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세청부업자

 

1. 개요
2. 운용 방식과 문제점
3. 쇠퇴
4. 유사 사례


1. 개요


Tax Farming(징세청부업)/Tax Farmer(징세청부업자)
유럽에서 국왕이나 황제, 작게는 지방 영주에게 돈을 빌려주고 그 돈을 특정 연도, 특정 지역에서 세금을 거둘 수 있는 권한으로 받는 것으로 수익을 얻었던 이들을 말한다.
로마 시대 갈리아 속주에서 세금을 걷는다고 가정하면, 기본적으로는 각 속주에 파견된 재무관이 세금을 총괄하지만 재무관이라고 속주의 모든 지역에 부하를 파견해서 세금을 걷는건 힘든 일이다. 그렇다면 로마 황제 입장에서는 재무관을 파견하는 대신에 '특정인'에게 그 지역의 평균적인 세금을 일시불로 받고, 대신 세금 받을 권리를 넘기면 된다는 생각이 들게 된다. 혹은 그렇게 할 생각 없느냐고 황제에게 건의하는 '특정인'이 등장하게 된다. 크게는 속주 하나, 작게는 마을 단위로 징세행정을 대리하고 그로 인한 이득을 받으며, 국가 입장에서는 징세 행정의 편의성이 증가하고 국가의 구석구석에서도 세금을 걷을 수 있게 해주는 존재인 이 '특정인'들이 바로 징세청부업자이다.
징세청부업은 고대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그리스에서도 있었던 유서 깊은 직종이다. 행정력이 빈약하고 관료제가 발달하지 않았던 고대는 물론이고, 관료 등용 루트가 한정적이었고 행정 비용을 늘리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었던 근세 유럽까지도 계속 존재했다.
성경에서 만인에게 지탄받는 존재인 세리가 이들을 말한다.

2. 운용 방식과 문제점


예를 들면 프랑스 국왕이 영국과 전쟁을 하고 싶은데 군자금이 부족하다고 가정하자. 징세청부업자가 100의 금액을 국왕에게 준다. 프랑스 국왕은 그 100을 돈으로 갚는 대신 매년 40의 징세를 할 수 있는 노르망디 지역에 대한 3년간의 징세권을 징세청부업자에게 넘기는 것이다. 이러면 노르망디 지역은 3년간 프랑스 국왕이 아니라 징세청부업자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되고, 징세청부업자는 3년에 걸쳐 20의 수익을 이자 대신 얻는다. 여기서 그 돈은 국왕이 걷어 해당 징세청부업자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그 징세청부업자가 스스로 직접 세금을 걷는 것이다.
징세청부업자는 말하자면 왕에게 징세권을 돈 주고 사는 것인데 징세청부업이 활발하던 시기에는 징세청부업을 하겠다는 사람이 여럿 나타나니 여기서도 경쟁이 붙어서 징세권 가격이 올라가는 현상도 발생했다. 근세에는 투자자들이 돈을 모아 국왕에게서 징세권을 사서 세금을 거둔 후 수익을 배당 형태로 나눠갖는 사업 아이템도 등장한다.
여기서 몇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1. 국왕 입장에서는 당장 100이 필요해서 120을 얻을 수 있는 세금원을 내줬으니 3년간 더더욱 자금난에 시달리게 된다. 만일 그 3년 동안 또 돈 들 일이 터진다면 다시 징세청부업자를 부르는 일의 연속이다. 실제로 앙시앵 레짐 시기의 프랑스가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징세권을 징세청부업자에게 넘겨야 했다. 즉 돌려막기의 연속을 부른다. 현대에서도 국채를 발행해 부족한 예산을 메우는 등의 일이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2의 문제는 벌어지지 않는다. 국채의 경우엔 채권자가 국가에서 돈을 받기 때문.
  2. 징세권이 징세청부업자에게 넘어간 지역에서는 더 문제다. 예시에 노르망디 지역이 매년 40을 세금으로 납부한다는 것은 평균의 이야기다. 그 3년 동안 불경기나 흉년이 든다면 어쩔 것인가? 징세권이 국왕에게 남아 있을 때는 타지에서 세금을 더 거두거나 나중에 더 받던지 하고 일단은 세금을 감면해 줄 수 있다. 그러나 징세청부업자는 나중이 없다. 3년 안에 원금+이자를 회수해야 망하지 않으므로 적어도 40을 꼬박꼬박 걷어야 한다.
  3. 게다가 더 큰 문제가 있다. 적어도 40이다. 상한선이 없다는 것이다. 만일 징세청부업자가 농민들을 쥐어짜 50, 60을 걷었다고 가정하자. 그래도 징세청부업자는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는다. 징세권을 가진 사람이 세금을 걷은 것 뿐이니까. 따라서 온갖 잡세를 만들어 세금을 늘리고 쥐어짜낼수록 이득이 된다. 처벌규정도 없고, 어차피 3년 뒤면 나갈 거니까 장기적으로 이 지역이 어찌 되든 알 바가 아니다. 로마 시대만 해도 세리들은 적어도 낙찰액의 120%에서 200%의 이득을 얻었다. 이는 탐관오리보다 더 심한 문제인데 탐관오리의 횡포는 그나마 명백히 불법이기에 왕에게 탐관오리를 처벌할 의사가 있고 적발이 되면 얼마든지 처벌할 수 있었다.
  4. 왕이 징세권을 개인들에게 매매하는 것이라고 생각을 바꾼다면, 당연히 징세권 매수 희망자가 많아질수록 가격이 오른다. 말하자면 왕은 돈을 가장 많이 주는 사람에게 징세권을 팔 것이다. 그러면 그 징세청부업자는 수익을 내기 위해 민중들을 더 쥐어짜내야만 한다.
이래서 징세청부업자들은 처음 등장한 이래로 모든 이들의 미움을 사고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 그렇다고 유대인처럼 고리대를 한다고 대놓고 비판을 하지도 못 하는 그런 존재였다. 예를 들면 누가복음에는 세리인 자캐오(삭개오)가 예수를 자기 집에 모시자 사람들이 '''저 사람이 죄인의 집에 들어가 묵는구나!'''라고 했다는 구절이 있다. 예수의 제자 중 1명인 마태오도 이런 세리 출신이었는데, 예수가 그를 비롯한 세리들과 함께 식사를 하자 바리새인들이 '어떻게 당신네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을 수 있소?'라고 따지기도 했다. 그러자 예수는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사람에게는 필요하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자비요, 희생제물이 아니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라고 반박했다.(출처:마태복음 9장 1~13절)
특히 소금세를 거두는 염세리가 매우 악명높았는데, 여자들이 가슴 사이와 코르셋, 허벅지에 잘 숨겨놓았었고, 염세리는 세금을 걷는다는 명목으로 그 여성들의 신체를 멋대로 움켜쥐었기 때문이다.

3. 쇠퇴


근세 시기 징세청부업이 가장 활발했던 루이 16세 통치 하의 프랑스 왕국은 결국 민중의 분노가 폭발해 프랑스 혁명이 터졌다. 이 때 대다수의 징세청부업자들은 목이 날아갔다. 예를 들면 앙투안 라부아지에는 저명한 과학자지만 한편으로 징세청부업자여서 정작 민중에게는 큰 원망을 받았고, 이는 그가 프랑스 혁명에 협력하고 과학에서 큰 공적을 세웠음에도 단두대로 끌려가는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다. 다른 과학자들이 탄원했지만 혁명정부는 듣지 않았다.
한편 근대에 들어 유럽 국가들은 세금의 법제 원칙을 확립했고, 행정 체계와 관료제를 정비하면서 징세를 민간에 위탁하지 않게 되었다. 이로서 징세청부업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4. 유사 사례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권에서는 이 징세청부업자라는 개념이 희박한데, 동아시아권에서는 일찍부터 관료 중심의 중앙 집권 체제가 자리잡아서 징세 작업도 정부가 직접 행하였기 때문이다. 물론 징세 실무를 맡은 관료들이 징세된 세금을 착복하거나 잡세 등의 명목으로 백성들을 쥐어짜내는 경우는 많았으나 징세청부업자의 개념과는 별개의 문제였다.[1]
그렇지만 구한말 조선대한제국에서도 서양의 징세청부업자와 비슷해보이는 역할을 하던 사람들이 있었다. 상인들이 나라에 돈을 빌려주고 대신 특정 지역의 징세권을 가지는 것이다. 이를 외획(外劃)이라 한다. 다만 중앙집권화가 완성된 국가였던 조선에서는 실제 세금을 걷는 것은 수령이 진행했고, 그 돈이 중앙정부까지 들어갔다가 나오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 바로 상인들에게 넘어간 것이다. 이 때문에 '''징세청부'''라고 보기는 어렵고, 현지차입에 가깝다. 위에 언급된 징세청부업자의 단점 가운데 1번은 그대로 나오지만, 2번은 원칙적으로 실현되지 않는다.[2][3] 링크


[1] 관료들의 경우 정식 관리이기에 징세청부업자처럼 징세한 세금을 마음대로 사용할 권리가 '''원칙적으로는''' 없었다. 따라서 관료가 세금을 착복하는건 원칙적으로는 금지되어 있기라도 했다. 징세청부업자의 경우 세금을 거둬 그대로 자기 주머니에 넣는게 합법이고, 권리였다.[2] 실제로는 2의 현상이 나타났다. 대한제국의 세무 행정은 대단히 막장이어서, 중앙정부가 지역에 대해 일정량의 세금을 부과하면 그 지역에서는 그것보다 많이 거두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추가분은 지방 행정에 쓰이기도 하지만 그냥 착복하는 일도 잦았다. 그러나 이는 외획과는 관계가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처벌할 근거는 명확했기에 처벌이 가능했다. 반면 징세청부업자는 처벌근거가 없다. 그게 보장된 권리나 다름없기 때문.[3] 다만 이쪽은 징세청부업자와는 또다른 문제가 터졌는데 징세청부업자는 먼저 내고 걷는 반면 수령은 매관매직이 아닌 이상은 내고 걷는건 없고 매관매직도 왕에게 내는 것이 아니었다. 때문에 나라에서는 수령이 마음만 먹으면 제 때 세금을 받을 수가 없었다. 실제로 조선 후기에 수령들이 걷은 세금으로 돈놀이를 하기 위해서 제금을 제때 바치지 않았고 고종 즉위 후 했던 일들 중 하나가 이런 일들을 없애는 일이었다. 반면에 먼저 내고 걷는 일을 만든 후한 영제시절 같은 경우에는 매관매직이 횡행했음에도 돈은 착실하게 들어왔다. 관리가 되고자 하면 먼저 돈을 바치거나 아니면 외상으로 관리가 된 후 2배를 내야 했는데 받는 대상자가 황제다 보니 영제 자신은 돈을 많이 받아먹었다. 애초 매관매직을 주도한게 황제인 영제 자신이니 당연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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