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쭤린

 




'''중화민국 초대 육해군대원수
張作霖
장쭤린 | Zhang Zuolin
'''
[image]
'''이름'''
張作霖 | 张作霖
장작림 | zhāng zuò lín
''''''
우정(雨亭)
'''출생'''
1875년 3월 19일 청나라 봉천성 해성현[1]
'''사망'''
1928년 6월 4일 (54세), 중화민국 봉천성 황고둔
'''국적'''
청나라 [image]중화민국 [image]
'''직업'''
정치가, 군인
'''배우자'''
초취 자오춘구이(赵春桂, 조춘계)
계취 루셔우쉔(卢寿萱. 노수훤)
측실 다이시엔위(戴宪玉, 대헌옥)
측실 쉬슈양(许澍旸, 허주양)
측실 셔우위(寿懿, 수의)
측실 마웨칭(马月清, 마월청)
'''자녀'''
슬하 9남 7녀
장남 장쉐량(張學良)
'''대원수
재임 기간
'''
1927년 6월 18일 ~ 1928년 6월 2일 (350일)
1. 개요
3. 여담
4. 가족관계
5. 주요 경력
6. 창작물
7. 참고문헌


1. 개요


봉천군벌의 수장으로 중국 동북화북 지방을 지배한 중국 군벌 시대의 가장 대표적인 군벌 중 하나이자 장제스 등장 이전까지는 '''대륙에서 가장 막강한 힘을 가졌던 군벌의 수장'''. 그가 보유한 군사력은 국민혁명만 아니었으면 천하통일을 이룰 뻔한 수준이었다. 일각에서는 당시 중국의 주요 세력으로 국민당과 공산당만이 아닌 봉천군벌 역시 한 축을 형성했다고 보기도 한다. 실제로 그는 중국 공산당을 창당한 리다자오를 공격한 뒤 사로잡아 처형했다.

2. 생애




3. 여담


상당히 호탕한 기질을 가졌다고 알려져있다. 1917년에는 자신에게 폭탄을 던진 테러범을 심문한 뒤 도리어 애국자라고 하며 그대로 훈방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이런 성격을 보여주는 사례로는 첫번째 제1차 세계 대전 종전 후 펑텐군기창(奉天軍械廠)[2] 설립 초기의 일화도 있다. 제1차 세계 대전까지 독일 최대의 군수기업이던 크루프베르사유 조약으로 판로가 막히게 되자 많은 잉여 제작설비를 해외에 수출했다. 중국에서도 판매를 위탁받은 네덜란드 업자가 상하이의 신문에 판매 광고를 냈다. 장쭤린은 이를 보고 병공창 총변(總辦)이던 한린춘(韓麟春)에게 이 설비를 구입해오라고 거금을 쥐어 그를 상해로 보냈다. 그런데 상하이에 간 한린춘은 이 돈을 도박장에서 탕진해 버렸다... 자금을 다 날린 뒤에 주군의 비용을 탕진한 것에 대해 죄책감과 두려움이 엄습한 한린춘은 자살을 결심하고 다시 동북으로 돌아가 장쭤린에게 “구매 자금을 도박장에서 다 잃었습니다. 이제야 비로소 도박의 도를 깨우친 듯합니다. 득도한 선인들의 기분이 어땠을지 짐작이 갑니다. 여한이 없으니 황포강에 투신하겠습니다.”는 내용의 유서를 보냈고, 이를 받아본 장쭤린은 도리어 “내 부하 중에 득도한 놈이 생겼다”며 포복절도한 뒤 군수처장을 불러다 "돈 백만 원을 줄 테니 한린춘에게 전해라, 절반은 무기 구매, 절반은 도박에 쓰라 하고 절대 강물에 뛰어들지 자살하지 말라 단단히 일러라" 라고 했다. 뜻밖의 처분에 감동한 한린춘은 다시 도박장에 가서 본전의 4배를 따고는 손을 턴 뒤, 딴 돈을 한 푼도 남기지 않고 기계 구입에 사용했다고 한다. 장쭤린은 그리고 나서 한린춘이 돌아올 때 직접 역에 나가 "너 같은 부하를 둔 게 영광"이라며 엉덩이를 두드려줬다고 한다. 이게 정확히 언제적 일화인지는 불분명하나, 이런 우여곡절을 거쳐 1921년부터 건립된 펑텐군기창은 1928년 완공이 되자 중국 최대 규모의 종합 무기공장으로 발전한다.[3]
또 두번째 일화는 한번은 자신이 세운 군사학교 졸업식 연설문을 작성했는데, 정작 졸업식 당일 날은 내용을 다 잊어버리고 말았다.(...)이에 장쭤린은 "미안하다, 너희들에게 할 말을 다 잊었구나. 열심히 하라, 그럼 나중에 내 모든 것을 너희에게 주겠다." 며 짧은 연설로 마쳤고, 생도들은 환호하며 박수를 쳤다. 군벌이 모든 것을 주겠다 함은 그 지위까지 넘겨주겠다는 뜻이니 좋아할 수 밖에. 그런데 연설을 마치고 퇴장하면서 장쭤린은 하나 잊은 것이 있다는 듯, "내가 잠시 실언을 했다. 다른 건 다 줘도 같이 사는 여자들은 못 주겠다." 라고 정정하자 생도들은 곧장 폭소를 터트렸다.
1927년 군대를 이끌고 소련 대사관을 공격해 중국 공산당 설립한 리다자오를 붙잡아 처형했다.
그를 암살했던 고모토 다이사쿠의 운명은 이후 기구했는데 나중에 중일전쟁에도 참여했다가 일본이 패배하면서 산시왕 옌시산의 수하가 되어 그에게 협조했다. 이후 옌시산이 패하여 광저우로 달아나자 그는 공산당의 포로가 되었다. 공산당은 그를 전향시키려 했으나 고토모 다이사쿠는 전향을 거부했고 황구툰에서 장쭤린을 암살한 것이 국가를 위한 대의였다고 끝까지 정신승리를 하다가 중화인민공화국의 감옥에서 옥사했다.[4]

4. 가족관계


장쭤린/가족관계 문서 참조.

5. 주요 경력


'''중화민국 역대 육해군 대원수'''
[image]
대행

초대

북양정부 멸망
후웨이더
장쭤린
(1927년 6월 18일 ~ 1928년 6월 2일)
'''봉천군벌 역대 수장'''
[image]
1대 '''장쭤린'''

2대 장쉐량

6. 창작물


[image]
  • 중국 공산당 선전영화 건군대업에서 등장한다. 중국배우 왕칭샹이 분했다.
  • 1985년작 한국 KBS1 특집드라마 <전웅실록: 오성장군 김홍일>에선 배우 김재건이 연기했다.
  • 호이4에서 얼굴만 등장한다. 게임 시작 시점인 1936년에 이미 장쭤린은 죽은지 10년 가까이 지난 상태이건만 어찌 중국군 장군들을 모집할 때 랜덤하게 장쭤린 얼굴을 한 사람들이 나온다.
  • 위 게임의 모드 카이저라이히에서는 멀쩡히 살아서 만주에 세워진 봉천정부의 수장으로 등장한다. 독일 제국이 프랑스 코뮌의 지원을 받는 국민당을 격파하고 직예군벌을 통해 청 제국을 부활시키면서 독일을 견제하려는 일본 제국의 지원을 받고 있다. 2차 직봉전쟁까지는 현실 역사와 유사하게 우페이푸와 펑위샹을 꺾고 승승장구했지만 3, 4차 직봉전쟁에서 산둥의 장쭝창이 독일의 압박으로 배신하고 전투에서도 패배하면서 산해관 너머로 다시 갇혀버렸다. 북양정부에서 데려온 옛 교통계 인사들을 내세워 자신들이 유일한 중화민국 정부라고 주장하지만 그걸 인정하는 나라는 일본과 콜차크의 트란스아무르 뿐이다. 청나라를 공격하여 베이징을 장악하면 다른 군벌들과 협상을 해서, 또는 무력으로 전 중국을 통일하고 일본을 손절할 수 있으며 어떤 선택을 하건 장쭤린은 퇴진하고 장쉐량이 뒤를 잇는다. 단, 일본의 영향력이 너무 높으면 안된다.

7. 참고문헌


  • 만주군벌 장작림, 쉬처, 아지랑이.
  • 군신정권, 진지양, 고려원.
  • 현대중국정치사론, 장옥법, 고려원.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신승하, 대명출판사.
  • 장제스 평전, 조너선 펜비, 민음사.
  • 다큐멘터리 중국 현대사 1,2권, 서문당 편집실, 서문당.
  • 원세개 평전, 허우이제, 지호.
  • 중국 근현대사 2권 근대국가의 모색(1894~1925), 가와시마 신, 삼천리.
  • 중국 근현대사 3권 혁명과 내셔널리즘(1925~1945), 이시카와 요시히로, 삼천리.
  • 直皖戰爭과 奉天軍閥의 關內進出, 송한용, 중국사연구 28권 28호, 중국사학회
[1] 현 중국 랴오닝성 안산 시 하이청 시.[2] 후일 동삼성병공창(東三省兵工廠)으로 개칭되어 일본 제국의 괴뢰국 만주국의 주요 군수공장이 되었다가, 일본군이 접수하여 관동군야전병기창, 펑텐조병소주식회사 등으로 발전했다. 보통은 선양병공창(沈阳兵工厂)이라고도 불린다.[3] 1930~40년대 전성기에는 생산 노동자가 3만 명에 이를 정도였다.[4] 말은 저렇게 했지만 소속을 계속 갈아타면서 살아남은 모습에서 알 수 있듯이 단순한 기회주의자였을 가능성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