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신 친나왓
[clearfix]
1. 개요
태국(타이)의 정치인. 제23대 총리를 지냈다. 치앙마이에서 출생했으며 학가계 화교이다. 화교식 이름은 휴탓신(丘達新, hiu´ tad xin´)이다.
탁신은 총리 취임 이후 보여준 대중주의적 행보와는 대조적으로 기득권층 출신이었다. 탁신의 증조부때 이미 비단사업이 크게 성공하면서 부유층에 끼어들었고 이를 바탕으로 아버지인 롯도 치앙마이 일대에서 사업하던 지역유지이면서도 국회의원직을 지내는 등 정계에 진출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온갖 비리 부정부패 혐의로 구속되었고 논란이 많았다.
2. 생애
평범하게 학창시절을 보내고 난 뒤에 경찰관이 되었고 30대 초반까지는 경찰관으로 일하다가 1980년대 초반부터 부업으로 사업을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두어차례 정도의 쓴맛을 보다가 1980년대 중반부터 연줄을 잘 이용하여 사업권을 따내고 나서는 일이 잘 풀리기 시작했고 이때를 기점으로 해서 이동통신산업 사업권을 속속 따내었고 (물론 정황상으로 봐서는 깨끗하게 따낸건 아니지만) 이때가 태국 경제가 매년 8-9%대의 고도성장을 기록할 정도로 엄청난 호황을 누렸고 당연히 인프라 구축사업도 호황기를 틈타서 대규모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불과 몇년만에 초대형 재벌이 되었다.
얼핏보면 평범하게 경찰관으로 일하다가 사업에 시작해서 엄청난 성공을 거두웠기에 자수성가 한 것 같지만, 탁신 자체가 금수저였던 인물이었고 사업확장의 상당부분도 연줄을 통해 이루어냈기 때문에 개천에서 용이 난 사례는 아니다. 물론, 그와 별개로 사업가로써 능력은 제법 뛰어난 축이라는건 부정 못한다. 아무리 가족들이나 주요 고위직의 도움을 받았다지만 사업 10년만에 초대형 재벌이 되는건 결코 쉽지 않기는 하다.
여하간 이 때의 인연으로 고위급 정치인들과 친분관계가 깊어져서 1994년에 외무장관직에 발탁된 것을 시작으로 정계에 진입했고 이후로 잠롱의 뒤를 이어 팔람탕당의 당수로 재직하다가 1997년에 부총리직에까지 오르게 된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탁신은 태국 정계를 바꿔놓은 인물로 보이지는 않았고, 그저 깨끗하게[2] 성공한 사업가 이미지가 전부였다고 할 정도였지만 IMF 외환위기로 경쟁사들이 크게 손실을 본 반면에 탁신은 큰 손실을 보지 않았으며 이를 계기로 인지도가 급상승하게 되엇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1998년에 타이락타이당을 창당하면서 당시 집권여당이었던 민주당과의 차별성을 보이기 위해서 각계 각층으로부터 수많은 인재들을 영입하였다. 단순 사업가들뿐만 아니라 전직 운동권 인사들, 학자들까지 대거 영입하였다. 사실 탁신도 정계 입문 초기때 기업가답게 친기업적인 성향을 강하게 드러냈고 후의 대중주의적 행보와는 거리가 멀었지만[3] 타이락타이당 창당과정에서 영입한 학자들과 전직 운동권 인사들을 나름대로 잘 써먹어서 2001년 총선을 앞두고 그 동안 기존 태국정당들이 무시했던 농촌지역을 적극적으로 공략하며 2001년 총선에서 248석을 차지하여 집권정당이 되었다.
총리로 재임하였을 때에는 사업가로써의 경험을 백분 활용하면서 그 이전까지 무시되었던 농촌지역 문제 해결에 힘을 썼고 IMF 외환위기 극복과 30바트 의료보험 정책[4] , 농어촌 지역 개발 지원, 마약퇴치 작전으로 크나큰 인기를 얻었다.[5] 그렇지만 남부지역의 반군을 말 그대로 무자비하게 때려잡고 이 과정에서 민간인 살상이 빈번하게 벌어졌기 때문에 논란이 일었으며, 그로 인하여 말레이시아와의 관계도 급속히 악화되었다. 그리고 그나마 역대 태국 총리 가운데서 빈민층에 신경을 많이 써왔다고 하지만 동시에 시민단체 활동을 등록하도록 의무화하면서 통제하는 법을 만들었고 돈을 이용해서 언론을 통제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리고 2004년부터 그 이전까지 같은 편이었던 재벌과 관료들과의 관계가 멀어져가기 시작했는데 태국 경제가 회복되는 과정에서 탁신이 떡고물의 대다수를 기득권층에게 골고루 분배하지 않고 자신이 대다수를 차지했기 때문이라는것이 중론이다. 여하튼 이 시점을 기점으로 언론들과의 관계도 나빠지며 기득권층으로부터 지지세가 급속히 약화되기 시작하면서 악운이 끼기시작했다. 하지만 탁신은 농어촌 개발정책의 수혜지였던 북부와 중부지역을 잘 공략시켜나갔고 결국 2005년 총선에서 개헌선을 넘는 역대급 압승을 기록하면서 재집권에 성공했다.
탁신은 재선에 성공한 뒤로부터 태국 남부 5주 지역의 개발예산을 삭감하겠다고 했다가 추밀원[6] 으로부터 태클을 받은걸 시작으로 해서 점차 위기감이 감돌기 시작했고, 2006년 9월 뉴욕에서 개최된 UN총회 참석차 방미했다가 태국 내 군부세력의 쿠데타로 정권을 상실했다. 그의 지지세력인 붉은 셔츠단과 치앙마이를 중심으로 한 북부지역과 중부지역 방콕을 중심으로 한 왕당파 세력과의 갈등이 주 원인이다. 실제로 푸미폰 국왕이 쿠데타를 조장했으며 탁신이 태국의 입헌군주정을 없애고 공화정을 만들어 대통령이나 총리로 집권한다더라 하는 소문이 파다했다.
과도정부가 발표한 그의 비리도 탁신 정권의 정당성에 타격을 가했다. 그의 기업 친 코퍼레이션의 사업을 싱가포르 국영기업 테마섹에 매각할 때 탈세를 했다는 것과 돈므앙 국제공항에서 수완나품 국제공항으로 국제공항을 바꿀 때 도입한 공항 검색장비에 대한 비리혐의가 적용되고 그는 입국이 금지되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이전의 경험때문에 북부지역에서 여전히 구세주 취급을 받았으며, 2007년 총선에서도 친탁산계 정당이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군부와 법원에 의해 강제적으로 의석수가 줄어나갔고, 옐로셔츠의 저항이 벌어지면서 점차 궁지에 몰리게 된데다가 일부 친탁신 세력이 민주당에 입당하면서 민주당이 집권했다. 그리고 몇년간 민주당이 집권하는듯 했지만 북부지역에서 별로 민심을 얻지 못했고, 2011년 총선에서 여동생인 잉락 친나왓이 탁신의 여동생임을 내세워 총선에서 승리를 거두며 총리직에 재직하다가 결국 2014년에 부패혐의로 탄핵되어 쿠데타로 총리직에서 강제로 물러나야 했다.
여하튼 이 과정에서 탁신은 자신을 민주투사로 포장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이는 2014년 군부쿠데타 이후 군부의 행태로 현실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사실 탁신도 따지고 보면 총리 재임시에는 비민주적인 행태도 꽤나 보여왔고 탈세도 했을 정도로 깨끗함과는 거리가 있었지만 옐로셔츠가 기득권층을 대변하는 세력이 대부분인데다가[7] 군부 자체가 선거결과를 여러번 뒤엎고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먼 행동을 앞장서서 자행하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포장이 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탁신은 사업가로써의 감각은 나름대로 뛰어난 편이고, 사업가였을때 경험을 정치에 활용하는 능력도 상당하여 지지층 확보에 많은 도움이 되었지만 정치적인 수완은 다소 미숙했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언론계와 노조와의 관계가 나쁜건 뭐 그렇다 칠수는 있다지만, 굳이 사이가 나빠질 이유가 없던 재벌들과 관료 등 기득권층을 적으로 돌린것에 대해서는 탁신이 과도하게 욕심을 부렸고 이것이 미숙한 정치력과 시너지 효과를 불러일으켰기 때문이었다는 것이 중론이다.또한 밝혀진 수많은 부정부패에 태국 국민들이 등을 돌렸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여전히 탁신을 좋아하는 태국인들도 많은데 어차피 기득권층들도 그리 깨끗하지 않은데다가 탁신때 수혜를 본 계층이 서민들이기때문이다. 사실 잉락 친나왓이 집권할수있던것도 이 때문이다. 그래서 태국에 갔을때 탁신에 대해 함부로 옹호나 비판을 하게 되면 싸움이 나거나 분위기가 싸해질수있으니 조심해야 된다.
3. 태국 왕위 계승문제 관련
사실 태국에서 탁신이 비판받는 가장 큰 이유중 하나는 왕위 계승자인 마하 와찌랄롱꼰을 지지한다는 점이다. 푸미폰 아둔야뎃 국왕이 엄청난 고령이 문제가 되면서, 태국 정계는 왕자의 왕위계승 지지와 반대로 나뉘었고, 대부분은 왕위 계승반대로 모아졌다. 이 과정에서 왕자 지지파와 반대파는 내전 가능성까지 언급될 정도로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었다. 그런데 북부 농민들의 지지를 받는 탁신이 내각을 차지하고 왕자 왕위계승을 지지하고 나서니 이걸 내버려두면 게임이 끝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이 때문에 이후 태국 정계는 왕자의 왕위 계승을 지지하는 시라낏 왕비를 포함한 왕실세력+탁신 세력의 레드셔츠와 왕자의 왕위계승을 반대하는 세력인 옐로우 셔츠의 대결구도가 되었다. 사실 탁신이 끼면서 양자의 세력이 완전히 동일한 위치에 섰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막상 마하 와찌랄롱꼰이 재위에 등극한 이후로도 군부의 눈치를 보는 모습을 보인다.
4. 축구단 운영
그는 평소 축구팬으로서 프로축구팀 인수에도 적극적이었는데, 2003년 프리미어리그 구단 풀럼 FC를 비롯해 2004년 리버풀 FC도 인수하려다 둘 다 실패했고, 2007년 맨체스터 시티를 인수하여 비로소 구단주가 됐다. 하지만 맨시티 서포터들은 그를 달가워하지 않았는데 전술한 2004년 당시 리버풀 FC를 인수하려 하면서 리버풀 팬이라고 잉글랜드에서 언론 플레이를 하다가 팬들의 반발로 실패했기 때문. 축구계에서도 그를 달가워하지 않아서인지 탁신이 챔피언스리그 진출 운운거리는 인터뷰를 축구잡지 포포투에서는 '''올해 가장 웃기는 축구 구단주 헛소리'''라고 신나게 비웃었을 정도였다.
그래도 초반에는 선수 영입도 투자도 하고 스벤예란 에릭손 감독 영입으로 맨유와의 리그 경기를 2번 모두 이겼으며 선두권에 들어서는 선전을 벌였으나 차츰 밀려나 리그 9위로 마무리하자 에릭손 감독을 경질하며 점차 구단 운영도 엉망인 모습을 보이다가 태국에서 자금을 막아버리면서 1년 만에 셰이크 만수르 빈 자예드 알 나얀에게 2배 정도 이득을 보고 맨시티를 팔아버린다.
[1] https://www.reuters.com/article/us-thailand-montenegro-thaksin/montenegro-says-has-given-thaksin-citizenship-idUSTRE62G2QM20100317[2]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정계거물이 아니었던지라 딱히 드러나지 않았다고 봐야한다.[3] 사실 이건 탁신의 경력에서 볼수있듯이 기득권층의 일원이라 할 수 있었던 인물이었던 영향이 크다. 탁신이 대중주의적으로 변한 것은 어디까지나 기득권층과 관계가 멀어지고 북부지역 빈민층을 지지기반으로 삼은 결과물이고, 탁신 자신도 자기를 대중주의적인 정치인으로 딱히 인식하지는 않는다는 듯하다.[4] 그 이전에는 사실상 정부차원에서의 의료정책이 없었다고 봐도 될 정도였다. 물론 가난하면 왕실직영 국립병원에서 치료받으면 되지만 이것도 포화상태에 놓여있는지라 제대로 된 의료혜택을 받기가 힘들었다.[5] 다만, 이 마약퇴치 작전도 국민들로부터 많은 지지를 받았기는 했지만 이 과정에서 마약용의자들이 별 다른 재판을 받지 않고 사살하는 식으로 처리하는 경우가 다반사였기 때문에 인권문제가 제기되었으며 교도소 충축없이 마약범들을 잡아들이다보니 교도소가 포화상태에 다달랐고 그 덕택에 교도소 환경이 나빠지게 되는 바람에 그리 성공적이지 못하다는 비판을 듣고 있다. 두테르페 필리핀 대통령이 역점을 기울이고 있는 마약소탕전이 탁신 친나왓 총리의 마약소탕 작전과 비슷하다고 보면된다. 물론 강도는 필리핀이 더 세지만.[6] 태국왕실의 재산을 관리하는 곳이다. 이곳의 재산만 해도 조단위이다.[7] 특히 태국 민주당이 탁신 정부 이후로부터는 친군부성향이 된데다가 탁신에 대항한답시고 한다는 주장이 말 그대로 민주주의를 기본인 1인 1표를 부정하는식이며 아예 2014년 총선을 보이콧할 지경이다. 오죽하면 탱크리버럴이라는 용어도 나올 지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