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보성
1. 개요
중화민국의 정치인. 1996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저보성은 1873년경 중국 저장성 자싱현 남문 메이완제(梅灣街)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찍이 일본으로 유학갔고, 도쿄 토요대 고등경정과를 졸업했다. 그러던 1905년 쑨원이 도쿄에서 설립한 중국동맹회에 가담한 그는 그때부터 쑨원과 공화혁명 세력과 연계하여 활동했다. 1905년 말 귀국한 그는 고향에서 중국동맹회 저장 지부장을 맡았고, 쑨원의 청나라 타도를 위한 투쟁에 동참했다가 여러 차례 해외로 망명하기도 했다. 1911년 신해혁명 후 중의원에 발탁되었으며, 1916년경 장쥐, 우징롄이 이끄는 익우사에 가담했다.
그러나 1917년 부원지쟁 도중 우징롄이 중국의 1차 세계대전 참전에 소극적이나마 찬성을 표하자, 저보성은 이에 반발하여 왕정팅과 함께 정여구락부를 구성했다. 하지만 1918년 호법전쟁이 벌어지던 중인 6월 12일 중의원 부의장에 선출된 후엔 정여구락부와 익우사의 재합당에 동의했다. 이후엔 베이징의 중의원 부의장이자 국민당 인사들의 대표자로서 활약했으나 회선 사건 이후 호법운동이 가망없어지자 이럴 바에야 차라리 각 성마다 자치정부와 헌법을 만들고 각 성이 연합하여 중국을 이끌어가는 연성자치론이 현실적이라고 판단해 그때부터 연성자치론자가 되었다.
1925년 3월 31일 선후회의에 참석한 저보성은 이번 회의에서 연성자치론을 정부의 건설방침으로 삼게 만들고자 노력했지만 정작 회의에서 연성자치론은 토론 대상으로 거론되지도 않았다. 이에 분노한 저보성은 선후회의를 박차고 나갔다. 이후 그는 상하이에 자리를 잡고 상하이전절공회(上海全浙公會) 이사장을 맡아 저장성 일대에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1932년 윤봉길의 훙커우 공원 의거 직후 천궈푸가 김구를 자싱으로 피신시킬 것을 샤오정(蕭錚)에게 지시했다. 이때 당시 동북의용군(東北義勇軍) 후원회 회장이었던 저보성은 절친한 친구였던 박찬익의 요청을 받아들여 김구 및 임시정부 요인들을 지원하기로 했다. 김구는 저보성의 양아들인 천퉁성(陳棟生)의 집에 은거했다. 이 집은 뒤쪽의 운하와 바로 연결되어 있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뒤에 항상 조그만 배를 대기시켜 뒀다. 당시 이곳에 거주하던 임시정부 요인들은 김구 외에도 이동녕, 김의한, 박찬익, 엄항섭, 이시영, 조완구, 차이석 등과 그 가족들이었다. 김구는 이때 중국 남부의 광둥인 장진구(張震球) 혹은 장진(張震) 행세를 하며 일제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자상 민국일보 사장 왕쯔량(王梓良)은 당시 저보성의 지원 사실과 임정 요인, 가족들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저보성 선배는 외부인들이 절대 모르게 하기 위해 자기 소유의 마황탕 공장을 한국 독립운동가들에게 피신처로 제공했다. 한동안 마황탕 공장 안에서 외국어로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렸다. (중략) 왕뎬(王店)경찰소장 진푸위(金璞玉)가 이 일을 유심히 보고 직접 방문해 확인해보니 한국 독립운동가들이었다. 이에 그들에게 강에서 300보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상하이~항저우 간 철로가 있으니 잦은 외출을 삼가고 비밀리에 행동할 것을 부탁했다.”
또한 김구는 백범일지에서 저보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한국인들은 젊고 힘이 셌다. (중략) 매일 오후4~5시가 되면 반드시 당교(塘橋) 위에서 목욕을 했는데 물에서 뛰면서 즐거워했다. 지도자 김구 선생도 소식을 듣고 마황탕으로 이들을 찾아왔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후 김구 등 임시정부 인사들은 일제의 추적을 피해 가흥, 광저우 등지로 피신했고, 저보성은 이후에도 상하이에서 영향력 있는 인사로서 활동하다 1948년경 사망했다.“저선생은 자기 수양아들 집의 호숫가에 정교하게 지은 정자 한 곳을 나의 침실로 정해주었다. (중략) 우리 국가가 독립이 된다면 저부인(주자루이)의 용감 친절을 우리 자손이나 동포가 누가 공경하고 우러러 사모하지 않으랴. 활동사진은 찍어두지 못하나 글로라도 기록하여 후세에 전하고자 이 글을 쓰는 것이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6년 저보성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