펑위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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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중화민국의 군벌, 군인, 정치가.
직예군벌, 안휘군벌, 우한 국민정부, 난징 국민정부 등에 소속되어 있었으며 생애에 수많은 배반을 저지른 적이 있기 때문에 배반 장군이라는 별명이 있었다. 또한 기독교를 신봉했기 때문에 크리스천 제너럴, 즉 기독교도 장군이란 별명도 있었다.[3]
그의 군대를 서북군, 혹은 스스로는 "국민군"이라고 했다. 한때 그의 영지는 옌시산이 지배하는 산시성을 제외한 산해관 이남 화북지역 전체에 달했을 정도로 세력이 컸다.
2. 일생
2.1. 초기이력
펑위샹은 1882년 청나라 군관의 아들로 태어났다. 안휘성 태생이지만 얼마 안 가서 직예성으로 이사를 갔는데 집이 워낙 가난한 터라 입이라도 하나 덜자고 '''11살의 나이로''' 입대를 하게 되었다.[4]
처음에 펑위샹은 졸병 중의 졸병으로 군복과 급식은 받아도 급료조차 받지 못하는 처지였다. 그러나 16살부터 두각을 나타내면서 차차 승진하기 시작했고, 자신의 급료를 어려운 병사들을 돕는 데 쓰면서 병사들 사이에서 인기를 얻었다.
1902년 위안스카이가 북양군을 창설하자 능력을 인정받았던 펑위샹도 북양군에 들어가게 되었다. 1911년 신해혁명이 터졌을 때 그는 지금의 대대장에 해당하는 영장의 지위에 있었는데, 감숙성 란저우에 주둔하고 있었다. 신해혁명의 불길이 란저우에 번지자 펑위샹은 란저우 기의에 동참했지만, 위안스카이가 보낸 군대에 패해 군대에서 쫓겨나고 감옥에 갇힌다. 하지만 1914년에 그는 다시 복직하여 위안스카이 밑에서 일하게 되었고, 7사단 14연대장의 지위로 하남과 산서의 각종 민란을 진압하는 임무를 맡았다.
위안스카이가 홍헌제제를 통해 중화제국을 선포한 이후에는 삼등 남작 작위를 받았다. 이 해에 그는 기독교도가 되었으며, 1915년 12월 25일 호국전쟁이 발발하자 쓰촨 성에 파견되어 반군을 토벌하는 임무를 맡았으나, 반군 사령관 차이어(蔡锷)와 비밀리에 협상했다.
위안스카이가 죽은 이후엔 돤치루이 밑에 있었으며 1917년 4월 그는 계급을 빼앗겼으나 그해 7월 장훈복벽이 일어나자 장쉰의 변자군에 맞서 싸우면서 다시 계급을 회복했다. 이후 돤치루이가 국회 부활을 거부하고 독재를 일삼아 쑨원이 탕지야오, 루룽팅과 연합하여 1차 호법운동을 일으켰고 이것이 호법전쟁으로 번지자 1918년 호법군 진압을 거부하고 평화통전을 보냈다가 돤치루이, 장쭤린의 분노를 사서 계급을 빼앗겼으나, 창더를 점령한 공으로 다시 계급을 회복했다. 1920년 7월의 안직전쟁이 발발하자 원래 주인인 돤치루이를 배신하고 우페이푸에게 붙었다. 결국 1921년 샨시(섬서)의 11 사단장, 8월에 섬서 독군으로 진급했다.
1922년 1월, 치셰위안, 톈중위, 진광원과 함께 량스이 내각을 이완용에 빗댄 우페이푸의 통전에 호응하여 량스이 내각의 하야를 압박했고 4월에 1차 직봉전쟁이 발발하자 하남군벌 자오티의 군대를 격파하고 그 공으로 5월 14일 하남 독군에 임명되어 하남성의 민생을 수습하고 자오티의 재산을 바탕으로 자신의 군세를 확장했다. 그는 자신 휘하의 16혼성여단에게 밀린 8~9개월치 월급을 지급하는 한편 이를 11사단으로 확대했고, 1922년 5월 신병 5개 단을 모집, 제7혼성여단, 8혼성여단, 25혼성여단을 새로 편성하고 1922년 11월까지 2만 명 이상의 병력을 확충했다. 당시 펑위샹의 개혁적인 성향은 그가 5월 9일 결정한 개혁안에 나타나 있다.
- 전쟁지역의 이재민을 구휼하여 잘 흩어지지 않도록 할 것.
- 조세행정을 정돈하고 불법적인 징수를 금지할 것.
- 호구조사 등을 통해 토비의 근원을 제거할 것.
- 순집대[5] 를 정돈하여 개편할 것.
- 탐관오리 등을 체포하여 일반 국민을 안심시킬 것.
- 공장을 건설해 유민을 수용할 것.
- 수로를 정돈하여 교통을 편리하게 할 것.
- 의무교육을 실시하여 계몽에 나설 것.
- 아편, 도박, 매춘을 엄격히 금지할 것.
- 변발과 전족 등의 악습을 없앨 것.
1922년 10월 5일, 우페이푸는 펑위샹과 만나 그에게 독군 자리에서 물러날 것을 요구하며 대신에 다린 자리를 제안했다. 우페이푸의 직접적인 요구를 거절하기 힘들었던 펑위샹은 이를 받아들였고, 1922년 10월 31일 펑위샹은 하남 독군에서 해임되어 육군검열사로 이동되었다. 이때 우페이푸는 하남 독군 대신에 펑위샹의 고향인 안휘 독군 자리를 주기로 약속했으나, 안휘 독군 장문생 등의 강력한 반발 때문에 좌절되었다.
펑위샹의 새 직책인 베이징의 육군검열사는 하남 독군 자리에 비하면 완전히 좌천이나 다름 없었다. 그나마 이 자리도 열하나 차하얼 지역으로 쫓겨날 판이었다가 차오쿤에게 사정해서 겨우 얻은 자리였다. 그곳에서 그는 아편, 매춘을 근절하고 약탈행위를 단속했으며, 여러 개혁조치를 단행했다. 1923년 5월 서북 변방 독판을 겸하게 되었고 11월 장군부의 양무 상장군에 임명되며 기회를 노리게 되었다.
2.2. 군벌의 길
펑위샹은 자신을 등처먹었는데다가 부정부패에 찌든 우페이푸를 매우 증오했는데, 장쭤린이 돤치루이, 쑨원과 손잡고 자신에게 러브콜을 보내자 주저없이 손을 잡았다. 일찍이 하남 독군이 되었을때 펑위샹은 원래는 자신과 같이 우페이푸 휘하인 군벌 포더전(鮑德全)이 짜오티의 동생인 짜오제이(趙杰)와 결탁하고 자신을 배신하여 막대한 피해를 입혔음에도 우페이푸와 친하단 이유로 처벌도 안 받는 것을 보고 여러모로 원한이 많았다.[6]
우페이푸는 회선 사건과 무리한 남방 원정으로 피해가 막심했고, 이 때문의 그의 파벌인 직계 안에서도 그를 경원하는 눈빛들이 많아지고 있었다. 1924년 10월 2차 직봉전쟁이 터졌을 때 우페이푸는 펑위샹을 직예군 3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하며 장쭤린을 공격하라고 명령했고 펑위샹은 그 말을 듣는 척, 휘하의 11사단을 거느리고 짐짓 러허성을 공격하는 체 하다가 10월 20일 총부리를 돌려 베이징을 향해 진군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펑위샹이 자신을 국민군이라 칭하며 우페이푸에게서 독립해버리자, 1사단장 후징이(胡景翼)와 15혼성여단장 쑨예(孙岳)가 동조했다.
펑위샹은 녹종린, 한푸쥐, 스여우싼 등을 이끌고 북경정변을 일으켜 베이징을 점령해버렸고, 옌후이칭 내각을 사퇴시키고 황푸 섭정내각을 출범시킨 후 대총통 차오쿤을 사로잡아 그에게 우페이푸의 파면 명령을 강요했다. 차오쿤이 어쩔 수 없이 우페이푸를 청해성 독판으로 전출시키고 정전령을 하달하자 우페이푸는 정전령이 펑위샹의 강요로 나온 불법명령이니 따르지 않겠다고 저항하다 패해 패잔병을 이끌고 남쪽으로 달아나야 했다. 펑위샹은 차오쿤을 꼭두각시로 삼으려 했으나 장쭤린이 차오쿤 사퇴를 요구함에 따라 차오쿤을 물러나게 했고 핍궁사건을 일으켜 청실을 자금성에서 축출했다. 이후 장쭤린이 베이징에 입성했다. 장쭤린은 즉각 뒤통수를 날리는데, 펑위샹 휘하 2개 여단을 무장해제시켜 자신의 부하로 삼은 것이었다. 이에 격노한 펑위샹의 부하들은 장쭤린을 암살해버리자고 제안하지만, 펑위샹은 그랬다간 남은 봉천군벌들이 분노하여 공격해올 것인데 펑위샹의 세력으론 봉천군을 이겨낼 수 없다고 거부했다.
결국 펑위샹은 한달만에 베이징에서 쫓겨났다. 그리고 1924년 11월 24일, 여러 군벌들의 추대로 안휘군벌의 수장 돤치루이가 임시 집정에 취임했다. 펑위샹은 직봉전쟁의 전리품으로 척박한 샨시와 쑤이위안만을 차지했고, 이 때문에 가뜩이나 장쭤린을 친일분자라고 싫어했던 펑위샹은 장쭤린에 대한 반감이 깊어졌다. 펑위샹은 1925년 11월 궈쑹링이 장쭤린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지원하고 그 패잔병들을 흡수하며 권토중래를 노렸고 돤치루이의 측근 쉬수정을 납치하여 암살했다. 장쭤린은 장쭤린대로 펑위샹의 확장에 불쾌해하며 옛날의 적인 우페이푸와 손을 잡았고 산시의 옌시산도 끌어들여 삼각동맹을 결성했다. 결국 1926년 5월 펑위샹이 옌시산에게 선제공격을 가하면서 직봉풍전쟁이 발발하게 되었다.
2.3. 장제스의 북벌
직봉풍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인 1926년 4월, 펑위샹은 장쭤린을 이기려면 국민당이 그랬던 것처럼 소련과 합작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느끼고 그해 5월에 스탈린의 초청을 받아 모스크바를 방문하였다. 펑위샹은 모스크바에 3개월이나 머물면서 중국 유학생들과 차이허썬, 류보젠을 비롯한 공산당원들과 만났고 소련인들과도 회동했다.
펑위샹이 소련에 있을 동안 펑위샹의 군대는 5월 18일, 옌시산을 공격했고, 이에 장쭤린과 우페이푸가 펑위샹을 공격했다. 이 시기에 맞춰 국민당의 북벌이 시작되면서 우페이푸는 박살이 났지만, 펑위샹의 군세는 우페이푸와 장쭝창의 연합 공세에 패배하여 쑤이위안과 만리장성 일대의 영토를 잃고 간쑤로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국민당이 북벌을 선포하고 북양군벌들에게 칼을 돌리자 펑위샹은 민족주의 혁명에 참여하기 위해 국민당에 가입하기로 결정하고 패전을 수습하기 위해 1926년 8월 15일 류보젠과 소련 고문 유마노프 등을 대동하고 비밀리에 귀국하였고, 9월 17일 우위안 서약을 통해 국민당에 합세할 것을 선언했다.[7] 펑위샹은 자신의 군대를 국민군으로 선포하고 전군을 국민당에 가입시켰다.
한편 펑위샹을 터는데 열중하던 우페이푸는 소련 교관들이 조련한 장제스의 정예부대들의 공격에 당해내지 못하고 밀려나기 시작했다. 우페이푸는 9월에 자신의 수도인 우한 3진을 장제스에게 내줘야 했고 우페이푸의 동맹인 쑨촨팡도 장시에서 쫓겨났다. 우페이푸는 허난으로 도주했고 쑨촨팡도 상하이 등을 내주고 달아났다. 우페이푸가 완전히 몰락하고 옌시산이 국민혁명군의 북진에 놀라 전선에서 이탈하면서 장쭤린이 펑위샹을 공격하기 위해 결성한 삼각동맹은 붕괴되었다.
그런데 펑위샹이 공산당원들을 받아들인지 얼마 안되어 4.12 상하이 쿠데타가 발생, 공산당과 국민당이 쪼개지면서 펑위샹은 선택을 해야 했고 그는 우한과 난징 사이를 저울질하기 시작했다. 일단 펑위샹은 동진을 시작, 시안에서 출병하여 뤄양을 함락시키고 6월에 국민당군과 합류했다. 그리고 왕징웨이의 우한 국민정부와 연합, 우한 군대와 장쭤린의 봉천군이 싸우는 동안 손쉽게 정저우를 함락시켰고, 1927년 6월 10일 정저우에서 왕징웨이와 회담했다.
펑위샹은 정저우까지 전용 열차를 타고 이동한 다음에 일반 병사들의 군복을 입고 군용 트럭 뒷칸에 타고 빵을 씹으며 나타나는 퍼포먼스를 보였다. 펑위샹은 허난 성의 지배권을 비롯, 17만 제곱킬로미터에 달하는 지역의 지배권과 전쟁 지휘권, 또한 장쭤린의 영토에 대한 명목상 통치권[8] 과 금전적 지원도 받아냈다. 장제스의 공세에 밀려 바람 앞에 등불이 된 왕징웨이는 펑위샹의 요구를 모두 받아들였다. 펑위샹은 왕징웨이 앞에서 장제스를 "늑대의 심장에 개의 폐를 가진 냉혹한 놈"이라고 욕하며 왕징웨이를 잠시 안심시켰고 공산당은 이를 국공합작 통일전선의 승리라고 선전했다.
하지만 펑위샹은 왕징웨이에게 새로운 조건을 붙이고 있었다. 다름 아닌 소련 고문들을 귀국시키고 공산당원들을 우한 정부에서 축출하라는 요구였다. 왕징웨이는 울며 겨자먹기로 그 요구도 받아들였다. 하지만 '''6월 19일 쉬저우에서 펑위샹은 장제스와 악수하고 있었다.'''
펑위샹은 자기 휘하의 공산당원들도 모조리 해고해버리기로 결정, 덩샤오핑 이하 공산당원들을 불러 은화를 몇푼씩 나눠주고 시안에서 추방했다. 펑위샹은 즉각 자기 통치 지역에서 반장 포스터들을 모두 떼어냈고, 장제스는 펑위샹에게 매달 200만 위안의 지원금과 허난 성의 통치권을 주었다. 펑위샹과 동맹을 굳건히 한 장제스는 공산당 사냥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사태 추이를 지켜본 옌시산도 장제스에게 붙었다.
한편 계속된 경제위기와 마일사변을 비롯한 군사반란에 직면했던 우한 정부는 농민과 노동자의 무장, 우익 장교 숙청, 토지개혁을 요구하는 코민테른의 5월 지시를 전달받고 7월 15일 분공을 결정했다. 7월 13일 공산당 역시 국민정부 탈퇴를 선언했다. 이로써 국공결렬이 일어나 1차 국공합작은 완전히 종결되었고 공산당이라는 장애물이 없어짐에 따라 우한과 난징 정부가 통합을 결정했다. 이를 영한합작이라고 하는데 우한의 요구에 따라 장제스는 사퇴하지만 장제스의 빈자리를 놓고 서산회의파, 광서파, 개조파 등이 다툼을 벌이다가 양호와 안휘를 지배하던 탕성즈는 당계전쟁으로 퇴갤하고 광서파, 광동파도 장황사변이니 광저우 폭동이니 난징 참안이니 하는 사건들로 입지가 좁아져 결국 장제스의 복귀를 앞당기는 결과를 낳았다. 장제스는 1928년 2월 2일 공식적으로 북벌군 총사령관으로 재추대되었고, 카이펑에서 펑위샹, 옌시산과 회담을 가졌는데, 이때 장제스와 펑위샹은 의형제를 맺었다. 나이가 많은 펑위샹이 당연히 형이었다. 여러 군벌들의 합류로 1928년 4월 7일 장제스가 국민당의 2차 북벌을 선포했을때 1차 북벌때 10만에 불과했던 국민당의 군세는 100만으로 불어 있었다. 당연히 장제스의 좌우엔 펑위샹과 옌시산이 있었다.
산둥의 장쭝창은 무참히 깨져서 베이징으로 달아났고 우페이푸는 쓰촨으로 달아났으며 쑨촨팡은 다롄으로 튀었다. 장쭤린은 대원수가 되어 결전을 각오했으나 장제스의 군대를 막을 순 없었고 결국 본거지인 만주로 달아날 수밖에 없었는데, 만주를 삼킬 야욕에 불타던 관동군은 황고둔 사건을 일으켜 장쭤린을 불귀의 객으로 만들어버렸다. 하지만 장쭤린의 뒤를 이은 장쉐량이 동북역치를 통해 국민당에 복종할 것을 천명하면서 수포로 돌아간다. 물론 세간의 설명과 달리 장쉐량은 아버지의 원수를 갚겠다고 반일감정에 불타는 인물이 아니라 매우 친일적인 인물이었으므로, 만주와 일본의 관계 자체는 크게 훼손되지 않았다.[9]
펑위샹은 베이징을 점령할 뻔 했으나 펑위샹의 세력이 너무 커지는 것을 우려한 장제스가 옌시산에게 베이징 입성을 명하면서 베이징에 돌아올 기회는 잃고 만다. 이후 펑위샹은 동북역치 과정에서 장쭤린에 대한 원한 때문에 봉천군벌에 대해 가장 강경한 입장을 취했고 장쉐량이 국민당에 합류하는 것에 대해 불만을 표했다. 이 때문에 장쉐량은 후에도 장제스, 옌시산과 합작하여 펑위샹을 견제한다는 입장을 취했고 중원대전에서 장제스에게 합류하는 한가지 원인이 되었다.
2.4. 반장전쟁과 몰락
북벌의 성공으로 중국 천하는 국민당의 손에 들어왔다. 장제스가 국무회의 주석, 후한민이 입법원장, 옌시산이 내정부장, 펑위샹은 군정부장 및 행정원 부원장(부총리)이 되었다. 하지만 국민당은 장제스가 철권통치로 다스리는 일사분란한 정당이 아니었고, 어제의 동지였던 여러 실력자들은 전리품을 놓고 침을 흘리며 서로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장제스는 통일국가의 수립을 위해 지방세력들의 힘을 줄이고 경제개발을 위해 군축을 실시하려 했는데, 이 과정에서 실시된 정치분회 폐지와 편견회의의 실시에서 결국 펑위샹, 옌시산, 리쭝런 등의 군벌들과 왕징웨이, 쑨커 등의 국민당 내부 반장 세력들의 불만이 폭발했다.
1928년 7월 11일의 편견회의에서 장제스, 펑위샹, 옌시산, 리쭝런 4인은 200만에 달하는 국민당군을 80만으로 감축하는데 합의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구체적인 감축안을 두고 으르렁대기 시작했다. 자신의 기반이 되는 군대를 줄인다는 계획에 군벌들이 반기를 든 것이었다. 결국 누적된 불만은 1929년 2월, 호남성 정부주석 루디핑이 무단해임된 호남 사건이 계기가 되어 3월 1차 장계전쟁을 시작으로 불이 번졌고 1929년 5월 펑위샹도 반기를 들어 1차 장풍전쟁을 일으켰다. 하지만 장제스는 잽싸게 펑위샹 휘하의 한푸쥐 등을 매수하여 펑위샹의 군세를 붕괴시켰다. 이에 펑위샹은 잠시 옌시산에게 몸을 의탁하여 샨시로 후퇴했고 이때의 반란은 옌시산의 중재로 끝났다. 하지만 펑위샹은 그리 순순히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1929년 9월 장파쿠이가 반란을 일으켰고 장제스에게 진압당했지만, 펑위샹은 10월에 다시 2차 장풍전쟁을 일으켰다. 장제스는 탕성즈를 파견하여 재차 진압했다. 하지만 펑위샹은 1930년 3월 옌시산이 리쭝런, 장파쿠이, 바이충시 등 군벌들에 우페이푸나 쑨촨팡의 잔당들, 반장의 기치를 든 왕징웨이, 쑨커까지 끌어들인 초대형 반란인 중원대전에 동참함으로써 또 장제스에게 반기를 들었다.
최대의 위기에 빠진 장제스는 약법 문제를 처리하면서 산둥에서 옌시산의 병력을 섬멸하여 반란군을 거세게 밀어붙였다. 이러한 상황을 파악한 장쉐량이 옌시산의 러브콜을 무시하고 장제스에게 가담하면서 결국 중원대전도 장제스의 승리로 끝났다. 리쭝런, 옌시산 등이 기반을 사수한 것과 달리 펑위샹은 기반을 모두 날려먹고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펑위샹은 산둥에 칩거했고 그의 옛 부하들은 독자적인 세력권을 구축했다.
2.5. 중일전쟁과 최후
하매 협정과 진토 협정 등 일본의 침략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취했으나, 선안내 후양외 정책 때문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35년 스젠차오가 쑨촨팡을 암살하자 구명운동에 참여했다. 1935년 11월, 기동사변 이후 무주공산이 된 화북의 군정대권을 정리하기 위해 옌시산과 공동으로 군사위원회 부위원장에 임명되었으나 계속된 반장행동 때문에 실권은 없었다. 이 때문에 1936년 서안 사건이 일어났을 때도 명목상 장제스의 군사위원장 직위를 대리했지만 실권은 토역군 사령관 허잉친이 가지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37년 루거우차오 사건을 시작으로 중일전쟁이 발발했다. 펑위샹은 일선에 복귀, 3전구 사령관이 되었으며 화북에 설치된 6전구 사령관도 겸했다. 하지만 베이핑-톈진 전투, 베이핑 탈환전에서 잇달아 패배, 9월 24일에 바오딩이 함락되고 10월 10일에 스좌장이 함락되면서 화북을 날린 펑위샹의 6전구는 폐지되었다. 펑위샹은 이에 책임을 지고 모든 공직에서 사퇴했다. 이후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진군, 화북과 동부 해안가의 주요 대도시를 모조리 점령했다. 일본에 대해 가장 강경하던 펑위샹도 이 상황에서는 절망하지 않을 수 없었고 중국이 6개월도 버티지 못할 것이라 한탄했다.
다행히도 중국은 이후 무려 8년을 버텼지만, 장제스에게 단단히 찍힌 그는 국민정부 군사위원회 위원이라는 명함만이 주어졌을 뿐 중일전쟁 내내 그럴듯한 일을 맡지 못했다. 전쟁이 끝난 이후 그는 1946년 미국으로 건너가 장제스와 장제스를 지원하는 트루먼 행정부를 비판하고 <내가 아는 장제스>란 책을 통해 장제스를 비방했으며 미국 의회에서 장제스를 비판하는 유인물을 발행했다.
1948년 미국에서 소련을 거쳐 중국으로 돌아오기 위해 소련 국적 여객선에 올랐으나, 흑해 오데사 항구에서 선박 화재로 사망했다. 이에 대해 장제스의 암살설이 제기되고 있다.
중국 공산당은 그를 애국 군벌로 높이 평가하면서 1949년 9월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의 주관으로 그의 1주기 추도식을 열었으며, 1953년에는 태산에서 성대한 장례식을 치뤄주었다. 그의 아내 리더취안(李德全)은 중화인민공화국 위생부장(장관)을 지내기도 했다. 지금도 태산에 가면 그의 묘지를 볼 수 있다.
3. 여담
기독교도 장군으로 유명한데 이 때문에 불상을 파괴하거나 절을 공격하는 훼불 행위를 자주 저질러 악명을 얻었으며 우페이푸는 이를 두고 그를 빨갱이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1928년엔 소림사에 불을 질러버리기도 했다고 한다. 병사들에게 소방 호스로 세례를 줬던 일화도 매우 유명하다.
그의 부하들중에 오호대장군과 비슷하게 "서북군 5호장군"이라는 명칭이 붙은 유능한 부하가 있었다. 이들은 장지강, 이명종, 송철원, 녹중린, 유욱분인데, 이중 유욱분은 왕징웨이정권에 붙어 한간이 되었다.
1927년 7월 장제스와 회동하였을 때 장제스는 농민처럼 너무도 초라하게 입고 나온 펑위샹을 알아보지 못하고 가축을 운반하는 유개 화차에 걸터앉은 펑위샹에게 "펑 최고사령관은 어디 계시나?"라고 묻자 펑위샹이 웃으면서 "내가 펑위샹이오."라고 대답했고 펑위샹을 만나러 왔던 장제스, 리쭝런을 비롯한 국민당 소속 장령들은 모두 크게 놀랐다 한다. 하지만 펑위샹은 왕징웨이와의 회담에서 그랬듯이 쉬저우로 이동하는 내내 급사들의 시중을 받으며 호화로운 여행을 하다가 장제스와 만나기 직전 급히 변장한 것이었다.
다만 펑위상은 당시 일반적인 군벌들의 행태와는 달리 사치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탐욕적으로 보이는 외모와는 달리 사생활은 청교도적이었고, 그의 군대도 규율도 잘 잡혀 있엇고 훈련도 잘 되어 있었다. 그가 거느린 "국민군"은 중원대전 직전 22만명까지 늘어났지만 전쟁의 패배로 와해되었다. 펑위샹은 영지에서도 옌시산처럼 비교적 선정을 베풀었다. 다만 옌시산과는 달리 본거지라고 할만한 영지가 없었기 때문에 반장전쟁 이후로는 근거지가 없어서 군벌로서 결국 생명을 다한다.
그나마 올곧고 개혁적인 성향이긴 했어도 펑위샹 역시 군벌인지라 배신과 야합을 밥먹듯 했고 배반 장군이란 별명도 있었다. 본인이 배신을 너무 잘했는지, 부하들도 충성심이 별로 없었고, 그의 몰락에는 부하들의 배신도 한 몫했는데, 결정적인 것은 반장전쟁 당시 심복 한푸쥐가 배신해서 장제스에 편에 붙은 것이었다. 만약 그때 한푸쥐가 배신하지 않았더라면 장제스를 하야시키고 중국의 지배자로 나설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펑위샹의 딸은 공산주의자로 모스크바 유학을 했는데 그녀가 잠시 사귀었던 남자가 바로 장징궈였다.
덩샤오핑이 잠시 펑위샹의 정치부 교관을 맡은 적이 있었다. 4.12 상하이 쿠데타 이후 국공합작이 결렬되고 장제스 휘아에서는 국민당원으로 활동하던 공산당원은 체포-처형되었는데, 펑위샹은 자기 휘하의 공산당원들에게 위해를 가하지 않고 그들에게 여비를 주어 집으로 돌려보냈다. 이후 덩샤오핑은 펑위샹이 장제스가 상하이에서 공산당원들의 목을 쳤듯이 자신들을 얼마든지 죽일 수 있지만 그러지 않고 우릴 공손히 돌려보냈다고 고마움을 표했다.
군벌들 중에서 이례적으로 조지프 스틸웰을 존경하여 미국 방문 시에 그의 집을 찾아 미망인을 방문하기도 했다 한다.
총 2번 결혼하여 3명의 아들과 6명의 딸을 낳았다. 훗날 중공에서 우대받은 리더취안은 두번째 아내다. 두번째 아내의 소생인 펑훙다와 펑리다(딸)는 각각 소련, 미국에서 교육받았고, 중국으로 돌아와 인민해방군 해군 및 군의관으로 일했으며 둘 모두 소장까지 이르렀다. 이외에도 공산당에 동조적이었던 것이 덕을 보았는지 자손들이 태자당 대접을 받아 중국에서 매우 출세한 사람이 많다. 손자중 한명인 펑단위(펑훙다의 아들)는 해군 중장으로 2019년 현재 인민해방군 해군 부사령관이다.
한국 발음은 위에 나와 있듯이 풍옥상인데 풍(馮)을 마(馬)로 잘못 보고 마옥상이라고 표기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4. 주요경력
5. 매체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 50주년을 맞아 제작한 선전영화 건국대업에 잠깐 등장한다. 시위대를 마구 폭행하는 정치깡패들을 부하들을 풀어 제압한 후 네놈들 상관에게 나에게 직접 와서 얘기하라고 일갈하는 등 그가 비판하는 장제스와 국민당의 백색 테러와 대비되어 아주 긍정적으로 다뤄진다. 미국으로 떠나기전 장제스에게 면담을 요청하지만 장제스는 이를 묵살하고 국민당은 이제 곧 망할 것이라고 한탄하며 조국의 앞날이 어둡다며 한낮에도 등불을 들고 다닌다. 그가 소련령 오데사에서 선박화재로 사망하자 마오쩌둥은 물론 시종일관 침착한 모습이던 저우언라이조차 화를 참지 못하며 부하들을 질책한다. 펑위샹의 죽음은 명확하게 드러나진 않지만 장제스의 사주인 것처럼 암시된다.
Hearts of Iron IV의 모드 카이저라이히에서는 산시 군벌의 장군으로 등장한다. 소련의 지원을 받지 못하면서 직봉풍전쟁에서 훨씬 빨리 무너졌고 옌시산이 그와 국민군의 잔존세력을 흡수하며 산시 군벌에 합류했다. 옌시산의 눈칫밥을 먹고있기는 하나 아직도 잔존한 군사력으로 정권을 탈환할 수도 있다. 제작진들이 기독교도 장군이라는 점에 주목했는지 기독교 관련 중점이 많은 편.
6. 참고문헌
- 중국 군벌의 성쇠와 초기 국민정부에 끼친 영향, 오수열, 조선대학교.
- 民國初 地域(小)軍閥의 운명 : 河南 趙倜·馮玉祥政權(1914~1922年)을 중심으로, 손승회, 중국근현대사연구 19권, 중국근현대사학회.
- 장제스 평전, 조너선 펜비, 민음사.
- 덩샤오핑 평전, 벤자민 양, 황금가지.
- 다큐멘터리 중국 현대사 2,3권, 서문당 편집실, 서문당.
- 장개석 연구, 배경한, 일조각.
- 왕징웨이 연구, 배경한, 일조각.
- 장제스 일기를 읽다, 레이 황, 푸른역사.
- 중일전쟁, 권성욱, 미지북스.
- 중일전쟁과 중국의 대일군사전략(1937~1945), 기세찬, 경인문화사.
- 군신정권, 진지양, 고려원.
- 중국현대정치사론, 장옥법, 고려원.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신승하, 대명출판사.
- 영어 위키피디아 펑위샹 문서
- 네이버 지식백과: 펑위샹이 잔여봉건세력을 제거하다.
7. 관련문서
[1] 풍(馮) 자를 마(馬)로 착각해 '마옥상'이라고 잘못 발음하는 경우가 많다.[2] 위키백과에는 2대 행정원 부원장 쑹쯔원이 취임한 1930년 10월 11일까지로 표기하지만 펑위샹은 1929년 5월 24일 1차 장풍전쟁을 일으킨 죄로 공직에서 추방되었다.[3] 군벌들 중에선 자신이 믿는 종교가 별명으로 붙는 사람들이 펑위샹 말고도 있었는데 회교도 장군이라 불렸던 바이충시(백숭희)나 불교도 장군이라 불렸던 탕성즈(당생지), 유교 장군이라 불렸던 우페이푸(오패부) 등이 있다.[4] 14살 설도 있다. 그외에 중간에 바오딩 무비학당을 졸업했다는 정보도 있다.[5] 이는 전 독군 짜오티의 개인 무장 조직이었다.[6] 이 포드전은 은근슬쩍 다시 펑위샹에게 붙으려 했으나 펑위샹은 그를 총살해버리고 이를 추궁하는 우페이푸에게 난군에게 맞아 죽은 모양이다 라고 둘러댔다.[7] 이 자리에 덩샤오핑도 배석했단 일화가 유명하지만 당시 덩샤오핑은 소련에 체류하고 있었으므로 잘못된 설명이다. 덩샤오핑은 1926년 말에 펑위샹의 공산당원 파견 요구에 따라 선발대로 결정되어 1927년 울란바토르를 거쳐 3월에 시안시에 들어왔고 그때부터 펑위샹 휘하에서 정치부 교관으로 근무했다.[8] 즉 우한 정부와 펑위샹이 힘을 합쳐 장쭤린을 몰아내면 그 영토를 펑위샹이 지배하게 해준다는 것이었다.[9] 오히려 관동군은 양위팅을 믿을 수 없는 인물이라 욕하면서 만만해보이는 장쉐량의 승계를 적극 지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