 쇠퇴하고 농촌이 황폐화되었으며 농촌 인구가 도시로 이주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이들은 도시 외에도 행정력이 약해서 지주나 정부의 힘이 약한 시베리아 지역으로 이주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던 와중에 크림 전쟁 전비 조달을 위해 루블 지폐를 너무 찍어낸 탓에 화폐 가치가 급락하고[5] 물자 공급을 위한 가축 징발, 전쟁세 징수 때문에 러시아의 경제는 전반적으로 침체되었다.

3.1.2. 농노 해방의 배경


19세기가 되자, 러시아 농노제는 한계에 봉착했다. 지식인과 대중, 심지어는 황제까지도 농노제가 러시아의 발전을 막는 가장 큰 장애물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농노제에 대한 개혁은 번번히 좌절되었는데, 농노를 해방시키면 러시아 전제군주정의 지지세력인 귀족 계급이 몰락하고 혁명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러시아의 지배층 사이에 만연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어쩌다 이루어지는 개혁도 너무 온건한 수준이었다. 예를 들면 철권 통치와 반동 정치로 유명한 니콜라이 1세조차 농노제의 심각성은 알고 있었고 농노제를 악으로 규정하는 칙령을 내리기도 했다. 하지만 니콜라이 1세는 농노제를 즉각적으로 폐지하는 급진적인 개혁은 혁명을 비롯한 사회 혼란을 부를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지주의 이해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 권리를 제한하는 등, 온건하고 점진적인 개혁으로 일관했다. 그리고 니콜라이 1세의 치세였던 1842년, 국가 재산부 장관 키셀레프는 농노들에게 몸값을 치르고 자유를 얻을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고 빚 청산을 위해 농노들을 경매에 내놓거나 가족 중에 한 명을 따로 떼어내서 파는 일을 금지하는 법을 제정했으며 토지 분배 '''없이''' 농노들을 해방하는 개혁을 실시했다. 또한 농촌에 학교와 병원을 설치하고 감자도 심게 했으며, 각종 교육을 진행하고 불에 타지 않는 불연성 건물들을 세우는 복지 정책도 시행했다.
하지만 토지 분배가 없었기 때문에 농민들은 개혁에 무관심했고, 토지를 받지 않는 대가로 풀려난 농노들은 고작 수 만명에 그쳤다. 학교와 학생의 수가 늘어났지만 전체 농민의 수와 비교하면 큰 성과라고 하기 힘들었고, 무엇보다 농노의 자녀들이 중등 교육 이상의 교육 과정을 이수하지 못했다. 그리고 가족 구성원을 강제로 분리시켜서 파는 일 역시 근절되지 않았다. 정부가 감자를 심을 것을 강요하면서 이에 반발한 농민들의 '감자 반란'[6]이 일어나는 등 농민들은 정부 자체를 불신하고 있었다.
이렇듯 농노제에 대한 개혁은 지지부진했고, 러시아에서는 여전히 농노제가 강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그러나 19세기 중반부터 농업이 위기 상황을 맞이하자, 농업에 기반을 둔 귀족 지주 계급이 붕괴하고 그 영향력이 줄어드는 현상이 일어났다. 귀족 지주들이 농노들을 착취해 계속해서 수익이 떨어지는데도 불구하고 지주들은 착취를 멈추지 않았고, 땅을 저당잡거나 농노들을 더 착취하는 '제 살 깎아 먹기'로 자신들의 사치스러운 생활을 유지하려고 했다. 1844년의 경우, 지주들은 자기 재산의 54%를 정부에 빚지고 있었다. 귀족들도 이제 문제를 인식했다. 농노제를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

더욱이 산업 혁명으로 인해 본격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한 러시아의 자본주의도 농노 해방을 요구했다. 공장 노동자의 다수를 차지하는 농노 노동자들은 자유 임금 노동자에 비해 생산성이 낮았고, 농번기만 되면 공장을 떠나 농촌으로 돌아갔다. 이런 문제 때문에 러시아의 공업은 성장이 늦어지고 있었고, 기업가들은 농노 노동자보다 효율이 좋은 자유 임금 노동자들을 수급하기 위해서 정부에 농노 해방을 청원했다.
그리고 대외무역량이 늘어나고 상공업이 발달하면서 화폐 경제와 각종 상품들이 농촌에 침투하기 시작한 것도 영향을 미쳤다. 농촌의 자연 경제가 붕괴하고 교환 경제가 성장했으며 농촌에서 공산품에 대한 수요가 늘어났다. 이에 따라 재산 수준이 서로 비슷했던 농민층이 분화하기 시작했다. 일부 농민들은 기회를 잡아 많은 수확량을 올려 재력을 쌓았고, 더러 모로조프, 가릴린, 프로호로프 가문처럼 몸값을 치르고 자유를 얻은 뒤 공장을 세워 사업가로 변신한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은 그냥 빈농이었으므로 농촌 사회에서도 빈부격차가 생겼다. 러시아의 자본주의와 농노제 사이의 모순이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농노 해방에는 경제적인 이유도 있었지만 실질적으로 정부 당국이 농노 해방을 단행한 가장 큰 이유는 농민 폭동이 급증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19세기 초에는 연간 10여건에 불과하던 농민 폭동이 19세기 중반에는 매년 50건으로 늘어났다. 특히 농민들은 귀족들의 학대와 착취에 더는 참지않고 부역 및 소작료의 집단 지불 거부, 대규모 탈주, 지주 재산 방화, 약탈, 극단적으로는 지주 일가와 관리를 살해하는 등 여러가지 방법으로 저항하며 분노를 표출했다. 농민 반란도 급증해서 1848년에만 107건의 농민 반란이 일어났으며, 1854~1855년에 일어난 격렬한 농민 반란은 정부 당국에게 더 이상의 농노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사태는 더 심각해져서 알렉산드르 2세가 즉위한 1856년부터 해방 선언을 포고하던 1861년까지 이전보다 훨씬 더 큰 규모의 농민 반란이 발생했다. 가장 심했던 1858년에는 무려 378건의 폭동이 일어나고 수십 명의 지주와 관리가 살해당했다. 물론 소요와 반란이 터질 때마다 러시아 정부는 군대를 동원해서 진압했지만, 문제는 아무리 진압해도 농민 반란은 끊임없이 일어나고 계속해서 그 규모가 커졌기 때문에 정부도 농노 문제를 해결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했다.
그리고 사회적인 여론 역시 농노 해방에 기여했다. 크림 전쟁의 패전으로 러시아는 국가의 정치·사회 체제가 서유럽에 비해 뒤떨어지고 부패했음이 드러나서 비판의 대상이 되었으며 이런 부패와 낙후성은 농노제 때문이라는 여론이 일어났다. 이전부터 농노제를 비판하던 자유주의자들은 '농노제는 비정상적이고 비도덕적이며 비경제적'이라고 주장하면서 글을 펴냈다. 그 중에서도 역사학자 카벨린의 <농민해방에 관한 비망록>은 유명하다. 카벨린은 '지주들의 토지소유는 유지하되, 적당한 양의 토지를 농민들에게 분배하고 지주들에게 합당한 보상을 해주어야 한다'는 구상을 제시했다.
러시아의 대표적인 인민주의자인 게르첸은 러시아 최초의 혁명 신문인 <종>에서, 체르니솁스키와 도브로류보프는 푸시킨이 창간한 진보 성향의 잡지, <동시대인>에서 조건 없는 농노 해방을 호소했다. 그리고 1840년대의 대표적인 보수주의자로 유명한 포고진이 차르 전제정과 농노제를 비판하고 개혁을 주장하는 등, 보수주의자들까지 농노제 폐지를 주장하기 시작했다.
"러시아는 서유럽에 비해 후진적이며 서유럽을 따라가야 한다"고 주장했던 서유럽주의자들은 서유럽에선 찾아볼 수 없는 농노제를 비판하고, 농노제를 폐지해야 러시아가 발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서유럽주의를 비판하면서 러시아 정교회와 러시아적 전통을 옹호한 슬라브주의자들조차도 농노제를 비판했다.[7] 이해당사자인 농민뿐만 아니라 러시아 지식인 전체가 농노제를 비판하고 나선 것이다.

마지막으로 인도주의도 농노제 폐지에 강한 영향을 미쳤다. 비인간적이며 야만적인 농노제는 19세기 유럽 사회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부끄러운 존재였다. 개 몇 마리와 농노 한 가족을 교환하거나, 어머니는 팔고 자식은 남겨두게 하는 일들은 이제 더 이상 좌시할 수 없는 일이 되었다.

3.1.3. 농노 해방의 과정


마침내 알렉산드르 2세는 러시아 제국의 암덩어리인 농노제를 도려내기 위해 농노 해방을 지지하는 친위 세력을 모았다. 그 친위세력은 일부 고위관료들과 사회 활동가, 일부 진보적인 관료 및 지주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고위 관료들 중에서는 콘스탄틴 대공과 내무성 장관 란스코이, 직속 보좌관 니콜라이 밀류틴 등이 주요 세력이었는데, 그 중 콘스탄틴 대공은 황제의 동생으로 당시 해군성 장관이자 개혁파였는데, 해군성은 장관부터가 개혁에 참여해서인지 개혁파 관료들을 모으는 일을 하고 해군성 관료들 중에는 개혁에 적극적으로 나선 이들이 많았다. 한편 황제의 숙모인 옐레나 대공비는 인도적인 이유로 농노 해방을 지지한 사회활동가였고 해방령 이전부터 농노들을 풀어주는 일을 했다. 사회활동가인 로스톱체프 백작, 체르카스키 공작 등도 농노 해방을 위해 알렉산드르 2세에게 협력했다. 마지막으로 로스톱체프가 모아온 사마린, 체르카스크, 솔로비예프, 세메노프 등이 관료로서 개혁에 참여했는데 이들은 그 진보성 때문에 '붉은 관료들'이라고 불렸다.
1856년 3월 30일, 크림 전쟁의 종전을 선언하는 칙령에서 황제는 국민들에게 개혁을 약속했다. 그리고 황제는 대관식에 모인 귀족들에게 농노제에 변화가 필요한 때가 왔다고 말하면서 "밑에서 일어나는 것보다는 위에서 일으키는 게 낫지 않겠느냐"고 귀족들을 설득했다. 1857년 1월 3일, 황제는 비밀 위원회를 설치해 농노 해방에 대한 구체적인 준비를 시작했다. 1857년 11월, 제국 정부는 토지 분배 없는 농노 해방이라면 검토해 보겠다는 서부 3개 구베르니야[8] 총독들의 제안을 거부하고 미르의 존속과 토지의 유상 분배가 정부의 농노 해방 방침임을 분명히 했다. 1858년, 46개 주의 귀족들로 구성한 주 위원회를 설치하고 농노제 폐지를 논의하게 했다. 추가적으로 제국 정부는 러시아 각 지역을 비흑토 지대, 흑토 지대, 스텝 지대로 나누어서 지역 사정에 맞는 토지 분배가 이루어지도록 조치하고 농노제 폐지에 대한 언론 통제도 풀었다.
다만 귀족들의 반발과 의견 차이로 인해 농노 해방에 관한 논의가 지지부진하고 농민 폭동이 빈발하였다. 그래서 황제는 전국을 순시하면서 농노 해방에 소극적인 귀족들을 직접 설득했다. 1858년 2월에 황제는 비밀 위원회를 <대 위원회>로 개칭하고 1859년 3월, 법전 편찬 위원회를 설립했다. 위원회는 각 주 귀족 대표들의 의견을 종합하고 법조문을 제정했으나, 예상과 달리 2년간의 토론과 법제화 과정에서 귀족 지주들의 요구가 대폭 수용되었다. 개혁파 관료들과 주 위원회의 자유주의자들은 원안을 유지하려고 노력했으나, 다수 귀족 지주들의 반발이 워낙 강해서 많은 부분이 귀족 지주들의 요구대로 수정되었다. 이 때문에 토지 분배량은 줄어들고 부역과 납세는 강화되는 등, 러시아의 농노 해방은 매우 불철저하게 이루어지게 되었다.
1861년 2월 19일, 황제는 "지주의 사유지에 거주하는 농민과 가내 농민들에 대한 농노제를 영원히 폐지한다"는 내용의 농노 해방령을 공표, 농노들에게 법적으로 자유인 신분과 일반 시민의 권리를 부여하고 2년의 유예 기간을 거친 뒤에 완전히 농노제를 폐지한다고 선언했다. 또한 황제는 지역에 따라 3 ~ 12 데샤티나에 해당하는 토지를 농노들에게 분배하고 토지 상환금을 부과했다. 토지 상환금의 20%는 즉시 지주에게 내고 80%는 토지를 대신 구매해 준 국가에게 49년 만기 6%의 이자로 납부하는 것이며, 농민들은 토지 상환금을 모두 갚기 전까지 임시로 지주에게 소작료를 지불하거나 부역을 해야 했다. 그리고 제국 정부는 농민들을 통제하기 위해 미르를 강화하고 미르 몇 개를 묶어서 '볼로스트'라고 하는 새로운 행정단위를 만들었다. 수십만의 황실사유지 농노는 1863년, 사유지 농노의 수에 맞먹는 2천만의 국가 농민은 1866년에 해방되어 러시아에서 농노제는 폐지된다.

3.1.4. 농노 해방의 의의


이러한 농노 해방과 토지개혁은 당시 러시아에서는 개혁을 넘어서는 혁명이었다. 4,000만에 달하는 사람들이 노예적 구속에서 풀려나 자유를 얻었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사건이었다. 그래서 황제 알렉산드르 2세는 '해방자'라 불렸고, 대표적인 반정부 인사이자 인민주의자인 게르첸까지 '''"오! 갈릴리 사람이여, 그대는 정복하셨도다."''' 라고 말하며 황제를 찬양했다. 억압적인 차르 전제정을 무너뜨리려는 인민주의자가 억압의 상징인 황제를 예수12사도에 빗대 찬양할 만큼, 농노 해방은 러시아에서 가히 혁명적인 사건이었다.
농민들의 지위도 향상되었다. 특히 농민들은 지주의 허락 없이 결혼하고 취업할 권리와 상업과 각종 부업에 종사하거나 자기 재산을 유산으로 물려줄 수 있는 권리를 얻었다. 법적으로 지주가 농민들에게 행사하던 사법권이 소멸하고, 농민들은 정식으로 법정에 소송할 권리를 받았다. 정신적으로 농노 해방은 농민의 노예 근성을 뿌리 뽑고 농민들이 새로운 사고를 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해 주었다. 점점 농민들은 주체적으로 생각하고 활동하기 시작했으며 차르에게 탄원서를 보내던 것에서 한 발 더 나아가, 농민 대표를 선출해서 자신들의 의사를 정부에 전달하고 통치에 참여하려 했다.
지방에서는 지주들이 누리고 있던 특권들이 타격을 받고 지방 귀족들이 장악한 지방 행정 제도가 재조직되었다. 경제적으로는 상공업이 발달하고 자본주의적 개인 영농이 발달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다. 도시민들과 상인들 중에서 토지를 소유한 이들이 늘어나고 도시가 성장하기 시작했다. 사회적으로는 농노해방 이후, 귀족계급이 몰락하고 새로운 세력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부르주아와 전문직 종사자의 영향력이 늘어나고 각종 제도를 근대적으로 정비하면서 자본주의가 성장했다. 드디어 러시아가 봉건제에서 자본제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접어든 것이다.

3.1.5. 농노 해방의 한계


하지만 농노 해방이 마냥 긍정적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농노 해방은 매우 불충분한 개혁이었다. 정부는 목초지와 삼림, 전체 토지의 절반 이상을 지주에게 남겨주고 나머지를 농민들에게 분배했다. 때문에 농민들이 받은 토지는 전체 농민의 수에 비해 부족했고, 농민 개개인에게 분배하는 것이 아니라 미르를 통해 분배한 것이라서 농민들의 토지는 오히려 해방 이전보다 20% 이상 줄었고 지역에 따라서는 최대 50%까지 줄어들었다. 그리고 이런 토지 문제를 조정하는 조정관들은 주로 귀족 지주의 편을 들었다.[9]
게다가 제국 정부는 농민들을 상대로 사기를 쳤다. 원래 정부가 매입한 토지의 가격은 5억 4,400만 루블이었는데, 정부는 매입한 토지의 가격이 원가보다 1.5배 이상 더 높은 8억 6,700만 루블이라고 발표하고 이를 기준으로 토지 상환금을 부과했다. 그리고 상환금의 20%는 지주에게 직접 지불하는 것이었는데, 이 20%의 토지 상환금도 농민 입장에서는 부담스러워서 이 20%를 갚는 데 20년씩이나 걸리기도 했다. 나머지 80%는 49년 만기에 연리 6%라는 높은 이자를 부담해야 했으며 농민들은 이 과중한 토지상환금의 이자까지 다 갚아야 완전한 자영농이 될 수 있었다. 19세기 말까지 제국 정부가 토지 상환금 명목으로 거두어들인 세금은 원가의 4배 가까이 되는 20억 루블이었고[10] 이것은 정부가 국민의 재산을 갈취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또한 상환금 외에도 제국 정부가 농민들에게 각종 세금을 부과한 탓에 상환금과 각종 세금을 다 합해서 농민들이 1년에 내야 할 세금의 액수는 총 30 루블로 농민들 입장에서는 매우 부담스러운 수준이었다. 정부가 농민 토지에 부과하는 세금은 귀족의 토지에 부과하는 세금보다 10배 더 높았다. 농민들은 이제 인격적으로 예속당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적으로 지주들에게 예속당했고, 예전보다 더 불리한 입장에 놓였다. 농민들은 상환금을 다 갚을 때까지 '임시 의무 농민'으로서 소작료를 내고 어느 정도의 부역도 해주어야 했다. 심한 지역은 농노 해방령 이후 20년이 지난 1881년까지 농민들이 임시 의무 농민으로 남아 있었다.
제국 정부는 농노 해방령을 선포한 뒤, 소요나 반란을 막고 농민들을 통제하기 위해 미르를 강화했다. 미르를 기반으로 각종 행정 단위를 만들어서 지주가 가졌던 징세·징병·재판 등의 권한을 미르에 위임했고, 미르에 연대 책임을 지워 농민들을 미르에 묶어두었다. 이런 제약 때문에 농민들은 독립적인 자영농이 될 수도, 자유로운 임금 노동자로 변신할 수도 없었다. 게다가 다른 곳에서 일자리를 구한다 해도 자기 몫의 의무를 수행하고 정기적으로 상환금을 납부해야 했다. 예를 들면 미르의 동의를 얻어 신분증을 발급받아 여기저기 일을 다니는 농민들이 많이 생겨났는데, 신분증 발급에는 일정한 수수료를 받았고 정부는 이 신분증 발급 수수료로 많은 수입을 올렸다.
그리고 미르가 정기적으로 각 가정의 노동력 수준에 따라 토지를 재분배했기 때문에 가정에 자식이 많을수록 많은 토지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농민들은 자식을 많이 낳았고[11] 인구가 늘어남에 따라 1인당 토지 보유량은 점점 줄어들었다. 1877년 농민의 1인당 토지 보유량은 평균 13.2 데샤티나였는데 1905년에는 10.4 데샤티나로 줄어들었다. 토지 보유량이 줄어드니 생계 문제가 심해져서 농민들의 불만이 커졌고, 토지 재분배는 농민들의 노동 의욕, 미래에 대한 희망, 농업 기술을 혁신하려는 시도를 꺾어 버렸다. 땅을 잘 경작하고 노력해 봐야 미르에서 땅을 빼앗아서 재분배해 버리니, 농민들의 의욕이 떨어질 수 밖에 없었다.
또한 미르의 강화는 산업화에 장애가 되기도 했다. 러시아가 산업화를 하고 서유럽을 따라잡으려면 서유럽이나 미국에서처럼 농촌 인구가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이주하게 만들어야 했다. 그런데 미르가 인구 이동을 통제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면적인 산업화가 이루어질 수 없었고 산업 노동자의 숫자도 농민의 숫자에 훨씬 못 미쳤다. 정부라고 이 문제를 모르던 것은 아니었지만 미르의 통제를 푸는 순간 대규모 농민 반란이 터질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미르의 통제를 풀 수가 없었다. 산업화를 위해서는 미르를 없애야 하지만, 미르를 없애면 체제가 위험해지는 딜레마에 빠진 것이다.
농노들이 어떻게 농노 해방을 바라보았는지 알아보자면, 1856년부터 해방이 이루어질 거란 기대 속에 있던 농노들은 농노 해방령을 듣고 경악, 분노했다. 농민들이 원하던 해방령은, 모든 토지를 균등하게 분배하고 임시 기간 없이 농노에서 해방되는 것이었다. 농노들은 이런 식의 해방은 생각하지도, 원하지도 않았고 '''"우리들의 아버지"인 차르'''께서 그런 어처구니없는 해방령을 선포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이 말도 안되는 해방령에 농민들은 부역과 소작료 지불을 거부했고 일부 지방에서는 반란을 일으켜 관리와 지주들을 살해했으며 지주들의 재산을 탈취, 방화하기도 했다. 농노 해방령을 선포한 1861년에만 1,176건의 농민 소요가 있었으며 정부는 1864년이 되어서야 간신히 진압했다. 황제와 관료, 지주들은 자신들이 선포할 농노 해방령이 농노들에게 환영받지 못할 거란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군대와 경찰이 경계 태세를 유지하게 했고 일부 지주들은 대도시로 도피했다.
결국 농민들이 해방으로 얻은 것은 미르의 통제와 경제적인 어려움과 계급의식이었다. 농노 해방령은 철저한 기만으로 전락한 것이다. 농민들은 니콜라이 2세 재위 기간 있었던 스톨리핀의 개혁 이후에야 진정으로 해방되었다.

3.1.6. 농노 해방 이후의 귀족들이 겪은 변화


농노제 폐지 이후, 일부 귀족 지주들은 농장의 체질 변화에 성공해서 계속해서 영화를 누렸지만, 대부분의 지주들은 변화에 실패했다. 지주들이 변화에 실패한 것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었다.
  • 무능
대부분의 귀족 지주들은 부재 지주였다. 농장이 있는 지역에서 살면서 직접 농사를 짓는 재지 지주와는 달리, 이들은 다른 지역에서 살면서 소작료만 받는 지주였다. 게다가 이들은 모든 일을 집사에게 맡겼기 때문에 농장 사정에도 어두웠고 농사일도 잘 몰랐다. 그들은 농노들이 바치는 부역과 소작료를 받아먹으며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는데만 익숙한 존재들이었다.
  • 자본의 부족
농사에 필요한 자본이 부족했다. 예전에는 농노들을 부려먹기만 하면 되었지만, 이제부터는 지주들이 직접 농기구를 사고 노동자들을 고용해야 했기 때문에 예전보다 더 많은 자본이 필요했다. 정부가 농노들을 해방하면서 지불한 상환금을 투자할 수 있었지만, 대부분의 지주들은 그 많은 상환금을 모조리 사치에 탕진했다.
게다가 농민들을 기만했던 제국 정부는 귀족들까지 속였다. 귀족 지주들은 자기 재산의 54%를 정부에 빚지고 있었는데, 정부는 상환금을 줄 때 귀족의 채무를 제하고 남은 것만 지급했다. 결국 귀족 지주들은 생계를 위해 땅을 팔거나 농민들에게 임대해 주고 임시 의무 농민들에게 부역을 시켰다. 그리고 귀족 지주들은 완전 농노제였던 농장을 귀족 지주의 직영지를 경작하는 조건으로 토지를 임대하는 방식(반(半)농노제) 농장으로 전환했는데, 이렇게까지 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귀족 지주들이 급속도로 파산했다. 귀족들은 토지 소유권을 상실해 갔다. 통계에 따르면 1861년부터 1905년까지 귀족들은 소유한 토지의 1/3을 농민들에게 넘겼으며, 1861년에는 귀족의 88%가 지주였지만 갈수록 감소하여 1878년에는 56%, 1895년에는 40%만이 지주였고, 보유한 토지의 40%를 다시 저당 잡혔다. 또한 농노 개혁 이후에 귀족들이 소유한 토지 면적은 평균적으로 1년에 약 68만 평방미터씩 감소했다. 지주들은 이제 소작료가 아닌 월급이 주요 소득이 되었다. 지주가 아닌 귀족들 중에 다수는 도시로 이주해서 의사와 법률가 같은 전문직 종사자가 되거나 예술가가 되었고, 일부는 철도 건설·공업·보험·금융업에 뛰어들어 대자본가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일부는 완전히 파산해서 사회의 저소득층으로 전락했다.
점점 자신들이 설 자리가 줄어들자, 귀족들은 어떻게든 기득권을 유지하려고 했다. 그들은 국가의 고위 관직들을 독점하고 대신과 부(副)대신직, 지사와 각 부서장직을 장악했다. 관직 승진에서의 우선권도 유지하고 보수 반동적인 정책을 시행하려고 했다. 그러나 귀족의 정치적 영향력 약화는 막을 수가 없었다. 공공기관에서 귀족의 비중이 줄어들었고 정부에서 직책을 맡을 만한 인력도 고갈되기 시작했다. 또한 공직 임용에서는 출신 성분이 아니라 능력과 준비 과정, 자격을 고려하는 분위기가 생기기 시작했다.
1861년의 개혁 이후, 비귀족 계급들이 적극적으로 귀족이 되려 했기 때문에 비귀족 계급의 신분 상승 사례가 늘어나고 귀족 계급의 분화 현상이 발생했다. 제국 정부는 정권을 지지하는 귀족층이 분열해 정권에 큰 위험이 되리라 보고 이 현상을 막으려 했고, 1865년에 개인 귀족(본인 1대만 귀족 대우를 받는 귀족)과 세습 귀족(귀족 권리 세습 가능)이 될 수 있는 관직 등급을 높였다. 이제부터는 12급 이상의 군직이나 9급 이상의 관직에 올라야 개인 귀족이 될 수 있고 세습 귀족이 되려면 6급 이상의 군직이나 4급 이상의 관직에 올라야 했다.
그러나 제국 정부는 귀족의 증가와 분화 현상을 통제하는데 실패했다. 1867년의 세습 귀족만 해도 65만 2천명이나 되었고, 1897년에는 그 숫자가 2배 가까이 증가해 122만 2천명이나 되었다. 19세기 말에 장교의 51.2%는 세습 귀족 출신이고 고위 관료와 중간관료의 30.7%가 세습 귀족 출신들이었다. 귀족층은 국가 공직의 1/4를 차지했다. 원래 동질적이었던 귀족층은 점점 구(舊) 귀족과 신(新) 귀족, 토지를 보유한 귀족과 토지를 보유하지 않은 귀족으로 나뉘기 시작했다.
이렇듯 제국 정부가 그토록 지키려 했던 귀족들은 농노 해방이란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도태되어 갔다. 그들은 농노제에 너무 익숙해져 있어서 다른 방식으로의 전환은 생각하지도 않았고 그런 탓에 세상의 변화에 적응할 수가 없었다. 수백 년간 농노들을 착취하며 편하게 살아온 귀족들은 그토록 많은 재산과 권리, 정부의 지원을 가지고도 새로운 시대에서 살아남지 못한 것이다.

3.2. 지방 통치 제도 개혁



3.2.1. 젬스트보


예전부터 러시아는 지방 정부와 자치 기관들이 신분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카자키 공동체와 농민 공동체, 지방 귀족 위원회와 상인 길드를 비롯한 자치 기관들이 난립했고 이러한 혼란은 행정 제도의 비효율과 관리 난항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대개혁으로 경제 상황이 변화하고, 농노 해방으로 농민들이 자유민이 되었기 때문에 제국 정부는 지방 통치를 관료와 귀족들에게 일임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이전 시기부터 계속해서 지역 주민들의 지방 행정 참여를 배제한 것이 지방의 경제, 보건, 교육을 비롯한 각종 문제들을 더 악화시키기만 했기 때문에 알렉산드르 2세는 지방 행정 제도의 개혁을 단행했다.
1864년 1월 1일, 제국 정부는 '주, 군 지방자치기관에 관한 법'을 제정하고 주와 군에 젬스트보(지방 의회)를 설립했다. 젬스트보는 신분에 상관없이 지주, 도시민, 농민 공동체의 3개 계층이 3년 임기의 의원을 선출하고 선출된 의원들이 운영기관과 집행기관을 구성하는 제도였으며 각 지역의 주지사와 중앙에 있는 내무성 장관의 통제를 받았다.
젬스트보의 의원 선출 과정과 선거권 부여 기준은 다음과 같다.
  • 지주
    • 일반 지주
300 데샤티나[러시아식•단위] 이상의 토지 혹은 총액 15,000 루블 이상의 부동산을 소유한 자.
  • 소규모 지주
재산이 위의 기준 이하인 소규모 지주들은 서로 연합해 대표를 선출하여 선거권을 행사할 수 있다.
  • 자본가
연간 6,000 루블 이상의 수입을 창출하는 산업 및 무역 회사의 소유주일 경우, 지주 계급의 선거권을 행사할 수 있다.
  • 도시민
    • 대도시
총액 36,000 루블 이상의 부동산 소유자.
  • 중소 도시
총액 600 루블 이상의 부동산 소유자.
  • 농민
농촌 집회(촌회)에서 마을(촌)의 상위 행정 단위인 볼로스트(읍)의 집회에 나갈 대표들을 선출해 읍 회의에 보냈다. 이렇게 모인 농촌 대표들은 읍 회의에 모여 자기들 중에서 읍의 대표를 선출하고, 이렇게 선출된 읍의 대표들이 모여서 군 젬스트보 의원들을 선출했다. 젬스트보는 제국 정부로부터 세금과 의무를 부과할 권리와 기금을 조성해서 운용할 수 있는 권한을 받았고 토지, 가옥, 공장과 같은 부동산에 특별세를 부과할 수 있었다.
젬스트보는 운영기관과 집행기관으로 나뉜다. 먼저, 젬스트보 운영기관은 젬스트보 의원들이 1년에 한 번씩 모여서 예산 책정과 기본적인 정책들을 논의하는 기구였다. 그리고 운영기관에 속한 의원들은 젬스트보의 '제1요소'라고 불렸으며 무보수직이었고, 집행기관(상임 위원회라고도 함) 위원들과 상급 젬스트보에서 일할 의원들을 선출했다. 상임 위원회 위원들은 젬스트보의 '제2요소'라고 불렸으며, 상시직이라 그런지 보수를 받았고 도로정비·의료·보험·초등교육·우편·지방의 무역과 산업 발전 · 영농 기술 지원·교회 신축·교도소 운영 등, 다양한 업무를 담당했다.
상임위 위원들은 각종 업무를 처리하기 위해 전문 인력들을 고용했는데, 상임위에서 고용한 이 전문 인력들을 일컬어 젬스트보의 '제3요소'라고 부른다. 제3요소는 의사·수의사·농업 전문가·통계학자·교사·기술자 등, 여러 방면의 전문가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들은 자기 희생을 무릅쓸 정도로 헌신적이고 민주적인 성향을 가진 젊은이들이었다. 이들은 19세기 말에는 사회에서 영향력 있는 세력으로 간주받을 만큼 위상이 커졌다. 그리고 제3요소들은 자유주의와 사회주의의 이상에 공감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유주의와 사회주의의 성장에도 영향을 미쳤다.
귀족과 관료들을 대신해서 젬스트보가 지방 자치를 시작하자, 지역 경제가 성장하고 교육과 보건 수준이 향상되었다. 젬스트보는 제한된 자원으로 학교와 병원을 짓고 농민들에게 가축 진료와 농업 서비스를 제공해주었으며 교량과 새로운 도로를 건설했다. 그리고 지역 상거래와 산업에 투자하고 신용 기관과 협동 조합에 자금을 지원했으며, 농촌의 신용 협동 조합과 생산자 협동 조합 뿐만 아니라 도시의 소비자 협동 조합과 주택 조합의 설립에도 관여했다. 아울러 이들은 미래에 더 많은 개혁을 시작하기 위해서 야심차게 통계 조사를 진행했다.
또한 젬스트보는 러시아 의사 협회를 비롯한 의료계로부터 지원을 받아[12] 무상 의료 지원 제도를 실시해서 지역 주민들에게 의료 혜택을 제공했다. 처음 의료 지원을 시작할 때는 의사들을 고용해서 왕진을 보냈지만, 의사들이 도시에 머무르다가 필요할 때만 왕진 나가는 것으로는 의료 수요를 채워주기 어려웠기 때문에 젬스트보는 천천히 제도를 개선해 나갔다. 젬스트보는 지역을 4~5개 혹은 그 이상의 지구로 나누고 의사들을 지역 보건의로 고용해 각 지구에 배치한 다음, 마을이나 거점 지역에 병원을 건설했다. 이렇게 해서 외래 환자들을 받고 입원 치료가 필요한 환자들을 수용했으며 환자들에게 안정적인 의료 혜택을 제공했다. '젬스트보 병원'은 5 ~ 10개의 침상을 갖추었고 진료실과 응급실·산부인과·매독 병동·의사를 위한 관사가 있었다. 그리고 젬스트보가 고용한 지역 보건의들은 간호사와 산파, 의사보들과 함께 평균적으로 1000 ~ 1500명의 환자를 담당했으며, 왕진을 나가게 되면 더 많은 환자를 치료해야 했다.
이러한 젬스트보의 무상 의료 지원은 '젬스트보 의료 제도'라고 하는 일종의 사회화된 의료 제도를 탄생시켰으며 러시아에서 의사의 역할에 대한 개념을 바꿔놓았다. 이 제도가 출현하기 전까지만 해도 의사나 간호사는 돈을 벌기 위해 의료 활동을 했지만, 이제부터는 사람들에게 의료 복지를 제공한다는 의무감을 가지고 의료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또한 젬스트보 의료 제도의 성장은 의사와 간호사의 증가에도 영향을 주고 치료사의 전통 의료에만 의존하던 러시아의 마을에 현대 의학의 혜택을 제공했다. 그리고 젬스트보 의료 제도는 러시아의 공공 위생을 개선하고 농민들에게 의료 지원을 해주기 위해 인구 통계와 질병률, 의학을 연구하고 지역 위생을 관리했으며 젬스트보는 1910년까지 2686개소의 병원을 세우고 3100명의 의사들을 지역 보건의로 고용했다. 의사들은 평균적으로 17 마일마다 한 명씩 있었으며 2800명의 환자를 담당했다. 마지막으로 젬스트보 의료 제도는 소비에트 의료 제도와 현대 러시아 연방 의료 제도의 기초가 되었으니 러시아의 공공 의료 제도의 발전에 젬스트보가 끼친 영향은 상당하다고 평할 수 있다.
젬스트보는 지방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일에서 자신이 전임자들보다(귀족, 관료) 훨씬 더 유능하다는 것을 입증하고 전임자들이 방치했던 농촌 지역에 많은 지원을 해주었다. 젬스트보는 농민을 대상으로 한 대부분의 제도를 발의하고 시행했는데, 젬스트보가 지방 자치를 시작한 이후로 대부분의 마을에 학교와 병원이 생기고 병원을 못 지으면 작은 진료소라도 지어주었다. 중심 지역에서 멀리 떨어진 마을들에도 도로망이 깔렸다. 내부적으로 귀족 의원들의 수가 더 많긴 했지만, 젬스트보는 귀족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인민의 생활 수준 향상을 위해서 일했으며[13] 조금씩 활동 범위를 확장해, 국가가 하지 못하는 영역에까지 손을 댔다. 예를 들면 업무 중에 오해가 생기면 젬스트보는 중앙의 원로원에 민원을 제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젬스트보 제도에도 한계가 있었다. 젬스트보는 국가적인 사안에는 관여하지 못하고 오로지 지방의 각종 현안들만 처리할 수 있었다. 일반 행정과 공권력은 중앙에서 파견한 행정관들이 집행하고 이들이 젬스트보의 활동을 감독했다. 보유한 과세권은 제한이 많고 담당하는 구역은 너무 넓어서 지역 주민들의 요구를 즉각적으로 해결해주기 어려웠다. 게다가 젬스트보는 농노제를 폐지한 러시아의 34개 주에만 설립했기 때문에 원래 농노제가 없었던 중앙아시아, 시베리아, 캅카스, 백해 연안과 러시아인들이 적었던 폴란드, 리투아니아, 벨로루시, 우크라이나 우안 지역에서는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최대 1880년까지) 젬스트보가 설립되지 않았다.
그리고 재산 규모와 부동산 보유 규모에 따라서 투표권을 제한했기 때문에 귀족들에게 매우 유리한 구조였다. 주 젬스트보에서 20%는 상인과 기타 계급, 38%는 농민들이 차지한 것과 달리 귀족, 관료 계급 의원들이 차지하는 비율은 42%였고, 상임위에서는 62%, 군 젬스트보에서는 74%나 될 정도로 귀족, 관료 계급 의원들이 다른 계급 의원들에 비해 매우 많았다. 상임위가 담당하는 지방 행정 업무는 높은 교육 수준, 시간적 여유를 요구한다는 점에서 귀족에게 유리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보수파들이 정권을 잡은 뒤로는 비귀족 계급의 의원 선출이 제한당하기 시작하고 젬스트보에 대한 귀족의 영향력과 정부 통제가 강화되었다. 제국 정부의 이러한 조치는 젬스트보를 통해 지방 자치를 이루고, 더 나아가 관료나 귀족이 아니어도 국정에 참여할 수 있게 될 것이라는 인민의 꿈을 짓밟았다.

3.2.2. 도시 자치


1870년, 제국 정부는 '도시법'을 제정, 젬스트보를 모델로 해서 도시의 모든 계층이 의원을 선출하는 도시 의회(도시 두마)를 설립했다. 세금 납부액을 기준으로 해서 3 부류로 유권자들을 나누었다. 각 계급간 비중이 상이하던 젬스트보와 달리 도시 두마의 경우에는 각 집단이 1/3씩 선출했다.
그리하여 러시아 509개 도시에서 두마를 소집하고 젬스트보가 없던 캅카스, 리투아니아, 벨로루시, 우크라이나 우안 지역 도시에서도 두마를 소집했다.[14] 4년 임기의 두마 의원들은 시장 선출권과 각종 행정(복지, 상거래 보호, 의료 등)에 참여할 권리를 부여받았으며 도시의 발전과 도시민들의 편익을 위해 활동했다. 이러한 두마의 활동은 광범위한 계층의 정치 참여를 촉진시켜 시민 사회와 법치 국가를 형성하는데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한계도 있었다. 시장 선출은 지사나 내무 대신의 인준을 받아야 했고 두마가 어떤 결정을 내리든 관료들이 이를 중지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제국 정부는 각 주마다 감찰 위원회를 설립해서 두마를 감시했다. 선거권도 문제였다. 제국 정부가 재산 보유량에 따라 선거권을 주었기 때문에 두마는 일반 도시민보다 재산이 많은 대자본가들에게 매우 유리한 구조였다. 또한 도시에 호적을 두고 있는 사람만이 선거권자가 될 수 있었기 때문에 도시 인구에서 다수를 차지하는 농촌 출신 도시민들은 두마 의원 선출과 도시 행정에서 아예 배제당했다.

3.3. 재정 개혁


러시아 제국은 크림 전쟁에서 8억 루블에 달하는 전비를 소모했다. 1857년 한 해의 재정 적자만 해도 7,500만 루블이었다. 러시아의 경제력이 유럽보다 좋지 않은 형편인데도 무리를 하면서 전쟁을 했으니 최악의 재정 적자가 발생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15] 심각한 재정 적자에 시달렸으며 전쟁 기간 동안 루블을 과다하게 남발한 탓에 루블의 가치가 폭락하고 물가가 오르는 등, 국가 경제까지 혼란해졌다. 그래서 러시아의 재무 관료들은 금 보유량을 필사적으로 늘려 화폐 가치를 높이고 신용을 되찾는 데에 주력해 러시아의 경제 회생에 기여했다. 시베리아를 개척하면서 금을 채굴해서 1840년대에 세계 1위의 금 생산국이 되었는데, 이 덕을 많이 봤다.
1863년, 타타리노프의 주도하에 제국 정부는 재정 개혁을 단행했다. 각 부서들이 개별적으로 금고를 두고 자체적으로 수입을 모으고 지출하던 제도를 개혁해서 금고는 재무성에 두고 재무성이 각 부서의 예산을 통제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모든 정부 기관에 예산 편성을 지시하고 국가의 수입-지출을 매년 공개했으며 현금 출납 제도를 통일했다. 또한 제정 러시아의 고질병인 부정부패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해외 각국의 감사 제도를 도입하고 감사원에 불시 감사권을 주어 감사원을 강화하고 부정부패를 감시했다. 이러한 재정 개혁으로 정부의 재정 관리는 효율성이 높아지고 공정해졌으며 국가 경제도 안정을 찾았다. 이외에도 제국 정부는 수입을 늘리기 위해서 관세를 확대하고, 예카테리나 2세 시절부터 있었던 주류 독점권을 폐지했다. 이 때의 주류 독점권은 개인이 정부에 일정한 돈을 지불하면 정해진 지역에서 독점적으로 주류를 판매할 권리를 얻는 것이었는데, 이제부터는 모든 주류에 소비세가 붙는 대신, 누구든지 합법적으로 주류를 판매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시기의 재정 개혁과 은행 설립, 적자를 줄이기 위한 관료들의 노력으로 정부의 재정 상태는 호전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의 재무 관료들은 균형 재정을 만드는데 실패했다. 러시아의 재무 관료들이 유능했음에도 불구하고 실패했던 것은 철도 건설 비용과 귀족에게 주는 토지 보상금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었다. 제국 정부는 이렇게 발생한 막대한 적자를 해소하기 위해 해외 자본을 끌어들이고 국채를 발행했는데, 정부의 이러한 재정 정책은 해외의 투자를 유도해 경제 성장을 이끌어내고 단기적으로 정부의 재정 부족 문제를 해결해주었지만, 장기적으로는 정부 부채가 늘어나게 하고 러시아 산업이 창출하는 이익의 상당 부분이 해외로 빠져나가게 만들었다.
그리고 부패가 극심했다. 정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에는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부정부패가 만연했다. 특히 고위 관료들의 부패가 심해서 관료들과 자본가들이 서로 결탁해서 이권을 주고 받기도 했다. 가장 이익이 많이 남는 철도업 같은 경우에는 엄청난 부정부패가 발생했는데, 건설 회사 입찰 과정, 부지 선정, 건설비, 자재 문제 등등 온갖 부분에서 부패가 발생했다. 심지어 러시아-튀르크 전쟁 중에 장성 여럿이 어떤 회사의 편의를 봐주는 대가로 막대한 돈을 받아챙겼던 부패 사건이 발생한 적도 있었다. 제국 정부가 부정부패를 가만히 놔두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부정부패는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알렉산드르 2세는 일을 공정하고 사심없이 처리하고 재정 통제를 강화하려고 많은 노력을 했지만, 그런 그도 황족들을 위해서 재정을 낭비하거나 정부 소유 토지를 '하사'하는 등, 관료들에게 좋지 않은 모습을 보였다.
최종적으로 정부가 진 부채는 계속 늘어나서 알렉산드르 2세가 암살당했던 1881년의 정부 부채는 총 60억 루블에 달했고 알렉산드르 2세는 자기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후계자에게 막대한 재정 적자와 경제적 침체, 심각한 부패를 물려주었다. 제국 정부가 이 막대한 부채를 해결하고 흑자를 보게 된 것은 1890년대가 되어서였는데, 알렉산드르 3세 시기의 분게, 브이시네그라드스키, 비테 같은 유능한 경제 관료들의 노력 덕분이었다.

3.4. 사법 개혁


19세기 중반의 러시아 사법 제도는 전근대적이고 불공정한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 지사와 지방관들이 사법 업무를 맡으니, 행정권과 사법권이 제대로 분리되어 있지 않고 사법부가 행정부에 종속되어 있었다. 재판은 비공개로 이루어지고 피고가 없는 상태에서 사건에 대한 서류만 가지고 진행했다. 게다가 정확한 기한이 정해진 게 아니라서 재판 과정은 오래 걸리고 비효율적이었다. 법은 신분에 따라 불평등하게 적용하고 심문은 서면으로 진행하며 증거는 형식적으로 다루었다. 경찰들은 자백을 받아내기 위해서 피의자를 고문하거나 협박했고, 판사는 피고에게 체벌과 거열형을 선고할 수도 있었다.[16] 피고는 변론할 기회도 없었고 판결에 대한 소원을 제기하는 것도 어려웠다.
러시아의 지식인들은 이런 상황을 좌시하지 않았다. 그들은 러시아의 사법 제도를 비판하고 개혁을 요구했다. 프랑스 혁명기에는 라다셰프가 서유럽 사법체계의 도입을 주장하고 지주들의 사법권 행사를 비판했으며 나폴레옹 전쟁기에는 데카브리스트들이 서유럽 사법체계를 받아들이고 너무 숫자가 많은 법원들을 줄일 것을 요구했다. 데카브리스트들이 실패하고 난 뒤, 50년대에는 라스노친지[17] 지식인들이 그들의 의지를 이어받아 강력하게 사법개혁을 요구했는데, 투르게네프, 게르첸, 아가료프와 같은 인사들이 대표적이다. 여러 잡지에서도[18] 서유럽 국가들의 근대적인 사법제도를 소개하고 러시아 사법 제도의 후진성을 비판했다.
지식인들이 제기했듯이 러시아의 사법 제도에 문제가 있다는 것은 제국 정부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크림 전쟁으로 러시아의 후진성이 드러난 이상, 사법 개혁을 더 이상 미뤄둘 이유가 없어졌기 때문에 1857년부터 개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개혁의 방향성을 놓고 관료들이 보수파와 개혁파로 나뉘어 서로 갈등을 빚었다. 개혁파 관료들은 서유럽을 모델로 해서 러시아의 사법체계를 근본적으로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보수파 관료들은 러시아적 가치를 지킬 필요가 있으며 일정 부분에 대한 개혁은 동의하지만 서유럽식 사법 체계의 도입은 제국을 위험하게 할 것이라면서 반대했다.[19] 양 세력간의 갈등이 심해지고 합의를 볼 기미가 보이지 않자, 결국 알렉산드르 2세와 황제의 동생인 니콜라이 대공이 개혁파의 손을 들어주는 것으로 논의를 마무리 짓고 서유럽을 모델로 한 사법 개혁을 추진했다. 주로 프랑스의 사법 제도를 따랐으며, 다른 나라의 제도들도 받아들였다.
1864년 11월, 제국 정부는 '만인에게 평등한 법'이라는 원칙 아래에 신분제도를 철폐하고 사법 개혁을 단행했다. 사법부를 행정부에서 독립시키고 원로원을 중심으로 하는 단일 기구로 개편했다. 본래 원로원은 러시아어로 세나트(сена́т)라고 부르는 기관이며 국가 원로, 황제의 고문, 고위 관료들이 모여 있었는데, 이때부터 원로원은 최고 공소 기관으로서의 역할을 맡았다.[20] 1872년에는 군과 도시에 치안 판사 제도를 도입하였는데, 치안 판사는 경미한 법률 위반, 500 루블 이하의 민사 재판, 소규모 형사 사건을 다루었다. 그리고 판사가 되기 위해서는 높은 교육 수준과 재산 자격을 요구 받았다. 1877년에는 몇 개 주마다 하나씩 지방 법원을 설립하고 그리고 지방 법원의 상위 기관으로 최고 재판소를 설립해서 최고 재판소가 지방 법원들을 총괄하게 했다. 지방 법원과 최고 재판소의 판결은 최종적인 판결로 간주했으며, 오직 재판 절차를 위반한 경우에만 공소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재판관 해임 불가의 원칙'을 세우고 판사의 독립성도 보장했다. 이제부터 판사들은 법원의 조치가 아니면 어떤 경우에도 해임당하거나 전보당할 수 없었고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았다. 법관 임용 과정도 개선했다. 일부 법관직을 임명직에서 선출직으로 전환하고 개혁 과정에서 신설한 치안 판사는 군 젬스트보와 도시 두마에서 선출한 다음, 원로원의 승인을 거치도록 했다. 그리고 고위직인 지방 법원장과 최고 재판소 재판관, 재판소장 임용은 황제의 승인을 받게 만들었다. 일단 승인만 받으면 일시적인 정직도 시킬 수 없었고, 해임도 불가능했다. 판사직을 임기제에서 종신제로 전환하고 2,200 ~ 9,000루블에 달하는 상당히 좋은 연봉을 지급해서 판사들이 권력이나 금전에 굴복하지 않게 만들었다.[21]
제국 정부는 재판 과정도 개혁해서 제소와 변론을 도입하고 매질, 채찍질, 낙형 등의 가혹한 체벌을 폐지했다. 재판은 공개 재판의 원칙을 세워서 방청객이 참석한 상태에서 공개적으로 진행했다. 사회적인 관심을 받는 재판은 판결문의 요약을 보도하는 것도 허가했다. 그리고 예전처럼 피고 없이 재판하는 것이 아니라 피고와 배심원들이 출석한 상태에서 구두로 재판을 진행하고 판결에 대한 소원도 제기할 수 있게 했다. 또한, 재판에 정확한 기한을 정해서 재판이 신속하게 이루어지게 했다.
법적 절차는 21가지나 되던 것을 일반 절차와 약식 절차로 간소화하고 재판에 배심원 제도를 도입했다. 지방 법원과 최고 재판소의 재판, 중대한 형사 범죄의 재판에는 배심원 재판을 진행하고 치안 판사들만 단독으로 판결을 내리게 했다. 형사재판의 심사는 12명의 배심원이 참석했으며, 치안 판사들만 단독으로 판결을 내리는 것이라도 대체로 공정했다고 한다. 배심원은 25 ~ 70살의 러시아 국민으로 2년 이상 해당 지역에 거주하고 총액이 2,000루블 이상인 부동산을 가지고 있어야 선발될 수 있었다. 배심원은 추첨으로 정했고 그 명단은 주지사가 추인했다. 그리고 배심원은 의외로 권한이 막강해서 배심원이 내린 판결에 대한 항소는 허락하지 않았다. 권한도 강했지만 깡도 좋았는지, 어떤 배심원은 황제 암살미수범에게까지 무죄 판결을 내렸다.
보수파의 반대가 심하긴 했지만, 법정에 변호사 제도를 도입해서 피고의 이익을 보호하는 변호사의 입회를 보장했다. 그러자 러시아 사회에서 변호 분야에 대한 관심이 생겨났고 플레바코, 우루오프, 스파소비치, 아로예니예프와 같은 유명한 변호사들이 등장해 러시아의 변론계가 성장했다.
여러 사회 계층들을 위한 특수 법정도 설립했다. 농민들을 위한 볼로스트 법정이 설립되었고, 볼로스트 법정의 판사는 미르에서 선출했다. 또한 귀족, 장교, 고위 관료들을 위한 특별 재판소를 설립하고 국경 지역에는 국경 지역 재판소를 설립했는데, 국경 지역 재판소의 판사는 법무성의 추천을 받아 황제가 임명했으며 판사는 형사와 민사를 담당했다. 다른 개혁이 좌초되거나 왜곡되는 와중에도 사법 개혁은 지속적으로 이뤄져서 19세기 말이 되면 러시아 전체 지역에서 사법 개혁이 완료되었다.
사법 개혁은 법무성 장관 자먀틴과 그를 보좌한 자루드니, 법무성의 진보적인 관료들이 이뤄낸 것으로 대개혁 중에서 가장 성공적인 개혁이었다. 사법 개혁은 악명 높은 러시아의 사법 제도를 확실하게 개선하고 국민들이 재판을 신뢰할 정도로 공정성을 확보했으며 러시아가 제대로 된 법치국가가 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했다.
하지만 한계도 있었다. 공식적으로는 체벌을 폐지했지만, 농민들은 여전히 체벌을 당할 수 있었고 농민들을 위한 볼로스트 법정은 제국법이 아닌 관습법에 토대를 두고 재판했다. 그리고 제국 정부는 가톨릭 신자들을 차별해서 일부 법관직에 대한 가톨릭 신자들의 진출을 막아 버렸다. 일부 지방의 치안 판사는 임명직이었고 중앙아시아에서는 배심원제를 도입하지 않았다. 배심원들의 자질도 문제였다. 어떤 배심원은 "이콘 앞에서 제비뽑기를 해서 평결을 내리자"고 주장하기도 했고, 피고가 자백해서 진상이 다 드러난 사건인데도 배심원들이 무죄 평결을 내리기도 했다.
정부가 사법 개혁을 무력화하려 한 시도 역시 문제였다. 1878년, 암살범 베라 자술리치의 재판에서 어떤 배심원은 죄인에 대한 폭력 사용을 근거로 해서 무죄를 주장했다. 재판에서 무죄가 선고돼서 베라 자술리치에 대한 처벌과 항소가 불가능해지자, 제국 정부는 모든 정치범 관련 사건들을 일반 법정이 아니라 군사 법정으로 넘겨서 정치범들에게 중형을 선고하려는 꼼수를 부렸다. 정치범 재판을 일반 법정에서 하면 혁명가들에 대해 동정적인 여론이 반영돼서 매우 관대한 판결이 내려질 가능성도 높았는데, 군사 법정은 비공개로 진행하는 것이 가능했고 중형을 선고하는 것도 쉬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부의 개혁이 당시 지식인들이 보기에는 여전히 부족한 점이 있었기 때문에 지식인들은 사법 개혁에 실망했고 추가적인 개혁을 요구했다. 또한 개혁 자체가 전제군주인 황제의 의지에 따라서 이루어진 '위로부터의 개혁'이었다는 점 역시 한계로 지적된다.

3.5. 교육 개혁


알렉산드르 1세의 치세부터 러시아는 꾸준하게 도시화가 진행되고 행정 제도와 문화가 발달하여 잡지와 신문, 도서관과 학교가 늘어나고 문자 사용자의 숫자도 증가했다. 그리하여 알렉산드르 2세가 통치를 시작했을 무렵의 러시아에서는 8천 개의 학교가 45만 명의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수치는 전체 러시아의 인구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숫자였다. 45만의 숫자는 전체 인구에서 취학 연령을 9%로 잡을 때, 1%도 안 되는 수치였고 알렉산드르 2세의 통치기인 1860년대의 문해율은 고작 6% 정도였다. 이 수치는 서유럽 국가들과 비교하면 너무나 낮았다. 비슷한 시기의 영국, 프랑스는 문맹율이 30% 안팎이었고 인접국인 오스트리아도 변경 지역의 문맹율이나 러시아와 비슷할까, 중심 지역의 문맹율은 러시아보다 훨씬 낮았다. 1880년 기준으로 변경 지역까지 포함한 오스트리아의 문맹율은 30%대였다. 이는 기존의 교육 제도로는 러시아가 가진 후진성을 극복하고 근대화와 산업화를 시작할 수 없음을 증명해주었다. 그래서 제국 정부는 후진성을 극복하고 근대화와 산업화에 필요한 국민 계몽과 인재 양성을 하기 위해 교육 개혁을 시작했다.
1862년, 알렉산드르 2세는 교육 개혁을 위해 푸타틴 제독을 경질하고 자유주의적인 관료였던 골로브닌을 교육성 장관에 임명했다. 골로브닌은 곧바로 자유주의 개혁을 단행하고 니콜라이 1세가 폐지했던 대학법을 되살려, 그 동안 대학이 빼앗겼던 권리를 돌려주었다.(대학의 부분적인 자치, 총장이나 학장의 선출권 등) 1864년 6월, 골로브닌은 중학교 입학에 대한 차별을 철폐하고, 신분과 종교의 차이 없이 모든 계급의 자녀들에게 중학교에 입학할 수 있는 권리를 주었다. 그리고는 <인민 초등학교에 관한 법령>을 선포해 공립 초등학교를 세우고 사립학교의 설립도 허가했다.
이 법령으로 인해 러시아 각지에서 국립 학교와 지방 학교, 교회 부속 학교, 일요 학교 등, 다양한 형태의 초등학교들이 나타났다. 교회 부속 학교는 정교일치의 당시 러시아 체제에서 정부가 가장 선호한 학교로, 1882년까지 4,500개로 늘어났으나 예산 부족으로 많은 도움을 주지는 못했다. 일요 학교는 1859년에 키예프에서 처음 생겼고 다른 도시로 퍼져나가서 1862년에는 그 수가 300개를 넘었다. 일요 학교는 학비가 무료였으며, 학생들에게 물리, 화학의 기초를 가르치고 지리학과 역사를 가르쳤다. 일요 학교의 교과 과정은 국립 학교보다 훨씬 폭넓었다. 초등학교의 교육기간은 대체로 3년을 넘지 않았다.
아울러 학생들을 가르칠 교사들에 대한 수요가 늘어났기 때문에 제국 정부는 사범 학교를 설립해서 교사를 양성했다.
이러한 정부의 노력 외에도 지방의 젬스트보가 교육 확산에서 큰 역할을 했다. 젬스트보는 문맹 퇴치 위원회와 계몽 기관을 만들어 교과서와 책을 출판하고 학교에 필요한 자금을 모았다. 또한 젬스트보는 보편적인 초등교육 도입의 필요성을 토의하고 교사 양성을 위한 사범 학교를 세웠다. 그리하여 젬스트보는 1864년부터 74년까지 10년 동안 1만 개의 젬스트보 산하 초등학교를 설립했으며 젬스트보 산하의 초등학교는 모든 주와 군의 관청 소재지와 농촌 지역에 가장 많이 보급된 초등 교육 기관이 되었다.
1864년 11월, 제국 정부는 중등 교육 과정을 개설해서 중등 학교(김나지야)를 고전 중학교(8년제)와 실업 학교(6년제)로 나누고 김나지야를 중등 교육 기관의 기본형으로 만들었다. 고전 중학교는 라틴어그리스어를 중점으로 가르치고 졸업생들에게 대학에 입학할 기회를 주었다. 실업 학교의 교과 과정은 다양한 산업 분야와 무역과 관련된 업무로 구성되어 있었고 실업 학교는 라틴어, 그리스어 과목이 없는 대신 수학, 자연과학, 기술 과목들을 중요하게 가르쳤다. 그리고 실업학교 졸업생에게는 대학 입학의 기회를 주지 않는 대신, 공업 전문학교로 진학할 기회를 주었다.
사회적으로 여성 교육에 관한 문제도 제기되었다. 이전까지는 사설 기숙학교 정도만 있고 귀족들만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제국 정부는 계급과 종교의 차이 없이 모든 계급의 여성들이 교육받을 수 있는 여성 중등 교육 과정을 만들고 여자 중학교들을 설립했으며 1863년에는 여교사 양성을 위한 교육 과정도 만드는 등, 여성 교육 제도를 개선했다. 제국 정부는 여자 중학교 졸업생들의 대학 입학은 불허했지만, 청강생 자격으로 대학 수업을 들을 수 있게 해주었다. 여학교 숫자는 계속 늘어나서, 1890년대 초에는 300개의 여성 중학교에서 7만 5천의 여학생들이 교육받았다. 그리고 1869년에는 여성들을 위해 모스크바, 상트페테르부르크, 카잔, 키예프와 같은 대도시에 여성 고등 교육 과정을 만들고, 1872년부터는 여의사들도 양성했다. 또한 정부는 성직자의 딸들을 위한 학교들도 설립했다.[22]
대학을 위한 새로운 규정도 제정해서 학생 정원 제한을 없애고 청강생에게도 대학을 개방했다. 1863년의 대학법 제정과 자치권 회복 덕분에 대학은 더 이상 정부의 감독을 받지 않았고, 교수 협의회가 자체적으로 대학을 감독했다. 교수 협의회는 대학 총장과 학장을 선출하고 교육계획을 정하며 재정과 교직원 문제를 처리했다.[23] 그리고 교육 개혁에 영향을 받은 톰스크와 오데사와 같은 도시에서 새로운 대학들이 들어서고 의과의술(전쟁의술)학원, 기술, 광산, 교통, 전기공학 대학, 페트롭스크 농업원과 같은 특수 고등 교육 기관들이 설립되었다.
교육 개혁으로 러시아의 교육은 크게 성장했다. 초등 교육에 대한 성과는 아주 커서 알렉산드르 2세의 치세 말기가 되면 유럽 러시아 지역 60개 주에서 22,570개의 초등학교가 114만 1천명의 학생들을 수용했으며, 전체 초등학교의 68.5%가 젬스트보 개혁 이후에 설립된 것이었다. 그리고 중등 교육도 크게 성장해서 1861년에는 85개의 중학교에서 2만 5천명의 학생들이 교육 받았지만, 1876년에는 학교와 학생의 수가 3배나 늘어났다. 대학과 중학교에서 귀족층이 차지하는 비중이 점점 줄어들었고 그 자리를 비귀족 계급 출신 학생들이 차지했다.
그리고 교육에 대한 수요와 공급이 늘어나면서 교사와 언론인, 문학가, 전문직 종사자들의 숫자도 함께 증가했다. 예전에는 귀족들로만 이루어졌던 지식인 집단은 다양한 계층으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소위 라스노친지(잡계급인)이라고 부르는 비귀족 계급 출신 지식인 집단이 탄생한 것이다.새롭게 등장한 지식인들은 선배들과 함께 정부에 개혁을 촉구하고 혁명 활동에 뛰어드는 등, 러시아의 근대화와 민주화를 위한 노력을 시작했다.
그러나 한계도 있었다. 개혁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의 문해율은 여전히 유럽에서 가장 낮았다. 1880년대에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사람의 수는 20%였고 1897년에도 문자 해독율은 21.2%으로, 남성 문해율은 29.3%, 여성 문해율은 13.1%였다. 동시기 프랑스와 비교하면, 혁명기(1790년대) 프랑스의 남성 문맹율이 50%, 여성 문맹율은 75%였고, 제3공화정(1875년 ~ 1940년) 초기에는 남성 문맹율이 25%, 여성 문맹률이 30% 정도였다. 러시아에서 읽고 쓸 줄 아는 사람들은 주로 대도시에 몰려 있었고, 농촌 지역에서는 문해율이 평균보다 더 낮았다. 그리고 고등 교육을 받은 사람의 수는 전체 인구의 1%를 넘지 않았고 중등 교육을 받은 사람의 숫자도 전체 인구의 4%에 불과했다.
한편 여자중학교는 수업료를 높게 받으면서도 남자중학교보다 가르치는 지식의 양이 뒤떨어졌다. 제국 정부가 여성 고등 교육 과정을 만든 것도 여성 인권과 공공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여성들이 해외 유학을 가게 되면 서구의 사상에 영향을 받아 급진화할 것을 우려해서였다. 그리고 정부가 대학생들에게 단체를 조직할 권리를 주지 않았기 때문에, 이것에 불만을 품은 대학생들이 '학생 소요'를 자주 일으켰다.

3.6. 군제 개혁


크림 전쟁의 패배는 러시아 제국에겐 엄청난 충격이었다. 그 대단하다는 나폴레옹을 패퇴시켜 파리로 진격하고, 유럽 각지의 혁명을 분쇄해 '유럽의 경찰'로 군림한 러시아 제국군이 크림 전쟁에서는 완전히 박살나 버리고 그 후진성과 한계를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러시아군이 크림 전쟁에서 패배한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 인접국과의 적대적 관계 및 내부 문제
러시아 제국군은 당시 유럽 최대 규모의 상비군인 222만을 보유했하였고 1860년 기준으로 거의 인구의 3%가 군에 복무했다. 그러나 국경이 넓고 자연 방어선이 없어서 국경마다 군대를 배치해야 하는 데다가 인접한 프로이센 왕국, 오스트리아 제국의 참전을 우려해 폴란드와 갈리치아 방면의 병력이 계속 국경에 묶여 있어야 했다. 게다가 캅카스 산악인들과의 전쟁도 동시에 치르고 있어서 러시아는 크림 전선에 70 ~ 90만의 병력밖에 투입할 수 없었다. 그래서 러시아는 방어전을 치르면서도 연합군을 숫자로 압도할 수가 없었다.
  • 병력 동원 및 이송 능력 부족
러시아는 산업화가 늦어서 군수품 생산 능력이 떨어졌으며 철도망과 도로망이 부실했다. 공병대 사령관 출신으로서 공병술과 기술에 관심이 많았던 니콜라이 1세가 철도를 깔고 러시아의 도로망을 개선하긴 했지만, 제국의 중심지에서 크림 반도까지 이어지는 도로망은 부실했고 크림으로 가는 철도는 아예 없었다. 그러니 크림 전쟁에서 병력과 군수품을 빠르게 보낼 수가 없었다. 연합군은 본국의 대규모 기계 공업 단지에서 체계적으로 생산한 군수품을 기차와 화물선에 실어서 병력과 함께 수송했지만, 러시아는 소규모 수공업 공장에서 생산한 군수품을 마차에 실어서 보냈고, 병사들은 걸어서 크림 반도까지 가야 했다.
러시아는 여전히 신분제가 잔존해 있었기 때문에 평민은 장교가 되기 어려웠고, 대부분의 장교는 귀족이었다. 귀족 계급에서만 장교들을 선발하다 보니 숫자가 부족했다. 크림 전쟁 때, 러시아군은 10만의 장교밖에 모을 수 없었다. 이것은 전투력 하락으로 이어졌다.
  • 농노제
다민족 국가에 농노제를 유지하던 러시아는 언제 농민 반란이나 소수 민족 반란이 일어날지 몰랐기 때문에 대규모 상비군을 유지하고 내지에도 군대를 주둔시켜야 했다. 그러나 대규모 상비군을 운용하는 것은 막대한 비용을 요구했고, 이것은 러시아의 재정에 많은 부담을 주었다. 또한 농노제는 러시아군이 상비군 제도에서 예비군 제도로 변화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안 그래도 농민 반란이 자주 일어나는데, 예비군 제도를 실시해서 농민들을 훈련시킨 다음에 집에 보낸다는 것은 낫과 괭이로 무장한 비조직적인 농민군을 화기로 무장하고 군사 전술을 구사하는 비정규군으로 진화시키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잘 먹지도 못해 영양 상태가 나쁘고, 중노동에 시달려 건강과 발육이 좋지 못한 농노들을 가지고 병력을 구성하다 보니 러시아군의 질적 수준은 매우 나빴고 사기도 낮았다.
  • 군사 기술
러시아군은 군사 기술 면에서 매우 심하게 뒤처져 있었다. 연합군은 사정거리 800m의 강선총과[24] 미니에 탄, 강철제 대포를 보유하고 있었지만, 러시아군은 최고 군 통수권자인 니콜라이 1세의 규율과 격식에 대한 집착과 보수성 때문에 라이플과 강철 대포, 증기선과 같은 최신 무기가 매우 부족했다. 러시아군은 전장에서 1선에게는 라이플을 지급하고 2선부터는 나폴레옹 전쟁 시절에 쓰던 사정거리 100m의 무강선 머스킷을 지급했으며 보병을 지원해야 하는 포병도 구식 주철 대포와 청동포 중심이었다. 그리고 바다에서 연합군이 폭발탄을 장전한 신형 대포를 싣은 증기선을 끌고 나올 때, 러시아군은 구식 범선으로 맞서야 했다. 러시아군의 증기선 비율은 30% 정도에 불과했다. 크림 전쟁에서 세바스토폴을 지키던 러시아군과 주민들은 연합군의 찬사를 받을 정도로 맹렬하게 저항하고 조국을 수호하려 애썼지만, 이런 기술적인 격차는 용기만으로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러시아군이 가지고 있는 이 수많은 문제들은 농노제를 폐지해야 해결할 수 있었고, 1861년에 제국 정부가 농노제를 폐지하면서 문제를 해결할 기회가 주어졌다. 상처받은 국민들의 자존심과 러시아의 대외적 위상을 회복하고 다른 열강들에게 뒤쳐지지 않으려면 반드시 군제 개혁을 단행해야 했기 때문에 제국 정부는 군제 개혁을 농노 해방만큼이나 중요하게 여겼다.
1864년에 제국 정부는 군제 개혁을 단행했다. 개혁파 관료인 국방성 장관 드미트리 밀류틴은 전국의 군대를 국방성 장관의 직접 통제를 받는 10개의 군관구로 편성했다. 군관구 제도는 지역별로 그 특수성을 인정하고 그것에 맞추어서 작전을 수행하게 만드는 제도였다. 광대한 러시아의 국토를 생각하면 매우 적절한 개혁이었다. 1864년에 6개 군관구로 편성했다가 1865년에 4개를 추가했다. 또한 사관 양성 제도를 개혁해서 육군 유년학교를 설립하고 사관 교육 과정을 일반 교육 과정과 특별 교육 과정으로 분리했다. 이 때부터 사관 후보생들은 육군 유년학교에서 종합적인 교육 과정을 이수한 다음, 육군 사관학교로 진학해서 전문적인 군사 교육 과정을 이수해야 장교로 임관할 수 있었다. 이러한 제도는 보수파의 반대를 받았으나 드미트리 밀류틴은 밀어붙였다.
새로 설립한 육군 유년학교는 귀족들만을 위했던 사관학교와 달리 모든 계층에게 입학을 허용했으며 중등 교육을 받지 못한 군인들을 위한 교육도 진행했다. 제국 정부는 1867년에 군 법무관 사관학교를 설립하고, 1868년에는 육군 유년 학교의 보충을 위해 육군 중등 예비 학교를 설립했다. 해군도 콘스탄틴 대공의 주도하에 이와 같은 개혁을 실시하고 1877년에 해군 사관학교를 설립했다.
사관 양성 제도를 개혁한 것에 이어서 제국 정부는 병역 제도를 개혁했다. 예카테리나 2세의 치세부터 귀족의 병역 의무가 완화되고 부자들이 사람을 사서 병역을 회피했기 때문에 병역 의무는 귀족과 상류층을 제외한 계층에게 큰 부담이었으며 군대는 점점 가난한 사람들이나 가는 곳이 되었다. 그리고 복무 기간이 25년이나 되었기 때문에 부양자나 가장을 군대에 보낸 가정이 생활고로 파괴되는 일이 속출했고, 농노 해방과 사법 개혁으로 신분제가 폐지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불평등한 징병제를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리하여 1874년 1월 1일, 제국 정부는 국민개병제를 도입하고 모든 계층을 대상으로 한 의무 복무제를 실시해 20세 이상의 모든 러시아인 남성에게 병역 의무를 부과했다. 제국 정부는 매년마다 필요한 군인의 수를 결정한 뒤, 20세가 된 젊은이들을 소집하여 추첨을 통해 필요한 군인의 숫자를 채우고 추첨에서 떨어진 이들은 예비군에 편성시켰는데 현재의 태국과 유사한 형태의 방식이다. 육군 현역 복무 기간은 6년이고 해군 현역 복무 기간은 7년이었으며, 육군은 전역하고 9년 동안, 해군은 전역하고 3년동안 농한기에 훈련받는 예비역으로 복무해야 했다. 그래도 실질적으로 군 복무 기간이 25년에서 6년으로 줄어든 셈이었고 신분의 차별 없이 모든 계층이 병역 의무를 지게 된 것이라 효과가 좋았다.
군 면제 대상은 장남과[25] 독자, 가족 중 유일한 부양자, 모든 종교의 성직자들과 신학생[26], 지방 주민 중 일부와 상인들이었으며[27] 면제자들은 전시에만 동원하는 민병대에 등록했다. 그리고 교육 수준이 높으면 복무 기간을 줄여 주었다. 초등학교 졸업자는 4년, 중학교 졸업자는 1년 6개월, 고등 교육, 즉 대학생들은 6개월만 복무하게 했는데, 당시 러시아에서는 교육 수준이 높은 이들에게 단축 복무 혜택을 주는 것을 불공정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러시아군에게 가장 문제가 되었던 물질적인 부분도 개혁했다. 가혹한 복무 조건을 개선해서 군대에서 신체형을 폐지하고 신체형은 징벌 부대에 편입된 군인에게만 가했다. 보급도 개선하고 막사도 개축했으며 병사들을 위한 읽고 쓰기 교육과 초등 교육을 실시해 문맹률을 낮추었다. 그리고 서유럽과의 격차를 줄이기 위해 구형 머스킷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출신 무기 개발자인 실베스터 크른카가 만든 '크른카' 소총을 채택해 개조했다. 더불어 미국인 무기 개발자인 하이럼 베르단이 개발한 신형 베르단 소총을 도입했으며 주철 대포와 청동포는 강철 대포로 대체했다. 전투 준비 체제를 개정하고 새로운 복무 규정, 교훈, 교범 등을 출판해서 대열 정비 시간을 크게 줄이고 병사들의 자기 업무 파악을 도와주었다.
해군 역시 체질 개선에 나섰다. 해군은 범선을 퇴역시키고 영국과 프랑스의 배들을 모방해 새로 증기선과 철갑선을 건조했으며 거기에 신형 대포를 탑재했다. 이렇게 꾸준히 해군력을 증강하는 한편, 기술 개발에도 힘써서 1873년에는 세계 최초의 장갑 순양함을 개발하고 어뢰정을 건조했다. 1871년에는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도움을 받아 파리 강화 조약의 결정 사항을 무력화하는 런던 의정서를 체결하여 흑해 함대를 재건하고 크림 반도를 다시 요새화했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러시아 해군은 러시아-튀르크 전쟁튀르크 해군을 양과 질에서 압도하고 전쟁의 승리에도 크게 기여했다. 특히 체질 개선으로 도입된 어뢰정들이 러시아-튀르크 전쟁 때 많이 활약했다.
군제 개혁의 결과, 러시아군의 전투력은 크게 강화되었고 국민개병제로의 변화와 군인 교육 실시는 러시아의 근대화와 사회 계층에 큰 영향을 미쳤다. 게다가 군 동원력이 좋아지고, 이전보다 더 적은 군대를 가지고도 충분히 치안 유지와 방비가 가능해졌기 때문에 군 감축을 이루면서 군사 분야에 대한 정부 지출도 많이 줄어들었다. 그리고 제정 러시아는 캅카스와 중앙아시아 지역을 장악하고 러시아-튀르크 전쟁에서도 승리를 거두어 크림 전쟁 이후에 잃어버렸던 자존심을 다시 되찾는 데에 성공했다.

그러나 러시아군은 군제 개혁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완전하게 효율적인 군대가 되지는 못했으며 서유럽과의 격차도 여전히 존재했다. 개혁을 시작한지 13년이 지난 뒤에 일어난 러시아-튀르크 전쟁에서 러시아군은 이전보다 훨씬 더 강한 모습을 보여줬지만, 군수 물자와 최신형 무기, 유능한 지휘관들이 부족하다는 문제를 겪었다.[28] 예를 들면 플레브나 전투 당시, 오스만 군은 레버액션 연발총인 윈체스터 M1866마티니-헨리 소총으로 무장한 반면, 러시아군은 단발 볼트액션 소총인 크른카와 베르단으로 무장했다. 당연히 화력 면에서 차이가 날 수 밖에 없었으며 전투에서 러시아군이 승리하긴 했지만, 막대한 피해를 강요받았다.[29] 게다가 제정 러시아가 튀르크를 멸망시키려는 것에 위협을 느낀 유럽 국가들이 러시아의 팽창을 막으려고 기를 쓰고 튀르크를 지원하다 보니 전투는 이겼으나 원래 목적인 튀르크 멸망은 실패로 돌아간다.[30]

3.7. 개혁의 한계와 반개혁


알렉산드르 2세의 대개혁은 긍정적인 면도 있었지만 부정적인 면도 있었다. 농노 해방은 농노들의 불만을 샀고 상환금 문제는 농민들을 옥죄었으며 정부가 그토록 편의를 봐주었던 귀족 지주들은 농노 해방 이후로 몰락해 갔다. 지방 의회인 젬스트보와 도시 두마는 귀족과 관료, 대 자본가의 비중이 높아서 그들의 영향력 아래에 놓여 있었으며 사법 개혁을 해서 행정부와 사법부가 분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행정부는 특히 혁명가들을 비롯한 정치 사범 문제에 관여하려 했고, 행정부는 편법을 써서 정치 사범들에게 중형을 선고했다. 그리고 불충분한 개혁에 실망한 대중과 지식인, 혁명가들은 추가적인 개혁을 요구하거나 스스로 혁명 운동에 뛰어들었다.
폴란드 입헌왕국에 대한 처우 개선은 1863년의 마지막 무력 봉기를 통한 폴란드인들의 독립 시도로 이어졌다. 폴란드인들의 봉기는 영국프랑스 등 열강들의 외면과 러시아의 강경한 탄압으로 좌절당했고[31] 폴란드 입헌왕국은 완전히 러시아의 직할령으로 편입되었다. 이 시기를 프리비슬린스키 크라이라고 한다.
1866년 4월 4일, 인민주의 혁명가 드미트리 카라코조프의 황제 암살 미수 사건은 제국 정부를 충격에 빠뜨렸다. 온건한 자유주의자들까지 경악한 이 사건으로 인해 황제의 정책은 개혁 정책에서 보수 반동적인 정책으로 돌아서기 시작했다. 황제가 보수화되자, 골로브닌을 비롯한 개혁파 관료들이 사임하고 보수파 관료들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톨스토이 백작(레프 톨스토이의 친척)이 교육성 장관이 되고 트레포프 장군이 헌병대장이 되었다. 개혁파인 란스코이를 대신해서 발루예프가 내무 대신이 되었고 슈발로프 백작이 황제원 3부(비밀경찰)의 수장이 되어 권력을 장악했다.
비록 알렉산드르 2세는 파벌 간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 개혁파의 지도자인 드미트리 밀류틴을 국방성 장관에 유임시켰지만 주도권읜 보수파가 가지게 되었다.이렇게 주도권을 잡은 보수파들은 반개혁 정책을 시작한다. 톨스토이의 취임 이후로, 김나지야는 수업 시간의 40%를 그리스어와 라틴어에 투자했다. 다른 과목의 비중이 크게 줄이는 이 조치는 학생들에게 악영향을 끼쳤다. 게다가 톨스토이는 비귀족 계급의 상급 학교 진학을 방해하고 졸업 조건을 엄청 까다롭게 만들어서 김나지야를 졸업하는 학생은 전체 학생의 40%에 불과했다. 보수적인 정책 집행과 비귀족 계급 학생에 대한 방해 공작 때문에 톨스토이 백작은 러시아 대중들의 증오를 샀다. 발루예프는 처음부터 농노 해방을 반대한 인물이었고 내무 대신이 되자 농노제 개혁을 왜곡하려고 했다. 더불어 젬스트보를 약화시키고 젬스트보 귀족 의원들의 권한을 확대했으며 학교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고 검열도 강화해, 출판에 새로운 규제를 제정하고 반정부지로 유명한 <현대인>과 <러시아의 말>을 폐간시켰다.[32] 언론에 대한 통제도 강화해서 국정을 보도하는 것과 노동자 파업, 농민 봉기를 보도하는 것을 금지했다. 슈발로프는 테러에 충격을 받은 황제의 마음을 좌지우지하고 자신에게 권력을 집중시켜 '표트르 4세'라는 별명을 얻었다.[33]
이처럼 제국 정부가 보수적인 정책을 실시하고 통제를 강화했으나, 인민주의 계열 혁명가들의 테러와 혁명 운동은 사그라들지 않고 더 크게 타올랐고, 러시아 제국은 이 시기부터 오래도록 혁명가들과의 전쟁을 치루어야 했다.
1872년, 독일에서 한 권의 책이 러시아에 들어왔다. 당시 러시아는 모든 서적을 검열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책도 다른 수많은 책처럼 검열관의 손을 거쳤다. 책을 검토한 검열관들은 러시아에서 이렇게나 두꺼운 책을 읽을 사람은 극소수일 것이며, 책을 읽은 극소수의 사람들 중에서도 책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 역시 소수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출판을 허가했다. 이 책의 이름은 '''Das Kapital, 자본론이었다.'''

4. 알렉산드르 2세 치세의 러시아 경제



4.1. 산업 혁명



4.1.1. 러시아 산업 혁명의 배경과 초기 산업 혁명


일반적으로 러시아 제국은 농업 국가이고 상공업은 낙후되었다는 인식이 강하지만, 러시아 제국은 상공업을 등한시한 국가가 아니었다. 표트르 대제 시절부터 강력한 서구화와 상공업 진흥 정책을 추진해서 성과를 내고 있었고 18세기 말에는 공업 기업을 1200개, 공장과 제조소는 2300개를 보유하고 있던 국가였다. 그리고 러시아의 다양한 공업 부문은 국가가 요구하는 중요한 수요들을 거의 다 만족시킬 수 있을 정도였으며 대외 무역도 활발해서 중국과 중앙아시아, 유럽과의 교역이 번창했다.
전통적으로 러시아가 강세를 보이던 산업은 금속 공업과 아마포 공업이었다. 우랄의 광산과 금속 공장에서 생산하는 막대한 양의 금속은 외국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프랑스나 영국의 것보다 품질이 좋았다. 18세기 말 ~ 19세기 초에 프랑스가 자국 금속 산업을 살리기 위해서 불가피하게 러시아 금속에 대한 수입 관세를 도입했을 정도였다. 그리고 러시아는 1750년에 41개의 용광로에서 200만 푸트(3만 2700톤)의 선철을, 1800년에는 111개의 용광로에서 990만 푸트(16만 2000톤)를 생산해서 금속 생산 분야에서 유럽 1위였다. 비교하자면 영국은 1750년에 30만 푸트(4900톤)를 생산했고, 산업 혁명 중이던 1800년에는 950만 푸트(15만 5500톤)를 생산했다.
러시아의 아마포와 밧줄, 돛천은 오래 전부터 명성이 높았다. 영국 선박을 비롯한 유럽 각국의 선박들은 러시아산 밧줄과 돛천을 애용했으며 러시아는 막대한 양의 아마포를 유럽에 수출해 필리핀산 아마가 유럽에 들어오기 전까지 유럽 아마포 시장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리고 러시아는 기술적인 수준도 다른 유럽 국가들에게 뒤지지 않았다. 이반 이바노비치 플주노프가 자체적으로 증기 기관을 개발하고 상용화하려 했으며 세계 최초로 2기통 엔진을 발명했다. 또한 영국보다 선진적인 선반 기계를 발명하고 압연 기계와 롤러 기계를 개발해서 우랄의 공장에 도입했을 정도였다.
니콜라이 1세의 치세가 되자, 러시아는 산업 혁명의 영향을 받아 상공업이 발전하기 시작했으며 원래 강세였던 금속과 아마포 공업 외에도 면직·목재·유리·가죽·도자기·직물업 등 각종 산업이 번창했다. 그중에서도 면직물 산업의 성장이 엄청났는데, 면직물 생산은 1850년대에 세계 5위로 뛰어오르고 목면 수입은 1819년부터 1859년까지 1620톤에서 4만 8000톤으로 증가할 정도였다. 목면 수입이 30배 가량 늘어난 셈인데, 이 정도의 성장은 산업 혁명을 일으켰던 영국조차 이루지 못한 일이었다. 이렇게 급성장한 면직물 공업은 아마포와 모직, 견직물 공업을 밀어내고 러시아 섬유 산업에서 가장 중요한 지위를 차지했으며 타국의 면직물 공업이 그랬던 것처럼 국가의 산업 혁명을 이끌었다.
1829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처음으로 산업 박람회를 개최하자 수백 명의 기업가들이 참가해서 증기 기관, 선반 기계, 파종기 같은 다양한 제품들을 선보였고, 박람회가 산업계의 호응을 얻고 성공적으로 끝나는 것을 본 러시아의 도시들은 러시아 혁명이 터지기 전까지 4년에 한 번씩 돌아가면서 산업 박람회를 개최했다. 또한 러시아는 19세기 후반에 세계 박람회의 상임 참가국 자격을 획득하고 항상 세계 박람회에 참가했으며 박람회에 전시한 러시아의 공산품과 전통 공예품, 예술품들은 언제나 큰 상을 받았다.
1830년부터 러시아의 공업은 조금씩 산업화와 기계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해서 수공업 공장들이 기계 공장으로 변하고 새로운 기계 공장들이 등장했다. 1830년에 7개의 기계 공장에서 24만 루블 상당의 상품을 생산하던 러시아의 기계 공업은 1860년에는 99개의 공장이 800만 루블에 달하는 상품을 생산할 정도로 성장했다.[34] 그리고 19세기 중반에는 러시아 전체 대기업의 3분의 2가 공장제 기계 공업으로의 전환을 끝내고 상트페테르부르크에만 11개, 모스크바에서는 191개나 되는 신규 기계 공업 회사들이 설립되었다. 모스크바가 수도인 상트페테르부르크보다 더 많은 기계 공업 회사들이 설립된 이유는,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신기술 도입과 공장 건설에 비용이 많이 드는 중공업이 중심 산업이었던 반면, 모스크바는 상대적으로 비용이 적게 들고 기계화가 빨랐던 경공업이 중심 산업이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막대한 기계 수입량을 줄이기 위한 자체적인 기계 생산도 이뤄졌다. 베르다, 넵스키 기계 제작 공장,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알렉산드로프 국영 공장과 같은 기계 제작 공장들이 설립되었으며 1849년에는 니즈니노브고로드 주의 소르모보에서 증기선 건조 공장이, 발트 해 연안과 우크라이나에서는 농기계 제작 공장들이 설립되었다. 공업의 양적인 팽창도 이루어져서 18세기 말에 1200개였던 기업은 1850년대 중반까지 2800개로 증가하고 1825년에 5260개였던 공장은 1854년까지 9940개로 증가했다. 공장에서 일하는 산업 노동자의 수도 20만 2천에서 45만 9천명으로 증가했다. 산업 노동자와 그외 여러 분야에서 종사하던 노동자의 숫자를 모두 합치면 80만 명이었다.
수공업에서 공장제 기계 공업으로의 전환이 이루어지자, 생산 공정에도 변화가 찾아왔다. 가장 빠르게 기계화가 이루어진 면직물 공업 같은 경우에는 30년대부터 실을 뽑는 방적 공정과 염색을 하는 날염 공정을 기계화하고 50년대부터 직포 공정에 대한 기계화를 시작했다. 면직물 공업의 이렇게 빠른 기계화는 면직물 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의 94% 이상이 고용 노동자였고 섬유 기업들이 각종 기계를 빠르게 도입했던 것, 1844년에 영국 정부가 자국 기계의 수출 제한 규제를 폐지한 것이 크게 작용했다. 고용 노동자들은 농노 노동자들보다 생산 효율도 높고, 기계 사용에 필수적인 문자 해독 능력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면직물 업계는 농노 노동력 비율이 높은 다른 산업보다 훨씬 수월하게 기계를 도입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다른 공업의 생산 공정도 조금씩 기계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해서 금속 공업은 증기 기관으로 작동하는 압연 기계와 베서머 법을 도입해서 새로운 방식으로 금속을 추출하고 제철 과정에서는 목탄의 비중이 높은 가운데 조금씩 코크스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다만, 금속 공업 같은 경우에는 농노 노동력의 비중이 높고 기계 공업으로의 전환에 막대한 자본이 필요했기 때문에 러시아의 산업 중에서 기계화가 가장 늦었다.
산업화가 이뤄지자, 인프라도 발달하기 시작했다. 18세기 말에 220만 명이었던 도시 인구는 19세기 중엽에 570만 명으로 증가하고, 양대 수도인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는 각각 인구가 27만 명과 33만 6천 명이었던 것에서 46만 명과 54만 명으로 증가했다. 또한 전체 인구에서 도시 인구가 차지하는 비율도 4%에서 8%로 늘어나고 도시의 숫자도 630개에서 1032개로 증가했다.[35] 교통망도 발달하기 시작해서 육지에서는 9천 베르스타의 포장 도로가 깔리고 볼가 강, 드네프르 강 등의 하천과 아조프 해 및 흑해 등에서는 증기선이 지나 다녔다. 그리고 공병대 사령관으로 커리어를 쌓고 기술에 관심이 많았던 니콜라이 1세는 수익성과 효용성이 없다는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1837년에 러시아 최초의 철도인 차르스코셀리스크선(상트페테르부르크 - 차르스코예 셀로)을 건설했다. 공사가 성공적으로 끝나자, 니콜라이 1세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바르샤바와 빈을 연결하는 철도와(1848)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를 연결하는 니콜라이선을(1851) 추가적으로 건설했다.
또한 민간에서는 17세기부터 시작한 선대제 수공업과 매뉴팩쳐가 발달하여 자본을 축적하고 숙련공을 양산했으며 러시아 산업의 성장에도 기여했다. 그리고 농촌에서는 계절 노동이 성행해서 농민들이 겨울마다 도시로 넘어가 상공업에 종사했으며 러시아의 노동 시장 형성과 도시 인구 증가에도 영향을 미쳤다. 계절 노동은 농업만으로는 가족 부양과 세금 납부가 어려웠던 중앙 러시아, 북서부 비흑토 지역에서 널리 성행했는데 19세기 중엽에는 아예 성인 남성의 30 ~ 40%가 겨울만 되면 돈을 벌기 위해 대도시로 떠날 정도였다.
그리고 산업 혁명의 영향을 받아 중앙 러시아와 비흑토 지역(야로슬라블, 칼루가, 모스크바, 니즈니노브고로드, 트베리, 블라디미르 주 등)의 많은 농촌과 수공업 마을들이 농사를 그만두고 아예 수공업으로 업종 전환을 하기 시작했다. 원래부터 이 지역들은 기후가 농업에 적합하지 않아 비농업 부문 경제의 비율이 높았는데, 본래 면화 산업과 상공업을 하기에는 적합해서 다른 지역보다 무역과 상공업이 발달한 편이었다. 중앙 러시아와 비흑토 지역에서는 전체 인구의 65~90%가 본업은 아니더라도 부업으로 비농업 경제 활동에 참여하고 있었다. 그래서 대다수의 농민들이 지주에게 소작료로 현물이나 현금을 주고 있었기 때문에 업종 전환이 용이했다. 예를 들어 야로슬라블 지역은 토양이 척박하고 농지가 부족해서 농노제와 부역이 강화되는 18세기 중반에도 대부분의 농민들이 현물이나 현금을 소작료로 납부하고 있었고 1858년에는 농민의 88%가 현금으로 소작료를 납부하고 있었을 정도였다. 이를 통해 블라디미르 주의 이바노보-보즈네센스크와 테이코보, 니즈니노브고로드 주의 파블로보, 트베리 주의 킴리 같은 마을들이 섬유, 금속가공, 피혁 산업의 중심지로 성장했다.

4.1.2. 초기 산업 혁명의 한계


그러나 한계도 존재했다.
  • 18세기의 러시아는 서유럽보다 더 나은 기계를 개발하고 도입했지만, 실제로는 일부 공장에서만 사용했다. 러시아의 공장주들이 서유럽의 것보다 더 우수하고 국산 기술로 제작한 기계를 쓰지 않은 것은 기계의 성능이나 생산성 문제가 아니라 가성비 때문이었다. 당시 러시아의 공장은 공장에 소속된 농노들이나 지주의 허락을 받고 공장에 돈 벌러 온 농노들을 노동자로 쓰고 있었기 때문에 인건비가 저렴하고 노동력이 풍족했다. 그래서 값비싼 기계를 사오기보다는 그냥 농노들을 착취하는 것이 더 싸게 먹혔다. 정교한 기계가 둔중한 기계음을 내며 제품을 생산하는 것보다는 족쇄와 채찍이 더 편리했던 것이다. 그리고 국가 역시 새로운 기술에 관심이 없었다. 세계 최초로 2기통 엔진을 개발한 이반 폴주노프는 예카테리나 2세에게 자신의 발명품을 시연했지만, 예카테리나는 이반에게 상금만 주고 끝냈으며 증기 기관을 비롯한 신기술 개발에도 큰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러시아의 공업은 18세기 말이 되면 판에 박힌 듯한 공장 운영과 지나치게 농노 노동력에 의존하는 점, 국가적 무관심으로 인해 산업 혁명을 치르던 영국과 프랑스, 벨기에와 네덜란드에게 뒤처지기 시작했다. 러시아의 금속 공업은 19세기의 1/4분기 동안 주철 생산량을 900만 푸트(14만 7400톤)에서 1800만 푸트(29만 4800톤)로 두 배 늘렸지만, 같은 시기에 영국은 주철 생산량을 950만 푸트(15만 5500톤)에서 2억 8500만 푸트(466만 8300톤)로 30배 늘렸다. 1830년에 세계 금속 공업에서 러시아가 차지하는 비중은 30%였지만, 1850년에는 4%로 급감했으며 영국을 비롯한 해외 각국들이 러시아산 금속 수입을 줄여서 타격이 심했다. 러시아의 금속 공업은 제국 정부가 흑색 금속과 비철금속 수입에 높은 관세를 부과해준 덕분에 간신히 살아남을 수 있었다.
  • 아마포와 견직물 공업을 비롯한 다른 산업 분야들도 실질적으로는 성장 속도가 매우 느렸다. 양적으로는 팽창했을지 몰라도[36] 여전히 표트르 대제 시절에 설립한 낡은 광산과 공장, 귀족 지주들이 설립한 영지 매뉴팩처들이 많이 남아 있었다. 농노 노동에 의존하는 이 기업들은 생산성과 품질이 나쁘고, 제품 가격은 높아서 경영 위기 상태에 높여 있었고 고용 노동에 기초한 기업들보다 훨씬 뒤떨어졌다. 특히나 영지 매뉴팩처에서의 작업은 농민들에게 가장 힘든 부역 중에 하나였기 때문에 농민들은 매뉴팩처 노동에 저항했다. 또한 국가 농민들을 고용하는 매뉴팩처들도 효율성이 낮아서 상황이 좋지 않았다.
  • 대기업의 2/3가 기계화를 이루고 공장의 숫자도 꾸준히 늘어났지만, 19세기 전반기의 러시아에서 생산하는 주요 공업 제품은 대기업이 아니라 10 ~ 15명이 일하는 소규모 수공업 공장과 가내 수공업이 생산했으며 생산재보다는 소비재가 훨씬 더 많았다. 1850년대에 러시아에서 생산하는 공업 제품의 80%가 소비재였고 전체 공업 기업에서 소규모 수공업 공장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82%에 달했다.[37] 공업이 이렇게 중소 기업 중심인 것이 문제는 아니지만, 다른 유럽 국가들과 비교하면 지나치게 수공업과 소비재의 비중이 높았다.
  • 농노제가 또 발목을 잡았다. 표트르 대제 시절부터 러시아의 공장은 위생이 나쁘고 안전하지 않았으며 노동 시간은 매우 길었다.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대부분이 ‘공장 농노’들이라 평생 공장에 묶여서 일해야 했다. 그래서 농노 노동력에 의존하는 공장들은 근로 의욕이 낮고 여건도 좋지 않아서 생산성과 품질을 보장할 수가 없었다. 19세기부터 산업화가 이뤄지면서 임금 노동자의 숫자가 늘어나, 1820 ~ 30년대에 국가 전체 공업 노동자 수에서 농노 노동자가 차지하는 비중은 46%로 감소하고 1860년에는 그 비중이 18%로 낮아졌다. 그러나 82%의 임금 노동자들 중에서도 다수가 농촌에서 지주의 허락을 받아 공장에 돈 벌러 나온 농노 노동자들이었다. 이들은 공장에서 일할 때는 공장주에 종속되어 있었지만, 지주들에게도 종속되어 있어서 지주들은 노동자들을 언제든지 농촌으로 복귀시키고 부역을 강요할 수 있었다. 그리고 공장주는 이들에게 임금 외에도 소작료까지 보상해야 했기 때문에 농노 노동자들을 고용하는 것은 인건비 측면에서 위험성이 상당했다.[38] 물론 이러한 위험성이 없는 국가 농민들을 고용할 수도 있었지만, 국가 농민들도 미르의 통제를 받고 있어서 완전하게 자유롭지가 않았다.

공장주 본인들도 농노제에 결박된 상태였다. 농노 해방이 이뤄지기 전까지 대부분의 기업가들과 상업에 종사하는 농민들의 신분은 농노였으며 이들은 지주들에게 상당한 액수의 '소작료'를 지불할 의무가 있었다. 기업가들이 신체의 자유를 되찾으려고 해도 좋은 수입원을 잃기 싫었던 지주들이 이들을 '해방'시켜주지 않았기 때문에 기업가와 미등록 상인[39]들은 계속해서 수입의 일부분을 지주들에게 빼앗겨야 했다. 모스크바에서 대규모 견직물 제조공장을 소유하고 있던 콘트라셰프도 농노 해방 전까지 골리친 공작의 농노로 남아 있어야 했으며, 구교도 출신으로 100년 가까이 러시아의 재벌 가문으로 군림하는 모로조프도 1820년대에 2000명 분의 소작료와 맞먹는 1만 7천 루블을 류민에게 바쳐서 간신히 자유를 얻었다. 이바노프 지역의 공장주 수십 명이 100만 루블이 넘는 돈을 셰레메체프 백작에게 바치고 자유를 얻은 사례도 있었다. 러시아의 자본 형성과 자본주의 발달이 다른 국가에 뒤쳐졌던 것에는 자본가들이 농노제에 결박당해 원치 않는 소작료를 바치고 신분이 농노라는 이유로 여러 가지 제약에 시달렸던 것이 영향을 미쳤다.
  • 부족한 도로 교통망이 경제 발전을 저해했다. 19세기 전반의 러시아에서 쓰는 주요 운송 수단은 수상 운송과 마차였다. 여름에는 수천이 넘는 하천과 국가가 건설한 운하를 지나가는 수로 교통을 이용하고, 겨울에는 썰매길을 따라 마차로 수송하는 것이 러시아에서 가장 편리한 수송 방법이었다. 그러나 도로의 대다수가 비포장 도로여서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라스푸티차 시기에는 통행이 어렵고, 자연재해가 터지면 아예 통행이 막혀버린다는 문제가 있었다. 니콜라이 1세의 치세에 상트페테르부르크, 모스크바, 바르샤바, 야로슬라블, 니즈니노브고로드 같은 대도시에 포장 도로를 건설하고 1860년까지 9천 베르스타의[40] 포장 도로를 건설했지만, 광대한 영토를 가진 러시아에게 이 정도 도로망은 매우 불충분한 것이었다. 비교하자면 같은 시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4만 5천km의 도로를 건설해 러시아보다 5배나 더 많은 도로망을 건설했다. 철도망 같은 경우에는 1861년까지 1500 베르스타의 철도망을 건설했지만, 같은 시기 영국은 1만 5천km, 프랑스는 1만km, 프로이센은 5천 7백km, 독일 전체로는 1만 1천km를 보유하여 러시아를 압도했다.

러시아가 다른 유럽 국가에 비해 철도 규모가 작었던 것은 내부적인 반대가 컸기 때문이었다. 기술에 관심이 많았던 니콜라이 1세가 철도를 추가적으로 건설하려고 해도 역참 소유주들이 도로 이용률이 떨어질 것을 우려해 철도 건설에 강력하게 반대했으며 귀족들은 철도 건설과 같은 혁신이 러시아의 사회 질서를 해칠 수 있고 수익성이 적을 것이란 이유로 반대했다. 게다가 니콜라이 1세의 재무 장관이었던 칸크린[41]과 도로교통성 장관 카를 톨도 철도 건설을 반대해서 러시아의 인프라는 낙후된 채로 남았다.

4.1.3. 알렉산드르 2세 시기의 산업 혁명


초기 산업화 과정을 거친 뒤, 러시아는 알렉산드르 2세의 치세부터 본격적인 산업화에 돌입했다. 제국 정부는 농민들에게서 걷은 조세와 토지 상환금, 농산물 수출 대금을 산업화에 투자하고 국채를 발행하는 한편, 외국으로부터 거액의 차관을 도입해 산업화에 필요한 재원을 조달하고 산업 자본에 투자했다. 그리고 서유럽의 기술을 도입하고 금융 기관들이 속속 설립되기 시작해서 러시아 산업 부르주아들의 자본 축적 기반이 매우 취약했던 것을 해결해 주었다. 그러나 러시아의 산업 혁명은 농노제가 잔존한 상태에서 일어났고, 타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늦게 시작했다는 불리한 점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문제점을 인식한 러시아의 자본가들은 산업화에 더 박차를 가하려면 생산성이 낮은 농노 노동자보다는 효율이 높은 임금 노동자들과 넓은 노동 시장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래서 이들은 정부에 농노제 개혁을 청원하고 공장 소속 농노들의 해방도 요청했다. 그리고 1861년에 농노 해방이 이루어져서 많은 농민들이 일자리를 찾아서 도시로 향했기 때문에 이들의 꿈이 마침내 이루어지는 듯 했다. 그러나 정부와 자본가들의 기대와는 달리 산업 생산이 증가하고 공장의 숫자가 늘어나는 일은 없었다. 공장에서 일하던 농노 노동자들이 공장을 그만둬서 노동자의 수가 부족해졌기 때문이다. 농노 노동자들은 그 동안 공장에서 받은 억압과 저임금(상대적으로 농민보단 많이 받았지만), 열악한 노동 환경에 염증을 느껴 공장을 떠났고, 임금이 몇 배나 올라도 돌아오지 않았다. 게다가 대개혁이 일으킨 변화로 인해 경제가 혼란스러워져서 많은 기업들이 생산을 줄여야 했다. 농노 개혁의 여파로 1860 ~ 1862년간 선철 생산은 2050만 푸트에서 1530만 푸트로 격감하고 면직물은 280만 푸트에서 80만 푸트로 격감했다. 그리고 1858년에 59만 9천명이던 노동자의 수는 42만 2천으로 격감했다.
1860년대 후반이 되어서야 변화에 적응한 기업들이 생산을 늘리기 시작했으며 이 시기부터 산업화에 속도가 붙어 기계 공업 생산이 공장제 수공업과 가내 수공업의 생산을 능가하고 중공업이 성장했다.[42] 그리고 러시아는 서유럽 국가들보다 산업화가 늦었기 때문에 그들을 따라 잡기 위해 독일이나 이탈리아처럼 국가 주도형 산업화를 시작했고 다른 국가들과는 다르게 대기업을 중심으로 산업이 발달하기 시작했다.[43] 또한 후발 주자의 이점을 살려 서유럽의 자본, 과학, 생산 조직화에 대한 비결을 습득하고 그들의 산업화 과정 속에서 일어난 시행착오들을 피할 수 있었으며 선진 기술을 대규모로 도입해서 서유럽의 공장들보다 더 근대적인 공장들을 설립했다.
러시아 공업에서 높은 비중을 가진 면방직 공업 역시 크게 성장했다. 이 시기부터 면방직 공업은 이미 기계화가 된 방적과 날염에 이어서 직포공정도 기계화를 이루었고 1870년대부터 방적·직포·날염 공정이 일관된 제조 체제를 갖추었다. 그리고 세계시장에서 목화 가격이 상승했기 때문에 자본가들은 원료의 단가를 낮추고 안정적인 원료 공급지를 얻기 위해서 1860년대에 러시아가 합병한 중앙아시아 지역의 토지를 사들였는데, 농노 출신 집안의 자본가인 마로조프가 중앙아시아 이주에 앞장섰다. 자본가들은 현지 주민들에게 이집트와 미국의 질 좋은 품종을 분배했고 목화 수확물에 대한 구입계약을 체결했다. 중앙아시아 지역의 목화 생산은 이 시기부터 30년간 4배 늘어났다.
노동시장에서도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대개혁 이전에는 공업 노동자들이 농노나 국가 농민, 영지 매뉴팩쳐 소속 농노들이었던 반면, 1860 ~ 70년대부터는 공동체에서 독립해서 가족들과 함께 도시로 영구 이주한 자유민들이 다수였다. 이들은 기계화가 된 공장에서 여러 가지 기계와 기술을 취급하는 능력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이전의 노동자들보다 문자 해득 수준이 높았다. 특히 대규모 공장과 철도 산업은 숙련공을 필요로 했다. 그리고 이 '새로운 노동자 계층'은 러시아 사회주의의 성장에 큰 영향을 미쳤다. 수 차례에 걸친 브나로드 운동에도 꿈쩍 않는 농민들에게 실망한 인민주의자들이 도시로 가서 노동자들에게 인민주의를 선전했는데, 농민들과는 달리 공장 노동자들이 인민주의자들의 주장에 상당한 호응을 보였던 것. 그래서 러시아의 인민주의 세력은 그들의 이론과는 달리 노동자들을 지지 기반으로 해서 성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공산주의가 등장하고 난 뒤부터는 양대 사회주의 세력이 노동자들의 지지를 놓고 서로 다툼을 벌였다.
1880년대가 되면서 러시아는 공장제 수공업에서 기계 공업으로의 전환과 기초적인 산업화를 완료했다. 특히 증기기관과 가공 산업에서 장치, 설비, 기계 등 각종 기기가 국민 경제의 중요 분야에서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그리고 당시 러시아가 이뤄낸 주요 산업 지표에서의 성장은 다음과 같다.
러시아의 선철 생산은 1855년에 25만 1천 톤, 1870년에는 35만 9천 톤, 1880년에는 60만 톤으로 증가했으며 석탄 생산은 1860년에 30만 톤, 1870년에는 70만 톤, 1880년에는 340만 톤으로 증가했다. 석유 생산은 1870년에 2만 7천 톤, 1880년에 51만 톤으로 증가했고, 1860 ~ 70년대의 러시아 산업의 성장율은 2.1%, 1870년부터 80년까지는 5.1%였다. 그리고 목면 소비량은 1870년에 4만 5천 톤, 1880년에는 9만 3천 톤으로 증가했다.
이렇듯 러시아의 산업은 빠르게 성장했고 그 성과도 높았으나 한계도 있었다. 러시아는 여전히 국민의 대다수가 농민인 농업 국가였고 지역적으로도 산업의 성장이 불균형해서 일부 유럽 러시아 지역, 일부 대도시에서만[44] 공업이 집중적으로 발전하고 나머지 지역은 낙후된 채로 남았다. 그리고 산업의 질적인 성장도 미진해서 1인당 생산량, 기술설비, 노동 생산성 등의 면에서 서유럽 국가들보다 크게 뒤쳐져 있었다. 그리고 일부 기술 분야에서 서유럽보다 앞서기도 했지만, 끔찍할 정도로 후진적인 면도 있었다. 원래 산업화 과정에서 복잡한 기계와 원시적인 수작업이 병존한다지만, 러시아의 공장은 그 정도가 심각했다.

4.2. 각 지역의 산업화와 경제 성장


중공업이 성장하면서 금속 수요도 함께 증가해서 전통적인 금속 생산지 우랄과 함께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남부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금속 생산지가 출현했다. 현재 도네츠크 강 유역의 돈바스 지역에서 철광석과 석탄 채굴을 시작하고[45] 크림 반도에서는 철광석 광산을 개발했으며 유좁카에서는[46] 1872년에 미국인 존 유즈가 선진 기술 설비를 갖춘 금속 공장을 세워 용광로를 가동하고 철 생산에 대한 정부 수주를 받았다. 2년 뒤에는 술린스크의 금속 공장에서도 용광로를 가동하고 금속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몇 년 뒤에 드네프르페트롭스크 주의 크리보이 로그에서 풍부한 철광맥이 발견되자 유좁카와 술린스크 공장은 철광석이 풍부한 크리보이 로그로 공장을 이전했으며 이 두 공장의 이전은 크리보이 로그의 철광 산업을 급속도로 발달시켰다. 산업화가 이루어지고 새로운 공장과 기업체들이 출현하자, 러시아 남부 지역은 원료 생산·공급지 상태를 탈피하고 새로운 산업 지역으로 성장했다. 또한 농노 노동력이 아니라 자유민 노동력에 기초해서 성장한 남부의 신생 금속 공업 지역은 경제 성장과 산업화에 장애가 되던 농노제의 잔재를 빠르게 없애고 기존의 경제 중심지보다 훨씬 더 빠르게 성장했으며 러시아의 중요한 산업 지역으로 떠올랐다.
아제르바이잔의 바쿠에서는 석유 산업이 급속도로 성장해서 석유 시추와 가공이 이루어졌다. 처음에는 일정 기간 동안 유정의 석유를 독점 판매하는 제도를 시행했으나 1872년부터는 석유 산지를 경매에 부치고 기업들이 입찰을 하여 장기 임대하는 제도로 전환했으며 증기 기관을 써서 유정 굴착과 채유를 하는 신기술을 도입했다. 1873년, 알렉산드르 2세는 외국 자본에 석유 산업을 개방하고 캅카스 지방의 석유 탐사를 허가했다. 1876년, 다이너마이트노벨상으로 유명한 알프레드 노벨의 형들인 루드비히 노벨과 로베르트 노벨이 '노벨 형제 석유 회사', 통칭 브라노벨 사를 세우고 바쿠 지역의 석유 개발과 생산에 참여했다. 형제의 석유 시추 사업은 성공적이라서 노벨 형제는 1879년에 본사를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전하고 회사를 주식 회사로 전환했다. 사족으로 이 시기에는 가정에서 생활용으로 소비하는 등유의 수요가 엄청났던 반면, 중유와 휘발유는 공업과 운송업 분야에서나 조금 쓰는 수준이었다.
이렇듯 남부 지역의 성장 역시 대단했지만, 실질적으로 러시아에서 가장 빠르게 산업이 발전한 곳은 서부였다. 서부 산업 지대는 폴란드와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스웨덴과 같은 선진 지역과 가까워서 해외 자본과 기술, 인력을 흡수하기 용이했고 대도시가 많아 굉장히 빠른 속도로 성장할 수 있었다. 또한 고를롭카, 나르바, 오레호보-주에보, 이젭스크 등 대규모 공업 중심지들이 성장하고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노벨 기계 공장, 오부호프 제강과 대포 공장, 페름의 기계 공장 등, 대규모 기계 공장들이 설립되었다. 지역적으로는 콜롬나(기관차), 소르모보(증기선), 하리코프, 오데사, 베르쟌스크(농기계)에서 대규모 기계 공장이 출현했다.

4.3. 수공업의 변화


산업혁명으로 인한 대규모 기계공업의 성장은 전통적인 수공업 생산을 쇠퇴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 시기는 전람회와 전시회에서 전통 공예품들이 전시되고 시장과 해외에서 러시아의 고급 공예품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는 등, 전통 공예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던 시기이기도 했다. 19세기 후반은 민중의 생활이나 예술, 전설과 같은 문화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던 시기였고 그 영향으로 전통 공예품에 대한 관심도 늘어났다. 장인들이 제작한 공예품들이 예술작품 대접을 받기 시작했고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전통 공예 예술가 집단도 생겼다. 러시아 각지에서 전통 공예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만든 협회들도 등장했다. 이 단체들의 활동으로 전통 공예가 보존될 수 있었고 새로운 공예도 생겨났다.
기계 공업이 성장하면서 각종 공정이 기계화 되었기 때문에 러시아의 공장제 수공업은 공업 부문에서 그 비중이 크게 줄어들었다. 과거에는 생산 공정 전부를 담당했지만 이제부터는 일부 공정만 담당하게 되었고 기계 공장으로부터 하청[47]을 받거나 선대제를 하는 방식으로 변화했다. 그러나 수공업이 마냥 쇠퇴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비중이 줄어들긴 했지만 장기적인 성장세를 보였고 전통적인 수공업 작업장들이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비롯한 여러 도시의 소매 시장을 대상으로 하여 명맥을 유지했다. 양복업, 제화업, 보석가공업, 시계제조업, 목가공업이 대표적이다. 도시의 장인들은 작업장을 운영하며 고급 소비자를 위한 상품을 생산했고 도시의 상점에서는 장인들의 공예품을 다량으로 판매하는 체제가 갖추어졌다. 농촌에서는 직물이나 철공, 목공, 도자기, 기름 제조를 비롯한 각종 소규모 수공업이 발달했고 소규모 제련 산업도 발달했다. 농촌과 도시에서 수공업 노동자들의 숫자가 크게 늘어났다. 수공업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의 수는 1880년까지 150만명으로 늘어났다. 블라디미르 레닌은 1880년의 농촌 수공업 노동자의 숫자를 최소 400만 ~ 최대 1,500만으로 추산했다. 이 숫자는 100만을 헤아리던 기계 공장 노동자의 숫자를 훨씬 넘는 수치이다.
러시아 각 지방에서도 전통 공예는 살아남았다. 키로프 주의 딤코보에서는 예전부터 여성들이 화려한 색깔로 채색한 점토 장난감을 만들었는데 말이나 병사, 새 같은 것부터 일상의 모습을 묘사한 것까지 다양했다. 공장제 장난감들이 시장에 대량으로 공급돼서 타격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농촌과 도시, 수집가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그리고 다른 지역에서 생산하는 수제 장난감이나 작은 조각상들도 인기가 있어서 농촌의 소규모 장인들이 주문을 받아서 제작했다.
블라디미르 주의 므스테라와 이바노보 주의 팔레흐의 이콘 장인들은 공장에서 대량 생산하는 이콘의 공격에서 살아남기 위해 제품 제작 방식과 재료를 바꾸고 고급화하는 전략을 취했다. 덕분에 그들은 정교한 기술과 독특한 미술 전통을 보존할 수 있었다.
1830 ~ 1840년대에 러시아에서 생산되는 도자기의 대부분을 차지했던 그젤의 도자기도 그 예술적 양식을 보존했고 러시아 내수 시장에서만 유통되던 것을 뛰어넘어 해외에도 수출하기 시작했다. 중앙아시아와 볼가 강에서는 비단, 금실 자수, 융단을 비롯한 직물 공예와 가죽 공예, 보석 가공, 도자기와 구리 그릇 제작 같은 실용적인 예술이 발달했다. 젬스트보 역시 전통 공예에 영향을 끼쳤다. 젬스트보는 전통공예를 지원하고 예술가들을 초빙했다. 대표적인 지원 사례로는 니제고로드 젬스트보가 호흘로마의 목제 공예업을 지원한 것과 19세기 말에 모스크바 젬스트보가 공예로 유명한 세르기예프 지역을 지원하여 수공업 단지를 만든 것이 있다. 젬스트보의 이러한 활동으로 전통공예 분야에서 예술가들이 장인들과 함께 일하기 시작했다.

4.4. 노동자의 삶


산업 혁명 이후로 공업이 발달하면서 1865년에 제조업·광업·철도업에 일하는 산업 노동자는 70만이었는데 70년대 말에는 100만 명 이상으로 늘어났다. 러시아 산업 노동자들은 도시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고 한 농민들과 소수민족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들은 농민들보다 더 많은 돈을 벌었고 교육 수준도 농민보다 높은 편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농민 출신으로서 월급을 아껴서 농촌의 본가에 돈을 보내줘야 했다. 그러다 보니 그들의 삶은 가난했고 자기 자신에게 투자하기가 어려워서 습기가 많고 어두운 방에서 힘들게 지내면서 잘 먹지도 못했다. 노동 조건도 열악했고 안전 규정도 잘 지켜지지 않았다.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의 건강이나 안전에는 무관심했고 그런 것에 돈 쓰는 것을 아까워했다. 때문에 일을 하다가 부상을 입거나 신체 일부가 절단될 정도의 중상을 입은 노동자들의 숫자는 매우 많았다. 전체 노동자 중의 20% 이상이 산재를 당한 공장도 있었으며 산재율이 높은 광산업의 경우에는 100명 당 50명 꼴로 산재를 당한 광산도 있었다.
부상을 입은 노동자들은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했고, 정부 당국의 법 제정에도 불구하고 공장에는 제대로 된 침대나 의사가 없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나아지긴 하지만 여전히 의사 수나 환자를 눕힐 침대의 수는 부족했다. 그리고 의사가 있더라도 제대로 교육 받은 의사들을 찾기는 힘들었다. 특히 이 당시 러시아의 의료 체계는 열악한 축에 속했다. 거기다 공장에서 발생하는 유독 가스나 먼지를 제대로 처리할 시설이 부족했기 때문에 호흡기 질환에 걸리는 이들도 많았고 위생 상태도 나빠서 콜레라나 성병이 자주 발생했다.
또한 자본가들은 계약을 맺으면서 노동자들의 권리를 억압했고 노동자들은 계약이 끝날 때까지 공장을 떠날 수도 없었다. 그렇다보니 노동자의 지위는 농노나 다름없었다. 해고도 쉬웠다. 자본가들은 자기 마음대로 노동자들을 해고할 수 있었고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았다. 또한 자본가들은 조그마한 규율 위반에도 막대한 벌금을 물렸고 벌금 명목으로 임금의 30% 이상을 깎아버리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임금을 줄 때도 숙식비용, 공제금 납부, 매점 이용권 지급, 현물 지급과 같은 갖가지 방법으로 노동자들의 임금을 깎았다. 그리고 공장 밖에서 물건을 사지 못하게 하고 공장 안의 매점에서만 물건을 사게 만들었는데, 공장의 매점은 바깥의 물건보다 훨씬 높은 가격에 물건을 팔았다.
기계화가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노동 시간은 매우 길었다. 최소 12시간을 일했고 14시간 ~ 16시간이 평균적이었으며 18시간까지 일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당시 서유럽보다 노동 시간이 훨씬 더 긴 편이었다.[48] 거기다 자본가들은 부수입을 얻을 수 있다는 환상을 노동자들에게 심어서 잔업을 시켰고, 벌금을 탕감해주는 명목으로 의무 노동을 시키기도 했다. 잔업과 의무 노동은 추가 고용과 추가 설비를 할 필요성을 없앴기 때문에 자본가들에게 이익이 되는 것이었다. 아동 노동도 이루어지고 있었고 여성 노동자나 아동 노동자들은 남성 노동자들보다 낮은 임금을 받았다. 여성 노동자들의 대다수가 임금이 낮은 직물업이나 비숙련 직종에 종사하고 있었던 것도 여성 노동자의 임금이 낮았던 원인 중 하나였다. 숙련공과 미숙련공간의 임금 격차도 컸다.
자본가들의 착취를 감시, 감독해야 할 정부는 노동자들의 비참한 삶을 방관했다. 정부는 늘 자본가들의 편에 섰고, 노동자들의 항의나 파업은 '불온한 것'으로 간주했기 때문에 경찰력과 군사력을 동원해서 진압해 주었다. 노동 조건을 개선시키는 법이나 조치는 거의 없었고 산업재해에 대해서는 매우 안이하게 대처했다. 노동 조합도 불법이었고 노동자들이 합법적으로 노동 조건을 향상시킬 수 있는 방법은 아예 없었다.
수공업 쪽은 상황이 더 나빴다. 수공업계는 노동법의 영향을 받지 않아서 법의 보호를 받을 수가 없었고 상술했듯이 수공업 공장은 기계 공장으로부터 하청을 받는 '하청업체'였기 때문에 수공업 노동자들은 기계 공장 노동자들보다 더 열악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나중의 일이지만 아동 노동을 제한하는 법이 제정되었을 때도, 수공업계는 이 법의 영향을 받지 않아서 아동 노동을 계속해서 이용했다. 기계 공장이 법 제정 이후로 아동 노동을 쓰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법 제정으로 기계 공장에서의 아동 노동은 줄어든 편이었고 일을 하는 '아동'의 나이도 수공업 공장보다 더 많은 편이었다. 수공업 공장의 경우에는 11 ~ 12세의 아동이 일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열악한 상황은 여러 가지 원인이 있었다. 상술한 대로 많은 노동자들이 농촌에 돈을 보내 주어야 했고, 농촌 인구가 도시로 유입되고 있어서 예비 노동력의 수가 늘어나고 있었기 때문에 노동자들의 협상력은 매우 약했다. 노동자들은 저임금을 감수해야 했고 해고를 두려워해서 함부로 항의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정 안 되면 농촌에 돌아갈 수도 있다'는 선택지가 있었던 것도 노동자들을 괴롭혔다. 노동자들이 열악한 노동 조건에 항의를 하면, 자본가들은 '너 말고도 일할 사람 많다', '꼬우면 농촌에 있는 집으로 가던가'라는 식으로 대응했다. 정부가 자본가들의 착취를 방관하고 노동 운동을 탄압하던 것도 영향을 주었다.
또한 임금이 낮고 예비 노동력이 풍부하다는 것은 노동 조건을 개선하거나 설비에 투자를 할 필요성을 떨어뜨렸다. 노동 조건 개선이나 설비 투자는 돈이 많이 들었지만 노동자를 새로 뽑아 투입하고, 잔업과 의무 노동을 시키는 것은 돈이 별로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임금은 낮고, 그 임금도 벌금과 각종 편법으로 깎아버릴 수 있었으니까.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이 죽어나가도 그냥 새로 고용하면 그만이었고, 항의를 하거나 말썽을 피우는 것들은 해고해 버리면 그만이었다. 더 심한 말썽을 피우는 것들은 경찰에 신고해버리면 그만이었고, 더 심하게 저항하면 정부가 알아서 군대를 보내줬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산업화가 진전되어 공장과 노동자의 수가 늘어나자, 노·사간의 갈등도 심해졌고 노동자의 투쟁도 점점 조직적으로 변했다. 1860년대 노동운동은 해고 문제에 대한 항의와 소요가 지배적이었지만 70년대부터는 노동자들이 집단적으로 작업을 거부하면서 자신들의 요구 사항을 사측에 전달하는 조직적인 파업이 속출했다. 1872년에 에스토니아 크렌골림스크 수공업 공장의 파업이 최초의 대규모 단결권 행사였다. 그리고 1870년대 후반부터 오데사와 키예프의 남부 동맹,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북부 동맹 등, 최초의 노동자 단체들도 나타났다. 노동 운동이 시작하고 러시아에 사회주의가 성장할 기반이 마련된 것이다.
노동자들의 일상 생활에 대해서 알아보자면, 러시아 노동자들은 농민 출신이 많았기 때문인지 농민들이 입는 옷을 입고 그 위에 조끼를 걸친 채, 모자와 구두를 신었다. 여성 노동자들은 화려한 색의 옷을 선호한 편이었다. 노동자들은 작업장에서 그대로 자거나[49] 공장 기숙사와[50] 아르텔에서[51] 사는 경우가 많았고 고용주의 집에서 숙식을 해결하는 이들도 있었다. 주택이나 아파트, 방 한 칸을 구해서 사는 경우도 있었는데, 그렇게 사는 노동자들은 일부에 불과했다.[52] 그리고 노동자들은 부서나 업무에 따라 집단을 형성하기보다는 같은 지역 출신들끼리 모여서 집단을 형성했다.
노동자들의 주식은 호밀빵이었고 공동 찻잔과 목제로 된 식기들을 사용했다. 전반적으로 노동자들이 먹는 음식들은 질이 좋지 않았다. 아르텔에서 사는 노동자들은 다른 주거 형태를 가진 노동자들보다는 풍족한 편이었고 집에서 사는 노동자들은 맛과 다양성 측면에서 더 나은 음식을 먹었다. 그리고 독신 노동자들보다는 가족이 있는 노동자들이 좀 더 상황이 좋았다. 노동자들은 식당이나 선술집에서 10 ~ 15 코페이카를 치르면 흰 빵이나 샌드위치, 철갑상어를 사먹을 수 있었지만 그렇게 사먹는 일은 흔치 않았다.[53]
노동 시간이 매우 길었지만 노동자들은 여가 생활을 즐겼다. 주로 술을 마시거나 카드 놀이를 비롯한 노름을 했고 때로는 무도회에 가기도 했다. 소수의 노동자(주로 숙련공)들은 공연을 보거나 박물관에 갔고, 독서와 공부를 하면서 자기 계발에 힘써 '노동자 지식인'들의 수가 조금씩 증가했다. 축제 기간에는 권투 경기를 열었는데, 각 공장별로 선수들이 나와서 다른 공장의 선수들과 맞붙기도 했다.

4.5. 금융과 무역


러시아에 근대적인 은행제도가 정착한 것은 1860년이었다. 제국 정부는 서유럽 국가들을 따라잡기 위해서 민간 기업들의 금융 지원을 위한 목적으로 러시아 최초의 은행을 설립했다. 러시아의 은행은 가장 중요한 산업분야인 금속, 기계공업, 제당, 섬유 공장 등 기업들의 발전을 위해 금융 지원을 시작했다. 국립 은행이 설립된 이후에 나타난 개인 은행들도 기업들을 지원했다. 그리고 산업 분야에 대한 금융 지원은 의무적이었다.
1860 ~ 70년대에는 최초의 개인 은행이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설립되었고, 모스크바와 다른 도시에도 설립되었다. 개인 은행이 등장하고 난 뒤에는 신용 대출기관들이 등장했다. 그리고 근대적인 은행의 설립과 신용 대출기관의 등장은 러시아의 경제 발전에 많은 영향을 미쳐서 새로운 형태의 기업이 나타나는 데에도 일조했다. 또한 금융업과 관련된 대자본가들도 등장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술의 독점 판매권으로 부자가 된 코코레프인데 1860년대 말에 코코레프는 정부에 제안하여 모스크바 상업은행을 설립했다.
1870년, 산업기업들에 대한 금융지원을 위해 제국 정부는 볼시스코-캄스키 은행을 설립했고 이 은행은 러시아에서 가장 큰 은행 중 하나가 되었다. 1875년에는 주식은행이 39개나 설립되었고 신용제도도 정비되었다. 정부는 은행 운영에서도 근대적인 법들을 도입했는데, 대표적인 것이 '국립은행의 현금 자산은 국고에 이용할 수가 없다'는 조항으로 이 조항을 통해 정부가 은행 자산에 손대지 못하게 했다.
제정 러시아의 수·출입 현황에 대해서 알아보자면, 수입면에서는 산업화가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완제품 수입이 줄어들었고, 기계와 각종 설비, 원료에 대한 수입은 예전보다 더 늘어났다. 수출면에서는 필리핀산 아마가 시장에 유입되고 영국이 러시아산 철에 대한 수입을 줄여서 전통적인 수출품인 아마와 철의 수출량은 줄어들었다. 하지만 1846년에 영국의 곡물법이 폐지되고 유럽에서 곡물 가격이 계속 올랐기 때문에 곡물 수출을 많이 하는 러시아는 많은 이익을 보았다. 곡가는 1860년까지 상승해서 1860년에 최고치를 찍었다. 그러나 1860년 이후로 곡가가 조금씩 낮아졌고 1870년대부터 미국산 농산물이 유럽에 대량으로 유입되다보니 농산물 가격이 떨어졌고 러시아는 이 시기부터 수출면에서 예전만큼의 이익을 얻지는 못했다.

4.6. 인프라의 확장


러시아 최초의 철도는 1837년에 건설된 '차르스코셀리스크선'이었다. 이렇게 러시아에는 이미 철도망이 깔려 있었지만 노선은 3개뿐이었다. 본격적인 철도 건설은 알렉산드르 2세의 치세부터였는데, 서유럽보다 뒤떨어진 병력 수송 능력 격차를 해소하고 식량 수출량을 늘리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제국 정부는 식량을 생산하는 지역에서 항구까지 이어지는 철도망을 건설했고 국내 자본가들과 해외 자본을 유치하는 계획들도 입안했다.
러시아의 철도 건설은 이 시기부터 정부의 지원하에, 민간 기업들이 철도를 건설하는 방식을 취했다. 제국 정부는 기업 설립 기준을 완화하고 기업들에 각종 재정 지원을 해주어 철도업의 성장을 도왔다. 제국 정부는 주식과 채권 구매에 안정성을 더해주었고 국립은행의 대출로 기업들을 지원했다. 제국 정부는 군수목적과 관련된 철도 건설이라면 신속하게 돈을 지급했다. 그리고 일부 기업들이 해외에서 기차를 도입하는 것에 국비를 지원해주었고 레일과 다른 자재들에는 면세 혜택을 주었다. 주식 회사의 설립도 장려했다. 그리고 주식 회사의 대부분은 철도 기업과 은행들이었다.
덕분에 철도업은 러시아의 자본주의 발전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할 수 있었다. 정부의 노력과 기업들의 활동으로 인해 1868년부터 1872년까지 러시아 각지에서 철도 건설이 폭증했는데, 모스크바-쿠르스크, 쿠르스크-하리코프, 하리코프-오데사, 하리코프-로스토프, 모스크바-야로슬라블, 모스크바-탐보프, 탐보프-사로토프, 모스크바-브레스트, 모스크바-니즈니노브고로드 등의 중요한 철도 노선들이 이 시기에 건설되었다. 새로 건설된 철도의 대부분은 군사적 용도가 아니라 경제적인 이유에서 건설된 것들이었다. 1861년부터 1877년까지 철도 화물 운송량이 25배 늘어났다. 철도와 관련해서 대외 수입과 수출이 10배 더 늘어났다. 철도 건설은 엄청난 규모의 국가적 지원을 받았고 관료들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신규 기업들이 성장하기 시작했다.[54]
그리고 철도 건설은 많은 산업 분야의 발전을 촉진시켰다. 상공업체와 공장의 숫자가 늘어났고 금속(선로, 화차, 기관차) 수요와 연료 수요가 급증해서 철도 관련 산업도 크게 성장했다. 수입에만 의존하던 기관차·차량·레일의 국산화가 이루어졌고 1860년대 말부터 푸틸로프, 콜로멘스키, 넵스키 같은 대형 공장들이 설립돼서 기차와 레일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기차, 레일의 생산도 국가의 지원을 받았으며, 레일은 1870년에 자급을 달성했고, 1880년대 초에는 이 기업들이 생산한 기관차가 국내수요의 4/5, 차량은 5/6를 충당했다.
산업 혁명은 통신수단의 발전도 일으켰다. 1856년에만 4천만 통의 편지가 발송되었고 1888년이 되면 3억 5,500만 통의 편지가 발송되었다. 1852년에는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연결하는 단 하나의 전신선만 있었지만, 1870년대 초에는 모든 구베르니야와 우에즈드의 도시들이 전신망으로 연결되었다.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전신선이 연결되었을 정도였고 이 전신선은 세계에서 가장 긴 것이었다. 알렉산드르 2세 사후의 일이긴 하지만, 1882년에 제국 정부는 상트페테르부르크, 모스크바, 오데사, 리가 등에 전화국을 개설했고 상트페테르부르크와 가트치나를 연결하는 최초의 도시 간 전화선이 개통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시기부터 러시아의 도시들은 외관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대도시와 지방의 도시에 철도역과 식당, 상점, 시장, 극장, 은행 건물들이 등장했다. 주택의 건설속도도 빨라졌고 건물 높이도 높아져서 이 시기에 새로 지은 건물들은 보통 4 ~ 5층이었다. 대도시에서는 수도망이 건설되기 시작했고, 대도시 중심부에는 정부 건물과 현지 행정기관 건물, 상업 중심가들이 들어섰다. 대규모 상점들이 전통적인 상가와 소규모 상점들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러시아의 모든 도시에 기업들이 들어섰고 노동자들이 거주하는 대규모 공단이 새로 생겨났다. 이러한 변화로 인해 원래 행정 중심지 역할만 하던 러시아의 도시들이 경제 중심지로서의 역할도 맡기 시작했다.
1860년대 초, 말이 끄는 철로길 <콘카>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놓였다. 1870년대에는 모스크바와 오데사에서도 등장했고 1880년대부터 다른 대도시에도 콘카가 놓이기 시작했다. 도시의 거리는 자갈과 돌로 포장하기 시작했고 모스크바에서는 일부 도로를 아스팔트로 포장하기 시작했다. 거리의 조명도 개선되었다. 1860년대에 등유 가로등이 나타났고, 나중에는 등유 가로등을 가스 가로등으로 대체했다. 1870년 말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전등이 켜지기 시작했고 1880년대 초에는 모스크바에서도 전등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4.7. 농노 해방 이후의 농업


1861년의 농노 해방 이후, 30년 동안 경작지는 25%가 늘어났고 식량의 총 수확량은 30%가 늘어났다. 산업화가 이루어지고 있었지만 농업은 여전히 러시아 경제의 토대였고 계속해서 자연경제에서 교환경제로의 변화를 이어갔다. 그리고 농민 계층의 분화가 촉진되어서 빈농의 수가 늘어났기 때문에 지주들은 농기구를 구하고 자유 노동자들을 고용해야 했다. 그리고 이전 시대보다 더 많은 숫자의 지주들이 기술을 혁신하고 새로운 종자와 가축, 농기계를 들여왔다.
농노 해방 이후로 농노제에서 자본주의적 영농으로 전환하는 농가가 많아졌고 발트해 연안, 러시아 서부와 남서부, 남부(노보러시아와 캅카스 이북), 상트페테르부르크, 모스크바, 야로슬라블, 사라토프에서 자본주의적 영농이 농노제를 대체하고 지배적인 영농 방식이 되었다. 더불어 지역별로 농업이 전문화되었다. 1880년에 폴란드와 발트해 연안, 프스코프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는 종래의 곡물 생산 대신에 상품 작물을 재배하고 우유를 생산하는 것으로 전환했다. 이로 인해 곡물 생산의 중심지가 러시아 남동부, 볼가강 하류 지역, 우크라이나의 초원 지역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랴잔, 오를로프, 툴라, 니제고로드에서는 축산업이 발달했다.
그리고 미르가 토지 공동 구매를 추진하고 일부 중농이나 부농들이 개인적으로 귀족의 토지를 구매했기 때문에 농민의 토지 보유량도 늘어났다. 1861년에는 귀족의 88%가 지주였지만 1878년에는 56%, 1895년에는 40%로, 점점 귀족 지주의 숫자가 줄어들었고 1905년까지 지주들이 자기들이 가진 토지의 1/3을 농민에게 판매했다. 미르가 공동구매해서 분배한 토지나 농민이 개인적으로 구매한 토지는 미르의 경지 재분배 대상에 들어가 있지 않아서 농민이 온전하게 소유권을 행사했다. 경작 방법도 개선되어서 서유럽에서처럼 휴경지에 클로버를 심고 목초지로 써서 지력 회복과 가축 사육을 동시에 하는 방법을 취했고 윤작을 하는 농지도 늘어났다.
양조업과 제당업도 발달했고 생산량의 증가 덕분에 농촌 지역의 정기 시장들도 많이 열렸고 거래량도 증가했다. 농민들은 각종 농수산물과 가정에서 만든 수공업품, 가축들을 시장에서 판매했다.
그러나 중앙-흑토지대, 볼가강 중류 지대, 비흑토 지역을 비롯한 많은 지역에서는 귀족 지주들이 농민들에게[55] 토지를 임대하는 반(半)농노제 농장이 보편적이었다. 그리고 경작지와 생산량이 늘어나긴 했지만 수확량 증가는 매우 느렸고 농업 전문화가 된 지역은 일부였을 뿐, 러시아 전체에서는 여전히 곡물 농업이 지배적이었다. 또, 러시아의 농업 생산력은 타국에 비해 매우 낮았다. 독일과 생산력을 비교하자면, 독일의 경우, 1 데샤티나(2.7 에이커)의 땅에서 여름에는 밀 128 푸트(1 푸트 = 36 파운드), 겨울에는 104푸트를 생산했지만 러시아 서부의 경우, 여름에는 64 푸트, 겨울에는 41 푸트를 생산했다. 더불어 농업 기술은 여전히 낙후되어 있었는데, 신형 농기구와 파종기가 등장했지만 대다수의 농민들과 소지주들은 쟁기와 목제 써레로 경작하는 낡은 방식을 유지했고 경지에는 비료를 충분히 주지 않은 상태에서 농사를 지었다.[56] 그리고 농민의 토지 보유량이 늘어난 것은 개인적으로 토지를 구매하거나 미르의 공동구매에 참여할 만한 재산이 있는 농민들에게나 해당하는 일이지, 재산이 부족한 빈농들은 토지 구매가 어려워서 토지 부족 문제에 시달렸다. 불충분한 농노 해방과 인구 폭증으로 인한 문제였고 보유 토지가 줄어들다 보니 농업 수익만으로는 충분히 먹고 살 수가 없었기 때문에 많은 농민들이 부업을 하거나 도시로 이주했다. 농노 해방 직후에만 해도 28%의 농민들이 토지에서 나오는 수입으로는 먹고 살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 비율은 1900년까지 52%로 늘어났다. 설상가상으로 매년 가뭄과 혹한, 홍수같은 자연재해가 일어나서 정기적으로 기근이 발생했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러시아 농촌의 상황은 좋지 못했다.
사회적으로는 농민 계급의 분화가 촉진되어서 빈농과 부농의 숫자가 늘어났고 소규모 자영농민 계층이 등장했는데 이러한 계층 분화는 미르의 존속에 균열을 가했다. 러시아에서는 농업용 말이 한반도의 소처럼 농기구 역할을 하여 말이 없으면 땅을 경작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말을 얼마나 가지고 있느냐가 부유함의 기준이 되었고 말이 없는 농민들은 극빈층, 한 마리만 있는 농민들은 빈농으로 간주되었다. 1880년대 말, 유럽 러시아 지역에서 말이 없는 농가는 27%였고 한 마리만 가진 농가는 29%였다. 5 ~ 25%의 농민들은 10마리에 이르는 말을 가졌다. 알렉산드르 2세 사후의 일이긴 하지만 당시 러시아의 농촌은 대략적으로 27%의 극빈층, 29%의 빈농, 19 ~ 39%의 소농과 중농, 5 ~ 25%의 부농과 지주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그리고 빈농과 부농 간의 갈등이 심해졌다. 빈농들은 선조들의 관습과 공동체주의에 토대를 둔 미르가 계속 존속해서 토지 재분배와 약자 구제를 하길 바랬지만, 중농과 부농, 진취적인 농민들은 독립적인 영농과 자기 소유지의 확대, 미르의 폐지를 원했다.
지역적인 차이도 있었다. 유럽 러시아 지역, 특히 중앙 산업 지대 지역은 인구 과잉 때문에 목초지든 삼림이든 전부 다 개간해도 경작지가 부족할 지경이었지만 시베리아 지역은 경지 부족 문제를 겪지 않았고 농민들도 부유한 편이었다. 시베리아의 농민들은 다른 지역의 농민들보다 가축도 더 많이 가지고 있었다. 농노의 숫자도 인구 100만 중에 3만 7천밖에 되지 않는 편이었다. 제국 정부도 인구 과잉 문제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시베리아 이주 정책을 계속해서 실시했는데, 이전의 시베리아 이주 정책이 시베리아 개발을 위한 목적이 강했다면, 이 시기의 시베리아 이주는 농민 문제 해결을 위한 목적이 추가된 것이었다. 그러나 성과는 크지 않았다.[57]
상술했듯이 토지 수입만으로는 먹고 살기가 힘들었기 때문에 많은 농민들이 도시로 떠났고, 특히 남성들이 농촌을 많이 떠났기 때문에 여성들이 남성들의 빈 자리를 차지했다. 점점 여성들은 가정생활이나 농촌 생활, 농촌 자치 분야에서 자신들의 영향력을 늘려갔다. 여성들은 없는 시간을 쪼개서 아이들을 양육했고, 아이들에게 농사와 가족의 전통을 가르쳐 주었다. 예전에는 이혼이 드물었지만 이 시기부터는 이혼이 늘어났다. 러시아의 여성들이 가정폭력에 시달리고 있었던 것과 사법 개혁으로 이혼하기가 쉬워진 것, 여성의 영향력과 경제력이 강해진 것 때문에 일어난 현상이었다.
경제적 어려움이 있긴 했지만 이전시기와 비교하면 대체로 삶의 질은 더 나아졌던 것으로 보인다. 주거 생활면에서 농촌의 주택들은 잘 정돈되었고 굴뚝이 없는 집이 사라졌다.[58] 양초가 들어왔기 때문에 밤에도 밝게 지낼 수 있었다. 공산품의 사용도 더 늘어났고, 목기 대신 도자기를 쓰기 시작했다. 부유한 가정에는 시계와 책, 악기들이 놓였다. 의생활면에서는 비단을 구입해서 옷을 지어 입기도 했고 유행이 더 많은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축제일이 되면 유행하는 옷을 입었고 여성들은 공장에서 모직이나 비단으로 만든 옷을 입었다. 부농들은 구두를 신었고, 빈농들은 여전히 짚으로 된 신발을 신었지만 가죽 장화나 방수 덧신도 신기 시작했다. 식생활 면에서는 중국의 추가 개항, 대외 무역 증가, 교통수단 발전, 캅카스에서의 차 생산으로 차값이 훨씬 저렴해져 사모바르[59]로 끓인 차에 사탕무에서 생산된 설탕을 타 마셨고 고기도 예전보다 더 많이 먹을 수 있었다.

5. 영토 문제



5.1. 태평양 방면


개혁 정책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자금이 필요한 것이 당연하지만 크림 전쟁에서 패배한 러시아 정부에는 그럴 재원이 모자랐기 때문에, 광대한 (그리고 쓸모 없는 것으로 인식되던) 영토의 일부인 알래스카(러시아령 아메리카)를 미국에 720만 달러를 받고 팔았다.
러시아는 알래스카 문서에도 잘 나와 있듯이 알래스카의 잠재적 가치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너무 멀어서 관리하기도 힘들었고[60] 알래스카를 유지하는 비용이 알래스카에서 거두어들이는 수입보다 훨씬 더 많았다. 거기다가 미국과의 국경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에 제국 정부는 개혁을 위한 재원 확보, 불법 월경자 문제로 인한 양국간의 갈등 해결, 미국과의 우호 관계 유지를 위한 목적으로 알래스카를 미국에 매각했다. 크림 전쟁의 여파로 영국에게 그냥 빼앗기느니 돈이라도 받고 그나마 (당시로서는) 우호적인 미국에게 판매한 것이다. 당시 미국 국민들은 알래스카를 돈 주고 사온 데 앞장선 정치가들에게 '기껏 사온 게 황무지냐?!'면서 신나게 욕을 해댔지만 나중에 냉전이 시작되자 소련 정부는 이를 몹시 아까워 했다. 엄청난 매장량의 석유와 금을 비롯한 다양한 광물이 가득했고[61] 쿠바 사태로 난리칠 것 없이 소련 턱 밑을 찌르는 터키의 미군 핵미사일 배치의 대항마로 충분하다든지 무엇 하나 버리는 땅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한편 남하정책은 러시아 제국의 기본적인 강령이었기 때문에, 흑해지중해 방면의 남하가 좌절되자 태평양으로의 남하를 시작했다. 제2차 아편전쟁이 발발하자, 제국 정부는 1858년의 톈진 조약을 중재해 주고 그 대가로 우수리 강 이북의 땅을 청나라로부터 얻어내었고 1860년에는 베이징 조약을 중재해주고 연해주청나라에서 뜯어와 '''총 한 방 쏘지 않고 엄청난 영토를 획득하는데 성공했다.''' 발칸에서의 좌절과 비교하면 그야말로 비교체험 극과 극(...).
1904년~1905년과는 달리 이 때는 영국제2차 아편전쟁에 묶여 있었고 일본은 한창 막부 말 동란의 와중이었기 때문에 두 나라 모두 러시아를 견제할 여력이 없었던 것이 주효했다. 또한 자바이칼 카자키 부대, 아무르시크 카자키 부대의 활동, 러시아 개척자들의 정착, 탐험가들의 보고 같은 것들도 러시아가 이 지역을 차지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1860년 6월 20일, 러시아 해군은 '동방의 지배'란 뜻을 가진 '블라디보스토크'를 연해주 지역에 건설했고 이 시기부터 블라디보스토크는 해군 기지이자, 동북 아시아 지역의 거점 도시로 기능했다. 러시아의 이런 공세적인 남하전략은 몽골중앙아시아는 물론 "부동항"인 한반도(조선)에도 적용되었다.
이 시기에는 사할린 섬쿠릴 열도의 영유권을 놓고 일본과의 국경 분쟁도 있었는데, 러시아와 일본 간의 국경선 협상은 상당히 복잡한 편이었다. 크림 전쟁 와중에 중심지에서 멀리 떨어진 태평양 지역에까지 신경 쓰기가 어려웠던 러시아는 일본과의 관계 악화를 피하기 위해 새로운 조건에 동의하여 1855년, 시모다 조약으로 이투루프 섬과 우루프 섬 사이의 해역을 경계로 북쪽은 러시아, 남쪽은 일본에 귀속시키는 것으로 쿠릴 열도를 분할하고 사할린은 양국의 공동소유가 되었다.[62] 그리고 1875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을 체결하여 사할린 전체를 러시아에게 귀속시키는 것으로 쿠릴 열도는 일본에게 양도되었다.

5.2. 캅카스 방면


알렉산드르 1세부터 50년간 치르고 있었던 캅카스 전쟁이 알렉산드르 2세의 치세에 끝났다. 전쟁은 제국 정부가 현지 산악인들에게 높은 세금과 부역을 부과한 것, 러시아의 진출로 산악인들이 토지를 상실한 것, 러시아 문화와 캅카스 문화가 충돌한 것 때문에 일어난 것이었다. 제국 정부가 현지의 노예제를 금지하거나 약탈 행위를 금지한 것은 현지인들의 반발을 불렀다.
전쟁 초기의 산악인들은 비조직적인 상태에서 저항했지만, 1820년대부터 수많은 민족으로 이루어진 산악인들을 하나로 묶어 준 사상이 출현했다. <뮤리디즘>이라고 부르는 이 사상은 매우 전투적이었고 무슬림들에게 엄격한 계율 준수를 요구했다. 뮤리디즘 덕분에 하나로 단결하게 된 산악인들은 1820년대 후반부터 이슬람 국가 건설을 시도했고, 캅카스 지역의 정치-종교 지도자로 이맘을 선출, 신권국가를 세웠다.
첫 이맘인 가지 무함마드가 죽은 뒤에는 감자트베크가 2대 이맘이 되었고 그 뒤를 이어서 3대 이맘으로 샤밀이 등극했다. 전설적인 산악인 지도자로 명성을 날리게 되는 샤밀은 이맘이 된 뒤로 캅카스의 이슬람 국가에 엄격한 질서를 세웠다. 그는 음주, 가무, 흡연을 즐기거나 계율을 지키지 않고 종교 의식에 참여하지 않는 이들에게 가혹한 형벌을 가했다. 그러나 샤밀은 농노제와 기득권층의 특권을 폐지하고 민중이 그를 필요로 할 때마다 늘 도움을 주었기 때문에 민중의 지지와 보호를 받을 수 있었고 민중의 보호 덕분에 샤밀은 러시아군의 체포 시도를 늘 피해갔다. 1840년대에 샤밀은 러시아군을 상대로 연전연승을 거듭했고 전성기를 누렸다. 그는 통치 조직을 만들어서 각 지방마다 행정 기관과 주둔군을 두었다. 샤밀의 군대는 4만에 달했고 모든 행정은 샤밀이 주도하는 회의에서 처리했다.
러시아의 침공을 계속해서 격퇴한 캅카스의 이슬람 국가는 번성하는 듯 했지만 샤밀과 추종자들이 오랜 승리에 자만하여 변질되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지방의 행정을 맡은 샤밀의 대리인들은 지방 영주라도 된 것처럼 물자를 사적으로 유용했고 민중 위에 군림하려 했다. 또한 샤밀도 세금을 국고에 보내지 않고 자신이 독점했으며 관습을 무시하고 권력을 아들에게 상속하겠다는 선언을 했다. 형벌도 더 가혹해졌고 세금은 끊임없이 올라갔으며 샤밀과 그를 따르는 자들이 권력을 독점했다.
이로 인해 샤밀은 민중의 지지를 상실했고 러시아 측에 합류하는 민족들도 나타났다.[63] 상황이 악화되자 당황한 샤밀은 더 강한 형벌로 상황을 타개하려 했지만 이것은 오히려 역효과를 불렀다. 샤밀의 변질과 실정으로 캅카스의 이슬람 국가는 군사적, 경제적으로 약화되었고 러시아군과의 싸움에서 연전연패하기 시작했다. 튀르크나 영국이 산악인들을 지원하긴 했지만 큰 도움은 되지 못했다.
1856년부터 러시아군의 공세가 강화되었고 바랴틴스키 공작이[64] 이끄는 군대가 샤밀을 압박했다. 약체화된 샤밀의 군대는 점점 수세에 몰렸고 결국 샤밀은 1859년에 마지막 거점을 잃고 러시아군에 생포된 뒤, 칼루가로 추방당했다. 러시아군은 샤밀을 무너뜨린 것에 축배를 들었지만 산악인들이 계속해서 저항했기 때문에 1864년이 되어서야 산악인들의 저항을 완전히 분쇄하고 캅카스 전역을 장악할 수 있었다.
캅카스 전쟁을 마무리 지으면서 러시아는 바랴틴스키 공작이 예상한 대로 남부 지역의 안보를 확보할 수 있었고 캅카스를 거점으로 해서 중앙아시아와 페르시아 지역으로 진출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캅카스인들은 러시아의 지배 아래에서 경제와 문화를 발달시킬 수 있었다. 러시아의 발달된 농업 기술이 들어왔고[65] 교육과 의료 혜택도 받을 수 있었다. 산업 혁명 이후에는 공장들도 생겨났다. 그리고 국방성 장관 드미트리 밀류틴의 건의에 따라서 제국 정부는 캅카스에 관용적인 정책을 실시했다. 캅카스인들의 종교와 문화, 전통을 존중했고 고위 성직자와 중간층 성직자들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 캅카스인들이 선출한 대표들이 특별 재판소를 구성해서 사법권을 행사하는 제도도 도입했다.
포로가 된 샤밀도 제국 정부로부터 우대받았다. 그는 칼루가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보내져서 러시아의 여러 명소나 문화 공간, 관공서, 군사 기지를 방문했다. 샤밀과 그 가족들은 저택을 받았고 제국 정부는 샤밀을 러시아의 대신으로 대우해 주었다. 러시아의 대신은 정부로부터 1만 5천 루블을 받았는데, 샤밀도 똑같이 그만큼의 액수를 지급받았다. 자식들은 사관학교에서 교육받고 러시아군에 입대할 기회를 받았다. 사관학교는 귀족의 자제만 갈 수 있었기 때문에 샤밀의 자식들도 귀족 대우를 받은 것이었다. 이것은 샤밀을 본인만 귀족 대우를 받는 '개인 귀족'으로 대우한 것이 아니라 귀족 신분을 세습할 수 있는 세습 귀족으로 인정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캅카스 전쟁으로 생긴 피해와 캅카스인들이 겪었던 고통은 막대했다. 전쟁에서 러시아군은 7만 7천명의 피해를 보았고 300만이 넘는 캅카스인들이 피난을 떠났다. 그리고 처음부터 제국 정부가 캅카스인들에게 우호적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밀류틴이 건의한 정책이 실시되기 이전의 캅카스는 바랴틴스키 공작의 통제 아래에 있었는데, 그는 캅카스인들이 제국에 적대적이기 때문에 이들을 존중할 필요가 없다고 보았고, 이들의 토지를 빼앗고 내쫓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때문에 수십만의 캅카스인들이 고향을 떠나서 튀르크 등 주변국으로 이주해야 했다. 그들이 떠난 자리는 제국 정부가 이주시킨 40만에 달하는 유럽 러시아 출신 이주민, 카자키, 아르메니아인, 튀르크에서 피난을 온 그리스인들이 차지했다. 산악인들은 고향을 떠나면서 재산과 토지를 헐값에 팔아야 했고 많은 이들이 고향에 돌아오지 못했다.[66] 바랴틴스키 공작이 물러난 뒤에야 밀류틴이 건의한 관용적인 정책이 도입되었다. 그럼에도 관용적인 정책을 실시한 후에도 1880 ~ 90년대까지 강제로 이주시키는 일들이 벌어졌다.

5.3. 중앙아시아 방면


러시아 제국은 표트르 대제 치세부터 지속적으로 중앙아시아 지역으로의 진출을 시도했고, 19세기 전반에 이르러서는 카자흐 지역을 완전히 장악했다. 1850년대에 남 카자흐를 완전히 장악하고 1854년에 베르노에, 나중에 알마아타가 되는 도시를 건설했다. 그런데 부하라, 히바, 코칸드 칸국이 여러 차례 카자흐를 침공하고 원주민들과 러시아 이주민들을 노예로 잡아갔기 때문에 제국 정부는 국경에 요새들을 구축했고 국경 지역의 총독들이 약탈자들을 응징하기 위한 원정을 감행했다.
알렉산드르 2세의 치세부터는 아예 약탈의 근원을 뿌리 뽑고 크림 전쟁에서의 패배를 설욕해서 군의 사기 저하, 국민의 자존감 하락을 회복하기 위한 군사 원정이 계획되었다. 국방성이 주도한 이 원정은 코칸드, 히바, 부하라 3개국을[67] 완전히 병합하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 중앙아시아 지역이 현지 지배층들간의 내전과 지배층의 주민 착취로 피폐해져 있었던 것, 군대는 약하고 무기도 보잘 것 없었던 것도 제정 러시아가 중앙아시아 침공을 시작한 원인 중 하나였다. 외무성은 영국과의 분쟁이 발생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 반대했지만, 외무성의 반대는 묵살되었다. 군 통수권자인 황제가 원정을 지지한 데다가 자본가들도 원료공급지를 구하고 시장을 확대할 수 있다는 이유로 원정을 지지했다. 그리고 3개국은 러시아 상인들을 차별해 높은 세금을 물렸고, 심하면 재산을 강탈하기도 하여 중앙 아시아 지역의 러시아 상인들이 제국 정부에 탄원을 보내왔고, 이 문제로 제국 내부에서 정벌이 필요하다는 여론이 강해진 것도 영향을 미쳤다.
1865년, 체르냐예프 장군이 지휘하는 러시아 군은 부하라와 코칸드 간의 전쟁을 이용해서 손실 없이 타슈켄트와 코칸드 칸국의 여러 도시들을 점령했다.[68] 그러나 이 침공은 중앙아시아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려 하는 영국의 반발을 불렀고, 알렉산드르 2세는 체르냐예프를 해임해야 했다. 그러나 러시아는 정복한 지역을 모두 차지할 수 있었다. 침공이 종료된 이후, 제국 정부는 투르케스탄 총독부를 세웠고 황제는 카우프만 장군을 총독으로 임명했다. 그리고 동부 지역을 지키기 위해 세미르첸스크 카자크 부대를 창설해서 국경지역에 주둔시켰다.
1868년, 부하라 무슬림 군주국의 군주는 중앙아시아 지역을 침공해 온 러시아에 대항하는 성전을 선포했다. 그러나 무슬림 군주국의 중심 도시인 사마르칸트에서는 군주를 지지하는 성직자, 귀족들과 러시아로의 병합을 지지하는 상인, 수공업자들 사이의 내전이 벌어졌다. 1868년 5월, 카우프만의 군대가 내전을 이용해 내부 협조자의 도움을 받아 사마르칸트에 무혈입성했다. 군주의 주력군은 패했고 부하라의 군주는 부하라가 러시아의 종속국임을 인정해야 했다.
1873년, 러시아군은 히바 칸국에 대한 원정을 시작했다. 현지 지배층들에게 착취당하던 주민들은 실질적으로 러시아군을 지지했고 일부 귀족들까지 러시아 측에 합류해 오기도 했다. 1873년 8월, 러시아군의 압박이 강해지자, 히바 칸국의 칸은 러시아와 조약을 맺었다. 조약의 주요 내용에는 히바 칸국의 칸은 러시아 황제의 신하가 된다는 것, 권력을 행사할 때는 러시아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것, 러시아 상인들은 면세 혜택을 받고 히바 칸국의 어디에서든지 장사할 수 있다는 것이 있었다. 1873년 9월, 부하라 무슬림 군주국과도 이러한 조약이 체결되었다. 조약으로 러시아의 종속국들은 선박업과 무역에 종사하고 부동산을 소유할 권리와 자치권과 기존의 통치체제를 유지할 수 있는 권리를 받았다.
1875년, 스코벨레프 장군이[69] 지휘하는 러시아군은 코칸드 칸국의 군대를 격파했다. 러시아는 1876년 2월에 코칸드 칸국을 무너뜨렸고 영토를 투르케스탄 총독부에 소속시켰다.
중앙아시아 정복은 투르크멘 쪽으로도 진행되었다. 1869년, 스톨레토프 장군이 지휘하는 러시아군은 카스피해 동쪽 해안에 상륙해서 크라스노보츠크 요새(오늘날의 튀르크멘바시)를 건설해 거점을 마련했다. 해안 지역에서 러시아군이 침공해 오자, 현지의 투르크멘인들은 거세게 저항했다. 투르크멘인들은 게오크-테페와 오아시스 지역을 중심으로 해서 러시아군에 저항했고 러시아군은 오아시스 지역을 계속해서 점령하려 했지만 그 시도들은 모두 실패했다. 러시아군 자신들이 거점으로 이용할 수 있는 오아시스 지역을 점령하려는 시도가 모두 실패로 돌아가자, 러시아군은 안정적인 물자 공급을 위해 크라스노보드에서 게오크테페 방면으로 철도를 놓았고 철도 덕분에 원정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 1881년 1월 12일, 러시아군은 마침내 게오크테페를 점령했고 1주일 후에는 아시가바트를 점령했다. 1884년, 러시아군은 메르브를 장악하고 투르크멘의 지도자로부터 항복을 받아냈다. 이것으로 러시아는 투르크멘 지역을 완전히 장악했다. 투르크멘의 귀족들이 러시아에 충성 서약을 한 것은 메르브를 장악하고 3년이 지나서였다.
청나라 영토인 신장 지역에 대해서도 진출이 진행되었다. 1862년 야쿱 벡이 신장 지역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그리고 1896년 청나라, 아프가니스탄과의 협정을 통해 고르노바다흐샨 지역을 편입한 것을 마지막으로 러시아의 중앙아시아 정복은 끝을 맺었다.
러시아의 정복으로 중앙아시아에서 민족 간의 내전은 끝났고 노예제와 노예매매가 폐지되었다. 제국 정부는 러시아에 저항했던 부족장들로부터 토지를 빼앗아서 현지 농민들에게 주었다. 산업의 원료 공급을 위한 목화재배와 전통 수공업을 위한 양잠업이 빠른 속도로 성장했고 유제품 공장과 섬유 공장, 식료품 공장도 생겼다. 자원 수송과 사람들의 이동을 도와줄 철도망도 깔렸고 석유, 석탄, 각종 금속의 채굴도 이루어졌다. 러시아 문화의 영향도 늘어났고 도시에는 점차적으로 현지인의 참여를 보장한 도시 두마와 현대적인 학교들이 설립되었다.
1873년부터 러시아 이주민들에 대한 토지분배가 시작되었고 이주민들은 현지 주민들에게 새로운 공업생산방식과 선진적인 농사방법, 감자와 사탕수수 같은 새로운 작물들을 재배하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그리고 현지 주민들도 이주민들에게 도움을 주었다. 현지 주민들은 이주민들에게 현지 사정에 맞는 농사법을 가르쳐 주었고 의료 서비스를 제공했으며 저렴하고 질 좋은 상품들을 판매했다. 그리고 제국 정부는 현지 주민들에 대해서 유연한 정책을 실시했기 때문에 중앙아시아 주민들의 풍습과 문화적, 종교적 전통, 자치권은 유지되었다.
그러나 러시아의 중앙아시아 정복은 부정적인 면도 있었다. 중앙아시아의 러시아 관료들은 유럽 러시아의 관료들보다 질적으로 떨어졌다. 러시아 관리들은 권력을 남용했고 주민들을 착취했으며 뇌물도 강요했고, 현지인들에 대해서도 차별적으로 대했다. 철도망을 건설한 것은 중앙아시아의 캐러밴 무역과 운송업의 쇠퇴로 이어졌고 이주민들과 현지 주민들 간의 토지 분쟁도 일어났다.

6. 대외 관계


러시아 제국은 크림 전쟁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오스트리아 제국과 우호 관계를 맺고 있었고 다른 유럽 국가들과의 관계도 크게 나쁘지는 않았다. 그러나 크림 전쟁이 발발하고 유럽에 반 러시아 동맹이 결성되면서 러시아는 유럽에서 완전하게 고립되었다. 역사적으로 러시아가 유럽과는 조금 따로 노는 분위기가 있고 유럽의 문제에도 잘 관여하지 않는 등 고립주의적인 면을 가지고 있긴 했지만, 이번에는 사정이 달랐다. 제국은 내부적으로 농노 문제와 캅카스 전쟁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고 심각하게 낙후되어 있었다. 따라서 러시아가 개혁과 내부 안정을 도모하고 산업화 중인 유럽 각국을 따라잡기 위해서는 대외적 안정이 필요했기 때문에, 알렉산드르 2세의 외교관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반 러시아 동맹을 해체시키고 고립을 타개하려 했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러시아의 외교관들은 많은 나라를 방문하며 동맹 상대를 찾으려 했지만, 영국그레이트 게임을 벌이는 경쟁 상대였고 프로이센을 비롯한 다른 나라들은 반 러시아 정서가 강해서 접촉을 해도 성과가 없었다. 그리고 전통의 동맹국이면서 크림 전쟁에도 참전하지 않았던 오스트리아는 아예 러시아 자신이 동맹국 후보 명단에서 탈락시킨 상태였다. 왜냐하면 오스트리아가 러시아를 '배신'했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1848년에 3월 혁명이 터져서 오스트리아가 곤욕을 겪자, 20만의 병력을 보내 헝가리 반란군을 포함한 혁명 세력을 진압해 주고 600만 루블의 차관을 지급해준 적이 있었다. 그래서 당대 러시아인들은 오스트리아가 러시아에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는 크림 전쟁이 터지자 러시아에 최후 통첩을 날리며 매우 적대적으로 나왔기 때문에 러시아인들은 오스트리아의 '배신'에 격하게 분노했다.[70]
러시아 외교관들의 노력이 수많은 실패로 이어지던 중, 희소식이 들려왔다. 파리 강화 회의에서 크림 전쟁의 승리를 즐기고 러시아에게 굴욕을 안겨주었던 프랑스가 러시아의 요청에 응답한 것이다. 얼어붙었던 양국의 관계가 진전되기 시작했고 러시아는 고립에서 벗어나는 듯 했다. 그러나 폴란드인들이 봉기하면서 러시아와 프랑스의 관계는 다시 급속도로 얼어붙었다. 프랑스인들이 폴란드인들을 동정하고, 여론이 폴란드 독립을 지지하기 시작한 것이다. 러시아로서는 폴란드 독립을 절대로 인정할 수 없었고 양국의 입장 차이는 좁혀지지 않았다.

6.1. 러-독 관계


그리고 이 순간에 등장한 사람이 바로 오토 폰 비스마르크였다. 당시 프로이센 왕국의 재상에 올랐던(1862년) 비스마르크는 폴란드 봉기가 프로이센 주도의 독일 통일에 해가 될 것이라 판단했다. 그래서 폴란드 봉기에 대해서 러시아의 입장을 지지하고 폴란드 독립운동가들이 프로이센으로 넘어오면 즉각 체포하여 러시아에 송환시키기로 약속했다.(알벤스레벤 협정)[71] 이렇게 되자 러시아와 프로이센의 관계는 급속히 개선되었고 이것은 러시아에게 희소식이었다.
이에 자신감을 회복한 러시아는 독일 통일 문제에서 전적으로 프로이센의 편을 들어주며 오스트리아 제국을 엿먹였고, 그러는 사이 착착 군제 개혁과 군사력 확충을 지속하며 기회를 노렸다. 그리고 1870년에는 비스마르크의 요구대로 보불전쟁에서 중립을 지켜주고 그 대가로 파리 강화 회의의 결정 사항을 무력화하는 데에 통일 독일의 지지를 받아내었다. 러시아의 일방적인 파기 선언에 경쟁국이었던 영국이 반발하긴 했지만, 러시아는 비스마르크의 도움을 받아 이 문제를 해결했다. 영국이 반발하여 런던에서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유럽 각국의 대표들을 모았지만, 비스마르크가 러시아를 지지하고 유럽 각국들이 크게 반대하지 않아서 러시아는 파리 강화 회의의 결정 사항을 무력화하는 내용의 런던 의정서를 체결했다. 이로써 러시아는 '''흑해 함대 주둔권'''과 '''흑해 연안 도시의 요새화'''에 대한 권리를 되찾았다.
그러다가 1875년 오스만령 보스니아에서 발생한 반란을 계기로 다시 발칸 문제가 불거지자 오스만 정부의 야만적인 탄압을 이유로 간섭, 1877년 제2차 동방 전쟁을 일으켰다. 개혁의 성과인지, 오스만 군대가 너무 약했던 건지 압승을 거두며 코스탄티니예까지 위협했으나, 영국의 위협으로 협상에 나서 산 스테파노 조약을 체결해 불가리아 공국을 성립시키고 세르비아 공국, 몬테네그로 공국루마니아 공국을 위성국으로 독립시키며 발칸 반도에서 패권을 장악하나 싶었으나... 오스트리아와 영국의 맹렬한 반발과 양국의 전쟁 불사 위협으로 위기가 고조되자, 독일 제국이 끼어들어 '성실한 중개인'을 자처한 비스마르크에 의한 베를린 회의(1878년)에서 문제의 조정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시궁창'''(...).
비스마르크의 조정의 결과 러시아가 설정한 불가리아 공국의 영토는 절반 이하로 축소되어 러시아는 지중해로 나갈 길이 막혔고, 러시아의 보상은 크림 전쟁 당시 루마니아에게 할양한 부자크 지방을 돌려받고 아르메니아 일부를 조금 얻는 수준에 그쳤다. 오히려 총 한 방 쏘지 않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 대한 위임통치권을, 영국키프로스에 대한 위임통치권을 따냄으로써 영국과 오스트리아가 큰 이득을 얻고 러시아의 남하가 또다시 저지당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결국 러시아는 막대한 국력을 투입해서 벌인 전쟁에도 독일한테 크게 엿을 먹고 얻은 것이 없었다.
이에 '''제대로 빡친''' 알렉산드르 2세는 독일과의 우호관계를 끝내기로 하고, 1873년 맺었던 삼제협정도 무효를 선언하고 러시아-독일 접경지대에 대규모 병력을 배치시키며 독일 황제에게 전쟁 선포에 버금가는 살벌한 서한을 보내는 등 분노를 억누르지 못하고 막나가기에 이르렀다. 이에 불안해진 독일은 러시아가 전쟁을 일으킬까 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끌어들여 1879년 독-오 동맹을 맺는다. 결국 제1차 세계 대전협상국vs동맹국의 구도가 점차 현실화된 것이다.

7. 로리스멜리코프의 헌법과 암살


결국 전쟁에서 아무 성과도 얻지 못하고 좌절만을 겪어야 했던 알렉산드르 2세의 행보는 차르 전제정에 대한 국내의 불신만 키웠다. 전쟁에 이기고도 이득을 보지 못한 것과 베를린 회의에서 당한 망신은 많은 러시아인들이 분통을 터뜨리게 만들었고, 베를린 회의에서 러시아와 함께 불이익을 당한 발칸 반도의 슬라브계 국가들도 러시아에게 크게 실망했다. 대중들이 정부에 대해서 불만을 품기 시작하자, 인민주의 혁명가들은 분위기가 무르익었다고 판단하고 대규모 테러 활동을 시작했다.
1878년 3월, 여성 혁명가 베라 자술리치가 트레포프 장군을 암살하려 했다. 암살미수범인 베라는 지식인들에게 ‘정의의 화신’으로 환영받았고 4월에 열린 법정에서 배심원들은 무죄를 선고했다. 그리고 혁명가들이 그녀의 영향을 받아 테러 활동이 더 확산되었다. 1878년 8월에는 황제원 제 3부의 국장 메젠체프 장군이, 1879년 2월에는 하리코프 지사인 크로포트킨이 암살당했고 1879년 4월에는 솔로비요프가 황제를 암살하려고 했다.
비밀 경찰 조직의 핵심 인사와 고위 관료들이 암살당하는 사건들이 터지자, 당황한 제국 정부는 테러와 맞서 싸우자며 대중의 지지를 호소했다. 하지만 대중은 이미 여러 번 병크를 터뜨린 정부에게 실망했기 때문에 정부의 호소를 외면했고 지방의 젬스트보들도 마찬가지였다. 일부 젬스트보 의원들은 정부의 무능함을 비판하기까지 했다. 무능한 관료들과 경찰들은 혁명가들을 제대로 체포하지도 못했고, 경찰 당국의 강경한 진압으로 1879년 4월 ~ 1880년 7월 동안 575명이 유배 당하고 16명이 사형선고를 받았지만 그럴수록 혁명가들은 더 과격한 테러를 일으켰다.
늘어나는 테러로 제국 정부는 자신감을 잃었고 테러에 대한 공포에 떨게 되었다. 그리고 1879년 11월 중순부터 1880년 초까지 3개월 동안 ‘인민의 의지’ 계열의 테러 단체 3곳이 황제 암살 시도를 감행했다.
1879년 11월, 첫 번째 암살 시도가 있었다. 두 혁명가가 철도 수비대에 위장 취업해서 황제의 기차가 지날 오데사에서 황제를 암살하려 한 것이었는데, 기차가 오데사가 아닌 알렉산드르프스크를 통과해 실패했다. 2번째 암살 시도는 아예 기차 자체를 날려버리려 한 것으로, 젤랴프가 이끄는 단체가 감행했다. 혁명가들은 상인으로 위장해 철로 밑에 폭탄을 설치했는데, 황제의 기차가 통과할 때 폭탄이 터지지 않아서 실패했다.
페롭스크가 이끄는 3번째 단체가 감행한 3번째 암살 시도는 모스크바에서 71 km 떨어진 철로 밑에 폭탄을 설치한 것이었다. 이번에는 폭탄이 제대로 터졌지만, 황제가 탄 객차가 아니라 수행원들이 탄 객차가 지날 때 폭탄이 터져서 실패했다. 혁명가들 입장에서 굴욕적인 것은, 폭탄을 터뜨렸는데도 불구하고 아무도 다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다음 암살 시도는 혁명가 스테판 할투린이 마호가니 가구 제조업자로 위장해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겨울 궁전에 잠입한 뒤, 황제의 식당 옆에 있는 시종들의 방에 다이너마이트를 조금씩 반입해 총 23kg을 설치한 것이었다. 폭탄은 황제와 모든 귀족들의 정찬이 열릴 1880년 2월 5일에 폭발하게 되어 있었는데, 정찬 시간이 변경되어서 경비병과 시종들만 피해를 입었다.
그 다음 암살시도는 아예 직접 황제에게 폭탄을 던지려 한 것이었는데, 혁명가가 폭탄을 점화하자 곧바로 손에서 폭탄이 터지는 사고가 발생해서 실패했다. 이 암살 시도 이후에도 여러 차례 암살 시도가 있었으나 모두 실패했다.
이렇듯, 수 없이 많은 암살시도가 있었지만 신의 가호 덕인지, 피델 카스트로급 행운을 가지고 있어서였는지 황제는 항상 죽음을 피했다. 하지만 그는 늘 불안에 떨게 되었고 정신적인 문제도 겪었다. 특히 산책을 좋아했지만 계속된 암살 위협 때문에 바깥 출입을 하지 않게 되었고, 어쩌다 외출할 때도 철통 같은 경호를 받았다. 결국 황제는 1880년 초에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기존 노선을 과감하게 바꾸기로 결정했다. 그는 보수파 관료들을 온건한 인사들로 교체하고 로리스멜리코프를[72] 비상전권을 가진 최고 집행 위원회 의장으로 임명해 중용했다.
최고 집행 위원회 의장이 된 로리스멜리코프는 혁명가들을 진압하는 한편, 어느 정도의 자유를 허용해 자유주의자들을 혁명 세력에게서 떼어내 혁명 세력을 고립시킨 다음 그들을 제거하려 했다. 또한 마음대로 사람들을 체포하는 게 가능했고 독단적인 행동을 해서 대중의 증오를 받았던 황제원 제3부를 폐지해 그 업무를 내무성으로 옮겼으며 출판에 대한 규제를 완화했다. 그밖에도 대중들의 분노를 샀던 소금세를 폐지했고 교육성 장관 톨스토이 백작을 파면했으며[73] 젬스트보에 개혁정책들을 구상하라고 촉구했다.
1881년 2월 28일, 로리스멜리코프는 자신의 개혁안을 황제에게 제시하고는, 분노한 대중을 진정시키고 국가가 안정을 되찾으려면 다시 개혁을 해야 하며 이번 개혁에는 사회세력들을 동참시킬 것을 제안했다.
로리스멜리코프의 개혁안의 내용을 살펴보자면, 황제가 젬스트보와 도시 두마의 의원들을 선발해서[74] 임시 위원회인 <경제행정 위원회>와 <재정 위원회>를 설립하고, 이 위원회에서 개혁 법안을 만들고 경제와 재정 문제를 전담하게 했다. 그리고 이 임시 위원회에서 준비한 법안들은 젬스트보와 도시 두마에서 선출한 대표자들로 구성한 <일반 위원회>로 보내고, 일반 위원회에서 인준한 법안들은 황제와 일반위원회가 뽑은 10 ~ 15명의 위원들로 구성한 입법자문기관인 <국가 위원회>로 보내도록 하는 것이었다.
<로리스멜리코프의 헌법>이란 명칭을 얻은 이 개혁안은 러시아 제국 정치 체제의 본질적인 변화는 이끌어낼 수 없었고 황제의 권력이 여전히 핵심적인 권력으로 기능하는 법안이었지만, 이 법안은 국정 운영에 민중이 선출한 대표들이 참여하고 입헌 군주국의 토대를 확립하는 기초가 될 수 있었다. 황제가 차르 전제정을 계속 유지하고 싶어했기 때문에 급진적인 개혁안은 내놓기 어려워서 로리스멜리코프는 매우 온건한 수준의 개혁안으로 타협을 지었다. 그리고 황제가 불안해 할 것을 염려해서 서유럽의 대의제 정치 제도를 도입하는 형태의 개혁은 아니라고 부정했다.
1881년 3월 1일[75], 알렉산드르 2세는 <로리스멜리코프의 헌법>을 승인하고 3월 4일에 최종적인 추인을 위해 각료 회의 소집을 지시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로리스멜리코프가 국정을 맡으면서 테러는 줄어들고 국가가 안정을 되찾았기 때문에 더 이상 비상전권을 유지할 필요성이 사라졌다. 그래서 로리스멜리코프는 최고 집행 위원회를 폐쇄시키자는 제안을 했고 알렉산드르2세도 승인했다. 이후에 벌어질 일을 생각하면 로리스멜리코프와 알렉산드르 2세는 잔인한 실수를 저지른 셈이었다. 헌법을 승인하고 난 뒤, 황제는 위험하다는 주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원래 일정대로 기병학교 열병식에 참석했다.
한편 1879년부터 알렉산드르 2세 암살을 추진해온 테러단체 '인민의 의지(Народная воля)'는 이러한 개혁에도 불구하고 혁명을 촉발하기 위해서는 거사가 불가피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이들은 황제가 행차한다는 정보를 입수한다음 그간 여러 차례의 실패를 토대로 이중삼중의 계획을 수립한 상태였다. 우선 이들은 황제가 보통 시내에서 행사를 치르고 환궁할 때 말라야 사도바야(Малая Садовая, 작은 정원) 거리나 예카테리나 운하를 따라가는 길을 이용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래서 말라야 사도바야 거리에 치즈 가게를 하나 열고, 이 가게 지하에서 거리 쪽으로 땅굴을 파서 다이너마이트를 매설해놓고 황제 행렬이 지나갈 때 이를 폭파시킬 준비를 해놨다. 만약 황제의 행렬이 말라야 사도바야 거리를 통과하다 폭발로 정지하면, 단원 4명이 사제폭탄을 들고 현장에 뛰어들어 확인폭사를 시킨다는 계획이었다. 행여나 이쪽이 아닌 운하변 도로를 이용할 경우에는 곧장 사제폭탄을 투척할 작정이었다. 이외에도 어느 쪽 경우이건 마지막으로 암살조를 총괄하던 안드레이 젤랴보프(Андрей Иванович Желябов)가 권총과 단검을 들고 현장에 난입하여 최후의 일격을 가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거사 결행 2일 전에 젤랴보프가 체포되었기에 최후의 일격은 그의 아내 소피야 페롭스카야(Софья Львовна Перовская)가 담당하기로 했다.
이 가운데 알렉산드르 2세는 3월 1일(구력) 열병식을 마치고 정오 경에 황궁으로 향했다. 황제의 일정을 미리 파악하고 있던 '인민의 의지' 단원 중 이그나치 흐르니예비츠키(Ignacy Ioakhimovich Hryniewiecki, 폴란드인 단원이었다), 니콜라이 리사코프(Николай Иванович Рысаков)[76], 티모페이 미하일로프(Тимофей Михайлович Михайлов), 이반 예멜랴노프(Иван Пантелеймонович Емельянов) 4명은 사제폭탄을 소지하고 말라야 사도바야 거리 쪽에서 대기 중이었다. 그런데 황제의 행렬은 말라야 사도바야 거리로 가지 않고, 다른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망을 보고 있던 소피야 페롭스카야는 이에 수신호로 빨리 운하 쪽으로 이동하도록 지시한다.
그래도 이들 암살단원들이 빨리 위치를 다시 잡기는 쉽지 않아서, 알렉산드르 2세가 곧장 황궁으로 돌아갔다면 암살을 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그날따라 알렉산드르 2세는 친척인 예카테리나 미하일로브나 대공녀[77]를 잠시 보고 가겠다고 하는 바람에 또 시간을 지체하여 암살자들이 다시 위치를 잡을 여유를 주고 말았다.
결국 황제의 행렬은 오후 2시 경에 예카테리나 운하를 따라 다시 이동했다. 이어 2시 15분 무렵,니콜라이 리사코프는 소피야 페롭스카야의 신호를 받고 손수건에 싼 첫 번째 사제폭탄을 투척했다. 폭탄은 마차 뒤편에서 폭발하고, 황제의 마차를 뒤따르며 호위하던 카자크 기병이 이에 치명상을 입고 그날 사망했다. 폭발 파편으로 거리를 지나던 애꿎은 14세 소년도 부상을 입었다. 특히 폭발로 인해 주변도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러나 알렉산드르 2세는 프랑스나폴레옹 3세가 선물한 방탄 마차에 탑승하고 있었기에 전혀 부상을 입지 않았다. 리사코프를 현장에서 체포한 경찰들은 리사코프가 체포 직전에 누군가에게 소리치는 걸 듣고 다른 암살단원들이 더 있음을 직감했다. 이에 신하들이 알렉산드르 2세에게 곧장 온전한 마차로 바꿔타고 궁으로 향할 것을 주청했으나, 황제는 '''자리를 피하기는커녕 "난 괜찮다." 라고 말하며 마차에서 나와 폭발에 휘말려 다친 사람들을 수습하려고 했다.'''[78]
하지만 이는 암살자들에게 좋은 기회를 제공했고 그 사이에 달려온 흐르니예비츠키가 황제 앞으로 난입하여 두 번째 폭탄을 발밑에 던졌다. 이번엔 암살범이 워낙 가까운 데서 폭탄을 던져 자살 폭탄테러나 마찬가지였다. 폭탄에 맞은 알렉산드르 2세는 즉사하지는 않았지만 팔 하나와 두 다리가 날아가고 배와 얼굴이 찢어지는 치명상을 입었으며 흐르니예비츠키도 중상을 입었다. 또한 이미 인파가 몰려든 가운데 폭발이 일어나 근위병들과 주변 약 20여 명의 구경꾼들까지 부상을 입었다. 이외에 암살조 중 이반 예멜랴노프도 언제든 추가로 폭탄을 터뜨릴 준비를 마쳤으나, 알렉산드르 2세가 이미 가망이 없을 정도로 상태가 심각한 것을 확인하자 암살이 성공했음을 알고는 물러났다.
치명상을 입은 황제는 주변 사람들에게 "짐은 궁전에서 죽고 싶도다..." 라는 말을 겨우 했고, 신하들과 근위병들에 의해 급히 겨울 궁전으로 실려 갔으나 9시간 만에 그의 서재에서 사망했다. 암살범 흐르니예비츠키도 주변 군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그는 자기 이름도 발설하지 않고 일체 협조를 거부하다가 그날 저녁에 사망했다. 반면 첫 번째 폭탄을 던진 리사코프는 순순히 조사에 응해 다른 단원들의 신원을 술술 자백했다. 이에 경찰은 대대적인 검색을 벌여 '인민의 의지' 단원들을 1881년 3~4월에 걸쳐 연이어 체포했다.
러시아 전제정의 상징인 황제를 쓰러뜨린 인민주의 혁명가들은 '이제 러시아 각지에서 인민들이 혁명을 일으켜 전제정을 완전히 끝장낼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설령 혁명이 일어나지 않더라도 자유주의적인 개혁은 이루어질 것이라는 기대를 품었다. '''하지만 그들의 생각은 완전히 빗나갔다.''' 인민들은 혁명을 일으키지 않았고, 오히려 황제의 잔혹한 죽음에 큰 충격을 받았다. 자유주의자들은 입을 다물었으며 보수파들은 "정부가 테러리즘에 맞서서 단호하게 무력을 행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황제의 암살 이후 1881년 3월 8일에 열린 회의에서, <헌법>을 만든 로리스멜리코프는 ‘죽은 황제의 의지는 그 후계자에게 법이 된다’는 전례를 황태자가 따를 것이라고 생각해서 침묵을 지켰다. 그러나 ‘죽은 황제의 후계자’인 알렉산드르 3세는 <로리스멜리코프의 헌법>을 거부했고 전제 정권을 보존할 것을 선언했다. 자기 아버지의 잔혹한 죽음을 목격한 알렉산드르 3세는 큰 충격을 받아 아버지의 '개혁'에 대한 아랫것들의 대답이 '테러'라고 여겨 급진파를 증오하게 되었고, 권좌에 앉자마자 반동 정치를 시작했으며 자기 아버지를 앗아간 테러리즘을 뿌리 뽑으려 했다. 그리고 알렉산드르 3세는 아버지가 암살당한 자리에 피의 성당을 지어 아버지를 애도했다.
매우 역설적이게도 혁명가들의 황제 암살은 전제정의 몰락이 아닌 더 강력해진 전제정과 반동 정치를 불러들였다. 알렉산드르 2세가 암살당한 날 그는 두마(의회)에 대한 기회를 실현시키려고 했기 때문에 러시아의 자유주의적 개혁이 시작될 찰나였다. 그러나 그 실마리를 운동가들은 자신들의 테러로 인해 스스로 날려버린 셈이 되었고, 이후 전제정치가 강화되면서 러시아 제국로마노프 왕조기나긴 몰락의 길이 시작되었다.

8. 개인적인 면


알렉산드르 2세는 자기 세대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황자였고 다른 경쟁자가 없었다. 그 당시 러시아 황제였던 알렉산드르 1세는 자식이 없었고, 알렉산드르의 맏동생이었던 콘스탄틴 파벨로비치 로마노프는 계승 1순위였지만 귀천상혼을 한 탓에 계승권을 상실한 상태였다. 또한 콘스탄틴도 자식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태어나자마자 미래의 후계자로 여겨졌다. 이제 막 태어난 알렉을 보러 왔던 알렉산드르 1세가 알렉의 어머니에게 ‘이 조그만 아이는 황제가 될 운명이다’라고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알렉산드르 니콜라예비치 로마노프는 어릴 적부터 좋은 교육을 받았다. 유년기에는 지혜롭고 인자한 육군 대위인 메르데르와 명성 높은 시인 바실리 주콥스키로부터 교육받았는데, 주콥스키는 인도적인 교육을 통해 알렉산드르를 잘 교육 받은 인물로 육성하려 했다. 주콥스키는 황태자를 착실히 가르쳤지만, 황제가 황태자의 교육에 개입하면서 주콥스키의 영향력은 많이 줄어들었다.
황제 니콜라이 1세는 본인이 그랬듯이 황태자도 군사 교육을 받기를 원했고 황태자의 교사들에게도 군사 교육을 강조했다. 군사 교육을 받기 시작하면서 세간에는 알렉산드르가 군대와 규율, 군사의식을 좋아한다는 소문이 퍼져나갔다. 군사 교육의 영향이 있긴 했지만, 황태자는 좋은 교사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고 부족한 부분은 교육 시찰로 보충했다. 1837년, 황태자는 제정 러시아의 30개 주와 시베리아 지역을 순방하고 그의 백성들이 보내오는 수많은 탄원서를 읽고 백성들의 고충을 살폈다.
그리고 황태자는 순방 중에 부황의 즉위식 날에 반란을 일으켰던 데카브리스트들이 비참한 삶을 사는 것을 보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도움을 주었다. 이 와중에 데카브리스트 유배자 중 한 사람이었던 게르첸을 만나 친구가 되었다. 이 때의 만남과 교분 덕에 게르첸은 알렉산드르의 주선으로 모스크바로 돌아올 수 있었으며 5년 뒤에 러시아를 떠났다. 순방에서 돌아온 뒤, 황태자는 데카브리스트들의 처우 개선을 부황에게 요청했고, 자신이 황위에 오르자마자 그들을 전원 사면했다.
1838년, 알렉산드르(21세)는 영국을 방문하고 이제 막 즉위한 빅토리아 여왕(1819 ~ 1901, 20세)과 만나서 함께 춤을 추었는데, 빅토리아 여왕은 자신의 일기에 알렉산드르(1818 ~ 1881)는 굉장히 매력적인 남자였으며 그와 함께 한 시간이 매우 즐거웠다고 서술했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깊은 호감을 느꼈지만, 국가적으로 볼 때 두 사람의 결혼은 이루어질 수가 없었고 이루어지더라도 양국에게 매우 부담스러운 것이었기 때문에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감정을 정리했다. 게다가 빅토리아 여왕은 이미 앨버트 공에게 푹 빠진 상태였으며 설령 두 사람이 결혼을 했더라도 두 사람의 성격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오래 가는 것이 어려웠을 듯 하다. 빅토리아는 낭만적이고 감성적인 성격이었지만 그와 별개로 고집불통에 다혈질이었다. 반대로 알렉산드르는 상냥하고 친절한 성격이었지만, 매우 예민하고 우유부단했다.
빅토리아 여왕을 만났던 그 해에 알렉산드르는 외국을 여행하던 도중, 헤센다름슈타트의 공주 막시밀리아나 빌헬미나 마리아 공주와 만났고 첫 눈에 반해 그녀와 결혼했다. 어머니의 반대가 있긴 했지만, 알렉산드르는 자신의 뜻을 밀어붙여 결혼했다. 이 때부터 황태자는 국정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니콜라이 1세는 황태자에게 다양한 분야의 업무를 맡겼는데, 국무협의회, 국무위원회와 같은 중요한 곳에도 참석시켰을 뿐만 아니라 농민 문제를 관여하는 위원회도 관장하게 했다. 그리고 육군 대장직에 임명하고 군사 업무도 맡겼다. 니콜라이 1세는 수도를 비우는 동안에는 국정 운영을 부탁했다. 국정에 참여하는 10년 동안, 황태자는 황제의 가장 가까운 조력자가 되었고 황제의 통치 과정을 바라보는 목격자가 되었다.
알렉산드르는 천성적으로 온후하고 친절했으며 예의바른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는 감성적이고 예민한 사람이었다. 알렉산드르는 부황을 닮아서 미남이었으며 건장하고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우유부단하고 다른 사람들에게서 영향을 많이 받는 성격이기도 했는데, 특히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강직한 니콜라이 1세의 기질은 알렉산드르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 그는 부황의 생각과 행동을 배우고 그의 뒤를 따를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알렉산드르는 성격이 워낙 온후하고 부드러웠기 때문에 니콜라이 1세와 같은 무자비함이나 단호함은 가지지 못했다. 어찌보면 서로 성격이 완전히 다른 두 사람이었지만, 황태자는 부황을 좋아했고 어떤 일이든 순종했으며 부황을 기쁘게 해주고 싶어했다. 황제 역시 황태자를 매우 사랑하고 신뢰했다. 두 사람 간의 성격 차이가 있다보니 니콜라이 1세가 너무 감정에 휘둘리고 이성적이지 못하다고 황태자를 자주 책망했었지만, 두 사람의 사이를 갈라놓을 정도의 문제는 아니었다.
알렉산드르 2세는 부황과 같은 워커홀릭은 아니었지만[79] 9시부터 업무를 시작해 6시까지 일했으며 잠깐 잠깐 휴식 시간을 가지고 식사를 했다. 업무가 끝나면 그는 가족과 시간을 보내거나 공적 행사에 나갔다. 그는 늘 관료들에게 업무를 미루지 말라고 지시했으며 관료들이 처리해야 하는 업무에 기한을 두었다. 그 자신도 예외는 아니라서 매일 매일 막대한 양의 서류가 올라와도 그는 스스로가 정한 업무 처리 기한을 철저히 지켰다.
알렉산드르 2세의 취미는 사냥과 산책이었다. 당시 러시아에는 두 가지 종류의 사냥이 있었는데, 하나는 조선 시대 국왕들이 하는 것처럼 대규모 인력을 동원해 사냥에 나서는 것이었고, 하나는 사냥에 나설 사람 한 두 명과 함께 조용히 사냥하는 것이었는데 그는 후자의 방식을 쓰는 사냥꾼이었다. 그는 장기간의 사냥 여행을 떠나 숲속에서 곰이나 들소, 엘크를 잡는 것을 좋아했다. 하지만 말년에는 계속된 암살 위협으로 인해 산책과 사냥도 함부로 하지 못했다.
알렉산드르 2세의 아내 막시밀리아나 빌헬미나 마리아 공주는 알렉산드르와 결혼한 뒤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로 개명하고 러시아 정교로 개종했다. 알렉산드르와 마리야, 이 두 사람의 관계는 매우 돈독했고 두 사람은 자식을 6명이나 낳을 정도로 금슬이 좋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부부는 점점 관계가 소원해졌고 함께 하는 시간도 줄어들었다. 서로 만나면 건강이나 날씨, 아이들 얘기 정도만 하게 되었고 공적 행사가 있으면 같이 있다가 저녁이 되면 각방에 들어갔다. 마리야는 자신의 시어머니가 그랬듯이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춥고 습기찬 날씨 때문에 건강을 많이 상하게 되었고 잦은 출산도 그녀의 건강에 악영향을 미쳤다.
마리야가 31살이 되던 해에 황제가 된 알렉산드르 2세는 외도를 시작했다. 수많은 여성들과 관계를 맺었고, 시녀나 하녀부터 시작해서 심지어는 나이가 최소 20살 이상 차이 나는 스몰니 학원의 여학생들과 관계를 맺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이런 원조교제에 가까운 연애와 수없이 많은 여성들과 관계를 맺는 외도를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죄값을 치르지 않았다. 러시아의 모든 이들이 그를 사랑한다는 이유 덕분에 그의 '일탈'은 늘 용서받았다.
몇 명이나 사귀었는지도 기억을 못하던 48세의 나이에, 알렉산드르 2세는 스몰니 학원의 학생이었던 19살의 예카테리나 돌고루코바와 사랑에 빠졌다. 두 사람은 매일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여름 정원에 나와 산책을 했고 거리의 행인들은 아리따운 아가씨와 손 잡고 걸어가는 이 거구의 신사를 못 알아 보는 척 해야 했다. 이 신사의 얼굴이 제국의 모든 관공서에 걸려 있는데도 말이다(...) 두 사람은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두 사람은 네 명의 자식을 낳을 정도로 금슬이 좋았다. 예카테리나는 황제와 연애를 시작한 뒤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겨울 궁전에 머물렀으며 거의 비공식적인 '황후'로서의 지위를 누렸다. 외도를 저지른 것 때문에 벌을 받은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1866년에 있었던 드미트리 카라코조프의 황제 암살 미수 사건도 황제가 예카테리나와 여름 정원에서 산책하러 나온 것을 노린 것이었다.
부황과 선대 황제들이 그랬듯이, 알렉산드르 2세도 경호원 없이 혼자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거리를 산책하는 것을 즐겼고, 가끔씩 반려견과 함께 산책에 나섰다. 그러나 그의 치세가 끝난 뒤로 그 어떤 러시아 도 경호원 없이 거리를 산책하지 않았고, 그는 경호원 없이 거리를 산책한 마지막 러시아 황제가 되었다.
알렉산드르 2세는 인간적으로는 선량한 황제였지만, 가족사와 관련해서는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장남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황태자가 매우 유능하다는 이유로 장남만 편애했고, 무능했지만 가정적으로는 선했던 알렉산드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후일 알렉산드르 3세)은 찬밥신세였다. 게다가 첩과 사생아들을 두었고, 장남 니콜라이가 1865년 수막염으로 숨을 거둘 때에는 오로지 니콜라이만 신경쓰고 다른 자녀들은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니콜라이 황태자의 사망 이후에는 알렉산드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을 차남이라는 이유만으로 그의 정치관에 귀 기울여 보지 않고 황태자 자리에 세웠다. 게다가 니콜라이 황태자의 약혼녀 다그마르 공주(마리아 표도로브나)를 알렉산드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과 '''강제로''' 결혼하게끔 했다. 당시 알렉산드르는 사랑하는 애인이 있었으나 차르는 신경쓰지 않고 결혼을 밀어붙였고, 그 무렵 개혁군주로서의 모습을 버리고 전제적으로 변하며 나태해졌다.
알렉산드르 2세는 1880년 황후인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가(본명은 헤센다름슈타트의 마리) 죽자 애인 예카테리나 돌고루코바와 비밀 약혼했고, 1881년에는 아예 '''결혼하겠다고 공식 발표까지 할 예정이었다'''고 한다. 이미 아내가 멀쩡히 살아있던 1880년 이전부터 돌고루코바를 정부로 들여 그녀와의 사이에서 자녀 4명을 두었다고 하니...[80] 다만 마리야 황후가 낳은 자신의 적자녀들을 비롯한 황족과 귀족들의 반대 때문에[81], 귀천상혼 형태로 재혼해서 돌고루코바의 자식들은 황위계승권이 없는 사생아로 남았다. 이렇게 알렉산드르 2세와 귀천상혼한 예카테리나 돌고루코바는 유리옙스카야 공비 칭호를 받고[82] 거의 비공식적인 황후로 대우받았으나, 그 대우도 알렉산드르 2세가 폭탄 테러로 사망하면서 끝났다. 알렉산드르 2세가 사망하자마자 유리옙스카야 공비와 그녀의 자식들은 러시아 황실에서 내쳐졌고, 결국 러시아 황실에서 막대한 연금을 지급받는 대신 황실 거주지에서 살 권리마저 포기하고 러시아를 떠났다. 이후 유리옙스카야 일가는 주로 프랑스 파리에 거주하면서 황실에서 받은 연금으로 풍족한 생활을 영위했지만, 러시아 황실은 그저 표면적인 연금만 지급할 뿐 끝까지 그들을 외면하며 호의적으로 대하지 않았다고 한다.[83] 이러한 풍족한 생활마저도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 로마노프 왕조가 몰락하면서 연금이 끊겨버리는 바람에 말년의 예카테리나 돌고루코바는 경제적으로 곤란한 처지가 되었고, 1922년에 사망할 때는 남은 재산이 얼마 없었다고 한다.
이와 대비되게 차남이자 다음 황제인 알렉산드르 3세는 자신의 아내인 마리아 표도로브나 황후와 끝까지 금슬 좋게 살았으며, 외도 같은 건 양쪽 다 하지 않았다.

9. 참고 문헌


  • 니콜라스 V. 랴자놉스키 『러시아의 역사』
  • 따찌야나 미하일로브나 찌모쉬나 『러시아 경제사』
  • 문명식 『러시아 역사』
  • 세르게이 표도로비치 플라토노프 『러시아사 강의』
  • 에이브러햄 애셔 『처음 읽는 러시아 역사』
  • 존 M. 톰슨 『20세기 러시아 현대사』
  • C. H. 스이로프 『러시아의 역사』
  • 한스 율겐 한젠 『서양목조건축』

10. 가족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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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헤센다름슈타트의 마리)'''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러시아로 시집오면서 정교회식으로 바꾼 이름이고, 원래 이름은 헤센다름슈타트의 마리이다. 헤센의 대공인 루트비히 2세와 바덴의 빌헬미네 사이에 태어난 자녀 중 막내이다. 하지만 그녀와 바로 위 오빠인 알렉산더는 대공의 자녀가 아닌 어머니 빌헬미네의 애인인 그란시 남작이라는 것이 당시부터 공공연한 비밀이였다. 자신의 자녀는 아니지만 불필요한 잡음을 원치 않은 대공은 2명의 아이를 자신의 자녀로 인정했으나 둘은 따로 떨어져서 양육되었다. 마리야는 겨우 16번째 생일을 지나자마자 남편과 결혼했고 어린 나이부터 임신과 출산의 반복 그리고 추운 러시아의 기후를 견디기 어려워 건강이 매우 안 좋았다. 그 와중에도 6남 2녀를 두었다. 알렉산드르 2세는 몸이 아픈 아내를 두고 위에서도 언급된 예카테리나 돌고루코바를 정부로 삼아 그녀와의 사이에서 사생아까지 낳고 이후 마리야가 사망하자 1년만에 그녀와 귀천상혼으로 결혼한다.[84] 마리야는 1865년 장남 니콜라이 황태자가 죽자 쓰러져 1880년 57세의 나이로 죽을 때까지 의식을 찾지 못했다.
수막염으로 요절했다.
머리도 뛰어나고 얼굴도 잘생긴 말 그대로 완벽한 군주감이었다. 또한 미녀 공주로 유명한 덴마크의 다그마르 공주(마리아 표도로브나)와 약혼하여 알렉산드르 2세는 이들이 러시아를 잘 이끌 선남선녀로써 기대하고 있었는데... 니콜라이 황태자는 1865년에 수막염으로 죽었고, 동생인 알렉산드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이 니콜라이 황태자의 뒤를 이어 황태자가 되었고, 약혼녀 덴마크의 다그마르 공주도 계승했다. ?
러시아 제국 황제. 4남 2녀를 두었다.

[1] 가내 농노는 농노 중에서도 가장 지위가 낮은 농노였다.[2] 소작료는 최소 19%, 최대 81%였다.[3] 그래서 1861년에 제국 정부가 농노들을 해방하고 그들에게 토지를 나눠주기 위해서 지주들의 토지를 구매할 때, 비흑토지대의 지주들은 정부의 토지 매각 요청에 대체로 거부 반응을 보이지 않았으며 오히려 '토지를 팔아 줄테니, 현금만 많이 쳐달라'는 태도를 보였다.[4] 남부 지주들은 토지 가치가 높았기 때문에 농노 해방령 당시에 토지 매각을 기피했다. 그러나 토지 매각을 강요하는 정부와 농노 해방을 원하는 사회적 분위기에 강한 압력을 받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토지의 일부를 매각했다.[5] 이 때문에 귀금속인 은으로 만들어 가치가 보장되는 '은화 루블'이 러시아의 화폐로 기능했다.[6] 정부 당국의 감자 재배 강요 때문에 반발이 생겼고, 감자가 성경에 나오지 않는다는 이유로 성직자들은 감자 재배를 반대했다. 게다가 농민들은 자칫 잘못하면 1년 농사를 망칠지도 모르는 새로운 작물의 재배를 거부했다. 이러한 이유로 정부와 농민들은 큰 갈등을 빚었고 사태는 반란으로 변했다. 이런 극적인 사건 이후로, 농민들이 감자의 장점을 알고 점점 심기 시작하면서 상술했듯이 40년대에 감자 생산량이 크게 늘어나게 되었다.[7] 대부분의 슬라브주의자들 역시 차르 전제정을 비판하고 그 권력을 축소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개인의 자유를 확대하고 농노제를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포고진 역시 보수주의자면서 슬라브주의자였다.[8] 구베르니야는 러시아의 행정단위이며 하위 행정단위로 우에즈드가 있다. 구베르니야는 주나 군, 우에즈드는 군이나 현으로 번역하는 편이다. 본 문서에서 구베르니야는 주, 우에즈드는 군으로 번역하였다.[9] 지주들의 편에 서지 않고 진정으로 농민을 위해서 활동한 유일한 조정관이 바로 레프 톨스토이였다.[10] 농민의 원성을 산 토지 상환금은 결국 1905년 피의 일요일 사건 이후 폐지되었다.[11] 농민들의 다산은 19세기 중후반에 인구가 급속도로 증가하는 원인이 되었다. 통계에 따르면 1860 ~ 1897년까지 농민 인구는 5천만에서 7,900만까지 급증했고 러시아 전체 인구는 1897년까지 1억 2,600만으로 늘어났다.[러시아식•단위] 평으로 계산하면 2,000평 이상. 1 데샤티나는 10926 평방미터.[12] 1871년에 설립한 돈 지역 의사 협회를 비롯한 지역 의사 협회, 여러 의료 협회들이 젬스트보 의료 제도에 끼친 영향은 막대했다.[13] 레프 톨스토이안톤 체호프의 소설에서 자주 등장하는 온정적이고 진보적인 지주들이 적극적으로 젬스트보에 참여했던 것이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후진적인 농촌 지역에 문명을 전파하고 싶어 했던 자유주의자들이었다. 그리고 톨스토이와 체호프 본인들 또한, 젬스트보에 참여해서 주민들을 위해 헌신적으로 일했다. 그러나 지주가 거의 없었던 러시아 북부의 젬스트보들이 성공적으로 운영되었다는 평가가 있기 때문에, 젬스트보 운영을 의도적으로 방해하거나 기득권 유지를 위해 활동한 귀족 지주들 또한 존재했던 것으로 추측된다.[14] 폴란드핀란드 지역은 원래 어느 정도의 자치권을 보장받았고 의회가 있었기 때문에 젬스트보를 설립하지 않았다. 중앙아시아 지역과 시베리아 지역만 두마의 설립이 상당히 늦었다.[15] 비교하자면 조국 전쟁의 재정적 손실은 6억 루블이고 당시 1년 예산은 4천만 루블이었다.[16] 데카브리스트의 난 주모자 중 몇 명이 거열형을 선고받았다. 사건의 피해자였던 황제 니콜라이 1세가 어느 정도 처벌 수위를 완화해서 사지가 찢기는 것은 피할 수 있었다.[17] 잡계급인이라는 뜻이다. 러시아의 비귀족 계급 지식인 집단이라 할 수 있다.[18] 1856년의 러시아에는 226개의 잡지가 있었으며 많은 수의 잡지가 자유주의적 성향을 띄었다.[19] 예를 들어, 보수파들은 프랑스 혁명 당시 변호사들이 혁명에 앞장섰다는 사실을 거론하며 변호사 제도를 도입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주장했다. 로베스피에르·당통·쿠통·베르니오·브리소 같은 프랑스 혁명의 주역들은 전부 변호사였다.[20] 교회 법정과 군사 법정은 독립적인 사법기관으로 남았다.[21] 다만 판사들의 승진은 여전히 고위 관료들이 결정했다.[22] 정교회에서는 가톨릭과 달리 사제의 결혼이 가능하다. 물론 주교부터는 짤없이 독신이어야 한다. 그리고 성직자의 자녀들은 당대 러시아 사회에서 약간 경원시 되는 존재들이었다. 알렉산드르 1세의 최측근이며 러시아의 법전을 새로 쓴 스페란스키조차 관료 사회와 사교계에서 '신부의 아들놈'이란 멸칭을 들어야 했다.[23] 다만 교수 협의회는 교육성 관료의 감독을 받아야 했다.[24] 아마도 Gun을 이렇게 번역한 듯하다. 7.62mm 탄을 쓰는 M1 개런드 소총의 유효사거리가 450m 정도인데 이 시대의 소총이 800m 라는 것은 불가능하기에 여기서의 Gun은 직사포를 의미하는 듯하다.[25] 장남이 복무 중이거나 예비역이면 차남은 군 면제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26] 이들은 예비역으로 편성했다.[27] 상인은 그냥 상행위를 하는 이들이 아니라, 예카테리나 2세의 치세에 만든 '상인 길드'에 소속된 '상인'을 말한다.[28] 크림 전쟁 당시 나히모프, 코르닐로프, 이스토민 등의 유능한 지휘관들이 전사한 것은 러시아군 입장에서 매우 뼈 아픈 일이었다.[29] 윈체스터와 마티니의 화력에 경악한 군 수뇌부들이 새로운 소총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고, 이렇게 해서 개발한 소총이 바로 그 유명한 모신나강이다.[30] 주 전선은 불가리아를 비롯한 발칸 반도 지역이었지만 러시아의 최종 목표는 튀르크의 심장인 코스탄티니예였으며 러시아군은 아드리아노폴리스까지 함락해서 코스탄티니예를 목전에 두고 있었다. 영국을 비롯한 열강의 개입이 없었다면 코스탄티니예로의 진격도 가능했다.[31] 조선 말기 김옥균 등의 개화파가 일본이라는 외세에 기대어 개혁을 시도했다가 좌절했던 것처럼, 폴란드인들도 영국과 프랑스의 힘에 기대했지만 철저히 외면당했던 것. 이후 폴란드인들의 독립에 대한 방침은 현실을 인정하고 낭만주의적인 무장 독립 운동 대신 계몽운동과 문학, 사회운동을 주류로 한 현실적이고 냉정한 대응이 주류를 이뤘다.[32] 반대로 보수주의적 색채를 띤 언론은 이러한 탄압을 받지 않았다. 원래 자유주의자였다가 폴란드 반란 이후로 보수주의자가 된 카트코프가 편집하는 <모스크바 신문>은 대내외 정책의 방향을 결정할 정도의 영향력을 행사했다.[33] 그러나 슈발로프는 베를린 회의에 외교관으로 참석했다가 러시아의 이익을 지키는 데에 실패해서 러시아 대중들의 엄청난 비난을 받았고 이 문제 때문에 실각했다.[34] 러시아 최초의 기계 공장은 1799년에 설립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국영 알렉산드롭스크 면방직 공장이었다.[35] 그러나 러시아의 도시 중 80%가 인구 5천 명 이내의 소도시였다.[36] 반면에 아마포 공업의 경우에는 1804년 약 285개의 아마포 매뉴팩처가 1845년에는 156개로 감소했다. 다만 이 시기 러시아의 공업은 대기업화되는 경향이 있어서 숫자는 줄더라도 개별 기업의 크기는 커지는 편이었다. 그래서 아마포 공업이 쇠퇴했는지는 추가적인 조사가 필요하다.[37] 러시아의 공업 기업 수는 1860년대에 1만 5천개로 증가했지만, 대부분이 이러한 소규모 공장들이었다.[38] 왜 소작료까지 보상해 줘야 하는지는 추가적인 조사가 필요한데, 아마도 노동자가 도망치는 경우 보상해 주는 것이 아닐까 추측된다.[39] 당시 러시아는 상인 길드를 만들어 상인들을 여기에 등록시켰는데, 19세기부터 상공업이 발달하면서 상당한 숫자의 농민들이 상업에 종사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길드에 등록하지 않은 상태에서 상행위를 했기 때문에 같은 시기 조선의 난전과 비슷한 존재들이었다. 여기서 ‘상업 종사 농민’이나 ‘상업 농민’은 너무 길거나 적절치 않은 듯해서 미등록 상인으로 서술했다.[40] 베르스타는 러시아의 전통 거리 단위로 영미권에서는 러시아식 '마일'로 번역한다. 1 베르스타의 길이는 1.0668km이며 1 베르스타는 500 샤젠과 같다.[41] 칸크린은 20년 동안 재무 장관직을 역임했으며 니콜라이 1세 시기의 화폐 개혁을 주도하고 경제 성장에도 영향을 미친 경제 관료였다. 그러나 그는 지나치게 보수적이고 기술 개발에도 소극적이었으며 대기업의 발달도 노동자들의 빈곤을 초래할 것이라 판단하고 반대했다. 칸크린은 공장제 수공업 생산의 지지자로서 주식회사, 민간은행을 반대했으며 이것이 경제에서 국가의 지위를 훼손한다고 간주했다. 게다가 칸크린은 상공업이 발달하고 신기술 도입, 철도 건설이 이뤄지는 중에도 극도로 보수적인 경제 정책을 계속 고집했기 때문에 이런 그의 모습을 보다 못한 니콜라이 1세가 그를 해임했다. 칸크린은 재무 장관에서 해임되고 2년 후에 사망했다.[42] 중공업이 빠르게 성장하긴 했으나 경공업의 비중이 더 높았다.[43] 대기업 위주로 공업이 발달했기 때문에 고용자 수가 1천명이 넘는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 수의 비율은 국가 주도의 산업화와 산업집중화로 유명한 독일보다 3배 더 높았다.[44] 폴란드, 중앙 산업지대, 남부 산업지대, 상트페테르부르크, 모스크바, 키예프였다.[45] 돈바스 일대의 석탄 생산량은 전체 러시아의 석탄 생산에서 1위, 전체 석탄 채굴에서 70%를 차지할 정도로 성장하게 된다.[46] 지금의 도네츠크. 미국인 존 유즈가 여기에 공장을 세워서 그의 이름을 따 도시 이름을 유좁카라고 지었지만, 지금은 도네츠크로 바뀌었다.[47] 의류, 제화, 금속, 가죽, 목가공업에서 이런 하청제가 많이 퍼져 있었다.[48] 러시아의 노동 시간 단축은 산업화가 어느 정도 진전된 시기인 1880년대부터 매우 느리게 이루어졌다.[49] 주로 수공업 노동자들이 이렇게 살았고, 이렇게 생활하는 노동자들은 고용주의 감시와 감독을 많이 받았다.[50] 큰 방에 100여명의 노동자들이 제대로 된 침구도 없이 대충 누워서 자는 주거형태로서 매우 열악했다. 가족이 있으면 따로 방을 받을 수 있긴 했지만 그래도 열악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작업장에서 생활하는 노동자들만큼은 아니었지만 공장 기숙사에서 사는 노동자들도 자본가들의 감시를 받았고 외출을 비롯한 각종 권리를 제한당했다.[51] 같은 지역 출신인 노동자들이 단체로(대개 10여명) 아파트를 빌려서 함께 사는 주거 형태이다. 아무래도 사생활이 보장되기 힘들고 사람들이 많이 살다보니 편히 휴식을 취하기 힘들어서 노동자들은 여유가 생기면 아르텔을 떠나려고 했다.[52] 도시로 인구가 몰리다 보니 주거난이 생기고 임대료가 올랐던 탓에, 여유 있는 노동자들이 아니고서는 자기만의 주거 공간을 구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53] 반대로 도시의 중산층들은 식당에서 음식을 사먹는 것이 일상적이었다.[54] 하천 운송량도 59% 늘어났다. 그러나 하천 운송량은 대규모 철도망의 건설로 인해 급격하게 감소한다.[55] 상환금을 다 갚지 못해서 '임시 의무 농민' 상태에 있는 농민들도 많이 이용했다.[56] 이 시대를 다룬 레프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에서는 주인공 레빈이 농민들의 이런 낡은 모습에 분통을 터트리는 장면이 나온다.[57] 사실 주산업이 농업에서 공업 및 광업으로 바뀐 현재에도 비슷한데, 의외로 시베리아 대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평균소득이 유럽 러시아와 크게 차이도 안나고 삶의 질도 좋은 편이다. 이런 대도시들은 도시를 먹여살릴 큼직한 사업들이 적어도 한두개는 있기 때문. 그래서 다른 요인도 있겠지만 서부에 비해 시베리아 및 극동에서 범죄율이 적은 이유기도 하다. 물론 투바 공화국, 알타이 지방처럼 낙후된 지역은 주의해야한다.[58] 러시아의 전통 목조 주택인 '이즈바'는 난로가 있는데, 서민들이나 빈농들은 돈이 부족해서 난로의 연기가 빠져나갈 굴뚝을 설치하지 못했다. 그래서 집은 검게 그을리기 쉬웠는데, 이 시기가 되면서 다들 굴뚝을 설치했기 때문에 미관상으로나 위생상으로나 더 나아졌다.[59] 러시아의 전통 찻주전자로 단순히 차를 끓이는 기능 외에도 가습과 난방을 하는 기능도 있었기 때문에 쓸모가 많았다. 차 문화가 서민들에게까지 전파되자, 서민들은 무리를 해서라도 좋은 사모바르를 구매했고, 산업 혁명 이후에 공장에서 만든 저렴한 사모바르가 등장하자 사용이 더 확산되었다.[60] 상행위와 밀렵을 하려고 불법적으로 국경을 넘는 미국인들은 넘치는데, 수비군의 숫자는 턱없이 모자랐다.[61] 러시아 제국 입장에선 허탈하게도 미국에 팔자마자 알래스카에서 새로운 금광이 발견되었던데다가 나중에는 알래스카 지역에 골드 러시가 벌어질 정도로 금맥이 풍부했다.[62] 시모다 조약이 체결된 뒤로, 사할린의 일본 이주민 수가 크게 줄어들었다.[63] 이전부터 오세트인처럼 러시아에 합류한 민족들이 있긴 했다. 이 경우는 원래 샤밀 밑에 있었던 민족들이 샤밀의 실정에 반발하여 러시아 측에 합류한 사례이다.[64] 바랴틴스키 공작은 캅카스를 장악해야 남부 지역의 안보를 확보할 수 있으며 캅카스를 거점으로 하여 중앙아시아와 페르시아 지역으로 진출하자고 주장한 인물이었다.[65] 러시아가 이 지역을 장악한 이후로 차가 전래돼서 차를 재배하기 시작했다.[66] 지금도 체르케스인들의 다수가 미국과 터키를 비롯한 외국에서 살고 있다.[67] 이 지역에서 거주하는 우즈베크와 타지크인들은 주로 관개 농업에, 투르크멘, 키르기즈, 카자흐인들은 주로 목축과 유목에 종사했다.[68] 이 침공은 중앙 정부가 계획한 것이 아니라 체르냐예프가 독단적으로 벌인 것이었고 나중에서야 중앙 정부의 추인을 받았다.[69] 스코벨레프는 이후 서부 투르크멘의 러시아군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70] 니콜라이 1세가 임종을 맞이할 때는 그 어떤 오스트리아인도 그가 임종할때의 자리에 참석할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71] 이는 프로이센도 오스트리아, 러시아와 함께 폴란드를 갈라 먹고 있던 처지였기 때문이다.[72] 크림 전쟁, 러시아-튀르크 전쟁에서 활약했고 지방 총독직을 지내며 그 능력을 입증했다.[73] 톨스토이 백작은 대표적인 보수파 인사였고 황제 암살 시도 이후에 있었던 그의 교육 정책은 많은 사람들의 반감을 샀다. 그래서 그를 파면했을 때는 많은 인민들이 환호했다고 한다.[74] 젬스트보나 도시 두마가 선정한 전문가도 위원에 포함될 수 있었다.[75] 러시아 구력 기준, 그레고리력으로는 3월 13일.[76] 발음만 보면 '릐사코프'에 가깝지만 현행 러시아어 표기법에서는 'ㅢ' 발음을 허용하지 않는다.[77] 알렉산드르 3세의 작은아버지인 미하일 파블로비치 대공의 셋째 딸이었다.[78] 세계 역사를 통틀어 전제군주제에서 민간인이나 호위병 등을 위해 생명의 위험을 무릅쓴 군주는 눈씻고 찾아봐도 이름 하나 대기가 어렵다.[79] 니콜라이 1세는 아침 7시부터 업무를 시작해서 11시에 산책을 나가 점심을 간단히 먹은 뒤, 다시 황궁에 돌아와 20시까지 일했다. 그 뒤로는 극장을 관람하거나 공식 행사에 참여했고 가족과도 시간을 보냈다. 개인 시간을 보내고 난 뒤에는 자정에 집무실로 돌아와서 3시까지 일했다.[80] 이중 3명만이 성인으로 자라났다.[81] 황후의 자식들은 물론이고 귀족들마저 병이 들어 오늘내일하는 마리야 황후가 돌고루코바 때문에 알렉산드르 2세에게 외면받는다고 생각해 돌고루코바를 매우 싫어했다. 특히 러시아 궁정의 여성들이 돌고루코바를 가장 적대시했다고. 또한 만약 돌고루코바가 정식으로 알렉산드르 2세와 혼인해 황후가 되면, 정치적 권력에 다가가고 그녀의 자식들이 공식적으로 황위계승권을 받게 될 것도 우려했다고 한다.[82] 돌고루코바가 낳은 알렉산드르 2세의 자식들도 유리옙스카야 공자, 공녀 칭호를 받았다,[83] 알렉산드르 2세의 뒤를 이어 즉위한 알렉산드르 3세는 정기적으로 유리옙스카야 일가에 대한 보고를 받았다고 한다.[84] 이 꼴에 진력이 난 차남 알렉산드르 3세는 이후 자신의 아내인 마리아 표도로브나만을 사랑하며 그녀와 나름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