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크 루이 다비드

 


[image]
[1]
'''이름'''
자크 루이 다비드 (Jacques Louis David)
'''출생'''
1748년 8월 30일, 프랑스 왕국 파리 [image]
'''사망'''
1825년 12월 30일, 네덜란드 연합 왕국 브뤼셀 [image]
'''학력'''
파리대학교
'''정당'''
자코뱅
1804년작 <알프스 산맥을 넘는 나폴레옹>
1789년에 그려진 <테니스 코트의 서약>
아마도 프랑스라는 나라가 존재하는 한 영원히 남을 다비드의 유산인 삼색기. 파랑-하양-빨강의 삼색을 맨 처음 제안한 사람은 라파예트지만 지금의 형태인 파랑-하양-빨강의 삼색기를 고안한 사람은 자크 루이 다비드이다.[2]
1. 개요
2. 생애
2.1. 타계
3. 기타


1. 개요


18세기에서 19세기 초반까지 왕성하게 활동했던 근대 프랑스를 상징하는 대표적 화가. 고대 로마, 프랑스 혁명, 나폴레옹의 제정 등을 소재로 한 만흔 고전적 양식의 역사화를 그려 신고전주의의 대표자가 되었다.
그의 주요 대표작들은 위에 서술했다시피 1804년작 <알프스 산맥을 넘는 나폴레옹>과 1789년의 <테니스 코트의 서약>, <마라의 죽음>,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 <소크라테스의 죽음> 등이다.

2. 생애


1748년 8월 30일 프랑스의 도시 파리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자랐다.
일찍부터 그림에 뛰어난 재질을 발휘하여 1774년에 로마에 유학할 기회를 주는 왕립 아카데미의 로마 대상을 받아 이듬해인 1775년이탈리아로마로 유학해 르네상스의 고전적 그림을 공부하고 습득했다. 1780년 프랑스로 귀국해 왕립 아카데미의 정회원이 되어 1781년 살롱에 그림을 출품한 뒤 루이 16세에게 왕립 아카데미에게 루브르 궁전의 아틀리에에서 생활할 권리를 받는 최고의 영예를 얻어, 이른바 성공한 미술가가 되었다. 많은 돈을 번 것도, 부인 마르게리트 샤를로트와 결혼한 것도, 50명 이상의 제자를 둔 것도 이때의 일.
정부에게 호라티우스 그림 의뢰를 받자 "로마에서만 로마 그림을 그릴수 있지"라 하며 다시 제자 3명과 로마로 가서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를 그려 1785년 9월 프랑스 살롱전에 출품했다. 혹자는 로마의 공화정과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찬양하는 이 그림에서 프랑스 혁명의 정신을 볼 수 있다며 곧 프랑스 혁명의 상징이 되었지만, 본인은 정치적인 의미를 담아 그리지는 않았다고. 1787년엔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1789년에는 <브루투스에게 아들들의 시체를 날라 오는 형리들>을 그렸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자 로베스피에르의 친구였던 그는 '''왕정에서 받은 모든 영예를 던져버리고''' 급진파였던 '''자코뱅에 가입'''해, 혁명 정부였던 국민공회의 의장까지 올랐을 정도[3]로 혁명에 깊게 관여한 거물인사가 되었다. 프랑스 혁명 때 문화재를 보호하고 혁명의 현장을 화폭에 담았던 것도 그가 혁명의 중요인사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가 왜 갑자기 왕정에서 받은 권리를 벗어던지고 온건파 지롱드도 아닌 급진파 자코뱅에 가입해 혁명의 최전선에 뛰어들었는지는 아직도 미스테리다.
로베스피에르가 테르미도르의 반동으로 처형당하고 뤽상부르 궁전에 유폐되었다가, 1799년 나폴레옹의 집권 후에 복권되어 나폴레옹의 전속 화가로 일했다. 말에 탄 나폴레옹의 영웅상을 그린 <생 베르나르 언덕을 넘는 나폴레옹> 그림도 이때 그린것. 나폴레옹 1세의 총애를 받아 궁정의 수석 화가로 활약하면서 나폴레옹의 활약에 로마풍의 신고전주의를 투영한 그림을 많이 남겼다.
예술적·정치적으로는 미술계 최대의 권력자가 되어 화단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를 비롯하여 19세기 중엽에 활약한 고전파 화가들은 모두 그의 가르침 및 영향에서 나왔다. 역사적 주제를 그린 작품은 18세기 로코코 미술의 우아·섬려한 것에 비해, 고대조각이 지니는 조화와 질서를 존중하고 장대한 구도 속에서 세련된 선에 의하여 고대조각 그대로와 같은 형태미를 만들어낸 것이 특징이다. 그가 왕정부터 프랑스혁명의 자코뱅 정부, 나폴레옹 정부 모든 시대에 거물 미술가로 있으며 프랑스의 문화를 보존하고 키운 덕분에, 나폴레옹 시대가 끝나고도 프랑스 파리는 유럽 예술의 중심지로 기능할 수 있었다.

2.1. 타계


이후 1816년나폴레옹의 퇴위 후 네덜란드브뤼셀로 망명하였고, 망명 뒤에도 왕정으로부터 프랑스로 귀국해달라는 요청을 받지만 거절하고 조국으로 돌아가지 않은 채 1825년 12월 30일 77세의 나이에 브뤼셀에서 세상을 떠났다. 묘지는 처음엔 생 조스 탱 누(Saint-Josse-ten-Noode) 묘에 안치했다가, 이후 브뤼셀 에베르(Evere) 묘지로 이장했다. 한편 파리에 남아 있던 다비드의 아내가 사망하자 페르 라셰즈 묘지에 안장했는데, 이때 다비드의 자녀들이 다비드의 심장을 가져다가 아내의 무덤 근처에 매장했다.
1989년 프랑스 혁명 200주년을 기념해서 프랑스 정부가 다비드의 묘지를 페르 라셰즈의 납골당으로 이장하는 것을 추진했으나, 브뤼셀 시 측에서 강하게 반대해서 무산되었다.

3. 기타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에서 나폴레옹 퇴위 후에는 능력 발휘할 일이 없었다는 식으로 루이 18세 치하의 프랑스를 묘사하는 과정에서 간단히 언급된다.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 따르면 <마라의 죽음>을 그리게 된 데에는 라부아지에에 대한 복수심이 담겨 있다고 한다. 프랑스 혁명 직전 라부아지에 부부로부터 부부 초상화를 그려달라는 의뢰를 받고 그의 집을 들락날락했는데 라부아지에의 아내 마리안느와 불륜(...)을 한다는 오해를 받아 일방적으로 라부아지에로부터 화가로서는 모욕적인 폭언을 듣고[4] 분노를 하여 그를 파멸시키려고 동분서주하다가 라부아지에를 처형해야 한다고 주장하던 마라가 암살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것을 이용하기 위해 그의 죽음을 그린 그림, <마라의 죽음>을 그리고 공개하게 된다. 당연히 이 그림으로 인해 라부아지에에 대한 비난이 집중되던 차에 라부아지에가 징세청부인으로서의 죄가 있음이 밝혀져 그것으로 라부아지에가 처형되면서 다비드의 복수가 성공했다는 이야기.

[1] 다비드 본인이 로베스피에르의 사후 감옥에 투옥되었을 때 직접 거울을 보고 그린 초상화이다.[2] 삼색기가 처음 국기로 지정된 당시에는 빨강-하양-파랑 순이었다.[3] 물론 그 당시 국민공회의 의장은 14일마다 새로운 의장이 뽑히는 제도라 지도자급이 아니여도 오를 수 있던 자리였다. 자코뱅 정부의 진짜 지도부는 로베스피에르의 공안위원회.[4] 당시 화가라는 직업은 천대를 받는 직종이었던 데다 라부아지에는 나이어린(...) 자기 아내를 극진적으로 사랑하는 애처가였으니 저런 폭언을 할 만도 하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