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폴 마라
장폴 마라(Jean-Paul Marat)
1743년 5월 24일 ~ 1793년 7월 13일
1. 소개
프랑스 혁명 시기 자코뱅의 중심에서 활약한 3인 중 한 사람(나머지는 조르주 당통, 로베스피에르)이다. 개인적으로 부르봉 왕조에 격렬한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으며, 매우 저돌적인 성격의 사람이었다. 스위스에서 태어나 프랑스에서 자랐다.
2. 프랑스 혁명과 행적
1789년 혁명 이후 "인민의 벗(L'Ami du Peuple)"이라는 신문을 발행하며 정치일선에 뛰어들었다. 이 신문은 온동 선동적인 문구로 도배가 되어있으며, 혁명회의에서 '''"인민의 적에게 줄 것은 죽음밖에 없다"'''는 말을 하면서 귀족과 왕당파를 몽땅 없애버려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그 덕분에 프랑스 전 국토에는 한바탕 피바람이 불어오게 된다.
이 무자비한 숙청에 충격을 받은 사람들 중 한 명인 샤를로트 코르데에 의해 마라는 지병인 피부병을 치료하기 위해 목욕을 하던 중 목욕탕에서 암살당하고 말았다. 이 사건은 본인이 살아서 탈출할 생각을 포기하고 저지른 짓이었기 때문에 코르데는 마라를 죽이자마자 현장에서 붙잡혔으며 며칠 후 사형 선고를 받고 단두대로 끌려갔다. 마라가 피부병을 앓았던 이유는, 정적들에게 쫓길 당시 도피처로 파리의 하수도를 이용했기 때문이다. 하수도에서 제대로 씻지도 못한 채 지내야 했으니 피부병을 앓게 된 것.(...)[1]
프랑스 혁명 200주년 기념으로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영국, 캐나다가 합작하여 제작한 영화 <프랑스 혁명> 중 마라의 암살 장면.(2분경부터)
이런 마라의 죽음은 후에 화가 다비드의 '마라의 죽음'이라는 그림으로 묘사되었다. 다비드가 이 그림을 그릴 당시는 마라가 죽은지 꽤 되어서 시체가 심하게 부패된 상태였다. 어느 정도였느냐 하면, 그림에서 욕조 바깥으로 늘어져 있는 팔이 실제로는 시체에서 팔이 썩어 문드러져서 떨어져 나가 있었을 정도였다(!). 그걸 '죽은 직후의 상황'으로 알아서 재현해 그린 그림이다.(…) 다만 상당히 미화해서 그렸다. 애초에 목욕을 하도록 만든 심한 피부병은 전혀 묘사되지 않았고, 실제의 마라는 그림상의 묘사보다 상당히 못생긴 인물이었다.[2]
일설에는 한때는 의학자의 길을 걸었는데 퇴짜를 맞았고, 이 때 퇴짜를 놓은 사람이 바로 산소를 발견한 앙투안 라부아지에라서 혁명 때 라부아지에가 숙청당하고 1년 후 로베스피에르에 의해 사형당할 때 개인적인 감정도 아주 없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그러나 사실 그가 초기에 면허없이 의료행위를 하기는 했지만, 나중에 대학에서 학위를 받았고, 왕족의 후원을 받을 정도로 의사로써의 명성도 꽤 높았다고 한다. 라부아지에와 사이가 나빴던 것은 사실이지만, 의학 문제는 아니었다. 마라는 과학에도 관심이 많았는데, 당대 논쟁의 중심이었던 플로지스톤설을 반박하는 실험을 하고는 논문을 써서 아카데미에 제출했다. 문제는 아카데미가 "오오 꽤 참신하네?"라는 반응을 보이자 "아카데미가 인정한 논문이다!"하고 출간해버린 것. 이것이 당대 이 분야의 최고 권위자였던 라부아지에의 신경을 거슬렸고, "인정못함"이라고 제동을 걸었다. 사실 개인적인 감정이 개입되었다는 구체적인 증거도 없을 뿐더러, 라부아지에의 직업이었던 징세청부업자라는 게 자기 구역에서 재주껏 세금을 뜯어다 일정액의 상납금을 바치고 나머지는 자기가 먹는 일이었기 때문에 대중에게 엄청난 원한을 사는 것이 오히려 당연했고, 따라서 최우선적인 숙청 대상 중 하나였다. 마라는 플로지스톤 관련 논문 다음에는 빛에 대한 논문을 써서 뉴튼에게 도전장을 냈고, 그다음에는 피뢰침과 관련하여 당대 전기에 대한 최고 권위자였던 생 라자르의 이론을 반박하는 논문을 제출한다. 나쁘게 말하면 반항적이고, 좋게 말하면 반권위적이고 실증적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 이는 과학자로써는 중요한 능력이고, 실제로 마라는 과학자로써도 유능함을 증명했다. 빛이 무지개색으로 이루어져있다고 생각한[3] 뉴튼이 틀렸고, 3원색으로 이루어졌다는 마라의 주장이 옳았던 것이다.[4] 어떻게 보면 프랑스 판 벤자민 프랭클린이라 할 수 있다.
프랑스 혁명기의 지도자들 가운데 과격파를 대표하는 인물로, 자코뱅파에서도 그 끝에 가있는 인물이었다. 당통은 온건한 편이었고, 로베스피에르는 귀족들의 무자비한 숙청만은 피하려고 했다. 로베스피에르의 이미지를 생각하면 의외처럼 들리지만, 사실 공포정치가 막을 올린 시점이 바로 마라의 암살 이후다. 오늘날에도 마라에 대한 평가는 "무자비한 사형집행인"과 "혁명 최전선의 투사"로 극단적으로 갈리고 있다. 페터 바이스의 희곡 "마라/사드"가 마라에 대한 이러한 두 시각을 잘 다룬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를 암살한 샤를로트 코르데 문서에도 언급되다시피, 비록 왕당파에게는 잔인했지만 서민들에게는 따뜻하고 관대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오늘날 연상되는 이미지와는 달리 당시 대중의 인기는 대단했다.
3. 기타
이오시프 스탈린은 마라를 개인적으로 존경했다고 알려져 있으며, 강구트급 전함 페트로파블로프스크를 마라라는 이름으로 개명하기도 했다.
어쌔신 크리드: 유니티에서 장 폴 마라의 살인사건을 수사할 수 있다. 정사와 거의 유사하게 진행된다. 따라서 이미 이 사건을 아는 플레이어는 수사를 하지 않아도 범인을 바로 검거할 수 있다.
김영하의 장편 소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에서 주인공이 화집에서 이 그림을 보는 장면이 책의 도입부다. 그리고 후반부에는...[스포일러]
[1] 마라가 앓은 피부병은 가려움증이었는데, 말년에 가려움증이 악화되어 몸에 물집이 생긴데다 목욕도 단순한 물로 목욕한게 아닌 미네랄과 각종 약물을 넣은 물로 목욕하는 목욕 치료였다. 이 가려움증으로 인한 고통이 굉장히 컸던 나머지 마라의 연설은 그만큼 무척이나 잔인했다는 말도 있다.[2] 당시 마라의 외모에 대한 평가는 키가 작고 몸이 기형적이며 얼굴이 흉측했다고 한다.[3] 뉴튼은 프리즘을 이용한 실험으로 태양빛을 무지개색으로 분광시키고 다시 이를 흰색으로 혼합시킨 바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4] 다만 마라가 이를 최초로 주장한 인물은 아니다.[스포일러] 주인공의 직업은 자살조력자라는 가공의 직업으로서, 자신을 찾아온 의뢰인들이 자살하는 것을 도와준다 . 미미라는 호칭으로 불리는 의뢰인도 소설의 마지막에서 주인공에게 욕조에서 칼로 심장을 찔려 죽는데, 이 장면이 위의 그림과 대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