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윤(독립운동가)

 


성명
정상윤(鄭相允)
일본식 성명
河東相允
이명
정상윤(鄭相潤)
본관
하동 정씨
생몰
1907년 ~ 1950년 7월
출생지
평안북도 철산군 참면 유정동
(현 평안북도 동림군 동림읍)
사망지
충청남도 대전군 산내 골령골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019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정상윤은 1907년경 평안북도 철산군 참면 유정동(현 동림군 동림읍)에서 태어났다고 하는데, 제적등본이 존재하지 않아 정확한 생년월일은 알 수 없다. 그는 1928년 8월 12일 평안북도 철산군 여한면 동덕동 석봉악수 부근에서 철산지국장 박봉수(朴鳳樹)를 비롯하여 정국일·정치언(鄭致彦)[1] 등 8명의 동지와 더불어 신간회 철산지회를 조직하였다. 같은 달 19일에는 철산군 참면 유정동 소재 차련관 유치원에서 경찰의 삼엄한 경계에도 불구하고 철산군 신간회지회 설립대회를 개최하여 대회사를 하고 철산지회 간부 등을 선출했다.
그러나 이날 참석자들에게 배포하려고 준비했던 문건인 "우리들 2천만 동포와 삼천리강산이 주인을 잃은 지 20년 가까이 되었다. 우리들은 그간 무한의 압박과 착취를 받아 정치적으로 털끝만큼의 자유도 없었다..."로 시작되는 '신간회 철산지부 설립취지서'약 200매가 경찰에 압수되었고, 이 문서가 문제되어 정상윤 등 신간회 철산지회 설립을 주도한 9명이 경찰에 체포․기소되고 재판을 받아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출옥 후에는 고향인 철산의 협성야학회(協成夜學會)에서 문맹퇴치와 민족사상을 고취하는 청년활동을 하다 1932년 5월에 철산경찰서에 체포되어 조사를 받았다. 이후 19141년 공주로 이주한 그는 8.15 광복 후 공주군 인민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좌익 활동을 수행했다. 그러나 1949년 경찰에 의해 체포되어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었고, 6.25 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7월 초 대전 산내 골령골에서 대한민국 군경에 의해 총살형에 처해졌다.
정상윤은 광복 후 좌익 활동을 수행하며 인민위원장을 역임한 행적이 문제시되어 오랬동안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했다. 그러다 2019년에서야 비로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1] 독립유공자로 지정된 정치언과 동명이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