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쥐
1. 개요
중화민국의 정치인.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장쥐는 1882년 8월 허베이성 남동쪽에 위치한 창셴(滄縣)에서 태어났다. 그는 7살 때 서당에 들어가 공부했고, 16살 때 부친 장이남(张以南任)이 보정연지서원(保定莲池书院)의 원장을 맡게 되자 그 서원에 들어가 공부했다. 그는 18살 때 일본으로 유학가서 와세다 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했고, 그 과정에서 황싱, 쑨원 등 여러 인사들과 교류했다. 이후 중국으로 귀국하여 <국민일보> 개편에 참여했지만 얼마 후 광시성을 순무하던 왕지춘(王之春) 암살 미수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어 몇달간 옥고를 치렀고, 출옥 후 1905년 일본으로 건너가 동맹회에 가입해 기관지인 <민보> 편집인을 담당했다. 그리고 1908년 이후 아나키즘 활동에 참여해 잡지 <신세기(新世紀)> 출판에 관여했다.
1911년 신해혁명이 발발하자 중국에 귀국하여 국민당 창당에 참여했으며, 중화민국이 출범된 뒤 사교부 주임으로 선출되어 당내 연락 및 당원 모집 등의 업무를 수행했다. 1913년, 장쥐는 초대 참의원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쑹자오런 암살 사건이 벌어진 후 위안스카이의 독재가 심화되자, 장쥐는 쑨원과 함께 위안스카이에 맞서고자 계축전쟁을 일으켰지만 끝내 패하고 일본으로 망명하여 그곳에서 중화 혁명당을 창설했다.
위안스카이가 사망한 후, 장쥐는 쑨원과 함께 호법 운동을 전개했고 광저우 군정부 주일대사를 역임했고, 이후에는 미국으로 건너가 화교들의 호응을 이끌어내고자 노력했다. 1920년 중국에 귀국한 그는 광동군정부 고문, 국민당 광저우 특설사무소 간사장을 역임했으며, 1924년 1월 국민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에서 국민당 제1회 중앙감찰위원으로 선출되었다. 또한 1924년 10월 쉬첸, 리스쩡 등과 함께 펑위샹이 북경정변을 일으키도록 부추키고 그가 쑨원과 우호관계를 맺게 하도록 노력했다. 한편 장쥐는 쑨원의 국공합작 방침에 지지를 표명했고 1922년 8월 하순 중국 공산당원들이 국민당에 정식으로 입당하는 걸 도와줬다.
그러나 1925년 8월 20일 랴오중카이 암살 사건을 빌미로 국민당 우파의 거물 후한민이 숙청되어 소련으로 보내졌고 린썬과 쩌우루도 민혁명의 취지를 화북에 통보한다는 핑계로 화북으로 사실상 추방당한 후 담평산과 임조한을 비롯한 공산당원들이 요직을 차지하자, 장쥐는 공산당이 국민당을 잠식하려 든다고 보고 반감을 품었다. 1925년 11월 23일, 장쥐는 쑨원의 시신이 안치된 베이징 서산 벽운사에서 열린 서산회의에 국민당 우파 인사들과 함께 참석하여 국공합작을 폐기하고 공산당원 추방을 결의했다. 이에 국민당은 장쥐 등에게 사면으로 반성을 촉구하고 2개월 내에 경고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제적한다고 통보했다.
하지만 장쥐 등은 이에 불복했고 국민당 우파와 함께 상하이에 국민당을 별도로 설립했다. 서산회의파의 상하이 중앙은 상하이를 중심으로 2년간 조직을 유지시키며 광저우의 국민당에도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후 장제스가 4.12 상하이 쿠데타를 단행하면서 국민당은 우한 정부와 난징 정부, 그리고 상하이 국민당 중앙으로 갈라져 무려 3개의 분당이 난립하게 되었다. 장쥐 등 서산회의파는 장제스에게도 반대 의사를 표명했지만 1927년 장제스가 하야를 선언하고 국민당 중앙특별위원회가 구성되자, 서산회의파는 반공에 뜻을 같이한 이상 가담하기로 결의하고 상하이 국민당 중앙을 해산하고 난징 국민정부로 합류했다.
장쥐는 난징 국민정부에 합류한 뒤 사법원 부원장 겸 북평정치지회 주석을 지냈으며, 국민당 중앙감사위원, 국민회의 주석단 위원 등을 역임했다. 1931년 9월 일제가 만주사변을 단행하자, 장쥐는 리스쩡, 우톄청과 함께 우한 국민정부에 내전을 중지하고 공동으로 국난을 타개하자고 호소했다. 이후 그는 차이위안페이, 천밍수와 함께 난징 측의 회담 대표로 선정되어 홍콩에서 우한 측과 협상을 벌였고, 그 결과 영월합작이 성립되면서 국민당은 비로소 하나로 통합되었다. 대신 우한 정부에 있던 공산당원들은 제명되어 체포되거나 추방되었다.
이후 화북판사저 주임을 맡은 장쥐는 1935년 아버지 시종빈을 처형했던 쑨촨팡을 살해한 스젠차오를 선처해달라고 호소했으며, 제1차 상하이 사변 후 국민정부가 수도를 뤄양으로 이전하는 방안을 계획했을 때 서경계획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고, 국민당 화북사무소 주임을 겸임했다. 그는 이후 뤄양과 시안, 베이징을 왕래했다. 1936년 12월 서안 사건 후 국공합작이 재개되자, 장쥐는 1939년 옌안을 방문해 공산당과 협의했다.
이후 고궁박물관 건립에 참여했으며, 민국사 편찬에도 관여했고, 국부위원과 국민당 중앙감사위원을 역임했다. 1946년 제헌국민대회에 참석하여 주석단 일원으로 선출되었고 연말에 국사관 관장을 맡았지만 1947년 12월 15일 난징에서 병사했다.
3. 한국 독립운동 지원
장쥐는 1912년 상하이에서 설립된 신아동제사에 가담해 신규식, 박은식 등 한국의 독립운동가들과 교류했으며, 1942년 충칭에서 조직된 한중문화협회에도 가입해 김구, 조소앙 등과 교류했다. 또한 1919년 11월 백남규, 허정(許政) 등이 프랑스로 유학갈 때 이를 도와줬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광복군을 창립하고 일제에 맞설 때 이를 측면에서 지원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이러한 공로를 기려 1968년 장쥐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