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 전투
1. 1592년 8월 1일에 벌어진 전투
淸州戰鬪
임진왜란이 한창인 1592년 7월 말 조헌이 이끄는 충북 옥천의 의병 1600여명, 충남 공주에서 온 영규대사의 승병 1000여명은 청주성에서 연기군으로 밀려난 충청방어사 이옥의 500여명과 합류해 청주성 탈환을 기도한다.
8월 1일(양력 9월 6일) 조헌의 의병들이 청주성 서문과 남문을 공격했고, 이에 왜군 5번대 하치스카 이에마사 병력들이 성문을 열고 나와 화승총으로 잡으러 쫓아가다 역으로 포위공격 당해 성 안으로 쫓겨 도망갔다. 이 기세를 몰아 의병과 승병들은 사다리를 걸치고 공성전을 전개하나 폭우로 공세가 돈좌되자 일단 서쪽 야산으로 물러난다.
8월 2일 새벽에 청주성을 향해 재공격을 감행했는데, 왜군들은 불을 피워 군사가 있는 것처럼 위장한 뒤 도주한 상태였다. 게다가 성 안 창고에 곡식들이 남겨져 있었는데, 방어사 이옥은 이걸로 왜군이 다시 점령할 수 있다며 불태워버렸고, 이 덕분에 의병들은 식사를 알아서 해결해야 했다.
이 전투로 의병장 조헌은 종4품 봉상시첨정으로, 영규대사는 당상관으로 각각 벼슬이 내려졌으나 이후 금산 전투에서 둘 다 전사했다.
2. 1950년 7월 14일에 벌어진 전투
6.25 전쟁 개전 후 북한군의 남진을 저지하기 위해 1950년 7월 14일부터 16일까지 충청북도 청주시 일대에서 수도기계화보병사단이 제1보병사단과 17연대[1] 의 지원 속에 북한군 15사단을 상대로 치룬 지연전.
참고로 전초전까지 합하면 10,11일부터지만 순전히 청주 안에서 치룬 것만 보면 14일에서 16일까지다.[2]
2.1. 전초전 미호천 전투 (7.11 ~ 7.13)
참고자료
진천 전투 초반부에 성공적으로 지연전을 펼친 뒤 8, 18연대에게 뒤를 맡기고 내려온 1연대는 이후 9연대 장병들을 보충받아 재편성[3] 후 진천과 청주 사이의 미호천[4] 을 두고 방어선을 형성하고자 오근장 일대에 진지공사를 한다. 이후 18연대는 정상리 일대에 자리잡아 공동 방어선을 형성했다.
7월 11일 새벽 북한군 탱크 1대와 대대 병력이 미호천 일대에 출몰했다. 이후 적들이 도하를 시도하나 격퇴된다.
7월 12일 오전 10시 적의 탐색조가 강변을 돌아다니며 도하 지점을 물색하고 있었고, 오후 2시엔 화산리에 1개 연대급 병력이 모여들었다. 이에 김석원 수도사단장은 김홍일 1군단장에게 요청해 군단 포병이 화신리를 향해 포격, 적들은 800여명의 사상자를 내며 괴멸되었다. 또한 이 와중에 오전 8시 30분부터 오창과 미호천 일대를 공습하던 미군 전투기(P-51 머스탱) 2개 편대(8대)가 9시 40분 경 수도사단 진지를 향해 '''아군 오사를 가해''' 피해가 났다.
오후 1시 40분경 미호천 교량인 팔결교가 폭파되었고, 오후 2시경 미 공군기가 오창 일대에 집결하는 인민군을 공격했다. 그리고 이 와중 오근장과 옥성리간의 586번 도로, 진천 일대에서 트럭 9대를 각각 발견하였다는 보고들이 속속 올라오자 사단장은 각 부대에게 야간공격에 대비한 경계를 강화하라고 강조하였다.
그리고 이 날 1군단장, 수도사단장, 육본 참모부장(김백일 대령), 2 사단 20연대장(박기령 대령)은 긴급회의를 열어 청주 사수 여부를 논의했다. 하지만 조치원이 피탈되었다는 소식과 시가전시 청주시내가 초토화 됨은 물론 부하들에게 명령하기가 여의치 않다는 이유 등으로 시가전을 하지 않기로 결정한다.
오후 9시 적들은 일제히 도하를 시도했고, 이에 1, 18연대 장병들은 지원포격 속에서 이들을 격멸했다.
7월 13일 새벽 적들은 결국 수도사단의 방어선을 뚫고 문의-부강 방향으로 계속 남진했고, 서쪽 미 24사단이 전의 전투에서도 패배해 금강 이남으로 물러나자 수도사단은 인접 사단들과의 전선정리를 위해 청주 남쪽으로 퇴각한다. 이후 좌측 봉무산의 2사단, 우측 미원의 1사단을 끼고 국사봉 ~ 고은리 ~ 431고지에 이르는 방어선을 구축했으며, 정오 무렵 청주시내에 진입한 북한군은 이후 야음을 틈타 수색대를 남쪽 방면으로 정찰보낸다.
2.2. 전투 전개 (7.14 ~ 7.16)
참고자료
7월 14일 오전 5시 431고지 일대를 담당하던 18연대는 431고지는 방어에 적합하지 않다며 태봉으로 옮겨갔고, 이 무렵 국사봉 북쪽 새터~수대리의 8연대는 민가에서 빌린 삽과 곡괭이, 그리고 대검(...)으로 진지공사를 하고 있었으며, 김석원 사단장이 방문해 이들을 독려했다. 이후 진주경비대대 예하 박배근 대위의 1개 중대가 1연대와 8연대 사이에 배치되었고, 이들은 8연대 5중대와 함께 북한군 공세를 격퇴한다.[5]
오전 7시부터 8시 30분까지 진천과 오근장 사이에 트럭 10대, 오근장에서 조치원 쪽으로 전차 2대와 차량화보병 13대가 관측되었다. 이후 대대규모의 적들이 수대리의 8연대 부대와 교전한다.
오후 2시 북한군 2사단이 고은과 부강 방면으로 공격해왔고, 이에 오후 6시경 전투기 1개 편대가 이들을 공격했다. 하지만 이 전투기들도 '''피아 식별을 못해''' 수도사단 18연대, 2사단 16연대 진지에 기총소사를 가해 20여명이 사상당했다.#
7월 15일 오전 6시부터 북한군 2사단은 1군단 방어선을 뚫기 위해 맹공을 가했고, 이 와중 오전 8시 문안산과 공주 일대에 있었던 17연대 대대들이 17연대본부가 있는 청주에 속속 도착했으며, 이 중 3대대는 장암리로 투입되어 그곳에서 분투중인 8연대 5중대, 경비중대원 50여명의 모습을 보게 된다. 이에 그들을 본대로 돌려보낸 뒤 이들을 상대하려 했는데, 문제는 이 일대는 엄폐물이 없는 논밭 지대였고 적의 전차와 탄막사격 공격으로 돈좌된다.
이에 1사단 대전차포중대가 남일초등학교 앞에 방열 후 적 전차를 강타했고, 이를 틈타 3대대가 공세를 재개하나 오후 2시경 적들의 포탄과 전차탄 세례에 또다시 돈좌된다. 이 와중 미 전투기 2개 편대가 돌연 상공에 나타나 적의 전차에 공격을 가한 뒤 3대대에게도 '''어김없이 공격을 가하고''' 떠나버리는 바람에 만신창이가 되고 만다.
오후 10시 경 17연대의 10중대는 예비로 있었던 덕분에 무사했고, 이 때문에 17연대장으로부터 8연대에 배속되라는 명령을 받고 국사봉으로 향한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첨병소대 일을 화기소대에게 맡기려 했고, 이에 류치문 중위가 "화기소대가 어떻게 첨병소대가 될 수 있습니까?" 하며 반발하자 공은 1소대에게 넘겨졌는데, 1소대장 최태영 소위도 "왜 우리소대만 첨병입니까?" 라며 반발하여 중대장은 직접 중대본부를 이끌고 선봉에 섰다.
7월 16일 수차례의 공격이 돈좌된 북한군은 용암동과 월오리를 거쳐 25번 국도를 차단해 수도사단의 퇴로를 차단하려 했다. 또한 585번 도로와 국사봉으로도 공세를 가했다. 이후 1군단은 수도사단에게 17일까지 보은으로 철수를, 17연대에겐 신편된 2군단으로 예속변경 및 경북 상주시 함창으로 이동할 것을 각각 하달했다.
이에 수도사단장 김석원 준장은 교전중이지 않은 부대부터 상당구 미원면을 거쳐[6] 청주와 보은 사이의 피반령으로 철수시키기로 하고 다음과 같은 요지의 명령을 하달한다.
이후 수도사단은 피반령에서 지연전을 펼치다 속리산 갈평 일대에 방어선을 구축, 북한 15사단 2개 연대의 진격을 14일간 지연시켰고, 이로 인해 15사단장 박상철이 파직되었다.① 사단은 군의 전선정비계획에 의거하여 당면한 적에게 타격을 가한 후 이탈하여 보은으로 전진하려함.
② 제 1연대 및 사단직할대는 제 1제대가 되어 보은으로 전진하라.
③ 제 18연대는 제 2제대가 되어 보은으로 전진하라.
④ 제 17연대는 사단의 철수를 엄호한 다음 보은으로 전진하여 7월 17일 06:00까지 제 2군단에 배속될 준비를 하라.
⑤ 제 8연대는 사단의 철수를 엄호하고 의명 보은으로 전진하라.
⑥ 포병중대는 제 1 및 제 2 양 철수제대의 철수를 엄호하고 의명 군단으로 복귀하라.
⑦ 각 제대는 기도비익에 유의하라.
2.3. 여담
- 미 공군기들은 이 전투 내내 피아 구분을 못하고, 수 차례나 쌍방 모두에게 발포했다.(...)
[1] 해당 연대는 전후 제2보병사단 소속이나 이 당시엔 1군단 직속 연대였다.[2] 그래서 이를 소개하는 곳마다 전투 시작일이 제각각이다.[3] 1연대는 1대대, 9연대는 2대대, 양 대대를 채우고 남은 인원은 3대대.[4] 다만 이곳은 수심과 유속이 낮아 도하가 용이했다.[5] 하지만 진주경비대대는 명칭 그대로 후방에서 경비임무나 하던 부대였기에 총포탄이 무자비하게 퍼부어지자 응사는 커녕 동요하고 있었다.[6] 이 당시 1사단은 미원면 거리고개에서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었기에 습격당할 염려는 없었다.[7] 이 당시 수도사단 예속이었다.[8] 참고로 18연대는 원산전투 이후 제3보병사단에 예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