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미사화
1. 개요
丁未士禍
1547년 명종 2년에 일어난 조선시대의 사화(士禍). 일명 벽서의 옥(壁書獄), 양재역[1] 벽서사건이라고도 한다. 을사사화의 뒤치다꺼리 격으로 윤원형이 이끄는 소윤이 대윤 일파의 잔당을 숙청한 사건이다.
1547년 9월에 경기도 과천 양재역에서 부제학 정언각(鄭彦慤)과 선전관 이로(李櫓)가 ‘'''위로는 여주(女主), 아래에는 간신 이기(李芑)가 국정을 농단하니 나라가 금방 망한다.'는 내용이 씐 익명의 벽서를 발견해 명종에게 올린 데서 시작했다. 윤원형 등은 '을사사화 당시에 재앙의 근원들을 다 뿌리 뽑지 못한 데서 이런 일이 일어났으니, 지금이라도 발본색원해야 합니다.'''' 하고 주장하여 피바람이 불었다. 그런데 이는 보통의 익명서로 인해 벌어진 사건과는 많이 다르다. 보통 익명서 사건이 벌어지면 의심가는 사람들을 잡아다 국문한다. 게다가 당시 상례로는 연산군이 익명서 때문에 의심가는 사람들을 잡아들였던 전례로 인해 태워버리는 것이 보통이었다. 하지만 정언각이 고이 떼어 바친건 그렇다고 쳐도 그에 대처하는게 "의심나는 자들을 잡아들이소서" 가 아니라 "이딴게 나오는걸 보니 아직도 잡아들여야 할 놈들이 많습니다." 라고 나왔으니 뭔가 다르긴 하다. 오죽하면 당시의 풍문은 물론이고 실록의 사관도 '혹시 정언각의 조작 아닐까?'라는 의심을 했다.
사실 조선 4대 사화로 손꼽히는 을사사화보다도 정미사화가 연루된 자들이 더 많고 여파도 더 컸다. 종친 봉성군, 송인수[2] , 이약빙, 이약해, 이언적, 노수신, 정황, 유희춘, 권응정, 이천제, 권벌, 백인걸 등이 처벌받거나 처형되었다. 을사사화가 소윤이 대윤을 몰아내기 위한 시작점이었다면, 이 사건이 끝판왕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을사사화의 일부로 보기 때문에 한국사와 관련해서 잘 다뤄지진 않는다.
명종 8년(1553) 이후로도 그 폐단은 가시지 않았다. 명종은 이제까지의 악정을 시정하기 위하여 명종비 인순왕후 심씨의 외삼촌 이량을 이조판서로 임명하고 그 외 인사를 등용하였으나, 이들은 명종의 신임을 믿고 파벌을 조성하여 세도를 부리기까지 했다.
명종 20년(1565)에 문정왕후가 사망하자 신진 사류가 다시 정계에 복귀하면서 귀양갔던 노수신 등이 요직을 차지하고 재야 신진 사류가 등용되어 정계는 사림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사화의 주인공인 정언각은 이 때 일로 악명이 높아져서 민심이 대단히 나빴는데, 그가 말에서 떨어지는 사고로 죽자 사람들은 그 말을 의로운 말(義馬)이라며 칭찬했다고. 심지어는 '정언각이 탔던 말은 을사사화로 죽은 임형수의 말이었기 때문에 주인의 복수를 한 것'이라는 이야기까지 떠돌았다.
2. 기타
사건의 배경이 되었던 곳은 양재역이라는 당시 영남대로의 역참으로서, 현대에는 서울 지하철 3호선, 신분당선 양재역이 생겼다. 7번 출구 쪽으로 나가면 양재역 터임을 알리는 비석이 자리잡고 있다. 경기도 과천의 양재역에서 일어난 사건이라고 소개되기도 하는데, 서울 서초구 일대가 당시에는 경기도 과천현이었기 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