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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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문
張群
한국식 독음
장군
영문
Zhang Qun

악군(岳軍)
생몰년도
1889년 5월 9일 ~ 1990년 12월 14일
1. 개요
2. 생애
3. 한국 독립운동 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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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화민국의 정치인.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다.

2. 생애


장췬은 1889년 5월 9일 쓰촨성 화양현에서 지방 관료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중학교를 졸업한 후 군인이 되기로 결심하고 1906년 바오딩 육군 속성학교에 재학했고 1908년 봄에 졸업한 뒤 장제스와 함께 일본으로 유학하여 도쿄 진부학교에서 포병과를 수학했다. 1910년 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육군 제13사단 야포병 제19연대에서 사관후보생에 복무한 그는 나카타 현 다카다시에서 군사훈련을 받았다.
그러던 1911년 신해혁명이 발발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비밀리에 귀국하여 상하이에서 천치메이의 혁명군에 가담했다. 이때 그와 함께 상하이에 가서 천치메이의 부대 제5단 단장을 맡던 장제스와 결의형제를 맺었으며, 얼마 후 타오청장 암살사건에 관여했다는 의심을 받은 장제스가 일본으로 망명하자 그 후임으로 제 5단 단장으로 임명되었다. 1913년 계축전쟁이 발발하자 이에 가담하여 위안스카이를 토벌하고자 했으나 끝내 패배하자 일본으로 망명했다.
장췬은 일본 망명 후 군사학을 배우기 위해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여 1915년에 졸업했으며, 화교 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가 다시 상하이로 귀국해 1917년에 쑨원의 호법운동에 가세하여 대원수부 참군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쓰촨성으로 이동해 쑨원파의 세력 확대에 나섰지만 쓰촨성 군벌에게 축출되고 말았다. 이후 베이징으로 이동하여 베이징 정부에서 총통부 총무처장, 교통국장을 역임하다가 1924년 10월 펑위샹북경사변을 단행하자 국민군 제2군 군장이던 후징이(胡景翼)를 따라 쓰촨성으로 돌아갔고, 얼마 후 허난성 경비처장 겸 경비사령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얼마 후 후징이가 병사하자, 장췬은 상하이로 돌아왔다.
1926년 장제스가 국민혁명군 총사령관이 되어 북벌을 개시하자, 장췬은 즉각 여기에 참가해 국민혁명군 총사령부 총참의로 임명되었다. 1927년 장제스가 4.12 상하이 쿠데타 이후 일시 하야하자 함께 하야했고, 그가 일본으로 건너갈 때 함께 가서 당시 일본 수상이던 다나카와 육군대신 시라카와 요시노리와 비밀 회담을 가졌다. 이후 1928년 장제스가 중앙정치위원 주석으로 복귀하자 중앙정치위원으로 복귀했고, 봉천군벌 수장 장쭤린이 일본 관동군에게 폭살당한 사건(황고둔 사건)이 벌어지자 일본 정부와 협상에 나서기도 했다. 장제스는 이러한 그를 전폭적으로 신뢰했고 11월에 국민혁명군 총참모장으로 임명했다.
1929년 3월, 장췬은 국민당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고 상하이 시장을 겸임했다. 이후 그는 중국 공산당 토벌 작전을 수차례 입안했으며, 1933년 7월에 허베이성 정부 주석으로 임명되어 공산당 토벌, 재무 관리, 민중구제를 수행했다. 1935년 12월 장제스가 국민정부를 개각하고 행정원장을 겸임했을 때, 장췬은 외교부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일본과의 교섭에 나섰지만 일본이 협상을 성의없이 임하는 데다 1937년 노구교 사건을 벌인 뒤 모든 책임을 중국 정부에 떠넘기는 등 전쟁을 도발하자, 결국 협상은 실패하고 중일전쟁이 발발했다.
1940년 11월 쓰촨성 정부 주석이 된 장췬은 군사위원회 청두 행정주임도 겸했다. 그는 쓰촨성의 인력과 재력을 동원해 국민정부를 후방에서 지원했다. 그러나 중일전쟁 종결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발발한 국공내전에서 국민혁명군이 공산군에게 패하는 걸 막지 못했고, 그는 1949년 충칭에서 공산군에게 일시 구금되었다가 곧 풀려나자 곧바로 대만으로 도피했다. 이후 대만에서 국민당 중앙비상위원, 행정원 설계위원, 총통부 비서장, 국방회의 비서장 등 요직을 역임했으며, 일본 전문 협상을 담당해 일본을 몇 차례 방문하여 경제협력과 반공전략 등을 일본 정부와 협의했다. 1990년 12월 14일 타이베이에서 병사했다. 향년 101세.

3. 한국 독립운동 지원


장췬은 1930년대 이후 일본의 본격적인 중국 침략에 따른 한국인 탄압과 관련하여 일본 당국과 협의를 진행했다. 1935년 일본군과 일제 만주국군이 치하얼성의 구위안(沽源)과 두스커우(獨石口) 일대로 침공했을 때, 장췬은 일본 측과 여덟 차례에 걸친 대일 회담을 추진했다. 당시 일본은 침공 이유를 중국 측의 대일친선 우호정책의 결여 때문이라면서 다음과 같은 사항을 요구했다.

1. 일본 비행기의 항행 자유

2. 관세 인하

3. 한인의 비법(非法) 행동 단속

4. 일본인 고문의 채용

5. 배일(排日) 언동의 단속

일제는 이러한 다섯 가지 요구조건을 배경으로 추후 중국이 이른바 배일주의 단속을 어떻게 시행하는 가를 주시하겠다면서 협의를 일단락 지었다. 장췬은 이 과정에서 불거진 일본 당국의 항일 한국인 문제를 원론적인 수준에서 동의했지만 한국인 독립운동가들과의 교류를 지속했다. 이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장췬은 일본군으로 동원되었다가 포로가 된 한국인 청년들을 회유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1945년 중국 국민당 정부 군사위원회에서는 포로수용소에 수감되어 있는 한적(韓籍) 포로 활용에 관해 각 지역의 행영(行營) 주임과 전구 사령장관에게 전문을 하달했다. 이에 따르면, “중국정부가 각 수용소에 수감 중인 한적 포로에게 공작을 맡길 필요가 있을 경우에는 사전에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접촉할 것을 청”하고, “포로수용소에 수감 중인 한적 인원에게 공작을 맡길 필요가 있을 때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에 통지”토록 되어 있었다. 당시 청두(成都) 겸 쓰촨성(四川省) 정부 주석을 맡으면서 위와 관련된 업무 수행에 적극 협력한 장췬의 활약은 중국 내 한국인들의 항일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대일 항전에 상당한 도움을 줬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장췬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