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락 친나왓

 


'''타이 왕국 제28대 총리
MPCh MWM
Yingluck Shinawatra'''
'''본명'''
잉락 친나왓 (Yingluck Shinawatra)
'''중국명'''
丘英樂 (휴인응옥, hiu´ in´ ngog)
'''국적'''
[image] 태국 (1967년 6월 21일-현재)
[image] 세르비아[1] (2019년 6월 27일-현재)
'''출생'''
1967년 6월 21일 (58세)
[image] 태국 치앙마이주 산캄파엥
'''신장'''
170cm[2]
'''학력'''
치앙마이대학교
켄터키 주립 대학
'''가족'''
동거: Anusorn Amornchat
슬하: Supasek Amornchat
오빠: 탁신 친나왓
'''정당'''
'''태국인당''']]'''
'''서명'''
[image]
'''현직'''

'''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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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 제28대 태국 총리(2011년 8월 5일 - 2014년 5월 7일)
[image] 제60대 태국 국방부 장관(2013년 6월 30일 - 2014년 5월 7일)

1. 개요
2. 생애
2.1. 정치 입문 전
2.2. 정계 입문
2.2.1. 프어타이당 창당
2.2.2. 2011년 타이 총선
2.2.3. 총리직 실각
2.2.4. 해외 망명
2.2.5. 법정 판결
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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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양의 유대인으로 불리는 화교 객가계 출신 여성 정치인으로 중국어 이름은 휴인곡(丘英樂, hiu´ in´ ngog)이다. 탁신 친나왓의 막내 여동생으로 타이 최초의 여성 총리이며, 2011년부터 2014년까지 총리직을 재직하였다. 젊은 시절에도 미녀라는 평을 자주 들었던데다가 총리직에 오른 40대에도 동안을 유지했기 때문에 전임 총리인 아피싯 웨차치와와 함께 역대 태국 총리 가운데서 가장 외모가 훤칠하다는 평을 들었으며 총리 재임기에는 가장 매력적인 국가지도자 순위 상위권에 꼭 들었다.

2. 생애



2.1. 정치 입문 전


1967년 6월 21일 객가계 이민자인 친나왓 가의 러트 친나왓의 아홉 자녀 중 막내 딸로 태국 산캄파엥에서 태어났다. 오빠는 태국 제 31대 총리로 쿠데타로 쫓겨난 탁신 친나왓이다.
1988년 치앙마이 대학 정치학부를 졸업한 후 미국에 유학, 1991년 켄터키 주립대학에서 행정학 석사를 취득하였다. 귀국 후에 친나왓 일족의 동족 기업인 친나왓 다이렉토리(Shinawatra Directories Co., Ltd)에 입사하였다. 현재는 어드밴스드 정보 서비스(Advanced Info Service Public Company Ltd)의 사장을 맡고 있다.
타이콤 재단의 위원이자 비서이다. 누이의 회사인 〈엠 링크 아시아 회사 PCL〉(M Link Asia Corporation PCL) 관리 이사인 아누손 아몬찻(Anusorn Amornchat)과 사실혼 관계이며, 그 남편과의 사이에 아들 하나를 두고 있다. 시누이인 야오와파 웡사왓은 전 총리였던 솜차이 웡사왓의 아내이다.

2.2. 정계 입문



2.2.1. 프어타이당 창당


2006년 타이 쿠데타로 잉락의 오빠인 탁신 친나왓이 이끄는 타이락타이 연합이 부정부패 혐의로 전복되었다. 타이락타이당은 군부 쿠데타가 지정한 군법재판소에서 2007년 5월 30일 강제 해체되었다. 그 후 타이락타이 당의 지지자들은 ‘민중권력당’(영어: Phak Palang Prachachon 팍 파랑 프라차촌)을 결성했다. 이 당은 2007년 12월 23일 군사정권이 실시한 선거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민중권력당도 2008년 12월 2일에 활동이 금지되었다. 그러나 민중권력당의 지지자들은 또 다시 프어타이당을 창당하고, 잉락에게 당수가 되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총리가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거절을 했으며, 그녀의 사업에 집중을 했다. 그리하여 용유스 위차이딧이 당수가 되었다.

2.2.2. 2011년 타이 총선


2011년 7월 3일 시행된 태국 국민 의회의 인민 대표원 총선거에서, 프어 타이당(Pheu Thai Party, PTP; →타이를 위해) 총리 후보로 선거전을 벌여 전체 500석 중 263석을 획득하면서 승리를 거뒀고, 2011년 8월 5일 총리 임기를 시작하였다.

2.2.3. 총리직 실각


2011년 타이 총선에서 265석을 확보하였고, 승리해 취임한 뒤 태국 정부를 약 2년 반 동안 무난히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았었지만 2013년 말 탁신 전 총리의 포괄적 사면을 추진하다 반 탁신 진영의 반발에 부딪혀 퇴진 압력에 시달려왔다. 그리고 결국 쁘라윳 짠오차 육군참모총장이 무혈 쿠데타로 군사정권 수립을 선언하였다.
2014년 5월 7일 태국 헌법재판소는 잉락 친나왓 총리가 2011년 타윈 플리안스리 전 국가안보위원회 위원장을 경질한 것이 권력남용이라고 판결하였고 이로 인하여 실각하였다. 그외에 부정부패 혐의로 탄핵당했다. 여기에 5년간 정치활동 금지당했다.
그리고 추가적으로 총리 시절 했던 쌀 수매 정책 과정의 막대한 국가 재정적 손실과 부정부패 혐의로 군부에 의해 2015년 2월 기소당했다. 쌀 가격을 높게 얻어내는 중에 수많은 부패 혐의가 밝혀졌다. 2016년 10월에 태국 대법원 형사부는 쌀 수매와 관련한 부정부패 혐의로 기소된 잉락 전 총리에 대해 350억바트(약 1조1천315억원)의 벌금형과 함께 자산 압류 명령을 내렸다.# 그리하여 잉락의 모든 재산이 압수되었다.

2.2.4. 해외 망명


2017년 8월 25일, 대법원 선고공판을 앞두고 오빠 탁신처럼 해외 망명을 선택했다.#

2.2.5. 법정 판결


2017년 9월 27일, 궐석재판에서 5년형을 선고받았다.#

3. 여담


2012년 서울 핵안보정상회의 참석차 한국을 방문했다. 한국측 수행원들까지 잘 챙겨줘서 인기가 좋았다고.

[1] https://www.yna.co.kr/view/AKR20190809000200109[2] 동남아 여성으로서는 상당히 큰 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