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트페테르부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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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러시아 북서 연방관구에 속하는 연방시(Город федерального значения)이다. 모스크바에 이은 제2의 도시이며, 과거 러시아 제국의 수도로, 과거 열강에서도 손꼽혔던 제국의 유산이 산재해 있어 지금도 러시아를 대표하는 관광도시이기도 하다.[11] 그리고 모스크바와 세바스토폴과 더불어 러시아에 3곳뿐인 연방시 중 하나다. 인구는 2010년 인구주택총조사 기준 4,848,700명, 주변 도시를 포함하는 연방단위의 면적은 1,439㎢이다. 모스크바가 내륙도시이므로 러시아 최대의 항구도시이며, 유럽 대륙에서 이스탄불, 모스크바, 런던에 이어 4번째로 인구가 많은 도시이기도 하다.
레닌그라드 주에 둘러싸여 있다. 1924년부터 1991년까지 도시명이 블라디미르 레닌의 도시라는 의미인 '''레닌그라드'''였고 소련 시절을 기억하는 중장년층 이상의 한국인들에게는 이 이름으로도 상당히 유명했다. 또한 대전기 이전 독일 베를린의 모습과 가장 흡사하다고 한다.
2. 상세
러시아 서북부 발트 해의 오른쪽 끝부분인 핀란드 만으로 흘러들어가는 네바 강을 품고 있다. 러시아를 동유럽으로 흔히 보지만,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위치는 북유럽 핀란드, 에스토니아와의 지리적 거리가 매우 가까운 편이다.[12] 북극에 가까워 한여름엔 새벽에도 어두워지지 않는다. 특히 핀란드의 수도 헬싱키와 가까운 편인데 고속철 '알레그로'가 개통된 이후 상트페테르부르크와 헬싱키를 3시간 30분 ~ 4시간 사이에 오갈 수 있기 때문에 인적 교류가 크게 늘어났다. [13] 덕분에 한국에서도 기존의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한항공 직항노선 뿐 아니라 핀에어를 이용하여 헬싱키에 도착한 후 고속철을 타고 헬싱키와 탈린[14] ,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동시에 여행하는 관광객들이 늘어났다.[15] 모스크바로부터는 북서쪽으로 700 km 정도 떨어져 있다. 러시아 땅 크기를 생각하면 멀리 떨어지진 않은 편. 두 도시는 UTC+3이라는 같은 시간대에 속해서 서로 간에 시차도 없다. 원래 상트페트르부르크는 UTC+3보다는 UTC+2가 더 자연 시간에 가깝지만 모스크바와의 원활한 교류를 위해 모스크바와 같은 시간을 쓴다.
3. 역사
표트르 대제가 건설한 신도시에서 사실상 시작했고 그 전에는 사람이 별로 살지 않는 네바 강 하류 삼각주의 늪지대였다. 페테르부르크 건설 이전 네바 강 삼각주의 살던 원주민은 노브고로드 공국에 조공을 바치던 이조라인[16] 이었다고 한다. 상트페테르부르크를 포함한 네바 강 삼각주 일대는 중세에 잉그리아(Ingria) 혹은 인게르만란디야(Ингерманландия)로 불리던 지역이었다. 리보니아 기사단, 덴마크, 스웨덴 등 발트 해의 패권을 노리던 서유럽 국가들이 잉그리아를 노렸으나, 당시 이 지역에서 종주권을 행사하던 노브고로드 공화국은 수세기에 걸친 이들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방어해냈다.
15세기 말 러시아의 패자로 등극한 모스크바 대공국이 노브고로드 공화국을 정복하면서 잉그리아 일대는 모스크바 대공국의 영토가 되었다. 모스크바 대공국의 후신 루스 차르국은 16세기 후반 리보니아 일대의 패권을 두고 폴란드-리투아니아, 스웨덴 등이 엮인 리보니아 전쟁에서 쓴 맛을 보면서 잉그리아를 잠시 스웨덴에게 양도해야 했다. 하지만 스웨덴도 1595년 튜지나 조약으로 잉그리아를 루스 차르국에 반환해야 했다.
하지만 스웨덴은 잉그리아를 계속해서 노렸고 17세기 초 혼란 시대로 인해 루스 차르국이 만신창이가 되자 기회를 살린 스웨덴은 1617년 스톨보바 조약으로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이 지역을 루터교화시키려던 스웨덴은 개종 시 세금 감면 및 병역 면제 등을 제시하고 자국 영토 내 루터교를 믿는 에스토니아인과 핀인들을 잉그리아로 이주시켰다. 그 결과 대북방전쟁 직전인 1695년에 이르면 잉그리아의 루터교 신자는 잉그리아 인구의 74%를 차지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잉그리아는 한대 기후와 늪지대 투성이인 척박한 땅이었기에 이 지역의 인구는 겨우 2만 명에 지나지 않았다.
한편 발트 해로 통하는 유일한 출구인 잉그리아를 상실한 루스 차르국은 이후 잉그리아의 탈환을 목표로 하였다. 마침내 대북방전쟁 때 잉그리아 지방을 점령한 차르 표트르 1세가 서구화정책의 일환으로 서유럽과 통하는 창구인 잉그리아 지방으로의 천도를 결정, 네바 강 기슭의 스웨덴 요새인 뉘엔스칸스(Nyenskans) 요새 주변의 삼각주 늪지대를 매립해 1703년 5월 27일 도시의 건설이 시작되었다. 사실 매립이라고 말은 간단한데, 근대적 토목기술이 없던 당시에 삼각주나 늪지대 위에 도시를 세우려는 것은 미친 짓이나 다름없었고, 실제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저 매립 작업에 희생됐다고 한다. 일명 '뼈 위에 세워진 도시'. 표트르 1세는 도시의 건설에 수십만 명의 농노[17] 들과 코사크[18] 및 수만 명의 현지 원주민과 전쟁 포로들을 동원했다.
9년 간의 작업 끝에 도시의 건설이 어느 정도 완료된 1712년 표트르 1세는 정식으로 이 도시로 천도한 뒤 '성 베드로의 도시'라는 의미의 상트페테르부르크라 이름지었다. 베드로=피터(영어)=페터(독일어)=표트르(러시아어)인 걸 생각해 보면, 사실상 이 새로운 수도에 자기 이름을 갖다붙인 셈이다.[19] 이후 러시아 제국의 차르들은 새로운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계속해서 발전시켜나갔다. 특히 귀족 문화 옹호자였던 예카테리나 2세 시대에는 러시아 제국 각지에서 모인 귀족들과 장사하러 온 독일인, 귀족들의 프랑스어 교사로 온 프랑스인, 스웨덴 점령 시절 정착한 잉그리아 핀인 등이 모이며 국제 도시로 변모하였다.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독일에 대한 반감으로 독일어식 명칭[20] 인 상트페테르부르크는 페트로그라드[21] 로 개칭되었다. 러시아 제국의 수도인 만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선 격동의 사건 또한 여러 차례 일어났다. 1830년 데카브리스트의 난, 러시아 혁명의 시발점이 된 1905년 피의 일요일 사건, 군주제를 무너트리고 인류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의 건설을 알린 러시아 혁명의 2월 혁명과 10월 혁명이 시작된 곳 또한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였다. 하지만 러시아 내전 당시 발트 해의 제해권을 장악한 외국 함대의 수도 공략을 우려한 소비에트 당국이 1918년 수도를 모스크바로 옮기면서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수도의 지위를 상실하였다.
1924년 소련의 국부 블라디미르 레닌이 사망하자 페트로그라드는 그의 이름을 따 '레닌의 도시'라는 뜻의 레닌그라드로 개칭되었다.[22] 수도의 지위를 잃었지만 레닌그라드는 제2의 도시로서 소련 제2의 도시로 기능하였다. 독소전쟁 당시에는 독일군 북부집단군의 주요목표[23] 로 독일군은 북쪽에서 내려오는 핀란드군과 협공하여 레닌그라드를 900일 가까이 포위하였다. 나치 독일은 레닌그라드를 점령하면 도시의 이름을 '아돌프의 도시'라는 뜻의 '아돌프스부르크(Adolfsburg)'로 바꿀 계획이었으나 레닌그라드는 수백만 명의 희생으로 끝내 그 이름을 지켜냈다.
독소전쟁 당시의 영웅적인 사투를 인정받아 레닌그라드는 1945년 종전 직후 영웅 도시로 지정된 최초 4개의 도시[24] 중 하나가 되었다. 소련에서는 이 도시를 기려 레닌그라드 수방메달[25] 과 레닌그라드 250주년기념메달을 만들었다. 하지만 이를 위해 레닌그라드가 치른 희생은 너무나 커서 수만 동에 달하는 유서깊은 건물들이 잿더미가 되었고 3백만 명에 달하던 도시 인구는 60만 명으로 줄어들었다. 하지만 레닌그라드는 전쟁 피해를 복구하는데 성공하였으며 전쟁을 피해 도시를 떠났던 주민들이 돌아오고 이후 소련 인구가 크게 늘고 도시로 인구가 유입되면서 소련 해체 직전에는 인구가 500만 명에 달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1991년 소련이 해체되고 러시아 연방이 수립되면서 원래 이름인 '상트페테르부르크'라는 이름을 되찾았다[26]
다만 소련의 이미지가 강하게 박혀 있는 중년 세대에게는 아직도 레닌그라드라는 이름이 더 익숙한 듯하다. 박노자의 고향도 이곳인데, 그도 이곳을 레닌그라드라는 이름이 더 익숙한지 아니면 의식적으로인지 그렇게 부른다. 사실 세대를 막론하고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레닌그라드가 별개의 도시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한편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20세기 초에 태어나 소련 해체 시점까지 살았던 노인들은 ''나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태어나 청소년기를 페트로그라드에서 보내고 죽을 때까지 레닌그라드에서 살 줄 알았는데, 다시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임종하게 되었다"라는 농담을 즐겼다. 1914년 6월 이전에 태어나 1991년 12월 이후에 임종했다면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나 페트로그라드와 레닌그라드를 거쳐 다시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임종하게 된 것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두 차례의 격변기를 거치며 인구가 급감한 바 있고, 러시아의 평균 수명 상승이 오랜 기간 지체되었기 때문에 저 테크를 실제로 이룬 사람은 많지 않다. 레닌그라드라는 이름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둘러싸고 있는 행정구역인 레닌그라드 주에 아직 남아 있다.[27] 모스크바에도 이곳으로 오는 열차가 발착하는 역의 이름은 여전히 상트페테르부르크가 아닌 레닌그라드 역이다. 풀코보 국제공항의 IATA 코드도 ULLI로, 레닌그라드 시절의 것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풀코보 공항을 비롯한 많은 곳에서 레닌그라드 시절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4. 지리
주변 도시를 제외한 상트페테르부르크 자체만의 면적은 605.8 km2. 지형적으로는 핀란드 만에 접한 해안선을 따라 펼쳐진 저지대에 위치해 있다. 모스크바에 비하면 약 4도 정도 북쪽에 위치해 있다. 위도가 북위 59°57로 북유럽권의 노르웨이 오슬로나 스웨덴 스톡홀름과 비슷한, 절대적으로 봐도 북쪽에 있는 도시다. 위도가 높다보니 낮의 길이가 계절에 따라 크게 차이가 난다. 비록 북극권처럼 낮만 있거나 밤만 있을 정도는 아니지만, 낮 길이가 짧으면 5시간 53분, 길면 18시간 50분일 정도로 계절별로 낮의 길이가 많이 차이난다. 삼각주 위에 지어진 도시답게 도시 일부는 해발 4미터 밖에 안 될 정도로 도시가 낮은 곳에 위치해서 홍수가 잦았다. 특히 1824년의 홍수는 해발 4미터가 넘게 차오르는 큰 규모의 홍수로서 이로 인해 300개 이상의 건물이 파괴되었다.
운하가 많다.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삼각주 위에 세워진 곳이기 때문에 도시를 계획할 때부터 자연적 지리 여건을 그대로 활용하여 지류들을 그대로 도심 운하로 활용하였고 지금도 남아 있다. 그래서 붙여진 별명이 '북유럽의 베네치아'. 덕분에 운하와 바다를 통한 유람선 관광이 크게 발전해 있다. 여름궁전이 있는 페테르고프와도 수상버스로 연결되며 네바 강 강투어도 있다.
산하 행정구역은 중구 격인 첸트랄니를 필두로 아드미랄테이스키, 바실레오스트롭스키, 비보르그스키, 칼리닌스키, 키로프스키, 콜핀스키, 크라스노그바르데이스키, 크라스노셀스키, 크론시타츠키, 쿠로르트니, 모스콥스키, 네프스키, 페트로그라츠키, 페트로드보르초비, 프리모르스키, 푸시킨스키, 프룬젠스키 등 18개 구가 있다.
5. 기후
쾨펜의 기후 구분[28] 상으로는 습윤 대륙성 기후(Dfb)에 속한다. 온난하고 습도가 높은 여름과 길고 추운 겨울이 특징이다. 7월의 평균 기온은 18.8 °C, 2월의 평균 기온은 −5.8 °C. 연 평균 기온은 5.7℃로 라선특별시와 비슷하다. 그래도 북위 60º에 가까운 위도를 감안하면 상당히 높은 편인데, 같은 위도의 시베리아와 비교하면 넘사벽으로 기온이 높고, 위도가 훨씬 낮은 극동의 블라디보스토크보다도 겨울철에 훨씬 따뜻한 편[29] 이며, 위도가 약간 낮은 모스크바와 비교해도 겨울철 평균기온이 높다. 다만 같은 위도의 스칸디나비아나 핀란드보다는 추운 편이다. 러시아에서는 온화한 편이라지만, 북쪽 도시다 보니 최저 기온의 기록은 −35.9 °C(1883년)에 이르고, 도시에 흐르는 네바강도 겨울에 대부분 얼어붙을 정도다. 그리고 도시 외곽은 더 춥다. 다만 겨울철에 이상고온 현상이 나타나면 영상권의 포근한 날씨가 이어지기도 하며, 실제로 2011년 12월의 이상고온때는 대한민국의 서울보다도 평균기온이 높았다. 여름철은 대체로 지내기 좋은 쾌적한 기온 분포를 보이지만, 가끔 폭염 현상이 나타나기도 하며, 러시아를 강타한 2010년 대폭염때는 37도까지 기온이 오르기도 했다.
6. 인구
20세기 초/중반에는 인구수의 급격한 변화가 여러 번 있었다. 러시아 제국 말기에는 수도이자 명실상부한 제1의 도시였다.[30] 1916년에 240만이었던 인구가 러시아 혁명과 적백내전을 거치면서 불과 4년 후인 1920년에는 74만명 미만으로 떨어졌다. 이후 인구가 늘어 1941년~1943년 300만명에 이르렀으나 독소전쟁으로 인한 차출/인명피해가 있었고, 그리고 특히 레닌그라드 공방전에서 많은 수가 굶어죽거나 피난을 갔기 때문에 인구는 60만 명 이하로 다시 격감했다. 종전 후 다른 지역으로부터의 이주자로 인해 인구가 늘어났고 1950년대 말에는 전쟁 전 인구를 회복했다. 소련 붕괴 직전인 1989년에는 500만 명을 넘기도 했다. 그러다 1990년대 소련 붕괴 직후 러시아의 인구가 줄어들면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인구도 같이 줄어들었다.....가 2008년 457만 명으로 저점을 찍고 2013년 500만 명을 회복하고 매년 증가하고 있다. 2019년 현재는 538만 명이 거주한다.
도심지 주민 대부분은 아파트에 거주한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아파트 거주는 역사가 좀 길다. 20세초부터 1990년대에 이르기까지, 소련 정부는 주택 건설을 국유화했고 주민들이 공동거주 아파트에서 살도록 강제했었다. 1930년대에는 68%의 주민들이 그런 아파트에서 거주했다. 레닌그라드 당시에는 소련에서 공동아파트가 가장 많은 도시였다. 1950년대 들어서 공동아파트의 숫자가 크게 줄고 흐루숍카가 대거 건설되면서 주거 방식에 변화가 생겼지만 아파트라는 건 마찬가지이며, 현재에도 저소득층은 공동아파트에서 사는 경우가 꽤 있다.
제2의 도시치고는 초고층 건물이 없어서 전체적으로 나지막한 도시 경관을 보이는데, 도심지의 높은 빌딩을 규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와 함께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도심지의 역사적 건축물들은 주로 18세기, 19세기 건축물로 이루어져 있으며, 현대적 건축물이 가득한 모스크바와는 달리 근대 건축물들이 잘 보존되어 있다. 상트페테르부르크가 수도에서 밀려난 것이 역사적인 건축물의 보존에는 상당히 많은 보탬이 되었는데, 공산정권의 업적을 과시하기 위한 현대 건축물들은 주로 수도인 모스크바에 건설되곤 했기 때문이다.[31][32] 이렇듯 보존된 건축물 덕에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36개의 역사적인 건축물과 4000여개의 역사적 문화적 기념물의 가치를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즈프롬이 상트페테르부르크에 400m가 넘는 마천루(일명 라흐타 센터) 건설을 추진 중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시 당국과 시민들은 격렬하게 반대했고 크렘린도 반대 의견을 내비쳤으며, 유네스코는 "초고층 빌딩 건립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취소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결국 가즈프롬은 건설 장소를 원래 예정했던 상트페테르부르크 중심부에서 시 외곽으로 위치를 변경할 수 밖에 없었다.
이 지역을 연고로 하는 프로축구단으로 FC 제니트 상트페테르부르크가 있고,[33] 아이스하키 구단으로 SKA 상트페테르부르크가 있다. 축구, 아이스하키 모두 리그에선 강팀으로 인식되는 팀들이다.
7. 교통
7.1. 철도
러시아 북부의 여러 노선들이 모이는 러시아 철도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참고로 상트페테르부르크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역이 없고 대신 목적지 방향 이름을 딴 역들이 있다[34] 정작 이 도시의 (옛) 이름을 딴 레닌그라드 역은 모스크바에 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주요 철도역은 다음과 같다.
- 모스콥스키 역: 모스크바 방면 열차가 발착한다. 구 서울역이 구 루체른역을 본따 만들었듯 북한 평양역이 이 역을 본따 만들었다.
- 핀란드 역: 핀란드 헬싱키 방면 열차가 발착한다.
- 발트 역: 발트3국 방면 열차가 주로 발착한다.
- 비쳅스크 역: 벨라루스 방면 열차가 주로 발착한다.
- 라도시스키 역: 카렐리야 공화국 무르만스크 방면 열차가 발착한다.
7.2. 시내 교통
상트페테르부르크 지하철이 있다. 다만 웬만한 곳에서는 조금만 걸으면 지하철역이 있는 모스크바 지하철과는 달리 역간 간격도 넓을 뿐더러 도시 전체를 커버하기에는 선로가 무리가 있다.[35] 지하철이 뚫리지 않은 곳에서도 무궤도전차와 일반버스를 통해 관광지로 접근할 수 있으니 배낭여행객들이 있다면 참고하도록 하자. 버스의 경우 얀덱스 지도가 구글 지도보다 정확한 편이다. 길찾기기능 뿐만 아니라 한국의 지도 서비스처럼 도착시간 및 배차간격도 제공해주므로 여행 시 버스를 이용할 일이 있으면 얀덱스 지도를 통해 확인하는 것을 추천한다.
트램도 있으나 중심가로 들어가는 노선이 제한적이고 교통정체에 발이 묶이는 경우가 잦으니 별로 추천하지 않는다. "마르시루트카(Маршрутка)"라고 불리는 소형 버스도 있는데 이는 일반 관광객이라면 이용할 일이 거의 없다.(여름궁전이 위치한 페테르고프로 가기 위해서 탈 수도 있다.)
7.3. 기타
풀코보 국제공항이 있으며, 여기서 세계 각지를 연결한다. 대한항공은 이 공항에 계절편으로 취항한다.
도로 교통의 경우 일반도로로 약 6~7시간이면 헬싱키까지 간다. 헬싱키에서는 일반도로, 고속화도로 같은 길을 따라 가면 핀란드에 직접 닿을 수 있어, 헬싱키에서는 항공 교통 이용 시 비싸진 운임(100유로 이상 정도)이 예상되면, 자가용으로 핀란드까지 바로 갈 수 있는 조건도 역시 있다.
8. 치안
러시아가 혼란스러웠던 2000년대 초중반에는 치안 상황이 심각했었는데, 요즘은 상당히 많이 나아졌다. 시의 범죄율은 러시아의 전반적인 치안상황과 연관이 깊다. 1980년대 말~1990년대 초에 범죄율이 치솟았는데, 이는 페레스트로이카라는 변혁을 겪으면서 러시아 전반에 사회적 혼란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상트페테르부르크에는 행정력이 무력해진 틈을 타서 레드 마피아들이 판치고 다녔다. 1990년대 후반에만 해도 부시장인 미하일 마네비치, 국회부의장 갈리나 스타로보이토바 등이 살해당하는 등 우리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치안상황이었다. 그러다 보니 러시아 내에서도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범죄의 도시로 인식이 되어 버렸다. 최근에는 구 CIS 공화국 출신 외국인들이 불법적으로 체류하면서 범죄를 저질러서 외국인에 의한 범죄가 늘어나는 중이며, 인종차별에 의한 범죄까지 증가 추세였다.
최근 치안 관리와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국가의 테러 위협을 이유로 시내 주변에 2인 1조로 순찰하는 경찰들을 흔히 볼 수 있다. 다만 관광객들을 상대로 하는 소매치기 같은 경범죄는 상당히 빈번하게 일어난다. 그 예로는 관광객에게 짧은 영어 및 중국어를 구사하며 길들인 비둘기를 쥐어주며 핸드폰을 달라하여 사진을 찍어준뒤, 말도 안되는 가격을 요구하는 사례가 있다. [36] 건장한 청년 여럿이서 같이 있는 경우도 있기에 걸렸다면 최대한 똥 밟았다 생각하며 맞춰주거나, 아예 무시하자. 애초에 러시아인들은 처음보는 사람에게 말을 잘 안걸고 마음열고 친해지는 것도 오래걸리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한국인들에게 말을 거는건 대부분 뭔가 불순한 의도가 있는 것이다. 드물게 한국에 관심이 많아 직접 한국인에게 말거는 경우도 있다(...)
2017년에 센나야 광장 근처 지하철 역에서 알 카에다에 가담한 키르기스스탄 남성에 의한 폭탄 테러가 발생했다. 2017년 12월 27일에 다에쉬에 의한 수퍼마켓 테러가 발생하면서 14명이 부상당했다.#
9. 관광 명소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러시아 제국 시대의 옛 수도로 현대적인 느낌이 강한 모스크바와는 분위기가 매우 다르다. 런던, 파리와 어깨를 나란히 할 근대 열강의 고도인만큼, 모스크바보다 볼거리가 많고 관광업이 훨씬 발달하여 러시아인들도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문화수도'로 여긴다고 한다. 북유럽의 베네치아라는 이명이 있을만큼 수많은 운하로 이어져있으며 19세기 제정 시대의 분위기가 잘 보존되어 있다.
- 에르미타주 박물관 (겨울궁전)
- 러시아 박물관
- 카잔 대성당
- 성 이사악 대성당
- 피의 성당
- 유수포프 궁전
- 파베르제 박물관
- 쿤스트카메라
- 멘시코프 궁전
- 미하일롭스키 성
-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
- 상트페테르부르크 모스크
- 넵스키 대로
- 네바 강
- 마린스키 극장
- 여름궁전[37]
- 예카테리나 궁전[38]
- 크론시타트[39]
10. 기타
긴 이름 때문에 흔히 현지인들 사이에선 '페테르부르크', 혹은 더 줄여서 '피테르(Питер)', 또는 머릿글자만 따서 '에스페베(СПБ)'라고 줄여 부르기도 한다.
모스크바와 더불어서 러시아의 양대 제조업 중심지이자 경제 중심지이며, 다수의 문화, 예술관련 기관과 시설이 들어서 있어서 학술적, 문화적으로는 러시아의 No. 1도시이다. 오죽했으면 19세기 러시아에선 '러시아의 심장은 모스크바이며 러시아의 머리는 상트페테르부르크, 러시아의 지갑은 니즈니 노브고로드[40] 이다.' 라는 말도 있었을 정도이니...
그리고 부시장을 지냈던 블라디미르 푸틴을 비롯해서 현재 러시아 정계를 주도하는 이들 상당수가 이쪽 출신이다. 이들을 '피제르츠'라고 부른다. 푸틴이 나온 직장인 구 KGB와 현 FSB 출신도 정권의 실세인데 이들은 '실로비키'라고 부른다.
1989년 잉베이 맘스틴이 라이브 공연을 했다. 당시에 공연 실황을 담은 라이브 앨범도 있다.[41]
1997년 대한민국 대구광역시, 2008년 대한민국 부산광역시와 자매결연을 맺었다. 그리고 제주도측(!)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와 자매결연을 추진할 움직임도 보이고 있다. 링크[42]
발트해에 접한 러시아 최대의 항구도시지만 대양으로 나가기는 쉽지 않다. 발트해에서 또 북해나 대서양으로 나가려면 덴마크와 스웨덴 사이의 좁은 해협을 또 통과해야 하기 때문이다.[43][44] 또 안보에서도 러시아에 많이 불편한 동네다. 이 지역은 러시아 제2의 중심지로 상당히 중요한 지역이었고 소련 시절에는 최전방인 동독과는 수백km가 떨어져 있던 안전한 지역이었다. 그런데 소련이 망하고 200km도 떨어지지 않은 발트 3국이 NATO에 가입하며 갑자기 최전선이 되어 러시아 입장에서는 상당히 골칫거리다.
관광 수요가 많은 만큼 대한항공이 인천국제공항과 상트페테르부르크 풀코보 국제공항을 오가는 하절기 한정 노선을 운항한다.
세계 최초이자 가장 큰 종자은행들 중 하나인 파블롭스크 실험국이 위치한 도시이기도 하다.
크레스토프스키 스타디움은 유로 2020의 개최지중 하나이다. 여기에 오게 될 팀은 일정이 지옥이겠지만, 위안 여기보다 더 한곳도 있으니 위안 삼을 수 있을지도? 두 군데 다 연속으로 간다면 거리상으론 괜찮으므로 상관 없다.
이 도시의 예전 이름인 레닌그라드는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7번의 별칭이다. 작곡가가 직접 붙인 이름이 아닌 별칭이지만 흔히 이 이름으로 불린다.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레닌그라드(Ленинград)'라는 락밴드가 있다. 리더는 세르게이 시누로프(Сергей Шнуров)이며, '우린 보드카하고 여자 노래밖에 안 한다'고 리더라는 작자가 공공연히 발언할 정도로 가사가 좋게 말해서 향토적이고 사실대로 말해서 저속한 편인데, 이 때문에 많은 라디오 방송국의 블랙리스트에 올라와 있다는 소문이 돌며, 전직 모스크바의 시장에게 직설적인 비난을 들은 적도 있는 반면, 그런 솔직한 가사 덕분에 상당히 인기가 있는 밴드이다. GTA 4의 블라디보스토크 채널에서 들을 수 있는 '아무도 타인을 동정하지 않을 것이다(Никого не Жалко)'가 이들의 노래이다. 1990년대 후반 창설되었고, 2019년 리더가 인스타그램으로 2019년 고별 콘서트를 마지막으로 밴드를 해체할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그 이름답게 도시에 대한 애정도 각별한데, 2016년 공개한 싱글 "피테르에선 마셔야지 (В Питере -- пить)"는 약은 다른 데 가서 빨더라도 상트페테르부르크야말로 술 퍼마시기 가장 좋은 곳이니 놀러 오라는 내용의 가사이다.
정말로 가사 꼴이 이렇다. 지역을 관리하는 입장에서는 확실히 뒷목을 잡을 만 하지만,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당시 관광개발위원회장 빅토르 코노노프는 "레닌그라드의 노래를 어떻게 평가하든, 가사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아도, 일단 들어보면 이곳의 뭐가 그렇게 잘났는지 보고 싶어지게 될 것이다" 라며 오히려 이 곡을 칭찬했다.얼마나 큰지 보면 정신이 나갈걸
첼랴빈스크에선 그냥 쩔어 살게 될 거야
하지만 피테르에선 마셔야지
피테르에선 마셔야지
피테르에선 리터 단위로 마셔야지
(중략)
이렇게 개판 5분 전이지만
난 그래도 우리 나라가 진심으로 좋아
진짜로 이 노래는 관광에 대한 거니까
이 예술작품은 너희 관광객들에게 선사하는 거야
이들의 또다른 대표곡 중 하나인 '혈액형(Группа Крови)'. 키노의 동명의 곡과 연관이 있다.
11. 출신 인물
-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 블라디미르 푸틴
-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 마이크 나우멘코
- 박노자
- 보리스 그레벤시코프[45]
- 레오니트 표도로프[46]
- 빅터 콜
- 빅토르 초이[47]
- 아인 랜드
- 안드레이 마카레비치
- 안톤 옐친
- 알렉산드르 쿠티코프
- 알렉산드르 보로딘
- 엘리자베타 보야르스카야
-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 안젤리나 다닐로바
- 스뚜르가츠끼 형제[48]
- 그리고리 페렐만
- 헬가 러브케이티
12. 대중매체에서
애니메이션 사이키 쿠스오의 재난 4화의 배경으로 나온다. 사이키 쿠스오가 순간적인 상황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해 이 곳으로 도피하지만 카잔 대성당 앞에서 깨달음을 얻고 일본으로 돌아간다.
월드 오브 워쉽에서 무료배포한 항구 중 하나로 등장한다.
상트페테르부르크(보드 게임)은 문자 그대로 표트르 대제가 이 도시를 건설하는 것을 소재로 한 경제/경영 보드게임이다. 석기시대의 제작자로 알려진 베른트 브룬호퍼의 2004년작이며 독일 게임상(Deutscher Spielpreis)를 수상했을 정도로 게임성에서 우수한 평가를 받았다.
Day R Survival에서 초반부에 도달할 수 있는 도시로, 현실과 같이 모스크바 다음가는 대규모 도시이다. 그만큼 파밍할 물자도 매우 풍족하여 초반 유저들의 주요 거점이지만 방사능 수치가 매우 높은 편이고 삵, 늑대 등 야생동물들이 수시로 팔다리를 분질러놓는 곳이라 장비가 변변찮은 초반 유저들의 생존 난이도가 확 올라가는 곳이기도 하다. 한편 이 게임의 배경이 1990년이지만 실상 1984년에 시간이 멈춰있는지라 옛 지명인 레닌그라드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미국의 팝피아니스트 겸 가수 빌리 조엘의 1989년 앨범 'Storm Front'의 수록곡 "Leningrad"의 제목을 이 도시의 옛날 이름에서 따오기도 했다. 이 곡은 빌리 조엘이 1987년 당시 개방화가 진행 중이었던 소련에서 공연을 하며 느꼈던 감정 및 냉전 체제에 대한 비판적인 목소리를 주제로 한 곡이다.
유로 트럭 시뮬레이터 2 Beyond the Baltic Sea DLC에서 등장한다.
브레이브 위치스의 주요 배경이 되었다. 정확히는 오라샤의 페테르부르크(Petersburg, Orussia). 기지의 형상은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를 모티브로 삼고 있다.
대항해시대 온라인에서는 러시아의 본거지로 등장하는데 유저들이 망명 할 수는 없고 NPC들의 국가로만 등장한다. 모험가들 사이에서는 애증의 항구인데 대부분 퀘스트들의 목적지가 멀고먼 동아시아나 지중해쪽이라서 퀘스트를 하자니 멀고 그렇다고 안하자니 발견물을 채울 수 없기 때문에 울며 겨자 먹기로 어쩔 수 없이 하게 된다.
러시아 영화 브라뜨에서는 주요무대로 등장한다. 90년대 소련해체로 혼란했던 러시아인들의 생활상이 잘 묘사되어 있다.
13. 관련 문서
- 러시아
- 도시
- 레닌그라드 250주년기념메달
- 레닌그라드 공방전
- 상트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성 이사악 대성당
- 에르미타주 박물관(겨울 궁전)
- FC 제니트 상트페테르부르크
- 카잔 대성당
- 타마라 삼소노바
- 크레스토프스키 스타디움
[1] 인간의 창의성으로 빚어진 걸작을 대표할 것[2]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3]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4] 사건이나 실존하는 전통, 사상이나 신조, 보편적 중요성이 탁월한 예술 및 문학작품과 직접 또는 가시적으로 연관될 것[5] 두마 타워 바로 뒤의 돔은 카잔 대성당, 멀리 보이는 돔은 성 이사악 대성당이다. 사진에서는 러시아의 국영은행인 스베르반크(Сбербанк России, 실제 발음은 자음 동화로 인해 즈비르반크[zbʲɪrˈbank\])가 보인다.[6] 왼쪽 중간쯤 보이는 돔은 카잔 대성당, 멀리 보이는 파란색 돔은 삼위일체 대성당이다.[7] 앞쪽의 황금색 첨탑은 러시아 제국 해군성 청사. 뒤쪽의 황금색 첨탑은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의 페트로파블롭스크 성당. 맨 뒤에 보이는 커다란 철탑은 상트페테르부르크 TV 타워이다.[8] 박물관 건물로 쓰이고 있는 겨울 궁전(왼쪽의 초록색 건물) 바로 앞의 궁전 광장과 알렉산드르 원주(광장에 서있는 기둥)를 사이에 두고 구(舊) 총참모부 청사가 마주하고 있다.[9] 강세에 따른 발음은 산크트피치르부르크[ˌsankt pʲɪtʲɪrˈburk\]에 가깝다. 즉, 연구개 비음이 존재하지 않는다. 문화어 표기도 이와 유사한 '싼크뜨-뻬쩨르부르그'이다. 약칭은 피테르(Пи́тер)와 에스페베(СПб)이다.[10] 탬파베이 레이스의 홈구장 트로피카나 필드가 있는 플로리다주의 도시 세인트피터즈버그와 똑같은 이름인데 이쪽은 St. Petersburg로 표기하여 상트페테르부르크와 구분된다. 이 도시의 이름의 유래도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이다. 하지만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가 워낙 유명하다보니, 플로리다가 아닌 곳에서는 플로리다를 뒤에 붙이지 않고 세인트 피터즈버그라고 하면 보통은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뜻한다.[11] 관광산업도 페테르부르크가 모스크바보다 더 발달해 있어서, 오랫동안 모스크바 지하철은 러시아어 안내만 있었지만 상트페테르부르크 지하철은 영어 안내도 예전부터 있었다. 그러다 2017년 기준으로 2018 러시아 월드컵 개최 준비를 계기로 모스크바에도 영어 안내를 만들었다. 다만 무조건 영국식 영어이다.[12] 시내 중심에서 두 나라 국경까지의 거리는 150km 정도인데, 외곽 지대의 경우 국경과 100km도 떨어져 있지 않은 곳도 있다.[13] 상트페테르부르크 사람들의 십중팔구는 다 한번씩은 핀란드에 다녀왔다고 말하는 정도다. 반대로 헬싱키 사람들 중에서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다녀온 사람의 비율이 증가하고 있다.[14] 헬싱키와 탈린의 거리도 매우 가까운 편이다. 배타고 두 시간 거리.[15] 다만 인천 - 헬싱키 노선 개통 이후 인천 - 상트페테르부르크 노선이 승객 감소로 피를 보고 있는 중. 인천 - 헬싱키에 비해 상당히 비싸기 때문.[16] 핀란드인, 카렐인과 친척이다.[17] 1년에 4만여 명씩 데려다가 요역을 시켰는데, 공사 장비를 직접 챙겨서 군인들의 감시를 받으며 도보로 이동해야 했다.[18] 페테르부르크 건설에 동원되었던 코사크 중 무려 3분의 1에서 3분의 2 가까이가 질병과 러시아 간부들의 가혹행위로 사망했다. 이전까지 코사크들은 러시아 제국을 폴란드-리투아니아로부터 정교회 신앙을 보호해주는 해방자로 보았으나 이 일을 기점으로 러시아 제국을 폴란드와 별 다를 바 없는 또 다른 압제자로 보게 되었다.[19] 서구문명에서는 흔한 사례인데, 고대 이집트의 람세스 2세가 건설한 피람세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알렉산드리아, 프랑수아 1세가 재설계한 프랑스 최대의 항구도시 가운데 하나인 프란시스코폴리스, 스탈린의 이름을 가져다붙인 스탈린그라드 등등. 다만 이들 도시 중에서 그 이름이 후대까지 유지된 경우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알렉산드리아 등 그렇게 많지는 않다.[20] ~burg(부르크)로 끝나는 지명은 독일어권 지역에서 많이 붙이는 이름 중 하나이다. 이름 뿐 아니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는 독일을 비롯한 서유럽식 건물이 많다.[21] 페테르부르크와 이름의 뜻은 같다. 성 베드로의 도시.[22] 레닌의 후계자인 스탈린의 이름을 본딴 스탈린그라드도 있었으나 1953년 스탈린이 죽고 그의 지위까지 격하되면서 일찍이 소련 시절인 1961년 지금의 볼고그라드로 지명이 바뀌었다.[23] 개전 직전 바르바로사 작전의 작전 계획을 짜던 중 2개의 주요목표 중 하나로 키예프를 우선시 할 것인지 모스크바를 우선시 할 것인지에 대해 독일군 사령부는 갈등이 심했으나 레닌그라드 만큼은 모든 참모진이 동일했다.[24] 나머지 3개는 스탈린그라드, 세바스토폴, 오데사.[25] 2차 대전 당시 레닌그라드 공방전을 기념하는 차원에서 만든 메달.[26] 이때, 이름을 아예 러시아식 이름으로 바꾸자는 주장도 있었다고 한다. '성 베드로의 도시'라는 원래 뜻을 살려 '스뱌토페트로그라드'로 바꾸자는 의견과 도시를 가로지르는 네바 강에서 이름을 따 '네보그라드'로 바꾸자는 의견이 꽤나 힘을 얻었던 모양. 하지만 결국 옛 명칭인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결정되었다.[27] 비슷한 사례로 우랄 산맥의 도시 스베르들롭스크도 소련 붕괴 후 원래 이름인 '예카테린부르크'로 돌아갔지만, 예카테린부르크가 속한 주의 이름은 소련 시대 이름인 스베르들롭스크 주로 남아 있다. 그러나 예카테린부르크와는 달리 상트페테르부르크 시는 레닌그라드 주에 속하지 않는 독립된 행정구역이다.[28] 사실 블라디미르 쾨펜도 이곳 출생이다. 20세부터 독일로 이주해 활동했고 말년은 오스트리아 그라츠에서 보냈으므로 독일 기후학자라 해도 틀린 소리는 아니지만(출처)[29] 강원도 전방, 평양 일대와 겨울철 평균 기온이 비슷한데, 물론 이 정도면 일본인이나 서유럽인에겐 상당히 춥게 느껴지는 기온이긴 하다.[30] 1912년 기준 인구 상트페테르부르크 2,035,600명, 모스크바 1,617,700명.[31] 공산당이 과거에 정교회 성당이라는 이유로 모스크바의 구세주 그리스도 대성당을 완전히 박살낸 것을 보면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많은 성당이 파괴됐을지도 모른다.[32] 물론 또 하나의 이유도 있는데 모스크바의 인구가 1950년대 들어서도 계속해서 늘어나고 덕택에 공동아파트로도 주거수요를 감당하기 힘들어질 지경이 되자 도심 중심지의 목조건물들을 대거 철거하거나 재개발해서 그 자리를 고층아파트로 채웠기 때문이다.[33] 디나모 상트페테르부르크도 있었으나 2018년에 소치로 연고지 이전을 했다.[34] 이 도시 뿐만 아닌 러시아 문화권에서 기차역 이름을 붙일 때 행해지는 일종의 관습이다.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시작역인 야로슬라블역 또한 원래는 모스크바 근처의 도시 이름이다. 야로슬라블로 가는 역이라는 의미에서 그런 역명을 지었다. 러시아 뿐만 아니라 과거 유럽권에서는 흔한 네이밍 방식이었다. 프랑스 파리의 리옹역, 뉴욕의 팬실베이니아역 등이 그 예다. 개통 당시의 종착역 방향으로 역이름을 짓는다.[35] 주요 관광지와 지하철 노선의 이동동선 차이가 나서 숙소 위치에 따라 이용할 일이 없을 수도 있다.[36] 경험한 바로는 1000루블을 요구하였다. 한국돈으로 약 15000원이 살짝 넘어가는 수준. 흥정하여 500루블까지 깎을 수 있는 등 적당히 상대해보자....[37] 상트페테르부르크 근처의 도시 페테르고프에 있다.[38] 상트페테르부르크 근처의 도시 차르스코예 셀로(푸시킨)에 있다.[39] 상트페테르부르크 앞의 핀란드 만의 코들린 섬에 위치한 곳. 상트 서쪽으로 약 30km 떨어져있다. 발트 함대의 군항이 위치한 것과 해군 교회로 쓰이는 성 니콜라스 교회가 유명하다. 소련 초기 정권에 대하여 수병들이 일으킨 크론시타트 반란이 일어난 곳이기도 하다.[40] 무역 중심도시로서 소득 수준이 상당히 높았다.[41] 그 시절에는 도시 이름이 레닌그라드여서 레닌그라드 라이브 공연으로 명명되었다.[42] 알다시피 제주도와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모두 각 나라 제일의 대표적인 관광지이다.[43] 러시아는 역사적으로 다른 나라 해역을 거치지 않고도 대양으로 나갈 수 있는 부동항을 갖기를 원했다. 러시아가 보유한 항구도시는 다른 곳도 모두 이런 식이다. 흑해는 보스포루스 해협과 지브롤터 해협, 수에즈 운하를 통과해야 대양으로 나갈 수 있으며 북극해는 북해로 나가는 방향 외에는 연중 얼어있으므로 역시 반쪽짜리 바다. 블라디보스토크가 있는 동해 역시 대한해협이나 쓰가루 해협 등 해협을 통과해야 대양으로 나갈 수 있다.[44] 이 해협에 대한 통과세를 받아먹었기 때문에 30년 전쟁 시기쯤 덴마크 왕실 재산은 전 유럽에서 손꼽힐 정도로 많았다. 지금은 이 해협을 통과하는 대신에 독일 북부의 발트해와 북해를 연결하는 킬 운하로 빠지면 거리도 단축되고 더 안전하게 지나갈 수 있어 운하를 주로 이용한다. [45] 러시아 락의 대부라고 불리는 음악가로 밴드 '아크바리움(Akvarium)'의 리더[46] 러시아 락의 전설들 중 하나인 밴드 '아우크치온'의 리더[47] 당시 지리적 특성으로 인해 레닌그라드는 "서방을 보는 창"이라는 별명으로 여러가지 문물을 접할 수 있는 도시로 유명했다. 그래서 외국 음악을 접하기 쉬운 도시였고, 소련 시절 3대 락클럽인 레닌그라드 락 클럽이 위치해 있었다(당시 VIA라고 불리던 당국 통제를 받던 밴드 외에는 공식 장소에서 공연을 하는 게 상당히 힘들었는데 이 곳은 언더그라운드 락 밴드들도 활동할 수 있는 곳이었다).[48] 형은 조지아 바투미에서 태어났지만, 이후 레닌그라드로 이주하게 되고, 보리스는 아예 태어날때부터 죽을때까지 여기에 있었다. 이들의 작품에도 상트페테르부르크가 등장한다. 이 형제들이 오랜기간동안 활동하고, 또한 창작을 했기에 이를 기리기 위한 공원이 만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