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세호(18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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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그러나 최근에 변절 논란이 일고 있다.
2. 생애
송세호는 1893년 8월 29일 경상북도 선산군 해평면 송곡리에서 태어났고, 10대 때 서울로 주소를 옮겼다. 일찍이 상하이로 망명한 그는 1919년 3.1 운동 발발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했으며, 4월 13일 임시정부 의정원 강원도 대표 의원에 선출되어 의정활동을 하는 한편 임정 재무부 재무위원에 임명되었다. 그 후 귀국한 그는 강원도 오대산의 월정사 스님이 되어 임시정부의 군자금을 조달하기 위하여 승려 복장으로 검색을 피해서 자주 국내를 내왕하였다.
1919년 5월, 송세호는 연병호, 조용주(趙鏞周) 등과 함께 대한민국외교청년단을 조직하고 동지규합, 자금확보, 임시정부 지원 등의 목적을 수행하였으며, 자신은 상하이 지붇장에 선출되어 활동했다. 또한 그는 대동단(大同團)의 전협과 연락하고 서울에 와서 의친왕을 상하이로 탈출시켜 임시정부에 참여시킬 계획을 세웠다. 그는 1919년 11월 선발대로 정남용과 같이 평양으로 출발했다. 그러나 의친왕의 행방불명을 보고 받은 일경이 총동원되어 기차 등을 수색한 결과 안동에서 일행을 체포하였다.
이때 그도 동지들과 함께 체포되어 1920년 6월 2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옥중에서 병을 얻어 1922년 12월에 병보석으로 가출옥하였다. 그는 출옥 후에도 한용운을 추종해 불교를 통한 자주독립정신의 고취에 전념했다가 1926년 6월에 낙원동에서 다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며칠간 고초를 겪기도 했다. 이후 1931년 6월 다시 상하이로 건너간 그는 연초공장을 경영하면서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제공했다고 하며, 8.15 광복 후 귀국하지 못하고 상하이에 머물러 지내다 1970년 6월 13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송세호에게 대통령표창을 수여했으며, 1989년 그의 유해를 국내로 봉환하여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그리고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그러나...'''
3. 변절 논란
2019년 4월 29일, '''송세호가 상하이에서 일본군 위안소를 운영했다'''는 기록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보도되었다. 1930년대 당시 상하이에 들어선 일본군 위안소는 170여 곳으로, 그 중 극동 댄스홀을 경영한 조선인은 바로 '송세호'였다는 것이다. # 이에 대해 송세호의 유족은 "극동 댄스홀은 직원용 숙소와 무대가 있는 술집이었을 뿐 위안소는 아니었다" 며 다만 이를 입증할 자료는 "남아 있지 않다"고 밝혔다.
게다가 1939년 7월 상하이에 근거한 독립의열단체 '남화한인청년연맹' 관계자들을 체포한 일제 경찰이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에 보고한 ‘남화한인청년연맹 관계자 검거의 건’에 따르면, 송세호는 '''일찍부터 일본의 밀정 행위에 종사한 친일 조선인'''이었다고 한다. 이는 그가 상하이에서 일제 밀정으로 활동하며 남화한인청년연맹 관계자들을 체포하는 데 공헌했음을 의미한다. #
이에 대해 국가보훈처는 독립유공자 검증 단계에서 검토하지 못한 부분이 있었다며 송 씨의 행적에 대해 조사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또한 독립유공자 1만 5천여명 가운데 초기에 훈장을 받은 5백여 명을 우선 검증해, 7월쯤 결과를 발표할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2020년 6월 28일 현재까지 송세호는 여전히 독립유공자로 남아있으며 그의 유해 역시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