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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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의 대표적인 유학자, 정치가. 본관은 여주 이씨. 호는 회재(晦齋)[2] , 자계옹(紫溪翁)이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경주시 양동마을에서 출생. 영남 남인의 선구자이자, 조선 시대 최초의 철학적 사유인 태극 논쟁을 벌인 성리학의 태두로, 이선기후설(理先氣後設)과 이기불상잡설(理氣不相雜說)을 강조하는 사상을 확립했으며, 이는 이황에게 계승되어 영남 학파의 근간이 되었다. 동시에 그는 의정부 종1품 좌찬성, 이조판서, 예조판서, 대사헌, 대사성, 한성부 판윤, 경상도 관찰사 등 고위직을 역임하며 사후 영의정으로 증직된 정치가이기도 했다. 학문적 업적으로 그는 동방 5현이자 동국 18현으로서 문묘에, 정치적 업적으로 명종의 배향공신이 되어 종묘에도 모셔졌다. 문묘와 종묘에 모두 이름을 올린 사람은 이언적, 이황, 이이, 김집, 송시열, 박세채 뿐이다.
2. 생애
2.1. 유년기
본래 이름은 이적(李迪)이었으나 후에 피휘로 인해 중종이 선비 언(彦)을 이름에 포함하여 개명하도록 명했다.
경주 양동마을에서 태어났으며, 어머니는 경주 손씨이다. 당시에는 남귀여가혼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에 외가인 서백당에서 태어났다.[3]
아버지는 성균관생원으로 한양에서 유학하며 문과를 준비했는데 이언적이 10세 때인 1500년 요절했다. 이후 외삼촌 손중돈(孫仲暾)의 임지를 따라다니며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외할아버지는 손소로 이시애의 난을 진압한 공으로 적개공신 2등에 책록된 사람이었다. 외삼촌 손중돈은 김종직의 제자로 의정부 우참찬, 이조판서까지 올라갔을 정도로 명망 높은 사람이었다.
18세 때인 1508년 함양 박씨와 혼인하였고, 20세 때인 1510년 외할머니 풍덕 류씨가 별세하면서 별급으로 종가(宗家)인 양동마을 무첨당(無忝堂)[4] 을 짓고 분가하였다. 젊었을 때 인근 사찰인 정혜사에서 학문을 닦았다. 당시에는 유불(儒佛)이 상호보완관계였기 때문에 이러한 학업이 가능했다. 23세에 생원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서 수학하였고, 24세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러한 이언적의 수학과정을 두고 ‘학문연원수수설(學門淵源授受說)’을 낳게 하였다.
2.2. 학문적 성숙과 출사
27세엔 손숙돈(孫叔暾)[5] 과 조한보(曺漢輔) 사이에서 일어난 무극과 태극에 관한 논쟁[6] 에 뛰어들었으며, 이 근간이 이황에게 계승되어 영남학파의 학문적 근간이 되었다.
37세에는 세자시강원문학이 되어 세자 인종의 스승이 되었다. 이후 사헌부지평, 이조정랑, 사헌부장령, 밀양도호부사 등 여러 관직을 거쳐 1530년 사간원 사간이 되었다.
2.3. 좌천과 낙향
그러나 사간원 사간을 역임할 당시 권신 김안로(金安老)의 등용에 반대했다가 김안로가 외척이 되어 부상한 직후 성균관사예로 좌천되었다. 이후 낙향하여 자옥산에 별장인 독락당[7] 을 짓고 학문 활동에 전념하였다. 그가 종가인 무첨당으로 가지 않고 은둔한 것은 관직에서 사실상 쫓겨난 신분이었기 때문에 가족과 친인척들에게 폐해가 미칠까 우려해서였다. 주자를 독자적으로 해석한 그의 학문관은《대학장구보유(大學章句補遺)》와 《속대학혹문(續大學或問)》에 나와있다. 그는 주자가 다시 살아나온다고 해도 자신의 해석에 동의할 것이라는 자신감을 보이기도 했다.
2.4. 재등용과 누명
1537년 김안로의 실각 이후 복귀하여 조광조의 복권과 사림의 등용을 요청하였다. 홍문관 응교를 거쳐 이듬해에는 홍문관직제학에 임명되었다가 전주부윤이 되었다. 일강십목소(一綱十目疏)를 올려 올바른 정치의 도리를 논하였다. 1539년 세자시강원우부빈객이 되어 다시 세자 교육을 담당했다. 1542년 이조판서, 예조판서, 형조판서 등 요직을 거쳐 1544년 의정부 좌찬성에 이르렀고 인종 승하 후 원상(院相)이 되어 국정을 총괄하였다.
그러나 1545년,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권신 윤원형(尹元衡)은 사림파를 축출하려 한다. 이에 이언적은 의금부판사가 되어 사림 윤임(尹任)파를 심문하는 역할을 맡았으나 그해 12월 관직에서 물러난 후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1547년, 양재역 벽서 사건으로 인해 평안북도 강계로 유배된다. 이후 저술 활동에 전념하였다. 63세에 《중용구경연의(中庸九經衍義)》을 저술하다 1553년 사망한다. 저서엔 《회재집(晦齋集)》, 《구인록(求仁錄)》, 《대학장구보유(大學章句補遺)》, 《봉선잡의(奉先雜儀)》등이 있다.
2.5. 복권과 추모
이황은 그의 저술을 접하고 크게 영향을 받고 찬탄하여 직접 행장(行狀)을 지었다. 명나라 사신이 왔을 때 조선에도 주자를 훌륭하게 해석한 학자가 있는지 물었을 때 이언적의 저술을 보여주기도 했다. 선조 즉위 이후 1568년 그의 유문을 수집하라는 명령이 있었으며 1569년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하고 그의 종가인 양동마을 무첨당에 제사를 지내게 하였으며, 시호가 문원(文元)으로 내려졌고 종묘에 배향되는 종묘배향공신의 은전이 내려졌다. 1610년 문묘에 종사되었다.
핵심적인 공을 세운 인물은 이언적의 손자인 수졸당 이의잠(李宜潛)으로, 선조 임금이 서인들에 의해 부화뇌동하여 을사사화 당시 이언적의 소위 모호하다는 행적을 핑계로 그의 문묘 종사를 반대할 때 외종매부이기도 한 서애 유성룡을 움직여 변무(辨誣)하게 했고, 백사 이항복이 명종실록 기록을 살펴 이언적의 무고함을 변백하자 그로부터는 이언적의 묘지명을 얻어내었으며, 옥산서원 원장으로서 이언적의 문집 간행을 주도하는 등 조부의 현양과 가학의 전수에 핵심이었다.
3. 관련 문화재
이언적 종가 종택(宗宅)은 경주 양동마을 무첨당이며, 현재 종손(宗孫) 혹은 주손(胄孫) 이지락(李址洛)씨가 살고 있는데 그는 17대 종손이다.
4. 둘러보기
[1] 처음 이름은 이적(李迪)이었다.[2] 주희를 따르겠다는 의미다. 주희의 호는 회암(晦庵)이다.[3] 태어난 산실인 서백당에 관해서는 양동마을 건물 내력 참조. 재미있는 이야기가 얽혀있다.[4] 시경(詩經) 소완(小宛)의 '夙興夜寐(숙흥야매) 無忝爾所生(무첨이소생)'에서 따온 것으로 조상에게 한 점 부끄럼 없는 삶을 살겠다는 뜻이다.[5] 손중돈의 아우.[6] 자신의 성리학적 견해를 밝히면서 성리학자로서의 명성을 쌓았다. 이 논쟁은 이후 일어난 사단칠정 논쟁의 시발점이 되었다.[7] 진심장구 상의 독락 장에서 인용하였다. 그리고 진심장구 상의 독락 장(8장)에서 나온 '古之賢士何獨不然. 樂其道而忘人之勢'라는 구절을 신조로 삼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