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참
1. 소개
驛站
과거에 국가의 명령이나 공문서를 전달하고, 외국 사신을 맞이하고 전송하며 접대하는 일을 위하여 마련된 교통·통신 시설을 일컫는 말.
역참의 '역'이라는 용어는 오늘날에도 기차를 이용할 수 있는 시설 이라는 뜻으로 바뀌어 남아 있다. 한편으로 역참의 '참'은 중화권에서 역을 가리키는 용어로 정착되었다.
2. 용어의 뜻
'역(驛)'은 원래는 '말을 키우고 관리하면서 사람과 말이 쉴 수 있는 숙박시설'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역의 등급, 형태, 위치, 기능 등에 따라서 다양한 역의 분류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하고 공통적인 개념은 '''지친 말을 바꿔 탄다'''는 것이다.
조선 시대에는 비슷한 역할을 했던 원#s-7(院)과 합쳐 역원(驛院)이라고 불렀고, 중국에서 역을 주로 부르는 표현인 참(站)[1] 과 합쳐 역참(驛站)이라 부르기도 했다. 일본에서도 역참이라고 불렀으며 현재의 도카이도 본선, 도카이도 신칸센 이름의 유래가 된 도카이도 53역참이 유명하다.
3. 역사
전통적인 '역'의 개념이 한국에 처음 도입된 것은 삼국시대로, 이때는 몇몇 지역에만 국지적으로 설치되었다. 삼국사기에서 신라가 지금의 울산광역시 지역에 설치한 굴헐역(屈歇驛)과 같이 역참의 이름이 간헐적으로 등장하는데 구체적인 위치나 전국 역참의 목록 같은 것이 따로 남아있지는 않았다. 남북국시대에는 신라 천정군(지금의 원산시 일대)부터 발해의 책성부(동경 용원부로 추정)에 이르는 길목에 39개의 역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후 고려시대부터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고려 때는 전국에 22개의 길과 525개의 역이 있었다. 비슷한 시기 중국을 정복한 몽골(원나라)은 중국뿐만 아니라 몽골 등 지배 전역에 걸쳐 역전제도를 실시했고 명나라 또한 원의 역참제도를 계승, 발전시켰다. 명나라 시대의 역참은 1700곳이 넘었고 명나라 조정은 역참 도로의 포장, 보수부터 각 역참 사이의 이동기한에 이르기까지 역참관리를 매우 빡빡하게 하였는데 명의 역참제도는 티무르 왕조의 사절단이 감탄할 정도였다. 조선시대에 들어 기존에 역원을 대부분 절들이 운영하던 것에서 전부 나라에서 운영하는 국영 시설로 바뀌고 조선 후기에 들어 비슷한 역할을 하던 원(院)을 점차 흡수된 이래 구한 말 우체사가 설치될 때까지 유지되었다. 당시 도로는 군사적인 목적이 강해, 조선시대 역은 지금의 국방부 격인 병조에서 관리하였다.
사찰이 역의 역할을 했던 게 다소 의외일지도 모르겠지만, 이는 고려만 그런 것은 아니고 중세 유럽에서도 수도원이나 성당 등에서도 숙박업 등을 겸하는 경우가 많았다. 중세 당시에는 나라에서 직접 곳곳에 숙박/교통시설을 운영하기에는 행정 능력이 부족했고, 민간 자본으로 운영하기에는 자본주의나 기술력이 충분히 뒷받침될 만큼 발달하지 못했고, 그렇다고 노숙을 하자니 치안 능력의 부족으로 인한 범죄자들이나 자연 개발이 덜 된 탓으로 설쳐대는 맹수들이 많았기 때문. 그런 상황에 일반 마을이나 영지에서 떨어진 교통의 요지에서 어느 정도 자급자족을 하고 도적이나 맹수로부터 자체 방어가 가능한 수준의 일정한 인원과 시설을 갖춘 비교적 안전한 쉼터는 종교시설이 전부였기 때문이다. 현대인들에게는 생소하지만 중세만 해도 중세의 사정이 사정이다 보니 자체 방어를 위해 수도자나 승려가 무술을 연마하거나, 절이나 수도원에 성벽을 쌓아 요새화 하는 게 의외로 흔했다. 중세 유럽의 수도자가 전쟁에 참여한 사례도 있고, 고려사에도 서경 반란 진압 당시 자원해서 참전한 관선이라는 승려가 거대한 도끼를 휘둘러 혼자서 반란군 십여 명을 썰어버렸다는 기록이 나온다. 일본의 소헤이는 아예 도를 넘어 유력 사원이 사실상 지방 영주화된 케이스. 종교시설/교단 입장에서도 숙박비와 여러 사람이 모이면서 자연스럽게 열리는 시장 기능, 여기에 기본적으로 운영자금을 대기 위해 나라에서 주거나 교회 차원에서 지원하는, 혹은 사람이 모이면서 자체 노동력으로 개간하는 재물과 논밭, 여행자들이 무사여행을 빌면서 내는 재물들 덕택에 역원은 상당한 수입원이었기에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사족으로 중세에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종교 시설이 부분적으로 행정을 담당하기도 했다. 문맹률이 높던 시절 행정 실무에 필수적인 글을 아는 사람들이 그나마 많은 곳은 종교시설 뿐이었으니까. 지금도 독일에서는 결혼식을 하면 근처 교회에 이를 등록하는 경우가 있는데, 과거 중세 시절의 문화가 아직 남은 것이다.
4. 암행어사와의 관련점
이 역을 관리하는 일을 하는 일꾼들을 역졸이라고 부른다. 본래는 양인이지만 신량역천이라 해서 천한 일을 하는 부류로 취급받았다. 이 역졸들은 암행어사가 병력이 필요할때 병력 역할도 했다. 시대극에서 '암행어사 출두야!'라고 외치며 관아에 쳐들어오는 장정들이 이 역졸이다. 이웃 고을 포졸들은 100% 믿을 수 없기 때문에 중앙정부 직속이라 지방 수령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역졸들을 병력으로 동원한 것.
마패 또한 본래는 역참을 이용하기 위한 증표으로, 암행어사의 신분증명서가 아니며, 그래서 암행어사 외 역참을 사용하는 자들도 마패를 지니고 다녔다.
역참의 인력, 물건이 암행어사의 상징이 되어 버린 이유는, 암행어사가 지방에서 신뢰할수 있고 다루기도 쉬운 중앙 정부 직속 기구가 역참이었기 때문이다.
5. 지명에 남은 흔적
6. 기타
역이 말을 갈아타는 시설이기 때문에 역에서 쓰이는 말들은 한 군데에 정착하지 못하고 여러 역을 떠돌아다니는 신세가 되곤 했는데, 여기서 역마살 이라는 용어가 유래되었다.
'한참'이란 말도 이 역참제에서 나온 말이다. 역참과 역참 사이의 거리를 옛날엔 '한 참(站)'이라 했는데 요즘 말로는 '한 정거장'이란 말과 같다. 그런데 고려시대 때에는 이 '한 참'의 거리가 100리(약 40km)였고 조선시대 때에는 30리(약 12km)였다. 그러니 고려시대 때엔 '한 참'을 간다고 하면 40km나 가야 나왔던 것이다. 그래서 이 사이의 거리가 멀다보니 먼 곳을 갈 때 '한참을 간다.'고 파생되어 나온 것이다.
학교대사전에는 '수업시간에 쪽지를 돌리면 신속하게 수신자에게 도착하는 체계'라고 나와 있다. 쪽지를 받을 사람의 중간 위치에 있는 친구들을 거치는 게 역참제를 연상케 해서 그렇게 부르는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