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흐메트 4세

 



[image]
'''이름'''
오스만어
'''محمد رابع '''
터키어
'''IV. Mehmet'''
'''이명'''
'''수렵제
(Avcı)'''
'''출생'''
1642년 1월 2일
오스만 제국 코스탄티니예
'''사망'''
1693년 1월 6일 (51세)
오스만 제국 에디르네
'''재위'''
오스만 제국파디샤
1648년 8월 8일 ~ 1687년 11월 8일
'''배우자'''
귈누슈 술탄 (출신: [image] 베네치아 공화국크레타 - [image] 그리스인)
'''자녀'''
무스타파 2세, 아흐메트 3세
'''아버지'''
이브라힘
'''어머니'''
투르한 하티제 술탄 (출신: [image] 우크라이나 / [image] 러시아)
1. 개요
2. 치세
2.1. 크레타 정복
2.2. 대합스부르크 전선
2.3. 포돌리아[1] 점령
2.3.1. 호틴 전투


1. 개요


이브라힘 1세의 아들로 아버지 이브라힘 1세가 예니체리한테 폐위되고 나서 살해되자 6세의 나이로 즉위했다. 재위기간을 보면 오스만 제국 역사상 쉴레이만 1세 다음으로 장기 재위한 황제이다. 다만 수렵제라는 별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사냥에만 빠져 지냈고 국정은 소홀히 하였다. 다행히도 당시 재상이 상당히 유능했던 쾨프륄뤼 가문의 일원인 메흐메트 파샤인지라 오스만 제국은 17세기 중후반에 중흥기를 맞아 영토를 최대로 늘린다. 하지만 과유불급이라는 말처럼 상승세를 몰아 쉴레이만 대제도 실패하였던 빈 공략에 나섰다가 실패, 이후 오스트리아 - 베네치아 - 폴란드 - 러시아에게 집단으로 협공을 당하여 대패하였다. (대 튀르크 전쟁)
그러자 메흐메트는 쾨프륄뤼 가문의 카라 무스타파 파샤를 처형하고 친정에 나섰지만 2차 모하치 전투에서 패배하자 그동안 갈등이 심했던 예니체리 사령관 예엔 오스만의 쿠데타가 일어나 이복동생인 쉴레이만 2세에게 양위하였고[2] 에디르네로 은퇴하였다. 이후 에디르네의 궁전에서 지내다가 51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그리고 쉴레이만 2세는 다시 쾨프륄뤼 가문 출신의 재상을 기용, 세르비아의 오스트리아 군과 동유럽의 러시아, 폴란드 군을 격퇴하며 일시적으로나마 반격에 성공하였다.
카자크 족 정벌에 나섰다가 패퇴한 뒤, 메흐메트 4세가 카자크에게 항복을 권고하는 편지를 보내자 카자크 측에서 엄청난 욕설이 담긴 편지를 보내서 반격했다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이야기 자체도 유명하지만, 이 이야기를 묘사한 러시아 화가 일리야 레핀의 그림도 유명하다. 자세한 이야기는 카자크 문서 참조.

2. 치세



2.1. 크레타 정복


5차 베네치아-튀르크 전쟁 (1645 ~ 1669년)
자세한 내용은 크레타 공방전 참고

2.2. 대합스부르크 전선


4차 오스만-합스부르크 전쟁 (1663 ~ 1664년)
3차 오스만-합스부르크 전쟁 이후 기고만장 해진 오스트리아의 콧대를 꺾은 전쟁.

2.3. 포돌리아[3] 점령


3차 오스만-폴란드 전쟁

2.3.1. 호틴 전투



2.4. 3차 러시아-튀르크 전쟁


드네프르 강을 국경으로 정함

2.5. 대 튀르크 전쟁


1683년 2차 빈 공방전
오스만 역사상 최악의 패배.


[1] 현 우크라이나[2] 말이 좋아서 양위였지 실제로는 폐위였다.[3] 현 우크라이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