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양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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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춘추시대 정(鄭)나라의 제13대 군주. 정목공의 아들. 정영공의 아우.[1] 그는 진(晉)나라와 초(楚)나라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다가 강대한 초나라를 따랐다.[2]
2. 생애
형인[3][4] 정 영공이 어이없게 시해되자 그가 뒤를 이었다.[5]
정 양공 원년(기원전 604년), 송(宋)나라의 화원은 정나라에서 포로로 잡고 풀어 준 일이 있었는데, 초장왕은 그것에 진노하여 정나라를 치자 진(晉)나라를 따랐다. 그러자 진나라는 순림보를 보내 구원하였다.
정 양공 5년(기원전 600년), 초나라가 다시 정나라를 치니 진(晉)나라가 다시 정나라를 구원했다.
정 양공 7년(기원전 598년), 정나라가 진나라의 언릉 땅에서 회맹했다.
정 양공 8년(기원전 597년), 초 장왕이 다시 정나라를 치니 정나라는 견디지 못하고 초나라에게 굴복했다. 바로 이때 진(晉)나라에서 구원을 왔으나 진(晉)나라의 장수들이 원수 순림보를 무시하고 행동해 결국 초군에게 패하고 말았다.[6]
정 양공 10년(기원전 595년), 진(晉)나라가 초나라를 따르는 정나라를 쳤다.
정 양공 17년(기원전 588년), 진(晉)나라가 노나라, 송나라, 조나라, 위(衛)나라와 함께 정나라를 쳤는데 매복계를 써서 승리했다. 여름에 허나라의 허 영공이 정나라를 따르지 않자 허나라를 쳤다. 이에 허나라가 진(晉)나라에게 구원을 청했다. 초공왕이 정나라를 구원하니 진(晉)나라 군대는 물러섰다.
정 양공 18년(기원전 587년), 정 양공이 죽고 그 아들인 희비가 즉위하니 그가 바로 정 도공이다.
[1] 일설에는 형이라고 전해진다.[2] 공원국 교수의 저서인 춘추전국이야기 4권에 나오는 말을 빌면, 아침에는 진(晉)나라와 협상하고, 밤에는 초(楚)나라와 협상한다는 말이 당시 정나라의 현실을 잘 보여준다.[3] 본문에서는 흔히 알려진대로 정 영공의 동생이라는 설에 따른다.[4] 정 영공의 형이라는 설에 따르면 정 양공이 서장자라고 한다.[5] 시해된 사유는 정영공 문서를 참조할 것.[6] 이게 내막을 알고보면 매우 씁쓸한데, 당시 진(晉)나라의 군주들이 신하들을 제대로 컨트롤하지 못해 일어나는 현상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