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남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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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승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정남용은 1896년 11월 21일 강원도 고성 현내면 철암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건봉사(乾鳳寺) 승려로, 1914년 이후 경성으로 상경해 휘문의숙(徽文義塾)과 중앙불교포교당(中央佛敎布敎堂)에서 불경을 공부했다. 3.1 운동 이후 전협, 최익환(崔益煥) 등이 주도·조직한 대동단(大同團)에 가입한 그는 1919년 5월 최익환이 체포된 후 후임을 맡아 선전활동을 주관하면서 대동단이 발행한 〈선언서(宣言書)〉와 〈임시규칙(臨時規則)〉 등 각종 문서의 인쇄 및 배포의 책임을 맡았다.
당시 대동단은 사회 각층 중 진신(縉紳)·유림(儒林)·상공(商工)·청년(靑年) 등 4개 단(團)을 중심으로 단원 포섭에 나섰는데, 그 가운데 청년단의 조직을 정남용이 주관했다. 그리하여 송세호, 나창헌 등을 가입시키는 등 조직 확대에 힘을 기울였다. 한편, 대동단은 앞서 최익환 등의 피체로 조직의 일부가 노출되었고, 또 기관지 〈대동신보(大同新報)〉 등의 발행을 통해 세상에 알려지는 것과 함께 동단에 대한 일제 경찰의 포위망이 좁혀오고 있었다. 이에 전협, 정남용 등 대동단의 주요 인사들은 대동단 본부를 상하이로 이전하기로 했다.
먼저 총재 김가진이 1919년 10월 10일 상하이로 망명했고, 이어 의친왕을 대동단의 수령으로 추대하고 상하이 망명을 추진했다. 1919년 11월 9일, 정남용은 이을규(李乙奎), 하란사와 함께 의친왕을 수행하여 서울을 출발해서 만주 안동(安東)까지 갔으나, 이 사실을 탐지한 일제 경찰의 추격을 받아 11월 11일 만주 안동역에서 체포되었다. 그는 서울로 압송된 뒤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5년형을 언도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 1921년 4월 18일 옥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정남용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국립서울현충원 무후선열에 그를 기리는 위패를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