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경(독립운동가)
1. 미주 방면 독립운동가, 장경
장경은 샌프란시스코에서 인삼을 파는 상인이었다. 그는 1903년 9월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에서 안창호와 함께 샌프란시스코 한인친목회를 결성했다. 한인친목회는 미주 일대에서 최초로 결성된 한인 단체로, 환난상부(患難相扶)를 목적으로 한인 동포간의 연락과 친목을 도모하고 한인 사회의 생활 개선 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던 1905년 11월 일제가 을사조약을 체결해 대한제국의 국권을 강탈하자, 그는 그해 12월에 안정수, 방사겸(方四兼) 등과 함께 캘리포니아주 패사디나에서 해외 유학생 양성, 서적 출간, 신문 간행을 목적으로 대동교육회(大同敎育會)를 조직해 총무로 선임되었다. 그는 대동교육회를 이끌면서 한인들의 유학 주선과 미주 교포들의 계몽운동, 직업 알선 등의 활동을 전개했다.
이후 1907년 3월 샌프란시스코에서 백일규, 문양목 등과 함께 대동교육회를 대동보국회(大同保國會)로 개편하고 중앙총무로 선임되었다. 대동보국회는 대한제국 황제에 대한 적극적인 지지와 충성을 강조했으며, 재미 한인들의 국권 회복 의식을 고양시키는 것을 목표로 유학 주선, 서적 출간, 신문 출간, 직업 알선 등의 활동을 전개했다. 1907년 7월 정미7조약이 체결되면서 대한제국군이 강제 해산되자, 장경은 그 부당성을 주장하며 동포들의 궐기를 촉구했다.
1907년 9월 상하이로 건너간 장경은 그해 11월 대동보국회 상해지방연회(上海地方聯會)를 설치했다. 당시 상하이에는 30여 명의 학생들이 앞서 도착해 무관을 양성하고자 했지만 계획이 어긋나면서 대책없이 상하이에 머물고 있었다. 그 사정을 알게 된 장경은 대동보국회관을 만들어 학생들이 그곳에 머물게 했고, 대동학교를 운영하기도 했다. 한편 샌프란시스코에서는 1907년 10월 대동보국회의 기관지 <대동공보(大同公報)>를 창간하고 민족정신을 고취했으며, 미주 본토에 10개소, 하와이에 3개소, 국내에 22개소, 중국에 1개소의 신문 발매소를 두었다.
1909년 2월, 장경은 상하이에서 한문 잡지인 <태동신보(泰東新報)>를 발간했다. 그러나 그가 곧 미국으로 건너갔기 때문에 단지 1호만 발간하는 데 그쳤다. 또한 그는 미국에서 청나라 보황회 계열 중국 교민의 후원을 받기도 했다. 그 후 대동보국회는 1910년 2월 국민회와 통합해 대한인 국민회로 개편되었고, 장경은 1911년 안창호, 안정근 등과 함께 북만주 밀산 기지 개척지를 돌아보기도 했다. 이후로는 상하이와 싱가포르 등 동남아시아 일대에서 인삼 장사에 종사하던 그는 1918년 1월 21일 싱가포르 여행 도중 숙환으로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장경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2. 사천군 출신 독립운동가, 장경
장경은 1920년 6월 27일 경상남도 사천군 삼천포 선구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1933년 삼천포공립보통학교(三千浦公立普通學校)를 졸업한 후 부산중학교(釜山中學校)에 재학 중 부산중학조선인회(釜山中學朝鮮人會)에 가입해 민족사상을 배양받았다. 1938년 3월 부산중학교를 졸업한 그는 일본으로 유학갔고, 그해 4월 중앙대학(中央大學) 제1예과 제2학년에 편입했다.
1939년 7월 하순, 일본에서 차별대우를 받는 것에 반감을 품은 그는 고담룡, 김운봉(金雲鳳) 등과 함께 비밀결사[1] 를 결성했다. 또한 그는 1940년 6월 하순경 고담룡, 김운봉 등과 회합하여 조선독립운동의 방법으로 한민족의 단결심 양성, 자력 함양, 미국을 통한 독립운동 도모 등을 전개하기 위해 고문(高文)그룹을 조직했다. 고문그룹은 표면적으로 학술연구와 상호 친목단체로 위장하여 일본의 감시를 피하면서 동지의 결속을 공고히 하기 위한 방법으로 결사를 유지했다. 이들은 조선의 독립방안으로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의 비폭력, 무저항주의를 기본적으로 체택했다.
또한 1940년 10월 말, 장경 등은 일본 정책에 편승하여 실력을 양성하며 자력 본위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매진할 것과 독립 후 통치체제는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주의를 본받을 것을 협의했다. 이후 그들은 11월에 기념촬영을 하면서 졸업 후 관계 혹은 재계로 진출해 평생 독립을 목표로 헌신할 것을 협의했다. 이렇듯 그들은 1940년 6월부터 1942년 5월까지 11회에 걸쳐 모임을 가져 독립쟁취 방안을 논의했다. 그러나 1940년 6월 일제 경찰에게 발각되면서 모두 체포되었고, 장경은 1944년 6월 대구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4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8.15 광복으로 석방되었다. 이후 고향에서 조용히 지내던 그는 1979년 9월 21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3년 장경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1] 명칭은 알려진 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