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법전쟁
1. 소개
1917년, 돤치루이의 무력 통일 방침에 반발한 남방 군벌들이 반발하여 호법군 사령부를 세우고 독립하자 무력통일을 원하던 돤치루이의 북양정부가 이에 대한 토벌을 선언, 남과 북의 군벌들이 무력으로 충돌한 사건을 말한다. 남방과 북방 모두 내분의 극치를 보여주었으며 특히 북방에선 직계와 환계의 충돌로 정권이 바뀌는 등의 혼란상을 보여주었다. 1918년 남북 군벌들간의 화해 끝에 흐지부지하게 끝났다.
2. 배경
2.1. 호국전쟁과 호법운동
1915년 중화민국의 독재자 위안스카이는 홍헌제제를 통해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그간 위안스카이의 전횡에 불만을 품던 남방의 실력자들과 혁명당의 궐기로 호국전쟁이 일어나자 열강의 지지를 잃고 궁지에 몰려 1916년 3월 23일 제제를 취소하고 6월 6일 사망했다. 이후 위안스카이의 유언에 따라 부총통 리위안훙이 대리총통이 되었는데 북방에서는 이것이 위안스카이가 1914년 발표한 신약법에 의거한 것으로 보았고 남방에서는 1912년의 임시 약법에 의거한 것으로 보았다. 남방에서 신약법의 폐지와 국회의 회복을 주장하면서 호법운동이 시작되었다. 일단 리위안훙 정부가 이를 수용하면서 호국전쟁이 일단락되었지만 돤치루이의 독재가 시작되면서 다시 남북 갈등이 빚어졌다.
자세한 것은 중화민국 국회 해산, 홍헌제제, 호국전쟁, 1차 호법운동 문서 등 참조.
2.2. 호법정부의 수립과 남북대립
장훈복벽 이후 돤치루이는 장쉰이 해산해버린 구국회를 무시하고 일방적인 독재를 일삼았다. 1917년 7월 12일 복벽을 진압한 돤치루이는 7월 14일 량치차오의 <민국 재조설>을 구실로 국회와 약법 복구를 거부하고 독일에 선전포고하고 안휘군벌의 세력확장과 무력통일에 진력했다. 이에 쑨원은 남방으로 내려가 8월 19일 군정부 조직을 통전하고 남방의 실력자들과 혁명당원들을 모아 돤치루이의 독재에 저항하기로 하였다. 실력 확장을 꾀하던 루룽팅, 탕지야오 등의 군벌들이 호응하고 왕징웨이, 탕사오이 등 여러 당원이 속속 모이면서 9월 10일 쑨원이 육해공 대원수에 취임했다.민국 6년 가을에 나는 함대를 이끌고 남방의 광저우로 갔다. 국회가 비상회의를 열고 나를 대원수로 임명했다. 그래서 나는 호법의 깃발을 들고 나섰다. 서남의 장사들 중에는 반대의견을 가진 자도 있었지만, 표면상으로는 호법을 받들었으며 드러나게 반기를 들지는 않았다. 서남과 북방의 싸움은 순전한 호법과 비법의 싸움이었다.
쑨원이 자기가 지은 중국혁명사에서 밝힌 당시의 정황
3. 호법정부의 약점
하지만 쑨원의 호법정부는 독자적인 군사력이 없으며 재정력이 취약하다는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북양정부라고 훗날의 장제스나 더 훗날의 마오쩌둥 정권에 비하면 취약하긴 매한가지였지만 최소한 중국에서 가장 부유한 재정과 독자적인 군대를 보유하고 있었으나 쑨원은 어디까지나 자신을 초청한 탕지야오, 루룽팅 등의 군사력에 얹혀사는 처지였다. 즉 그들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퇴출될 수 있었고 나중에 2차례나 그런 일을 겪게 된다. 자신들이 실세임을 아는 탕지야오, 루룽팅 등은 쑨원이 내각도 구성하지 못하도록 방해를 일삼았으며 호법정부의 통제를 전혀 받지 않고 마음대로 행동했다. 그리고 이들은 호법정부를 애초에 이용할 생각이라서 쑨원이 외치는 북벌과 호법운동에 대해선 신경도 쓰지 않았다. 오히려 쑨원이 푸젠 성에 대한 북벌을 준비하자 이를 방해하며 무산시키기도 했다. 호법정부가 거느린 병력은 기껏해야 쑨원의 친위부대 조금과 약간의 해군이 고작이었다. 게다가 호법정부는 고정된 수입이 없어서 오로지 기부금에 의존하였다. 즉 쑨원의 남방정부는 사실상의 사상누각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호법군은 명목상 광서사단 4개 사단, 광동사단 10개 사단, 운남, 귀주사단 6개 사단 등 15만 정도의 병력을 갖추었으나 쑨원이 통제할 수 있는 병력은 앞서 설명한 듯이 거의 얼마 되지 않았고 이들은 전계군벌 탕지야오와 계계군벌 루룽팅의 휘하에 속해 있었다. 반면 북양군의 실질적인 우두머리인 돤치루이는 비록 북양군벌 내부가 직예군벌, 안휘군벌, 봉천군벌 등으로 갈라지긴 했어도 당시 중국에서 가장 강력한 병력을 갖추고 있었으며 북양군벌 전체를 합칠 경우 64만에 달하는 대병력을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돤치루이는 지나친 친일행위으로 인한 민심 이반과 북양군벌 내부의 파벌 갈등 및 관할해야 하는 전선이 너무 넓어 병력이 분산되어 있다는 약점이 있었고 이는 실제로 북양군벌 내부의 파벌 싸움이 심해지면서 그에게 치명적인 약점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4. 전개
4.1. 호남과 사천에서의 충돌
돤치루이는 군정부를 제압하기 위해 개전준비에 착수했다. 8월 초순, 돤치루이는 심복인 육군부차장 푸량쭤를 호남독군에 임명했으며 악양으로 북양군대를 남하시켰다. 또한 사천에서는 우광신을 장강상류총사령 겸 사천사판사로 임명하였고 일본에게 제공받은 차관을 바탕으로 구비를 충족시키고 있었다. 원래 사천성은 호국전쟁에 앞장섰던 차이어가 사천독군으로 임명되어 그의 세력 하에 있었는데 차이어는 호국전쟁이 끝나고 얼마 안되어 1916년 11월 젊은 나이에 병사했다. 이에 탕지야오는 사천성을 지배하기 위해 나패금을 사천독군대리로 임명하였으나 사천의 토착 군벌인 류존후가 반발하였다.
이 충돌을 알게 된 돤치루이는 나패금과 류존후를 모두 면직해버리고 대감을 사천성 성장대리 겸 독군으로 임명했다. 하지만 류존후는 대감이 부임해오자 반발하며 그에게 자리를 내어주려 하지 않았다. 이에 대감은 1917년 전계군벌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탕지야오는 사천을 차지하기 위한 절호의 기회라 판단하여 대감을 지원하여 사천성에서는 환계, 전계, 사천 토착 군벌이 얽히는 대혼전이 벌어졌다. 이 싸움에서 탕지야오는 패배하여 사천성에서 축출되었다.
1917년 7월 1일 장훈복벽이 발생하자 탕지야오는 7월 3일 장쉰을 토벌하겠다는 통전을 보냈다. 7월 12일 장쉰이 토벌되고 7월 14일 돤치루이 내각이 재출범하자 쑨원이 7월 17일 광저우로 남하, 1차 호법운동을 전개했다. 이에 탕지야오는 이에 호응하며 사천성을 안정시킨다는 구실로 사천성으로 출병했다. 이에 류존후는 북양군벌과 손잡기로 하였고 돤치루이는 류존후를 사천독군, 장란을 사천성장에 임명하여 전계군벌을 저지하게 하였다. 이어 장강 총사령 겸 사천사판사 우광신이 북양군을 이끌고 충칭에 진주하면서 사천성은 북양정부의 지배 하에 놓였다.
그러던 중 광저우 군정부 수립 직후인 1917년 9월 18일, 영릉진수사 유건번과 형양의 호남군 여장 임수매가 돤치루이의 무력통일에 반대하며 자주를 선포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들은 자신들을 호법군 호남사령관이라 일컬으며 10월 6일 호법군 호남사령부를 세우고 청첸을 총사령관으로 추대하여 북양정부와 전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4.2. 쑨원의 북벌계획
한편 쑨원은 9월 20일 '북벌 작전계획'을 제출, 내분에 빠져 혼란스러운 북양정부를 공격한다면 11월 말까지는 난징을 점령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쑨원은 북양정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실제로 북양정부는 자신의 기반인 강소성에 전화가 퍼질 것을 우려한 화평론자 펑궈장과 주전론자 돤치루이의 충돌이 극심하였으며 내몽골, 산서, 산동, 하남에서의 반란과 독립 요구가 끊이지 않아 돤치루이가 당장 동원할 수 있는 군대는 7개 사단이 고작이었다. 반면 쑨원은 10개 사단 동원이 가능하였으므로 체급 차이를 운용 가능 병력 수로 넘어설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쑨원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쑨원은 북벌 계획을 1,2기로 나누었는데 1기는 중앙군이 광동, 광서에서 호남의 성도 창사로 진격하고 호남 전역에서 북양군을 몰아내는 와중에 좌익군이 사천을 해결하고 다시 동쪽으로 내려와 호북으로 들어오길 기다려 무창을 공격해 점령한다는 것이었다. 이때 좌익군은 사천성 북방을 방비하고 섬서와 산서의 적을 견제하며 제2기 작전의 호응을 기다린다. 우익군과 해군은 합동으로 복건, 절강을 함락한 다음에 오송과 상하이를 점령, 난징에서 중앙군과 합류한다. 이렇게 장강 상하류의 적을 모두 소탕하고 오송을 근거지로 해군이 적함을 소탕하며 육군을 원호하며 전군이 난징을 총공격해 점령하는 것이 1기 작전의 끝이었다. 작전에 따르면 이 시기는 11월 말이어야 했다."우리 군대의 총수는 적군을 훨씬 상회하고 있다. 각 사단의 결원 인원수로 2할을 빼낸다 하더라도 적군보다는 3분의 1이 더 많다. 실력을 비교해 본대도, 전투장비가 적군에 미치지 못하는 점을 제외한다면 다른 점, 예컨대 보급력, 병력, 마필의 전투력에 있어서는 적군과 큰 차이가 없다. 오히려 남하한 적군에게는 지형과 기후에 익숙하지 못한 불리함이 있으므로 승산은 우리 쪽에 있다. 적군은 작전에서 병력을 우한 이남으로 집중시킬 것이다. 그들의 주력을 사천성, 호남성으로 보내기 위해, 또는 서쪽이나 남쪽으로 이동시키기 위해서도 그 지방을 통과하는 것이 가장 쉽기 때문이다."
2기 작전은 장강 이북을 동영의 땅으로 정하여 보급물자를 비축하고 병력과 마필을 보충하며 장비를 정비하고 병력을 2개월 이상 휴식하게 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후 3월이 되면 중앙군이 진포 철로, 좌익군이 경한철로로 북진, 우익군이 요서지구에 상륙, 좌익군의 지대가 섬서, 산서를 진군하며 본군을 원호하고 각군이 베이징에서 합류해서 총공세를 펼친다는 것이었다.
4.3. 돤치루이의 토벌령과 호남-사천 전역
호남에서 임수매, 유건번, 청취 등이 봉기하자 결국 돤치루이는 9월 29일 쑨원과 비상 국회의장 우징롄 체포를 선언하고 본격적인 무력 대응에 나섰다. 상황이 급박히 돌아가는 상황에서 앞서 설명한 바와 마찬가지로 쑨원의 말을 듣지 않던 루룽팅, 탕지야오 등이 비협조적으로 굴자 쑨원은 자신의 계획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쑨원은 북벌 계획을 대폭 수정, 10월 1일 '복건-절강성에 대한 단독작전계획'을 제출했다. 1500자에 달하는 이 작전계획은 말 그대로 동남의 복건과 절강만을 공략하자는 것으로 북양군 주력이 주둔한 호남성에서는 수세적으로 나가며 장강 하구의 상하이를 점령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하지만 이런 수정된 계획안이 사용될 겨를도 없었다. 10월 6일 이우문 휘하의 호남육군 제1사단이 헝양 북동 40킬로미터 지점에서 군정부와 최초의 전투를 벌였다. 쑨원은 10월 7일 돤치루이, 량치차오에 대한 토벌령을 선언하고 전쟁 상황에 돌입했다. 북양군 여단장 2명이 귀순해오고 이우문이 달아나는 등 첫 전투에선 군정부가 손쉽게 승리하였다. 군정부는 청첸을 호남 총사령관으로, 탄하오밍을 광동, 광서 연합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원군을 파병했다. 하지만 북양군벌 역시 순순히 물러날 생각은 없어 니쓰충 휘하의 지원군을 파병했다. 초기에 군정부는 형양을 뺏기는 등 수세에 몰렸으나 전쟁에 반대했던 펑궈장이 범국장과 왕여현에게 지시를 내려 11월 14일 정전을 통전하고 군사를 철수시킴에 따라 11월에 반격에 돌입했고 돤치루이에게 불만을 품고 있던 직계 군벌 범국장과 왕여현이 일방적으로 철수한 덕에 11월 14일 창사를 점령했고 12월 사천성에서 5사단장 웅극무가 호법전쟁 참가를 선언, 호법정부에 가담하여 우광신을 사천에서 축출하고 사천정국각군총사령관으로 추대되어 류존후를 몰아내기 시작했다. 이리 하여 사천성의 성도 청두가 호법정부의 손에 떨어졌고 1917년 12월 15일 탕지야오는 충칭에서 전검천 3군 장군회의를 소집하여 정국군을 일으켰다.
하지만 여기서부터 군정부가 삐걱거리기 시작하여 탕지야오는 서남 각성 연합회의를 조직하여 군정부를 대항하려는 의사를 보였고 11월 4일 리례쥔을 시켜 각 성의 의견을 묻는 단계까지 갔지만 루룽팅이 남북화의의 기미가 보이니 늦추자는 태도를 표명하면서 일단 중단했다. 하지만 12월 31일 북양정부가 용제광을 양광순열사로 임명하자 루룽팅도 태도를 바꾸어 1918년 1월 15일 광저우에서 서남 각성 호법회의를 성립하였다. 이 호법회의는 명목상 군사상의 소통을 위한 것이라 쑨원도 처음에는 찬성했지만 호법회의가 사실상의 정부 형태를 띄면서 호법정부를 압박하는 지경에 이르자 이를 약법에 근거가 없는 또 하나의 독군단으로 비난했다. 장병린도 호법회의의 배후인 천춘쉬안을 제2의 니쓰충, 제2의 이완용이라고 비난하면서 일단 서남연합회는 취소되었다.
4.4. 군정부의 분열과 환계와 봉계의 동맹
북양군의 거듭된 패배에 직예의 차오쿤, 호북의 왕잔위안, 강서의 진광원, 강소의 리춘 등 4명의 독군이 베이징에 전문을 보내 돤치루이에게 군정부와 화평교섭할 것을 요구했다. 결국 돤치루이는 호남, 사천의 패전에 책임을 지고 국무총리 자리에서 하야했고 후임으로 왕스전이 총리에 올랐다. 이 기세를 틈타 펑궈장은 11월 25일 정전명령을 내리고 탕지야오, 루룽팅과 접촉했는데 남방이 이에 호응했다.
허나 돤치루이는 아직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돤치루이는 차오쿤에게 부총통의 자리를 약속했다. 돤치루이는 그가 구상하는 남방공격에 차오쿤도 동참시키는 한편 차오쿤을 이용하여 장강삼독도 포섭하려 했다. 돤치루이가 양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차오쿤의 요구도 거세져서 그에게 4개 성의 군사업무를 맡길 것이며 2개 혼성여단, 헌병대, 경찰대를 확충해주고 이를 위한 매달 130만 위안의 경비를 요구했다. 결국 12월 3일 쉬수정의 주도로 안휘독군 니쓰충, 산동독군 장희지, 직예독군 차오쿤이 톈진에서 1차 텐진회의라고 불리는 북양군 독군단 회의를 열고 펑궈장에게 토벌령 선포를 강요했다. 이에 펑궈장은 마지못해 18일 돤치루이를 참전독판에 임명, 돤치루이는 사직한지 1개월이 채 못되어 다시 군권을 차지하게 되었다.
쑨원은 12월 2일 휘하의 20영을 원민월군으로 조직하여 천중밍을 총사령관으로 삼고 복건독군 리허우지를 공격하게 했으며 1월 23일 악양으로 진공했다. 악양의 북방군은 모두 화평파라서 시내에 불을 지르고 철수했고 1월 27일 군정부가 악양을 점령했다. 이로써 원했던 호남과 사천을 모두 얻은 루룽팅과 탕지야오는 쑨원의 반대를 무시하고 펑궈장의 접촉에 호응, 1918년 2월 2주간의 휴전협정을 체결했다. 하지만 악양의 함락에 돤치루이 등 주전파가 크게 자극받았다. 환계의 쉬수정은 장쭤린에게 산해관 이남으로 봉천군을 출병할 것을 요청했고 부총통 자리와 일본제 무기를 가로채게 해주겠다고 제안했다. 장쭤린은 이를 수락, 1개 여단을 거느리고 남하했으며 1918년 2월 25일 양위팅을 진황도에 파견하여 일본제 무기들을 탈취했다. 펑궈장과 돤치루이는 즉각 무기의 반환을 요구했으나 장쭤린은 남정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며 이를 거절했다.
1월 31일 강소독판 리춘이 쑨원에게 무력통일에 반대한다는 통전을 보내고 2월 14일에는 펑위샹이 화평통전을 요청하면서 환계의 입지가 좁아지자 쉬수정은 장쭤린에게 신속히 봉군을 출동시키고 돤치루이 내각 회복을 도울 것을 요청하였다. 1918년 3월 6일 장쭤린이 장징후이에게 선발대를 이끌고 베이징으로 진군하게 하였고 자신도 후속부대를 이끌고 남하하여 펑궈장을 압박했다. 장쭤린은 평화 통전을 돌린 펑위샹을 토벌할 것을 요구하고 돤치루이 내각의 회복과 동삼성순열사 설립을 요구했다. 3월 12일 장쭤린은 남정봉군총사령부를 설립하고 총사령관이 뒤었으며 쉬수정을 부사령관에, 양위팅을 참모장에 정초를 참모부관에 임명, 5만 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펑궈장을 압박했다. 여기에 옌시산 등이 연명으로 호법군 토벌을 요구하자 펑궈장은 굴복할 수밖에 없었고 1918년 2월 19일 왕스전 내각이 사퇴하고 대행 첸넝쉰을 거쳐 3월 23일, 돤치루이가 다시 국무총리가 되었다. 이로서 정국은 환계가 다시 주도하게 되었고 주전파가 득세했다. 이쯤되자 펑궈장이나 왕잔위안, 리춘, 진광원 등 전쟁에 반대하던 장강삼독도 더 이상 저항하지 못했다.
북양정부가 일전을 준비하고 있는 동안 광동 군정부는 정치적 내분 때문에 혼란에 빠져 있었다. 쑨원의 지시에 루룽팅이 무시로 일관하고 쑨원이 자신의 독자적 군사력을 갖추려 하자 이를 방해하는 등 내분이 심각했다. 쑨원은 광동성장 주경란의 경위군 20대대를 광동에 주둔시키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겨우 자신의 직할 병력으로 만들 수 있었다. 1918년 1월에는 광동독군 막영신이 죄없는 군민 60여명을 살해했는데 이에 쑨원이 토벌을 명했으나 해군총장 정벽광은 쑨원의 지시를 거부했다. 이에 쑨원이 직접 군함 2척을 지휘해 막영신의 독서를 포격하여 겨우 그의 사죄를 받아낼 수 있었다. 게다가 정벽광이 해군의 힘으로 광동성장에 취임하려 들자 루룽팅, 막영신이 2월 26일 정벽광을 암살하기에 이르렀다.
4.5. 북양군벌의 분열
군정부가 내분에 휩싸인 사이 우페이푸가 지휘하는 부대가 3월 17일 악양을 탈환했고 4월 23일까지 창사, 헝양을 잇달아 점령하면서 호남 전역을 다시 북양군의 수중에 넣었다. 이로써 군정부의 멸망이 눈앞에 이른 듯 하였지만 북양정부 역시 내분에 휩싸였다. 자신에게 호남독군 자리가 돌아오긴 커녕 공적도 없던 장징야오가 대신 차지하는 것을 불만스럽게 여긴 우페이푸가 별안간 정전한 것이다. 1918년 4월 24일의 한커우 회의에서 북양군벌들은 남방에 대한 무력통일 노선에 표면상 합의했지만 어디까지나 표면상의 합의였다. 돤치루이는 정전을 요구하는 사회적 요구를 묵살했다. 장징야오는 사직을 청하고 차오쿤은 직군의 회군을 요구하면서 직예군이 맡고 있던 호남전선 전체가 사실상 정전 상태에 놓였다. 내분에 직면한 돤치루이는 차오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여 직계 우페이푸의 무력을 견제하려 했다. 이를 위해 돤치루이는 차오쿤을 양호순열사에 임명하고 쉬수정을 직예독군으로 삼았다. 하지만 호북과 호남은 북양군벌 통치 하에 있지 않아서 이는 명예직에 불과했다. 이 때문에 차오쿤은 돤치루이의 편에 붙기는 커녕 오히려 분노하여 분열은 가속화되었다.
이예 쉬수정은 사천성에 투입하려던 봉군을 호남에 대힌 투입하기로 하고 5월 9일 손열신의 봉군 27사단, 급금순의 28사단, 우쥔성의 29사단을 장사에 배치했다. 이 때문에 직예군은 오히려 더욱 반발하게 되었다. 장쭤린 역시 쉬수정이 임의로 자신의 부대를 재배치한 것에 크게 불쾌감을 느껴 각 사단장들을 소환하고 변방에 긴장이 고조된단느 구실로 호남의 봉천군을 철수시켜버렸다. 계속 칭병하며 직예로 돌아가고 싶다는 뜻을 표하던 차오쿤은 5월 29일 1로군 사령부 인원을 거느려 한커우를 떠나버렸다. 결국 한커우 회의는 주요 참석인물들이 칭병하여 빠지고 평화적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입장을 선회하면서 실패로 돌아갔다. 이에 돤치루이는 차오쿤과의 관계를 호전시켜 북양군벌을 단결하려 했는데 이를 위해 차오쿤에게 사천, 광동, 호남, 강서 4개 성의 군정을 총괄하는 사성순열사 자리를 주었는데 이 중에서 강서성을 제외하곤 전부 다 북양군벌 통제 바깥이었으로 역시나 의미없는 자리였다.
톈진으로 돌아가버린 차오쿤은 톈진에서 2차 독군단 회의를 소집했고 돤치루이는 이에 대한 맞불로 베이징에서 군사회의를 개최했으나 독군들은 톈진에 머물며 회의에 참여하지 않았다. 이 와중에 쉬수정이 6월 13일, 돤치루이의 동의도 없이 주화파이며 펑위샹의 삼촌인 육건장을 톈진의 봉천군 사령부로 초대해서 6월 15일 암살해버렸다. 장쭤린은 자신의 사령부에서 자신의 동의도 없이 육건장이 살해된 것에 대해 크게 분노했다. 거기에 쉬수정이 봉천군에게 할당된 300만 위안 중 180만 위안만 지급해주고 일본이 제공해줬던 차관에서 자기 자신은 1천만 위안이나 차지했으면서 장쭤린에겐 200만 위안만 주자 장쭤린이 분노함으로 봉계와 환계까지 틀어지는 등(...) 북양군벌 내부 상황은 더욱 개판이 되었다. 게다가 쉬수정은 멋대로 동북에서 군대를 편성하여 봉천의 치안을 어지럽혔고 이 때문에 봉천군의 중하급 장교들이 반발했다. 돤치루이가 중재에 나서 쉬수정이 주지 않은 120만 위안의 경비와 빌렸던 무기를 돌려주었으나 장쭤린은 쉬수정과 양위팅을 모두 파직하고 손열신을 부사령관에, 봉화를 참모장에 임명하여 환계와의 동맹을 파기했다.
4.6. 복건전역
한편 쑨원은 등갱을 참모장 겸 1사단장, 쉬충즈를 지대사령으로 하는 10영을 추가 편성하여 복건성 용암, 장주, 정주 등을 공격하게 했으나 이들은 광동성경에서 1백킬로미터 진격한 상태에서 더 이상 진전이 없었다. 이는 루룽팅 등이 보급을 훼방놓아 작전을 수행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때문에 쑨원은 상하이의 장제스를 호출하였다. 3월 2일 상하이를 출발한 장제스는 5일에 광동에 도착하여 쑨원과 만나 전황을 점검한 다음에 복건의 적을 물리치지 않으면 광저우도 위험해진다고 판단, 복건에 총공격을 감행하기로 하였다. 3월 15일 광동군 총사령부 작전과 주임에 취임한 장제스는 전선을 시찰하였다. 이 와중에 호남에서 군정부군이 정신없이 밀리고 있었다. 이때 광동을 점령하기 위해 하이난을 거점으로 침입하려던 용제광 군대가 격퇴되고 우페이푸가 진군을 멈추면서 군정부는 한숨 돌릴 수 있었고 쑨원은 복건 공격에 승패를 걸기로 하였다. 4월 11일 회의에서 사령부를 산터우에서 삼하패로 옮기고 5월 9일 공세가 시작되었다. 총사령관 천중밍이 중앙을, 쉬충즈가 좌익을, 참모장 등갱이 우익을 지휘하며 복건 전역을 따라 진격했다. 10일 쉬충즈가 복건군 1여단을 격파, 무평과 하패를 절명하고 24일에 상항을 점령했다.
이때 루룽팅과 탕지야오는 정학회의 정객이자 전 양광총독인 천춘쉬안과 결탁, 쑨원을 몰아낼 계획을 꾸몄다. 천춘쉬안은 일찍이 서남각성호법회의 조직의 배후에 있었고 이후에도 군정부 내부에 정학회를 조직하여 군정부의 분열을 획책하고 있었으며 <군정부조직법 수정안>을 내놓기에 이르렀다. 4월 하순, 탕지야오는 각 성에 전보를 쳐서 군정부를 군무원, 호는 묵무원으로 개편할 것을 제안했는데 이는 군정부가 북양정부 휘하로 들어간다는 것으로 펑궈장을 총통으로 인정하며 천춘쉬안은 광동에서 국무총리로 행세할 수 있게 한다는 타협안이었다. 그리고 방해되는 쑨원은 해외로 외교담당을 구실로 내쫓을 궁리를 하였다. 이 군정부 개조안은 5월 4일, 4표 차이로 가결되었다. 쑨원은 그날로 즉시 대원수를 사임하며 다음과 같은 성명을 발표했다.
1918년 5월 탕지야오는 북벌을 핑계로 충칭에서 연군회의를 소집하여 천전검정국연군 총사령관에 취임하여 사천성의 지배권을 확대했고 섬서, 서북의 지배를 노리고 있었다. 이후 탕지야오는 9월에 천전검악예 5성연군회의를 소집, 5성연군총사령관에 취임하여 자신이 장악한 5개 성의 지배를 노렸다. 탕지야오는 중국 국민당 가입을 거절하는 등 오로지 세력 확장을 위해 호법을 이용할 뿐이었지 호법 그 자체는 전혀 관심이 없는 인물이었다. 5월 10일 정학회와 익우사가 연합하여 군정부 조직대강을 수정의결하였다. 5월 20일 국회 비상회의는 총재 선거회를 열고 쑨원, 탕사오이, 오정방, 탕지야오, 임보택, 루룽팅, 천춘쉬안을 정무총재로 선출했다. 호법은 이름만 남게 되었고 쑨원은 실의에 빠져 5월 21일 일본상선 소류마루를 타고 광저우를 떠나 일본으로 이동했다. 이에 탕사오이와 오정방 역시 광저우를 떠나 상하이로 이동했으며 이후 참의원 의장에 임명된 린썬, 중의원 의장에 임명된 우징롄과 다수의 국회의원들도 군정부를 이탈하면서 천춘쉬안이 의장 대리를 맡았다."돌이켜보건대 우리나라의 대환은 모두 군웅의 패권투쟁에서 야기된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남쪽도 북쪽도 다를 바 없는 추잡한 존재들이다. 그들이 입으로는 '호법'을 말하면서도 법률과 민의를 따를 생각이 아예 없었다. 즉, 군정부가 성립된 뒤에도 요직에 선임된 자가 그 직책에 취임하지 않았고, 비상국회를 존중할 의사조차 갖지 않았다. 이처럼 내부통일을 보전할 수 없는 상태에서는 군정부는 우방의 승인을 얻지도 못할 것이다. 개인의 거취는 작은 일이나 국가의 존망이야말로 대의이다. 나는 국가에 대해서 충성을 다해왔다. 그러나 이제 그 임무도 끝나려 하고 있다."
6월 5일 군정부는 군정부 개조를 선포하였고 6월 12일 의원의 보충과 정식 국회 개막을 거행하여 린썬을 참의원 의장, 왕정팅을 참의원 부의장, 우징롄을 중의원 의장, 저보성을 중의원 부의장에 선출했다. 6월 19일에는 천춘쉬안이 수석총재로 추대되었다.
4.7. 호법전쟁의 끝
1918년 6월 25일 결막염에 걸려 고생하던 쑨원은 일본에서 데라우치 마사타케 내각의 중국 개입을 비판하다가 상하이로 귀국했다. 그는 27일 <산터우의 천중밍 총사령과 장제스에게>라는 전문을 보냈다.
하지만 계속된 내전에 중국 내부에서도 평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1918년 4월 전국상인연합회가 톈진에서 회의를 소집, 정전을 요구했고 교통계의 량스이도 평화촉진회를 조직하여 평화를 요구했다. 10월에는 장건, 채원배 등의 명사들이 평화를 호소했다. 10월 23일 슝시링, 채원배, 장건이 평화기성회를 발의하였고 이에 직계의 펑궈장이 지지를 보냈다. 주전파였던 니쓰충도 입장을 전환해 평화를 지지했다. 이들은 11월 3일 성립대회를 개최, 각 지역에서 기성회를 성립하여 1919년 3월 2일 전국평화기성회연합회를 개최하였다. 이외에도 평화통일회, 5족평화합진회 등이 설립되어 평화를 요구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파리강화회의가 열리자 중국 내부에선 전쟁을 그만두고 중국의 국제적 지위 향상에 힘쓸 것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더욱 높아졌다.
이런 분위기에 편승하여 천춘쉬안은 7월 5일 다시 군정부의 개편을 선언하고 북양정부와 화평을 꾀했다. 북양정부는 7월 28일 톈진에서 3차 독군단 회의를 열어 쉬스창을 새 총통으로 추대하는데 합의했으나 차오쿤과 장쭤린이 부총통 자리를 다투어 대남작전에 공이 있는 자를 부총통으로 세우기로 합의했다. 독군단은 차오쿤에게 남하하여 공을 세우도록 권했으나 차오쿤은 이미 우페이푸에게 남하하지 말라는 밀전을 받은 후였다. 이에 차오쿤은 3개 조건을 제시했다.
- 1. 중앙정부가 모든 군비를 부담하고 무기를 중앙에서 공급할 것.
- 2. 사성순열사의 직권을 규정할 것.
- 3. 상하이, 덕주, 한양의 병공창의 관리권을 보장할 것.
1918년 8월 12일 안복국회가 개원했고 9월 4일 쉬스창이 총통으로 선출되었다. 하지만 9월 5일 선거는 의원의 정족수 부족으로 부총통 선출이 불가능했다. 이는 환계는 남방을 정벌한 사람에게 부총통 자리를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쉬스창은 남방의 인사를 부총통에 앉혀야 한다고 싸웠기 때문이었다. 이 시점에서 우페이푸가 돤치루이 비난 통전을 보냈고 마침 일본에서도 돤치루이를 지원하던 데라우치 내각이 사퇴하고 하라 타카시 내각이 들어서면서 돤치루이는 힘을 잃었다. 여기에 돤치루이는 국회의원 선거를 위해 매수공작을 한 것이 들통이 나 총리에서 사직해야 했고 이에 따라 북양정부에서는 화평론이 대세가 되었다. 여기에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은 쉬스창에게 동수의원으로 구성된 남북국회가 동수의원을 파견해 연석회의를 구성하고 남방의 영수를 부총통으로 임명하며 헌법을 개정하여 임시국회와 남북국회를 동시에 해산하고 신헌법에 의거해 신국회를 다시 열 것을 권했다. 10월 23일 영국, 미국,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1] 이 5개국 공동으로 남북 쌍방에 화평권고를 보내왔다.
1918년 10월 10일 취임한 새 대총통 쉬스창은 주화파와 화평파의 싸움으로 부총통 선출조차 불가한 상황과 세계 각국의 화평 권고에 주화를 결정, 량스이의 조언에 따라 부총통 자리를 남방에 준다는 조건을 제시하며 1918년 10월 24일 평화령을 선포했다. 이에 천춘쉬안 등 남방도 호응하여 10월 30일에 동등한 수의 남북 대표가 대등한 회의를 열자고 주장하였다. 여기에 평화기성회가 양측에 정전을 요구했다. 1918년 10월 10일 취임한 쉬스창 총통은 여러 독군들을 소집하여 평화의 필요성을 역설하자 독군단은 남방에서 가혹한 조건을 붙이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총통의 방침에 따를 것을 결정, 11월 16일 각군에 정전령을 내렸다.
남방정부는 8월 19일 북양정부의 모든 행위를 승인하지 않을 것이며 9월 4일 안복국회를 부정하고 그들이 총통 선거권한이 없다고 지적하며 10월 8일 쉬스창의 총통 취임에 대해 반대를 표명, 9월 28일 장쉰의 장훈복벽으로 무산된 헌법 초안에 대한 제2 독회를 개최하는 등 강경한 태도를 보이기도 했으나 호법국회 내부는 성장의 민선제와 관선제를 두고 민우사와 익우사가 민선제를, 정학회가 관선제를 주장하면서 격렬한 정쟁이 벌어지는 상태였다. 남북화평을 주장하며 쑨원 축출을 주도한 정학회 등에서 의결법정 정족수가 부족하여 호법국회의 선언은 법적 정당성이 없다고 딴지를 걸었다. 결국 군정부는 북방의 정전령에 호응하여 11월 22일 정전명령을 내렸다. 이로써 호법전쟁은 끝나고 남북간의 화의가 열렸다.
5. 결과
1919년 2월 20일 상하이에서 남북화의가 개최되었고 1919년 3월 2일 난징에서 전국평화기성연합회가 조직되는 등 각계의 평화 요구의 목소리는 컸다. 하지만 의견이 분분하여 합의를 보지 못했다. 안복국회의 해산과 구국회 회복 및 쉬스창의 하야를 요구하는 목소리도 있었고 구국회 회복과 쉬스창의 유임, 남쪽의 부총통 선출이라는 타협안, 군정부가 헌법을 제정하면 북양정부가 이를 실행하고 이를 군정부가 잠시 감독하자는 제안도 있었는데 안복국회 폐지, 참전차관 페지, 중일 군사협정 취소 등의 조건에 대해서 북양정부, 정확히 하자면 안휘군벌의 태도가 완고하였고 호법국회 내부에서도 민우사와 익우사가 화의 반대를 주장하면서 진전이 없었다. 결국 4월에 이르러 화의는 사실상 중단되었다. 5.4 운동이 일어나자 국내외에서 빨리 화의를 종결하라는 압력이 들어와 쉬스창은 왕읍당을 대표로 교체하여 회의를 속개하였다. 하지만 남북 모두 서로를 불신했고 남북 내부에도 분열이 일어나 결국 남북화의는 8월에 완전히 결렬되었다.
실망한 쑨원은 5.4운동 이후 1919년 10월 10일 중화혁명당을 중국 국민당으로 개편, 광동군벌 천중밍이 광동을 장악하자 그와 합작하여 2차 호법운동을 전개하게 되었고 북방에서는 돤치루이의 환계와 우페이푸의 직계, 장쭤린의 봉계가 패권을 두고 안직전쟁이라는 대형 내전을 벌이게 된다.
6. 참고문헌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신승하, 대명출판사
- 군신정권, 진지양, 고려원
- 중국근현대사 2권 근대국가의 모색 1894~1925, 가와시마 신, 삼천리
- 중국현대정치사론, 장옥법, 고려원
- 다큐멘터리 중국 현대사 1권, 서문당 편집실, 서문당
- 만주군벌 장작림, 쉬처, 아지랑이.
- 直皖戰爭과 奉天軍閥의 關內進出, 송한용, 중국사연구 28권, 중국사학회
- 오사시기 군벌체제의 재편, 박준수, 강원사학 23권, 강원사학회.
- 民國 元年을 전후로 한 '約法'과 孫文의 護法運動, 이승휘, 중국근현대사연구 63권, 중국근현대사학회.
7. 관련문서
- 돤치루이
- 펑궈장
- 탕지야오
- 루룽팅
- 신해혁명(1911.10.10~1912.2.12)
- 장전우 사법살인 사건(1912.8.16)
- 쑨원-위안스카이 회담(1912.8.24~1919.9.25)
- 쑹자오런 암살 사건(1913.3.20)
- 선후대차관 사건(1913.4.26)
- 계축전쟁(1913.7.12~1913.9.21)
- 중화민국 국회 해산(1914.1.10)
- 홍헌제제(1915.12.12)
- 호국전쟁(1915.12.25~1916.7.14)
- 부원지쟁(1916~1917)
- 장훈복벽(1917.7.1~1917.7.12)
- 1차 호법운동(1917.7.17~1918.5.21)
- 외몽골 출병(1919.11.7)
- 하남독군 교체 파동(1920.2.23)
- 안직전쟁(1920.7.14~1920.7.23)
- 2차 호법운동(1920.11.28~1922.8.9)
- 영풍함 사건(1922.6.16)
- 회선 사건(1923.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