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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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인도의 정치가이자 독립운동가.'''나는 가난한 탁발승(托鉢僧)이오. 내가 가진 거라고는 물레와 교도소에서 쓰던 밥그릇과 염소젖 한 깡통, 허름한 요포(腰布) 여섯 장, 수건, 그리고 대단치도 않은 평판(評判) 이것뿐이오.'''[7]
세계적으로도 존경받는 위인이다. 1999년 4월 18일 미국의 시사주간지 뉴욕 타임스는 지난 1천년간 최고의 혁명으로 영국의 식민통치에 저항한 간디의 비폭력 불복종 운동을 선정했다. 성웅이라고 하면 한국에서는 이순신에 주로 붙이지만 중국 등 중화권에서 성웅이라는 단어는 자기 나라인 중국사의 어떤 역사인물이 아니라 거의 이 사람의 전용 칭호에 가깝다.[8] 구글에서 성웅(聖雄)을 한자로 검색하면 간디만 뜨고 자동으로 완성된다.
다만 현대엔 간디에 대한 무결점의 성인과 같은 이미지를 지우고 기존과는 다른 방향으로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독실한 힌두교 신자였던 간디는 힌두교 내에서 4개의 카스트에 속하지 않는 불가촉천민(Untouchables)에 대해서는 악담을 퍼붓는 등 심각한 신분 차별을 보이는 발언을 해왔기에 결국 힌두교적 질서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았던 사람이란 평가가 설득력을 얻은 것. 이에 반해 인도 헌법의 아버지라 불리는 빔라오 람지 암베드카르 박사는 불가촉 천민 출신으로 힌두교로는 인도를 발전시킬 수 없다고 생각했고, 실제로 다른 불가촉천민들과 함께 불교로 대규모 개종을 해 카스트에 대한 저항을 실천하기도 했다.
쇼맨십이 상당히 강했으며, 자기애도 강했다고도 전해진다. 소는 인정을 해도 불가촉 천민은 인정하지 않는 신분차별적 발언들이 숱하게 기록으로 남아있다. 암베트카르 박사와의 갈등이후, 그는 불가촉천민의 아이를 양자로 거두기도 하는 쇼를 하며, 그들에게 '하리잔(신의 아이들)'이란 이름도 붙여주었다. 이에 대항하여, 힌두교의 카스트에 반감을 가졌던 빔라오 람지 암베드카르 박사는 '달리트(억압받는 자)'라고 부르기로 하고 운동을 펼친다. 당연히 현재 인도에서는 누구도 불가촉천민을 하리잔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실제 대우가 하리잔이 아니기 때문에 당연한 일이다.
비폭력 이미지로 워낙에 알려진 것과 다르게 학창 시절에는 술도 마시고 담배도 피웠으며, 고기도 먹고 교수와 정면에서 맞짱까지 깠다고 한다. 그러나, 교수와 맞짱까는 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간디가 매우 우수한 학생이었기 때문이다.
2. 생애
2.1. 출생 ~ 청년기
모한다스[9] 카람찬드 간디는 1869년 10월 2일 인도 구자라트의 작은 소국인 포르반다르 국(Porbandar State)에서 카람찬드 간디와 파트리바이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가람찬드 간디는 포르반다르 국의 수상이었다. 간디 가문의 종교는 비슈누를 섬기는 종파인 바이시나바였고 특히 어머니가 대단히 독실했다고 한다.[10] 그렇지만 집안에서는 자이나교, 이슬람교 신자들과도 많은 교분을 맺었다. 간디의 카스트는 평민인 바이샤였다.
모한다스 간디는 어린시절을 포르반다르에서 보내다가 간디가 7세 즘에 아버지가 라자스타니크의 가신이 되면서 라지코트로 이사했고 거기서 초등학교와 고등학교[11] (알트레드 고등학교) 생활을 한다. 학교생활중이던 1883년 13세의 나이로 마칸지 가문의 카스토르바이(कस्तूरबा)와 결혼한다.
간디 자서전에 따르면 자신의 어린시절은 그렇게 모범적이지는 못했다고 한다. 간디의 어린시절 일탈을 적어보면 친구의 권유로 고기를 먹었던 일이 있었다. 다만 고기의 경우 식욕보다는 호기심과 당시 인도에 퍼져있던 개혁 문화 다시말해 인도의 카스트나 힌두교 악습같은 비합리적인 문화를 없애고 서양식(주로 영국식)의 합리적인 문화를 수용하자는 움직임이 퍼져있었고 그 중 하나가 영국인처럼 육식을 하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친구가 가져온 염소고기를 시작으로 한 1년쯤 먹다가 어느날 문득 고기의 맛을 즐기고 고기를 먹고 싶어하는 자신을 깨닫고 그만두었다고 한다. 그 외의 일탈로는 아내와 싸운 뒤 매춘을 하려다 실패했던 일도 있었다고 쓰고 있고, 12세 때는 담배를 사려고 하인의 돈을 훔친적도 있었고, 15세 때는 형의 금팔찌의 조각을 훔쳤던 일도 있었다고 쓰고 있다. 이후 아버지에게 용서받고 그 일을 그만뒀다고 쓰고 있다. 그 외에도 자살시도도 한번 있었다고 한다.(출처, 모한마스 간디, 간디 자서전, 1부 4장)
이렇게 성장하던 중 간디가 16세이던 1885년 아버지 카람찬드 간디가 사망하게 된다. 아버지의 사망은 모한다스 간디에게 큰 충격과 변화를 가져오는데 당시 간디가 밤중에 아내와 성관계를 갖다가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고 이것 때문에 간디는 금욕적인 삶을 살게 된다.[12][13]
이후 간디는 1887년 11월 대학입학자격시험에 합격하고 바우나가르 주의 사말다스 대학교(Samaldas College)에 입학한다. 그렇게 한학기를 보냈다가 방학중에 아버지의 친구였던 마브지 다베(Mavji Dave 간디는 '조시지'라고 불렀다)가 자기 아들인 케발람 다베가 있던 영국으로 유학을 조언하게 되고 때마침 사말다스 대학교에서 성적과 흥미를 잃었던 모한마스는 반대하던 어머니를 설득해 술과 육식, 불륜을 하지 않겠다고 맹세한 뒤 영국 유학을 허락받아 8월 10일 봄베이[14] 로 떠난다. 간디는 한달간 봄베이에서 머물렀는데, 이 때 간디가 속한 모드 바니아(Modh Bania) 카스트의 셰드(카스트의 우두머리)에게 소환을 당하고 여기서 설득을 빙자한 협박을 들었지만 간디의 뜻을 꺾지는 못했다. 또한 많은 힌두인들이 믿고 있던 바다(Kala Pani, black water)를 건너면 카스트 계급을 잃는다는 금기도 그를 막지는 못했다. 1888년 9월 4일, 간디는 인도 봄베이를 떠난뒤 9월 말 영국 사우샘프턴(Southampton)에 도착한다.
본래 군인이 되기 원하여 19세가 되던 1887년, 영국의 보어전쟁이 발발하자 영국군에 참전하기 위하여 자진입대하였으나 신체검사에 불합격하여 입대하지 못하게 된다.[15] 1888년 영국 유학길에 올라 런던에서 공부를 한 뒤 변호사 자격을 취득하게 된다.[16]
2.2. 남아프리카 생활
대학을 졸업한 이후 간디는 1893년에 남아프리카로 떠나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하게 된다.
이때 간디가 인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자각하게 된 에피소드 중 하나가 기차에서 짐짝과 함께 내동댕이쳐진 사건이다. 인도인이라는 이유로 정당하게 티켓을 구매하였음에도 불구하고 1등석에서 쫓겨났는데, 당시의 1등석은 오늘날 비행기의 비즈니스 클래스처럼 물리적으로 분리되어 있는 구조였다. 그런데 1등석의 영국인 손님이 차장을 불러 냄새나는 쿨리랑 같이 있기 싫으니 내보내달라고 하여 차장이 간디한테 바로 나가라고 한것이다. 게다가 이 차장은 1등석에서 쫓아내는것도 모자라 간디한테 2등석, 3등석은 자리가 없으니 짐칸으로 가라는 모욕을 준다. 간디는 그럴수없다고 거부하여 차장이 기차 직원들이랑 같이 그를 기차에서 강제로 내동댕이 치며 쫓아냈던 것이다. 쫓겨나는 간디를 비웃은것은 덤이다. 기차에서 쫓겨난 간디는 별수없이 역마차를 탓으나 여기서도 역마차의 영국인 마부가 그의 자리에서 담배를 피워야겠으니 비켜달라고 요구하여 비켜줘야 하는 수모를 당한다. 상위 카스트에서 자라나고 영국의 엘리트 교육을 받았던 상류계급인 간디조차도 단지 인도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차별받게 되자 비로소 대영제국이 겉으로만 식민지인을 같은 영국인이라고 했지 실제로는 2등 시민으로 매우 멸시하고 차별했으며 인도인의 정체성도 자각하게 된 것이다.
또 다른 에피소드로, 인도에 다녀온 뒤 인도인 청년들과 함께 돌아오자, 반정부 운동에 반감을 가진 남아프리카 백인들은 간디에게 린치를 행하였고, 이에 남아공 경찰청장의 부인인 알렉산더 부인이 나서서 그를 보호한 사례도 있었다.
개업 직후 남아프리카 정부에 반대하는 반정부단체를 결성하여 반정부운동을 벌이게 된다. 특히 남아프리카 정부의 자국민 보호를 위해 외국 이민자들의 신상을 기록하게 하는 법률에 강력히 반발하여 이러한 법률의 폐기를 주장하였고 이를 위한 게릴라 시위를 일으키려다 사전 발각되어 체포당하게 된다.
이후 출소한 간디는 인도에 돌아오자마자 1899년 남아프리카에서 제2차 보어전쟁이 발발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영국군 입대를 자원하게 된다. 간디는 영국군의 입대시험 및 신체검사에 무사히 합격하여 영국군의 지휘를 받게 되나 당시 서류에는 계급이 없는 지원병 신분이었다.
제2차 보어전쟁은 영연방[17] 의 지상군과 보어인으로 구성된 오렌지 자유국, 트란스발 공화국 연합군과의 전쟁이었는데 최초 2년간은 보어인들의 끈질긴 저항으로 버텨내었으나 전쟁을 조기 종결시키기 위해 영연방이 당시 40만의 보어인 인구수에 필적하는 35만 병력을 투입하여 군인과 민간인을 가리지 않는 말살작전을 펼쳐 결국 보어인 총 인구수의 1/4에 해당하는 10만여명을 사살하여 결국 승리하게 된다.[18] 이 때 간디와 인도인들은 의무병과 후송 임무 등을 맡았고, 가혹한 환경 하에서 후송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는 평가를 받아 훈장을 수여받았다.
이후 간디는 남아프리카에 거주하는 소수민족의 대표자 격이 되어 각종 조직의 위원으로 참여하게 되나 현직 군인이었기 때문에 중요 요직에는 오르지 않았으며 다만 인도인 차별에 반대하는 탄원서에 이름을 넣는 것 정도 외에 특별한 활동을 하지 않게 된다.
이후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이번에는 영국군 모병관으로 참전하게 된다. 당시 전쟁영웅으로 각광받은 간디를 본 수많은 젊은이들이 영국군에 지원하였는데 그 수가 수십만에 이르렀으며 종전 이후 영국군이 승리하게 되자 모병관으로서의 성실성을 인정받아 다시 한번 영국 국왕으로부터 표창을 수여받게 된다. 이후 간디가 군 생활을 마치고 퇴임함으로써 받은 정근 훈장까지 합하여 총 3개의 영국군 훈장을 수여받게 된다.
그러나 그는 영국군인임에도 인도인이었기 때문에 더 이상 진급할 수 없었으며 영국에서도 인도인 신분으로 각종 차별대우를 받게 된다. 특히 1919년 영국에 반대하는 인도인을 영장없이 처벌할 수 있는 롤레트 법이 통과되었고 이 때문에 자신 또한 영국에서 배척당하게 되자 결국 정치계에 입문하여 본격적인 인도 독립운동을 이끌게 된다. 독립운동을 시작할 당시의 간디의 나이는 50세였다.
가장 존경하는 남아프리카인은 보어인이었던 얀 스뮈츠 수상. 스뮈츠 역시 간디와 편지와 선물을 주고받았을 정도로 각별한 사이였고, 자신의 여러 저서에도 간디를 언급한 만큼 그를 진심으로 존경했다고 한다. 스뮈츠가 휴머니스트이고, 남아프리카 내 인도인의 처우 개선에도 노력을 기울였다는 점이 크다. 스뮈츠는 또한 제 1 야당 남아프리카 연합당의 당수인 만큼 국민당(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집권과 인종차별 정책에 반대했다.[19]
2.3. 독립운동
간디의 독립운동 슬로건은 '무저항 비폭력' 으로 알려져 있다. 다만 이러한 가르침은 영국에 대해서만이었는데 따라서 간디는 각종 집회나 시위를 영국군의 허가를 받아 진행하였으며 영국군의 해산명령이 있으면 거리낌없이 집회를 포기하고 돌아갔다. 당시 영국에서는 간디가 인도의 세력을 규합하여 반란을 일으키는 것이 아닌지 의심하여 초기에는 구속하여 감옥에 가두었으나 출소 이후 행적을 조사한 결과 영국에 어떠한 위해가 되지 않는다고 판단하여 더 이상 관여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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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나이가 들자 정치계 입문을 갈망하여 자신의 이미지를 보다 더 구체적인 '비폭력'으로 심화하기 위해 상징적인 활동을 시작하는데, 그 중 하나가 영국의 소금세 제정[20] 에 반대하는 소금 행진이다. 간디는 차라리 바다에서 소금을 가져다먹자며 360km 가량을 행진하였는데, 당시 그의 나이 '''61세'''였다. 또한 감옥 안에서 영국의 공장제 수공업에 대항해서 인도의 전통 수공업을 상징하는 물레를 돌리는 퍼포먼스 또한 널리 알려져 있다.
2.4. 인도의 독립, 그리고 사망
그는 인도 자치령과 파키스탄 자치령[21] 의 분리를 반대하였으며 지속적인 통일을 주장하였는데 초기에 이슬람에 대하여 무조건적인 강경론을 펼치던 모습과는 상당히 달라진 것이었다.
1947년 인도와 파키스탄은 결국 분리되고 말았으며 간디는 이를 '정신적 비극'이라고 칭하였다. 결국 인도가 분할되자 간디는 "나는 125세까지 살고 싶었지만 이제는 그럴 명분을 찾을 수 없을 것 같다"라며 상심했고, 단식을 하기도 했다. 이 단식은 평소보다, 아니 상당히 위독한 지경까지 가서 당시 싸우고 있던 무슬림과 힌두교도 당수들이 급히 화해를 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 후로 과격 보수파 힌두교 신자들은 카스트 교리를 부정하고 무슬림을 인정하는 것으로 보인 간디를 적대시하게 되었으며, 결국 1948년 1월 30일 오후 5시 17분 79세의 나이로 암살을 당하고 말았다.
암살 당하던 날 두 증손녀의 부축[22] 을 받아 그를 환영해주는 군중 사이를 빠져나가고 있을 때, 카키색 군복을 입은 한 남자가 나타나 그에게 인사하며 마하트마의 발을 만지려고 했다. 이에 간디는 두 손을 모아 쥐고 보답해주며 미소 지었다. 그러나 남자는 몸을 일으켜 갑자기 권총을 뽑아 든 뒤 정면에서 세 발을 쏘았다. 간디가 "라마"하고 신의 이름을 부른 뒤 그의 몸이 땅 위로 쓰러졌다. 이는 아무도 예상 못한 일이라 간디의 증손녀들과 주변의 군중들은 이 암살에 큰 충격을 받았다. 범인은 힌두교 극단주의 과격파 나투람 고드세였다.
그의 마지막 말은 '''" हे ! राम (Hē Ram)"'''(아! 라마[23] 여)였다고 한다. 간디의 장례는 국장으로 치루어졌고 유해는 암살 다음날인 1월 31일 야무나 강 남쪽의 라지가트에서 화장되어 여러 개의 유골함에 나눠지고 2008년에 아라비아해에 뿌려졌다. 화장터에는 간디의 유언이 새겨진 검은색 대리석 대좌가 잔디밭 가운데에 놓여 있다. 당시 인도의 수상인 자와할랄 네루가 참석하여 추모사까지 지어 애도했으며 수많은 인도인들이 간디의 죽음을 슬퍼했고 장례식날 무려 2백만 명이 넘는 조문객이 찾아와서 간디의 죽음을 애도했다. 1951년 기준 델리 인구가 '''고작 174만 명''' 정도였던걸 감안하면 그야말로 엄청난 인파였던 셈이다.
당시 사람들 사이에서는 무슬림이 힌두교도인 간디를 죽였다는 말이 돌았지만, 범인인 반 이슬람 극단주의 힌두교 무장단체 라시트리야 세와크 상가의 회원 나투람 고드세라는 청년은 간디에게 권총 베레타 M1934을 발사한 후에 도망가지도 않고 그자리에 서 있었고 전혀 저항도 하지 않았다. 이후에 엄청나게 분노한 민중들에게 붙잡혀 당장 권총을 뺏기고 죽지않을 많큼 실컷 두들겨 맞았으며 경찰에 끌려가면서도 간디의 암살자를 죽이라는 욕설도 실컷들었다. 이후에 다음해인 1949년 공범과 함께 교수형에 쳐해졌다. 간디를 싫어하던 많은 사람들까지도 간디를 죽인것은 분명히 잘못된 행동이었다고 강력히 비난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루이 마운트배튼 경은[24] 훗날 간디가 암살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직후 군중이 무슬림의 짓이라고 외치자 무슬림이 죽인 게 아니라고 외쳤고, '만약 무슬림이 간디를 죽였다면 인도에서는 전면적 내전이 터졌을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실제로 무슬림들은 간디를 존경하고 있었기에 죽일 이유가 없기도 했고. 당장 간디가 죽기 몇 달 전 무슬림과 힌두교도가 싸우던 곳에 간디가 나타나자 며칠 만에 서로 화해하고 축제를 벌였다는 일화가 전해지기도 하니까.
간디를 암살한 나투람 고드세가 속했던 힌두교 극단주의 단체 라시트리야는 지금은 합법 정당이 되어서 인도에서 잘나가고 있다.[25] 물론 나투람 고드세는 이런 정황을 떠나 좋은 소리를 들을 자격이 전혀 없는 살인 범죄자이지만 말이다. 또한 라시트리야는 자신들이 시킨 적이 없다고 했기에 무사한 것이기도 하다. 특히 간디의 영향력을 보면 제아무리 극단주의 단체인 라시트리야라고 해도 정말로 간디를 죽여버리면 분노한 인도 정부에게 당장에 박살날것이 분명해서 죽일 생각을 못했다. 인도 정부가 직접 안나서도 종교를 떠나서 인도의 절대다수의 민중들에게 지지받는 간디인 만큼 정부에게 박살나기 전에 분노한 민중들에게 먼저 처참하게 박살날게 분명했다.
2.5. 사후
인도에서는 단순히 위인을 뛰어넘어서 '''신적'''으로 추앙받고 있다. 5루피부터 2000루피까지 이르는 인도의 모든 지폐에는[26][27] 전부 간디의 초상이 새겨져 있다. 인도의 지폐는 색상과 크기, 적힌 숫자를 제외한 모든 도안이 똑같다. 동전은 엄청나게 다르다. 같은 액수인데도 굵기 크기 등등이 여러가지가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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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있던 지폐들. 현재 500루피와 1000루피는 화폐개혁으로 사라진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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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나온 500루피와 2000루피[28]
보이다시피 5루피부터 2000루피까지 모두 간디가 그려져 있다.
이외에도 동전으로도 여러 차례 발행되었는데, 간디의 탄생 100주년인 1969년에는 이를 기념해 50파이스,1루피,10루피 은화의 3종 주화에 간디의 얼굴을 넣은 주화를 발행했고 2005년 간디가 주도했던 소금 행진 75주년 기념주화에도 간디의 모습이 들어갔으며 2019년에는 간디의 탄생 150주년을 기념해서 150루피 은화를 발행하기도 했다.
3. 사상
간디의 사상의 근본은 '''아힘사'''(무상해)였다. 간디는 정치적인 폭력을 거부했으며 인류애를 통한 폭력 부정을 그대로 정치활동에 실천했다. 그의 생애와 사상은 몇 개의 단어로 대변한다면. 아힘사(비폭력), 사티아그라하[29] (사티아(진리)의 그라하(파악 ·주장)), 브라흐마차리아(감각의 완전한 통제, 금욕), 아파리그라하(무소유) 등을 들 수 있다. 불살생을 실천하기 위해 간디는 평생 채식을 했으며, 진실을 관철하기 위해 투쟁했으나 그 방식은 비폭력이었으며, 욕망의 굴레를 벗어나 브라흐마차리아 또는 해탈에 이르기 위해 금욕을 실천했다. 그는 죽을 때까지 신실한 힌두교도였으나, 다른 종교와 그 교리에도 관심이 많아 성경을 비롯하여 다른 경전 역시도 많이 읽었다.[30][31]하나된 인도를 꿈꾸었던 그가 여러 종교가 사이좋게 공존할 수 있을 방법을 찾기 위해서 여러 종교에 관심을 보인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하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간디는 의외로 카스트 제도의 최하층민인 불가촉천민에게 우호적이었던 적이 없었으며 오히려 이들의 인권 개선 운동을 적극적으로 방해한 주요 인물 중 한 명이었다고 한다. 무슬림들과 시크교도들의 분리선거는 인정하면서도 불가촉천민의 분리 선거를 반대하며 금식까지 불사하였던 인물이고, 하리잔이라는 이름 역시 그런 그를 향한 불가촉천민들의 비난을 잠재우기 위해 꺼낸 카드에 불과했다. 간디는 불가촉천민 해방에 있어서, 빔라오 람지 암베드카르 박사[32] 와 가장 날카롭게 대립했던 인물 중 하나이다.
4. 명언
(간디는 이 말을 하지 않았다는 주장도 일부 존재한다.)
"진리를 찾아가는 자는 티끌보다도 겸손해져야 합니다."
"새로운 진리가 드러나면 그에 따라 생각을 바꾸는 것이 진리에 대한 일관성이다."
"내가 머물러 있어야 한다면 하나의 심부름꾼으로 머물러 있겠습니다."
"교육받은 사람일수록 3등차로 여행해야 한다."
"남들이 단순하게 살 수 있도록 검소하게 살라."
"비폭력은 인류가 활용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힘이다."
"폭력으로 얻은 승리는 패배한 것과 같다. 왜냐하면 그것은 일시적이기 때문이다."
"평화로 가는 길은 없다. 평화가 길이다."
"우리는 힘사(폭력) 속에 갇힌 무력한 인간들이다."
"나는 폭력을 반대한다. 왜냐하면 폭력이 선을 행한 듯 보일 때, 그 선은 일시적일 뿐이고, 그것이 행하는 악은 영원하기 때문이다."
"솔직한 (의견) 차이는 대개 진보를 위한 건강한 신호다."
"자신의 지혜에 대해 지나치게 확신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일이다. 가장 강한 것도 약해질 수 있고, 가장 지혜로운 것도 틀릴 수 있음을 상기하는 것이 건강하다."
"나는 가난한 탁발승이오. 내가 가진 것이라고는 물레와 교도소에서 쓰던 밥그릇과 염소젖 한 깡통, 허름한 담요 6장, 수건, 그리고 대단치도 않은 평판, 이것 뿐이오."
"When I despair, I remember. that all through history the way of truth and love has always won. There have been tyrants and murderers and for a time, they can seem invincible but in the end, they always fall. Think of it. Always." "절망에 빠졌을 때, 나는 기억한다. 모든 역사를 통틀어, 언제나 진리와 사랑이 승리했다는 것을. 독재자도 살인자도 있었고, 그들에게 당장 대항할 수 없어 보여도 결국엔 무너진다는 것을. 이것을 생각하라. 언제나."[34]
"세계의 모든 나라가 다 반대를 하더라도 온 인도가 다 일어나서 나를 잘못이라 하더라도 나는 나서련다. 인도를 위해서 또 세계를 위해서. 나도 지금 우리 나라가 순수한 비폭력의 정치 불복종 운동을 하기에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군사가 준비되지 못한다고 도망을 가는 장군은 스스로를 깎아내리는 것이다. 신은 내게 가장 귀한 비폭력의 무기를 주셨는데, 만일 내가 오늘의 위기에서 그것을 쓰기를 꺼린다면 신은 나를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이 고통받는 세계에 비폭력이라는 좁고 곧은 길 외에는 희망이 없다. 나와 같은 수백만 명이 자신의 평생 동안에 이 진리를 증명하는 데 실패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실패일 뿐 절대 이 영원한 법칙의 오류는 아니다."
"항상 생각과 말과 행동이 완전한 조화를 이루도록 하십시오. 늘 생각을 정화하는 것을 목표로 하면 모든 것이 잘 될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인 것은 자제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오직 자제를 실행하는 한에서만 사람다운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모든 소유를 내버릴 수 있을까. 내 몸부터 훌륭한 소유가 아닌가."
"내가 정욕에 사로잡혀 있는 한, 아내에 대한 나의 성실함은 아무런 가치도 없다."
"노예의 쇠사슬을 끌고 정규 교육을 받느니 차라리 자유를 위하여 무지한 채로 돌을 깨는 편이 낫다."
"나는 민중을 알게 되었고 민중은 나를 알게 되었다."
"관용과 사랑과 참이 있을 때는 서로 차이가 있어도 유익했다."
"신에게 건강한 신체를 내놓는 일은 경건한 사람의 의무다."
"구원을 얻고자 하는 자는 관리인처럼 행해야 한다. 그는 막대한 재산을 관리하면서도 동전 한 푼도 제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한 사람이 할 수 있으면 모두가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자기 동포를 천대하면서 자기가 높아진 듯이 여기는 것은 참 알 수 없는 일이다."
"죄는 미워하되 죄인은 사랑하라."
"나는 늘 가난한 사람들 속에 뛰어들었고 그들과 하나가 될 수 있었다."
"어떤 이에게서 신을 발견할 수 없다면, 그를 더 알려고 하는 것은 시간낭비다."
"24시간 매분마다 신을 깨달아야 합니다."
"한 나라의 위대함과 도덕적 성숙도를 보여주는 것은 그 나라 사람들이 동물들을 어떻게 대하는지 보면 알 수 있다."[35]
※ 동물보호주의에서 자주 인용하는 문구이나, 실제로 간디가 이 발언을 했는지의 여부나 출처는 제대로 확인된 바가 없다.
"세상에는 일곱 가지 죄가 있다. 노력 없는 부, 양심 없는 쾌락, 인격 없는 지식, 도덕성 없는 상업, 인성 없는 과학, 희생 없는 기도, 원칙 없는 정치."
※ 출처 : 간디 자서전(한길사)
" <7가지 악덕>1.철학 없는 정치2.도덕 없는 경제3.노동 없는 부4.인격 없는 교육5.인간성 없는 과학6.윤리 없는 쾌락7.헌신 없는 종교"
※ 출처 : 마하트마 간디 추모공원에 새겨진 그의 묘비명
"약한 자일수록 상대를 용서하지 못한다. 용서한다는 것은 강함의 증거이다."
"내일 죽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사십시오. 영원히 살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배우십시오."
"권리의 진정한 근원은 의무이다."
"My Life is My Message 나의 인생은 나의 전언이다."
5. 비판
인도의 정신적 지주라는 간디도 생전에 실책과 과오를 숱하게 저질렀다. 또한 '''그를 둘러싼 이미지 자체를 뒤흔드는 도덕적 추문'''도 존재한다.
- 간디의 군 복무 기록과 각종 증언을 토대로 간디는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주의자였다는 의견이 강하다. 특히 줄루족을 학살한 보어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을 뿐만 아니라 남아공의 주간지 thought leader mail & blog의 2008년 기사에서도 간디의 인종차별 및 학대에 대한 기사가 작성될 정도로 흑인 사회에서는 간디를 흑인에 대해 적대적인 차별주의자로 생각하고 있다고 한다.[36] 간디가 평화주의자로 알려진 일본과 한국[37] 과는 다르게 직접 연관이 있는 영국 및 서방의 경우에는 이미 간디의 실체를 비판하는 상당수의 기록과 그에 기록하고 분석한 저서가 넘쳐난다. 쉽게 접할 수 있는 저서로는 G.H. SINGH,[38] 'Behind the mask of divinity' 등이 대표적이다. 2016년에 가나에서 간디의 동상 철거요구를 하기도 했다. #
- 간디는 남아프리카 의회에서 "식민지에서 일반적인 믿음은 인도인이 아프리카 원주민 같은 야만족보다 더 낫다는 것이다"라고 공공연하게 발언했다.[39]
- 간디는 다른 힌두교인들과 마찬가지로 백인우월주의를 가지고 있었고 남아공에서 열차를 탈 때 자신이 유색 인종이라 차별을 받은 일은 불쾌하게 여겼지만, 정작 흑인을 남아공 사회 주류에서 배척하는 것 자체는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 간디는 힌두교의 계급제인 카스트 제도를 완전 부정하지 않았으며, 불가촉천민들에게 멸칭인 찬달라(부정타는 자들) 대신 “하리잔”(신의 아들)이라는 칭호로 부르자는 운동을 펼쳤으나, 간디를 의심했던 불가촉천민 측에 의해 거절당했다. 이후 간디는 불가촉천민 측에서 자신의 제안을 거절하고, 빔라오 람지 암베드카르 박사의 인도 하에 불가촉천민들이 신 불교로 개종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타 종교로 개종을 시도하는 불가촉천민에게 집단 테러와 린치를 가한 것 또한 간디를 추종하는 힌두교 단체들이었다.
- 간디는 사실 힌두교를 중시했다고 한다. 독립 당시 종교문제는 신생 인도의 가장 큰 현안이었는데, 간디는 인도가 갈라지는 것은 반대하였지만, 이슬람 등 타 종교와 힌두교간의 평등이나 소수 종교 보호 제도에는 소극적이거나 우회적으로 반대했다. 그 덕에 모하마드 진나 같은 이들은 격렬하게 반발했다.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간디가 충분히 인도의 단결에 이바지할 수도 있었지만 이러한 그의 행동은 사태해결에 도움을 주기는 커녕 악화시켰으며 그의 죽음으로 사태는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 간디는 사실 인도의 계급제도인 카스트 제도 철폐 등 구시대의 악습 철폐에 무관심하였고 서민보다는 부유층과 상위계급에게 호의적이었다는 비판이 있다. 또 하나의 인도 독립의 영웅 빔라오 람지 암베드카르가 카스트 제도 철폐와 서민에 대한 정책에 큰 관심을 보인 것과 달리 카스트철폐 문제에 대해서 '사랑과 온정으로' 천민들을 대하면 된다는 식의 태도로 일관했다. 끝까지 카스트 제도를 옹호하고 카스트 제도 내에서 천대받는 피압박계급에 대해서 주체보다는 객체로 대한 것이다. 게다가 노동자들의 노동쟁의권 자체를 부정하는 제도를 시도하였고 이밖에도 임노동자들의 권리를 약화시킬 수 있는 제도에도 찬성하였다.[40] 이와 관련해서는 인도의 좌파운동가 남부디리파드가 저술한 <마하트마 간디, 불편한 진실>을 참고하라.
- 아내 카스트루바이가 폐에 병이 났을 때 영국인 의사의 진료를 거절했으나, 아내가 죽고 난 후 자신의 학질에는 영국인 의사에게 진료를 받고 장염에는 시술을 받기도 했다는 말이 있고, 이에 대해 일구이언적인 태도라며 비판받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고의인지 아닌지 모를 심각한 왜곡이며, 실제로는 영국인 의사라고 아내의 치료를 거절한 것이 결코 아니다. 사실 간디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이해한다면 이 이야기 자체가 말이 안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간디는 영국인을 차별하지도 증오하지도 않았으며 혼을 나눈 영국인 벗도 있었다.[41]
- 아들인 하릴랄 간디는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영국으로 유학하여 변호사 자격을 취득하려고 하였으나, 아버지 간디가 그것을 강하게 반대했고, 하릴랄의 결혼에 대해서도 평생 금욕을 강조한 내가 어떻게 네게 성을 즐기라고 할 수 있겠냐면서 반대하는 등 여러가지 면에서 지나치게 완고한 아버지에게 벗어나고자 하릴랄은 1911년에 가족과 절연하였다는 말이 있다.
- 또한 1990년대 이후 간디의 성인과 같은 이미지에 걸맞지 않는 부적절한 사생활이 알려짐에 따라서 논란거리가 되기도 했다. 맹세 때문에 평생 금딸하고 살았다고 하는데 대신 몽정으로 고생했다고 한다. 간디 스스로 성욕을 자제하는 것이 칼날 위를 걷는 것과 같다라고 토로하기도. 부인과 부부관계를 할 때야 괜찮았지만 중년 이후 부부관계도 끊었기 때문에 무려 66세에도 몽정을 했다고 한다. 중년 이후에는 거의 끊겼다가 딱 한 번 했다고. 이를 속죄하기 위해서 간디가 택한 방법은 여러 아가씨와 함께 잠을 자는 의식이었다. 밤에 오한에 시달리던 간디는 친한 집안 처녀나 색시, 심지어 조카며느리와 증손녀뻘 되는 친척에게도 나체로 함께 잠자리에 들어 체온으로 몸을 덥혀줄 것을 부탁했다고 한다. 서양의 회춘법 슈나미티즘을 신봉했기에 이같은 행위를 했다는 주장도 있으나 인도의 전통 요법이라고도 한다. 여성들은 다른 여성에 대한 질투로 잠자리에 들었다고 한다. 조카가 자기 아내 대신 자기가 잠자리를 덥혀 드리겠다고 하자 "그러면 내가 금욕한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없다"면서 벌컥 화를 냈다고도. 일간에서는 간디의 금욕기준이 삽입이라고 하는 의견들도 많았다.
- 간디의 생활비는 부유한 상인귀족 세 사람이 댔는데, 이들 중 한 사람은 이런 말을 남겼다.
언뜻 보기에 간디의 생활에는 별 비용이 들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일단 함께 생활하는 추종자들의 수가 대단히 많았고, 간디는 고기만 먹지 않았을 뿐이지 음식에 매우 까다로웠으며, 대식가여서 식사를 자주 했고, 심지어 물도 마시지 않았다. 간디의 일상적인 음료는 레몬주스에 탄산소다를 넣어 신맛을 없애고 꿀을 탄 것이었다. 요즘 식으로 이야기하면 건강을 위해 채식을 한다면서 최고급 유기농 채소만 먹는 경우에 비할 수 있다. 그러니 생활비가 많이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6. 패러디
각종 창작물 속에서 간디가 패러디되는 양상은 대체적으로 둘 중 하나인데, 첫째는 비폭력 무저항 사상을 극단적으로 희화화시켜서 '''호구'''로 만드는 방식이요, 둘째는 아예 이를 거꾸로 뒤집어서 폭력의 아이콘, 숫제 '''깡패'''로 비틀어 버리는 방식이다.
6.1. 동네북
- 미국 대체역사소설 작가 해리 터틀도브의 단편소설인 최후의 신조[42] 에서는 인도를 점령한 독일군 사령관 발터 모델 원수에게 비폭력주의를 설파한다. 하지만 결과는...
- 북두의 권에서 등장하는 무저항주의자의 마을의 장로도 간디에서 따온 듯. 라오우에게 맞아 죽는다.# 재밌게도 문명시리즈에서 간디에게 붙은 별명 중 하나가 세기말 패자.
- 시리어스 샘 2 에서 중국과 비슷한 에피소드에서 적들과 싸우기전 이벤트 동영상으로 민간인이 얽히지 않게 하자~샘이 말하자 적들이 동의하는 부분에서 사람들이 피하는데, 바로 이 간디와 비슷하게 생긴 할아버지가 너무나도 느리게 피하는 통에 샘이나 적들 모두가 지루해하는 장면이 나온다. 100미터도 채 안되는 길을 20분이 걸려 간다고 자막까지 나오고, 나중에 샘은 앉아서 졸고 있다
- 브루스 올마이티에서는 하느님(모건 프리먼)이 브루스(짐 캐리)의 손가락을 7개로 만들어 브루스를 놀라게 하는 장면이 있다. 브루스는 그냥 기겁하고 말았지만, 하느님의 말씀에 따르면 간디는 너무 놀라서 2주간 단식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한때 <간디 올마이티>였던 셈.
- PLAYERUNKNOWN'S BATTLEGROUNDS에선 게임 플레이 방식의 일종으로 최대한 싸움을 회피하며 마지막까지 버티는 플레이를 간디메타로 부른다.[43]
- 미국-캐나다의 성인 애니메이션 클론 하이에서는 간디의 복제인간이 등장하는데[44] 매우 경박스러운 성품의 눈새인데다가 여자도 밝히고 실수로 감옥까지 들어가는 등 사고뭉치 그 자체로 나온다. 게다가 자기 입으로는 인도인이라고 하면서 정작 하는 짓이나 분위기는 영락없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스테레오타입을 따라가는지라[45] 결국 인도에서 간디의 손자를 비롯한 150명의 정치인들이 해당 애니메이션을 제작하고 방영한 MTV의 인도지부에 몰려가 단식투쟁을 하고 건물까지 봉쇄할 정도로 항의했으며, 이로 인해 결국 클론 하이는 시즌 1을 끝으로 종영당했다. 출처 대체 어느 정도였길래 이렇게 거칠게 항의했는지는 간디가 나오는 부분들을 봐보자.
6.2. 패왕
- 스트리트 파이터 시리즈의 달심은 아무래도 마른 모습과 대머리라는 공통점 때문에 국딩~초딩 사이에서 간디라는 별명으로 통했다. 실제로 스트리트 파이터 4의 퍼스널 스킨 중에서는 장난으로 간디 스킨을 입힌 달심이 있다.
- 원피스의 오로성 중 하나가 간디에서 모티브를 따온 것으로 보인다. 험악한 인상이며 연로하신 중에서도 유일하게 검을 들고 계시는 모습 등으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결코 비폭력주의자는 아닐 듯.
다음 주, 그가 돌아온다. 이번엔 꼭지가 돈 상태로 간디 2!
이 영화는 당신이 결코 휘말려 들어가고 싶지 않을 살육극이다.
"꼼짝 마! 머저리들"
그는 1인 소방대원, '''하지만 풍류도 아는 남자.'''
'''"스테이크. 미디엄 레어로."'''
"야, 대머리!"
이 세상에는 단 하나의 법만이 존재한다. '''그가 곧 법이다!'''
간디 2! ||
- 액션에도 일가견이 있다. 실제로 있는 영화는 아니고, 케이블 방송을 소재로 삼은 개그 영화 UHF에서 가짜로 만들어 내보낸 예고편 중 하나. 저 영상 속 간디 역할의 배우는 위어드 알 얀코빅. 채식을 실천했던 간디가 웨이터에게 스테이크를 미디엄 레어로 달라는 장면이 참 인상적.
- 그리고 시드 마이어의 문명 시리즈의 간디는 전통으로 武저항 Be폭력주의자로 유명하다. 수틀리면 핵 쏘신다. 문답무용. 자세한 것은 간디(문명 시리즈) 문서를 보자.
7. 기타
- 제국주의자이자 백인우월주의자였던 윈스턴 처칠은 간디가 인도 총독 궁전 계단을 누더기를 입고 반쯤 벌거벗은 몸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고 "경악스럽고 역겹다"고 했다 한다. 그는 간디가 단식 투쟁 중 아사하길 바랐다 고도 한다. 실제로 처칠은 31세에 식민성 차관이 된 이래로 인도의 독립운동에 대해 늘 강경한 입장을 보여왔으며, 이 시기에 간디를 "벌거벗은 비렁뱅이"라고 모욕하기도 했다.
- 아돌프 히틀러에게 "전쟁 하지 마셈"이라고 충고의 편지를 보낸 적이 있다. 번역은 여기서 읽어 보면 알겠지만 뭔가 주위 사람들에게 떠밀려서 쓴 듯하기도. 물론 '지금 저 인간의 폭주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은 너뿐이야!' 정도의 정황으로 해석하자면 당대 간디의 영향력을 다시 한 번 확인해 볼 수 있겠다. 2011년에 상영된 인도 영화 Gandhi to Hitler는 이를 소재로 했다.
- 인도는 전쟁이 나자 종주국인 영국을 따라 연합국에 가담했다. 대부분은 영국 인도주둔군(British Indian Army) 휘하 인도 여단에 편성되었는데 지원병으로 구성된 인도인 참전 병력은 종전 무렵엔 무려 250만명에 달했으며 다수의 전차여단을 포함해 100개가 넘는 인도 여단이 편성되었다. 하지만, 찬드라 보세 같은 일부 인도 독립지휘자는 오히려 일본군이 인도를 해방해 줄 것이라 믿어 인도국군(India Nation Army)같은 조직을 만들어 추축국에 협력했지만 추축국에 협력한 인도인 병력은 많지 않아서 4만을 조금 넘는 수준에 불과했다.
- 잡지 <젊은 인도>에서 간디는 인도가 피해야 할 7대 사회악으로 '원칙 없는 정치', '인간성 없는 과학', '양심 없는 쾌락', '노동 없는 부', '도덕성 없는 상거래', '개성을 존중하지 않는 교육', '희생 없는 신앙'을 꼽았다.
- 그의 생애를 미화한 면이 많지만 유명한 영화인 간디(영화)에서는 인도계 영국인 배우 벤 킹슬리가 연기했다. 정말로 간디와 닮은 모습으로 열연했기에 간디의 모습을 직접 봤던 인도의 노인들은 촬영장에서 놀랐다고 하며, 간디의 환생으로 착각받은 벤 킹슬리는 촬영 때 고생했다. 사실 의도된 캐스팅으로 킹슬리부터가 인도계로, 킹슬리의 아버지는 케냐에서 태어났고 간디와 같은 구자라트 출신이었다.
- 간디의 유품인 안경 가죽신발 그릇 등이 미국경매에 나오며 인도전역이 한바탕 뒤집힌적이 있다.이에 인도정부등이 가처분 신청을 했지만 경매는 진행됐고 다행히 인도의 갑부가 180만달러에 구입해 인도정부에 기증을 했다.
- 인도의 초대수상인 네루에게는 스승이자 아버지 같은 존재이다 비록 네루와 의견차이로 싸운 적도 있지만 네루가 인도의 총리가 되는 데 큰 힘을 보탰고 1947년에 인도가 인도 자치령으로 독립했을 때에도 비록 의견차이로 충돌하기는 했지만 주변인들 증언에 의하면 네루가 선생님은 구닥다리야 하면서 간디의 의견을 먼저 존중했고 딸인 인디라 간디를 데리고 간디의 집에 방문하는 등 사이는 좋았다고 하며 간디가 암살당하자 반쪽을 잃었다며 힘들어했고 장례식 때 상주 역할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