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춘추전국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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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춘추시대에 남방에 있는 양쯔강 중류와 한수이강 일대 지방인 형주를 다스리던 나라로 초창기의 수도는 단양. 현재의 후베이성을 중심으로 일어선 국가이다.
황하 문명에 뿌리를 둔 상, 주에 대비되어 장강 문명을 계승해 독자적인 문화권을 형성한 지역이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춘추시대에 주나라의 제후국을 자처하지 않고 왕을 자칭하며, 스스로도 오랑캐로 자처하고 다른 주의 제후국으로부터도 그렇게 취급됐다는 기록 등이 남아 있어 황하 유역과의 문화적 차이와 민족적 구별 의식이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통일 왕조 진(통일왕조)이 등장하고서야 중화 문명에 확고하게 동화된 것으로 보인다.
춘추전국시대에 있었고, 진나라가 혼란스러워진 뒤 다시 등장했으며 한때는 진나라를 멸하고 패권국으로써 기세를 떨쳤으나 초한쟁패기에서 전한에 의해 멸망했다.
2. 역사
2.1. 춘추시대
주나라 성왕 때 웅역이 자작의 지위로서 봉토를 하사받은 제후국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실제 시작은 남방의 이민족 국가였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당시 장강(양쯔강) 이남은 밀림으로 뒤덮인 이민족의 영역이었으며, 고고학적 발굴로도 초기 초나라의 유적이나 유물을 보면 묘족의 나라였음이 강하게 암시되고 있다. 애초에 楚라는 글자에 숲을 뜻하는 林이 들어가 있는 것도 당대의 이 지역의 환경을 짐작케 한다.
중원에 위치한 국가들로부터 남방의 오랑캐로 불려 무시를 당하여 형만(荊蠻, 형주의 야만인들)이라 하였으며 각종 사서의 기록을 보면 이들을 멸시하는 의미로 형(荊)나라, 형초(荊楚) 등으로 쓰였다. 사실 초나라의 경우 지리적 위치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원래부터 중원 국가가 아니라 황하 유역을 중심으로 한 중화 문명이 전파됨에 따라 중화 문명권에 편입된 국가이다.
'''따라서 제후직을 하사받았다는 말도 중원에서의 권위와 명분을 얻기 위해 후대에서 끼워맞췄을 가능성이 있으며''', 실제로 주나라 소왕 때는 초를 정벌하러 나갔다가 배가 침몰해서 물에 빠져죽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초창기에는 형주의 서부, 즉, 삼국지에서 이릉(현재의 이창)으로 칭해지는 곳이 중심지였다. 이릉이라는 이름의 유래 자체가 이족의 능묘라는 뜻으로, 초나라 왕실의 사직이 있던 곳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왕을 칭하여[10] 주변 나라들을 복속시키며 세력이 강성해졌고 서서히 북으로 진출하며 수도를 영으로 옮겼다.
성왕 때에 이르러 세력이 크게 성장하여 진(晉)나라와 같은 강대국과 겨룰 정도였지만 끝내 진(晉)을 이기지는 못하였고, 시간이 흘러 초장왕 때에 이르러 크게 강성하여 패권을 잡았다. 춘추시대는 대체로 전통적 중원의 강국인 진과 신흥 강국으로 흥기한 초의 대립을 축으로 전개된다.
그러나 춘추 시대 후기에 이르러 초 장왕의 아들인 초공왕 때부터 패권이 기울기 시작하더니 초영왕의 거듭된 전쟁으로 국력이 기울고 초 공왕의 막내 아들인 초평왕 대에는오(吳)나라의 공격을 받아 불안불안하더니[11] 평왕의 아들인 초소왕 대에는 오(吳)나라의 공격을 받아 수도를 약으로 옮기기까지 할 정도로 쇠퇴하였다.[12]
그러나 초 소왕은 약 땅을 거점으로 국력을 회복시키고 월나라와 친선관계를 맺어 오나라를 견제하며 국력을 회복시켰고[13] , 초혜왕은 채나라와 진(陳)나라를 멸망시키고 초간왕 대에 이르러서는 거나라를 멸망시키며 초나라가 건재함을 천하에 과시했다.
2.2. 전국시대
전국시대에 이르러서는 초도왕 때 오기(吳起)를 영윤으로 임명해 부국강병을 이루려 했으나 오기의 든든한 지원자인 초도왕이 죽고, 오기도 개혁 때문에 손해를 입은 귀족들에게 죽임을 당해 물거품이 되고 만다. 그래도 오기의 부국강병책이 성과는 있었는지 초위왕 대에는 월(越)을 멸망시키고 세력을 회복하지만 이것은 초나라의 마지막 불꽃이었다. 진(秦)나라, 제(齊)나라의 국력을 따라가지 못하고 진(秦)의 압박을 받아 수도를 진으로 옮겼다가 그 후에는 거양으로 천도하고 또다시 수춘으로 천도하였다.[14] 이처럼 형주 북쪽(단양 일대)에서 시작한 초나라는 나라가 망할 때쯤에는 수도가 동쪽(수춘 일대)으로 옮겨가 있는 상태였다. 기원전 223년에 진(秦)나라의 공격으로 초왕 부추가 생포당하면서 멸망했다. 그 후에 항전 등이 난릉성에서 항전했지만 이 또한 진(秦)에게 격파됐다.
그리고 진나라에서 상국을 지낸 창평군이 이신에게 뒷통수를 쳐서 오월 지방에서 초나라 유민들을 이끌고 맞섰으나 결국 패하여 초나라는 완전히 멸망해 전국시대의 사실상 종지부를 찍는다.
2.3. 진승·오광의 난
진승과 오광이 진나라에 반란을 일으키면서 선포한 나라를 초나라라고 하였다.
'''장초'''(張楚)라고도 하는데, '장대한 초나라(張大楚國)'라는 뜻이다.
2.4. 초한쟁패기
진나라 말기에 세워진 나라로 춘추전국시대의 초나라 명장이었던 항연의 후손인 항량과 항우가 초나라의 부흥 기치를 내걸고 세운 나라로 범증의 진언에 따라 초나라 왕의 후손인 웅심을 찾아내 황제로 옹립해 세운 나라다. 이 황제가 바로 초나라 의제다. 의제를 모실 동안에 한하여 '''후초'''(後楚)라고도 한다.
일단 진(秦)나라에 저항해서 일어난 세력의 구심점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실제로 이를 바탕으로 진나라를 무너뜨리는 데까지는 성공하였지만, 애초에 항우가 세운 허수아비 정권에 불과했으므로 유방을 상대적으로 옹호했다는 이유만으로 항우가 자신이 올려놓은 의제를 살해함으로써[15] 붕괴되었다.
의제를 추대한 항씨 세력을 이끄는 항우는 명목상 황제인 의제를 모시면서 자신은 '''서초'''(西楚)라는 제후국의 패왕을 맡는 형식을 취했다. 서울은 원래 우이(盱眙)에 있었으나, 항우의 18제후왕 분봉에서 의제를 소외시킨 항우가 침(郴)으로 몰아냈다. 의제가 항우에게 살해당한 뒤에는 항우의 서초가 명실상부한 유일한 초나라로 행세한다. 서초의 수도는 팽성(彭城)이다.
항우는 서초패왕이 되어 자립하였으나(서초, 항초) 초한전쟁에서 한태조 유방에게 패사하여 초나라는 멸망했다.
3. 역사적 평가
비록 진나라에게 멸망하긴 했으나 춘추 전국 시대를 통틀어서 강력한 국가 순위를 따지면 반드시 3위 이내에 드는 국력을 자랑했다. 춘추전국시대의 러시아 포지션이다.
영토의 넓이 역시 1위였으나 그 대부분인 장강 유역은 당시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이민족들로 가득했으며 밀림과 코뿔소, 코끼리 등이 공존하던 미개척지임을 유의해야 한다. 제나라, 한나라(韓)와 같은 국가들은 영토는 작았지만 대부분이 농토로 개발되고 인구가 거주할 수 있는, 당시 중국의 노른자위인 땅을 차지하고 있었던 반면에,[16] 초는 진(陳), 영(郢), 오월의 옛 땅 등 넓은 영토를 살리지 못하고 몇몇 대도시 위주의 거점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이 백만의 병력을 동원할 수 있는 국력을 가졌음에도 힘을 결집시키지 못했던 이유이기도 하다.[17] 그리고 초나라 땅을 생각하면 의외로 크지 않은 국력인데 일례로 전국칠웅 최약체인 한나라는 '''30만 대군을 보유할 수 있었다.''' 초나라가 전국칠웅중 가장 크고 한나라는 그 반대임을 생각해 보면 결국 초나라가 타국에 비해 인구밀도가 낮든 동원력이 약하든 둘 중 하나고 이것은 국력이 약하거나 제대로 발휘할 수 없거나 둘 중 하나로 귀결된다.[18]
그렇다고 해서 마냥 불리한 점만 있었느냐 하면 장점도 상당했다. 양자강 이남이 본격적으로 개발된 것은 육조시대 이후라고 하지만 그 전에도 사람은 꾸준히 살고 있었고, 특히 남쪽은 고온다습하여 농사를 지어 작물을 키우기에는 오히려 북쪽보다 유리했다. 특히 하류지역인 양주 일대는 비옥한 삼각지가 엄청나게 넓게 자리잡고 있어 그 옛날 상고시대에도 사람이 살고, 읍락을 이뤘던 유적과 유물이 있을 만큼 역사 깊은 곳이다. 따라서 인구부양력은 중원에 비해 그다지 밀리지 않았으며 촘촘한 국경선을 서로 맡대고 끊임없는 전란에 시달리던 중원의 다른 나라보다 오히려 전란은 더욱 적어 인구를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었다. 실제로 초나라의 춘추전국쟁패기를 보면 동원하는 군대의 양이 다른 나라의 몇 배는 될 때가 자주 나오며,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한 후에도 나타난 군벌들 중 상당수가 초나라 유민들이었던 것으로 볼 때 적어도 인구수 하나만큼은 밀리지 않았다.
진나라가 통일전쟁을 치를 때에도 초나라의 역량을 알 수 있는데, 경험이 많은 왕전은 초나라를 정벌하려면 60만 병력은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신과 몽염이 20만이면 충분하다 하여 기각하였지만 초나라의 역공에 털리고 말았고 결국 60만, 사실상 진나라 전 병력을 총동원하고 그마저도 우주방어로 초군의 오른 사기를 빼고 기습작전을 한 후에야 겨우 멸망시킬 수 있었다. 즉, 군사적 역량으로 치자면 전국시대 최강국이었던 진나라와 맞먹는 수준이었다는 얘기다.[19]
이런 면면을 살펴보면 초나라의 저력이 상당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런 힘을 바탕으로 해서 독자적으로 주변 이민족들에 대한 정벌을 단행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촉 지역과 그 밑의 운남 지역이 중국의 문화권에 최초로 들어갔다. 특히 운남 지역의 경우 정벌을 위해 쳐들어간 초의 병력과 장군 '장교'(莊蹻)가 진나라의 촉 지역 점령에 따라 돌아갈 길이 막히자 현지에서 자립해서 전나라(滇)를 수립하여 사실상 운남 지역에서 최초로 국가를 수립한 역사를 만들기도 했다. 전나라는 한나라(전한) 무제 때까지 독립 왕국으로 존속했다.
이 시기에는 초나라가 중화 문명권이 아닌 '오랑캐 나라' 취급을 당한 경우가 많아서 비하적 표현들이 많이 전한다. 《맹자(孟子)》에서 위(魏)나라 혜왕(惠王)[20] 이 맹자에게 주변국에 털린 것을 거론하며 하소연을 할 때 "남쪽으로는 초나라에게 욕을 당했다(南辱於楚)"[21] 고 했다든지, 항우를 원숭이에 비유했다든지 등 이루 말할 수 없이 많다.[22] 고사 각주구검의 배경이 초나라인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초나라의 가장 큰 문제점은 역사가 오래되면서 현실에 맞지 않는 각종 구습들이 존재했고,[23] 무엇보다 귀족의 힘이 너무 강성했다는 것이다. 중앙 집권을 원하지 않던 귀족들이 거대한 사병을 거느리고, 이를 기반으로 지역을 지배하는 등 왕국임에도 불구하고 효율적인 국가운영을 방해했다. 또한 오기가 초나라의 왕실 종친과 귀족들의 전횡을 뿌리 뽑고, 가산을 압류하여 군사비와 유민들의 정착비로 사용하자 단 몇 년만에 초나라가 크게 일어나 중원 전체를 위협하는 강국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그 오기도 자신의 뒤를 봐주던 초도왕이 죽자 바로 귀족들의 견제로 살해당하고 말았다. 며칠 전까지만해도 재상을 지내던 이가 왕에 의해서도 아니라 귀족들에게 살해당하는 것만 봐도 얼마나 귀족의 힘이 강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또한 관직에서 내쫓기고 결국 죽음까지 맞이한 충신 굴원의 사례 역시 초나라가 얼마나 귀족의 힘이 막강했는지 단편적으로 보여준다.
초 회왕의 치명적 실수도 쇠퇴에 한몫했다. 짧은 식견을 알 수 있는 일화가 장의의 상어육백리라는 성어에서 드러난다. 초 회왕은 진나라의 600리의 땅과 진나라 공주를 초나라에 바칠테니 제나라와 연을 끊으라는 장의의 말에 그것들을 받을지 안받을지도 확인 안하고 일방적으로 제나라와의 연을 끊었으며 장의가 차일피일 약속을 미루면서 정말 제나라와 연을 끊었는지 의심쩍다는 모습을 보이자 사람까지 보내 제나라를 모욕하기까지 해서 제나라가 진나라와 손을 잡게 만들었고, 나중에 장의에게 땅을 줄지 안줄지 추궁하자 장의는 '그거 내 땅 6리 주겠다는 얘기였음 ㅋ' 라며 입을 싹 씻어버렸다. 귀가 얇았던 초 회왕은 나중에 진나라가 땅을 줄테니 화친하자는 말에 땅은 필요 없으니 장의를 내놓으라 했고, 장의는 주저없이 적지로 들어가서는 언변으로 주변을 설득해서 피 한방울 안흘리고 돌아왔다. 후에 진나라가 혼인으로 연을 맺자면서 회왕에게 진나라로 방문할 것을 요구했는데, 신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갔다가 인질만 되고 초나라에 돌아가지도 못한채 죽고 만다. 이처럼 진나라와의 장기간의 소모전에서 진의 심장부로 원정을 갔다가 군대를 말아먹는 등 정예 병력의 손실이 커서 이걸 단기간에 회복하는 것이 불가능했고 이는 곧 초나라의 국력 손실로 이어졌다.
초나라가 진나라의 연횡책에 넘어가지 않고 합종책에 보다 치중했더라면[24] 진나라가 통일하지 못했을거라는 주장도 있을만큼 초나라의 입지가 막강했다.[25] 국력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정치가 한계가 있어서 진나라의 간계에 번번히 넘어가 다른 제후국으로부터 신의 없는 나라로 낙인찍혀버렸다. 춘추 시대에도 신의가 없다는 평가가 있었던 것 같은데, 초나라가 오나라의 침입을 받아서 수도가 함락되자 초의 장군 신포서가 진나라에 가서 원군을 요청할 때 '''7일 동안 쉬지도 않고 울어서''' 겨우 원군을 받아낼 정도였다. 사실 초나라가 오나라에게 수도를 관광당하는 것까지도 그 과정을 보면 어처구니가 없어지는데 원래 진나라의 공주 맹영과 초의 태자 건이 혼인을 맺기로 되어 있었던 것을 초평왕이 날치기해서 자기 후궁으로 삼아버린 데다 후계자 다툼에서 밀려 정나라로 도망친 태자 건은 망명을 받아준 정나라를 통수치고 자기가 정나라를 집어삼키려다 들통나 죽고 태자 건을 따르던 오자서가 가족들을 죽인 초의 왕가에게 복수하기 위해 오로 망명해 초를 공격한 것이기 떄문이다. 덤으로 이때 진나라 왕이 한 말이 뭔고하니 "'''초나라는 의리가 없는데 신하가 너무 충직해서 도와주겠음'''"이라니 말 다 했다.
물론 양쯔 강 이남의 개발이 미진하여 영토에 비해 국력이 낮았으나, 광활한 영토 덕분에 진나라에게 밀리기 시작할 때도 타국과 달리 수도를 계속 이전하면서 상당 기간 버틸 수 있었으며, 진나라는 국운을 걸고 주력군을 모아 초나라와 결전을 한 것도 모자라서 장기간의 토벌전 끝에 초나라를 완전히 멸하고서야 사실상 전국 시대를 마감짓고 최초의 통일적 중화제국을 이룩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진나라(秦)를 반대하는 세력들이 내건 대의 명분 중 하나가 초나라를 재건하자였을 정도로[26] 통일 왕조인 진나라에 저항하는 세력의 사상적 구심점이 되기도 했다. 진 시황의 폭압이 절정에 달하던 시대 '''단 세가구[27] 만 남더라도 진을 멸망시키는 사람은 반드시 초나라 사람'''이라는 말이 유행하기도 했다. 실제로 초나라 사람이었던 항우는 결국 초나라의 기치를 내걸고 진을 멸망시켰으며, 비록 초나라를 잇지는 않았지만 이후의 통일왕조를 세운 한고조 유방도, 항우를 물리친 일등 공신인 한신도 초나라 출신인걸 보면 그 말은 사실이 되었다.[28]
4. 역대 군주
- 육웅(鬻熊) : 초나라의 시조.
- 웅려(熊麗) : 육웅의 아들.
- 웅광 : 웅려의 아들. 초나라의 초대 군주다.
- 웅역 : 웅광의 아들.
- 웅애 : 웅역의 애들.
- 웅달 : 웅애의 아들.
- 웅승 : 웅달의 아들.
- 웅양 : 웅달의 아들. 웅승의 동생
- 웅거 : 웅양의 아들.
- 웅지홍 : 웅거의 아들.
- 웅연 : ? ~ 기원전 848년, 웅거의 아들.
- 웅용 : 기원전 847년 ~ 기원전 838년, 웅연의 아들. 이때부터 재위 기간이 제대로 나오기 시작한다.
- 웅엄 : 기원전 837년 ~ 기원전 828년, 웅용의 아들.
- 웅상 : 기원전 827년 ~ 기원전 822년, 웅엄의 아들.
- 웅순 : 기원전 821년 ~ 기원전 800년, 웅엄의 아들. 웅상의 동생.
- 웅악 : 기원전 799년 ~ 기원전 791년, 웅순의 아들.
- 약오: 기원전 790년 ~ 기원전 764년, 웅악의 아들. 이 사람 때부터 춘추 시대 초나라의 주요 귀족 가문인 투씨 가문이 갈라져 나왔다. 투백비의 아버지.
- 소오 : 기원전 763년 ~ 기원전 758년, 약오의 아들.
- 분모 : 기원전 757년 ~ 기원전 741년, 소오의 아들. 이 사람이 화씨지벽 고사에 등장한 초 여왕이다. 그러나 이때까지 초나라는 칭왕하지 않았다.
- 초무왕 : 기원전 740년 ~ 기원전 690년, 소오의 아들. 이때부터 초나라가 칭왕하기 시작했으며, 시호인 무답게, 무력으로 주위를 제압하며 중원 진출의 야욕을 노골화 한다.
- 초문왕 : 기원전 689년 ~ 기원전 675년, 초 무왕의 아들. 식나라를 멸망시키고, 식후의 아내인 식규를 차지해 초 성왕을 낳았다.
- 장오 : 기원전 674년 ~ 기원전 672년, 초 문왕의 아들. 놀고 먹기만 하다가 동생인 초 성왕에게 죽었다.
- 초성왕 : 기원전 671년 ~ 기원전 626년, 초 문왕의 아들. 형인 장오를 죽이고 왕위에 올라 송나라를 물리치는 등의 활약을 하지만 진문공에게 패한 오점을 남겼다. 그 자신도 아들인 초 목왕에게 죽는다.
- 초목왕 : 기원전 625년 ~ 기원전 614년, 초 성왕의 아들. 강나라, 육나라, 요나라[29] 를 멸망시키는 활약을 했다.
- 초장왕 : 기원전 613년 ~ 기원전 591년, 초 목왕의 아들. 춘추 오패로서 진나라의 대부 하징서를 죽이고 진나라를 멸한 뒤 진나라를 되일으켜 주었다. 절영지연의 고사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 초공왕 : 기원전 590년 ~ 기원전 560년, 초 장왕의 아들. 아버지에 비해 능력이 떨어져 아버지 때의 위용을 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도 애꾸가 되어버렸다.
- 초강왕 : 기원전 559년 ~ 기원전 545년, 초 공왕의 아들.
- 겹오 : 기원전 544년 ~ 기원전 541년, 초 강왕의 아들. 숙부인 초 영왕에게 죽임을 당했다.[30]
- 초영왕 : 기원전 540년 ~ 기원전 529년, 초 공왕의 아들. 조카인 겹오를 죽이고, 왕이 되어 진(陳)나라와 채나라를 멸하는 정복 사업을 펼쳤으나 그 외에 사치를 벌여 백성들의 원성을 사서 초 평왕에게 쫓겨 났다.
- 자오 : 기원전 529년, 초 영왕이 쫓겨난 공백에 즉위한 왕. 초 영왕의 동생. 초 평왕의 계략으로 초 영왕이 군대를 이끌고 온다는 말에 속아 자결했다.
- 초평왕 : 기원전 528년 ~ 기원전 516년, 초 공왕의 아들이며, 초 영왕의 동생. 처음에는 나라를 잘 다스렸으나 간신 비무기의 말에 넘어가 오자서 부자를 해치는 일을 하다가 초나라의 몰락의 단초를 제공한다.
- 초소왕 : 기원전 515년 ~ 기원전 489년, 초 평왕의 아들. 이때 초나라가 오나라에게 멸망했으나 신포서가 진(秦)에 원병을 청해준 덕분에 초나라를 다시 되일으켰다.
- 초혜왕 : 기원전 488년 ~ 기원전 432년, 초소왕의 아들. 이때 진(陳), 채, 기나라를 멸망시킨다.
- 초간왕 : 기원전 431년 ~ 기원전 408년, 초 혜왕의 아들. 거나라를 멸망시킨다.
- 초성왕[31] : 기원전 407년 ~ 기원전 402년, 초 간왕의 아들. 얼마나 무능했는지 도적이 일어났을 때 도적에게 순삭당했다.
- 초도왕 : 기원전 401년 ~ 기원전 381년, 초 성왕의 아들. 오기를 등용해 부국 강병을 이룬다.
- 초숙왕 : 기원전 380년 ~ 기원전 370년, 초 도왕의 아들.
- 초선왕 : 기원전 369년 ~ 기원전 340년, 초 도왕의 아들. 형인 초 숙왕이 아들이 없어 즉위했다.
- 초위왕 : 기원전 339년 ~ 기원전 329년, 초 선왕의 아들. 월나라를 멸망시킨다.
- 초회왕 : 기원전 328년 ~ 기원전 299년, 초 위왕의 아들. 장의에게 질질 끌려다닌 바로 그 암군이다.
- 초경양왕 : 기원전 298년 ~ 기원전 263년, 초 회왕의 아들. 진나라의 침략으로 재위 20년째에 400년고도 영도(강릉)를 잃고 진현으로 천도
- 초고열왕 : 기원전 262년 ~ 기원전 238년, 초 경양왕의 아들. 그가 후계자 선정을 바로 하지 못하여, 갈등의 불씨를 낳아 춘신군 황헐이 이원에게 죽었다.
- 초유왕 : 기원전 237년 ~ 기원전 228년, 춘신군의 사생아지만[32] 공식적으로는 초 고열왕의 아들. 이원이 이 당시 때 권력을 휘둘렀다.
- 초애왕 : 기원전 228년, 초 고열왕의 아들. 초 유왕과는 달리 아버지가 초 고열왕이 맞다. 웅부추에게 죽었다.
- 초왕 부추 : 기원전 227년 ~ 기원전 223년, 초 고열왕의 아들. 초 애왕과 그를 끼고 행패를 부리던 이원을 죽여 초나라를 안정시키려 했지만 진나라에게 밀려 수춘이 함락당하고 진 시황에게 붙잡혀 서민으로 강등된다. 그 명분은 초 애왕을 죽인 죄.
- 창평군 : 기원전 223년, 초나라의 진짜 마지막 임금. 초 고열왕의 아들. 원래는 진나라의 장수로 활약했으나 초의 장수 항연의 추대를 받아 초나라의 왕이 되었다. 오나라와 월나라 땅에서 진나라에게 저항했으나 역부족으로 결국 전쟁에서 패해 죽었다.
- 초은왕(진승) : 기원전 210년 ~ 기원전 209년, 진승·오광의 난 때 진승이 스스로를 장초의 왕으로 선포하였다.
- 초가왕(경구) : 기원전 209년 ~ 기원전 208년, 진승이 죽은 후 추대되었던 왕. 하지만 항량에게 패배해 처형되었다.
- 초회왕/초의제 : 기원전 208년 ~ 기원전 206년, 회왕의 후손 혹은 부추의 아들. 진 시황이 중국을 통일한 이후 실정으로 진나라는 곧 붕괴했고 초한 쟁패기 반진 세력의 상징적 맹주로서 항우에 의해 초나라(후초)의 천자로 옹립되었다. 실권은 없었고, 황제에 버금가는 패왕의 지위에 오른 항우에 의해 곧 피살된다.
- 서초패왕(항우) : 기원전 206 ~ 기원전 202년, 항연의 방계 후손으로써 반진 세력의 맹주로 진나라를 멸망시켜 서초패왕으로 즉위하고 초의제를 살해했으나 초한전쟁에서 한고조 유방에 패사하여 서초는 멸망한다.
[1] Baxter-Sagart의 재구에 의하면 상고음은 /*S-r̥a/. 현대 발음은 Chǔ. 楚는 현대의 한자이며 진나라 시대의 전서 소전체 표기는 이렇다. 참조[2] 항량, 항우의 서초까지 합하면 기원전 202년.[3] 한자 뜻 자체가 초나라 서울이다.[4] 춘추전국시대에는 성과 씨를 구별했는데 초나라 미성은 웅씨(熊氏)다.[5] 기원전 704년부터.[6] 초나라 사람들이 묘족의 조상격 민족 내지는 자매 민족이라는 점에서, 몽몐어족에 속하는 언어로 추정된다.[7] 태양신과 불의 신을 섬겼다.[8] 현대의 묘족과 관계가 깊은 민족이다.[9] 현존하는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금화이다. 대략 기원전 5세기경 등장한것으로 보여진다.[10] 춘추 시대 중원의 나라들은 주나라를 업신여기더라도 감히 스스로 왕이라고 칭하지는 않았는데 남방의 '오랑캐' 나라인 초나라·오나라·월나라는 그에 구애받지 않아서 당당하게 왕을 칭했다. 이때 문정(問鼎)의 고사가 나오기도 했다.[11] 초평왕은 비록 후계자 문제로 일을 그르치고 오나라의 공격으로 국력을 깎아먹었지만, 월나라와 결맹을 맺어 후일을 도모할 기반을 만들었다.[12] 이때 오자서의 친구로 알려진 신포서가 진(秦)나라의 병사를 빌려 오나라 군대를 물러나게 한다. 그 덕에 멸망은 피할 수 있었다.[13] 오나라와 월나라가 초나라를 멸망시키다가 실패하고 돌아갈 때 초나라가 아니라 월나라와 싸운 원인이다.[14] 이 시기에 초고열왕은 노나라를 멸망시키면서 초나라가 최강국인 진나라와 더불어 강국이라는 것을 보여준다.[15] 이 일화를 가져다 세조를 비판했다고 문제가 된 것이 바로 김종직의 '조의제문'. 의제를 조문한다는 뜻으로 단종을 의제로 비유하고 세조를 항우로 비유했다고 참소되어 이것이 무오사화의 단초가 된다.[16] 제나라는 악의가 이끄는 합종군에게 크게 패한 후 국력이 급격히 줄어들긴 했으나, 단기간에 이를 회복하고 전국 시대 중반까지 동제를 칭할 정도로 번성했다. 일단 바다와 접해 있었기에 소금을 생산할 수 있었고, 제환공과 관중의 시대에서부터 상업의 중심지로 자리 잡아 일찍이 부국 강병을 이루어내는 데 성공한 면도 크다. 한반도와 일본에서도 춘추전국시대의 제나라 화폐를 발견할 수 있을 정도.[17] 여기에 추가로 이민족의 반복되는 침략에도 항상 대비해야 했다.[18] 이를 뒤집어 말하자면 초나라가 타국 수준의 인구밀도가 되고 국력을 제대로 살릴 수 있었다면 진나라를 제치고 천하통일을 이룰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19] 게다가 또 이게 초나라 영토의 절반 정도는 뜯긴 상태에서 벌어진 일로서 이빨도 발톱도 다 뽑힌 호랑이 신세인데도 이 정도의 저력을 보여줬다는 거다.[20] 《맹자》에서는 양혜왕(梁惠王)이라고 표기돼 있다. 당시 위나라의 수도가 대량(大梁)이었기 때문.[21] 초나라에 비하적 태도가 자리 잡고 있으니까 이렇게 '''욕을 당했다'''고 표현한 것이다. "고작 '오랑캐' 따위한테 지다니 정말 치욕스러워 미치겠다!" 이 정도의 뉘앙스인 셈.[22] 춘추·전국 ~ 진 - 한 교체기에는 특정 국가에 대한 당대인들의 비하적 인식들이 녹아 있는 기록들이 굉장히 많다. 요즘으로 따지면 인종차별이나 지역드립급이다.(…) 당시 초나라 외에 자주 비하됐던 망국 하나라의 후예 기(杞)나라, 역시 망국인 상(은)나라의 후예 송나라가 있다. 기우(杞憂) 같은 기나라의 고사나, 송양지인(宋襄之仁)이나 수주대토(守株待兎) 같은 송나라의 고사들은 하나같이 덤 앤 더머급 고사인데 이것은 당시 중원에서 '바보 동네' 취급을 당해 유독 저런 이야기들이 오늘까지 전해져 내려오는 것이다.[23] 전국시대를 마감한 진나라도 구습이 많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이쪽은 상앙의 변법으로 퇴치했다. 귀족 역시도 변법 이후 문제가 해결되었다.[24] 물론 나머지 6국의 이해관계를 교묘하게 이용한 진나라의 이간질도 감안해야 하지만.[25] 물론 또 그렇다고 나머지 5국의 입지도 약한건 아닌게 우선 조나라는 진의 공격에 대한 방패막이였고(천하통일때도 가장 먼저 타깃이 되었다. 결과적으로는 조나라를 몇번이고 공격해도 막혀서 한나라가 먼저 먹혔지만) 제나라는 한때 진나라에서 서제, 동제 칭호를 만들어 나는 서제 너님은 동제라고 하는게 어떻겠냐고 할 정도였고 심지어 전국칠웅 최약체인 한나라는 전성기에는 진나라와 맞먹는 국력을 가질 정도였으니 초나라 외에는 쩌리였던 것도 아니다.[26] 실제로 초한전쟁의 서막을 올린 진승도 나라이름을 초로 내걸었다.[27] 이 세 가구는 수사적으로 초나라의 유력한 왕족 가문인 굴씨, 경씨, 소씨 세 집안을 나타낸다고 해석하기도 한다.[28] 유방의 출신지는 강소성 패국(沛國) 풍읍인데, 패국 역시 초나라 땅이다. 패국이 원래 초나라 땅인 게 아니었고 위, 송, 제나라와의 접경지였기에, 위나라 출신인데 초나라로 옮겨온 것이라는 이야기는 있다.[29] 거란족의 요나라가 아니다.[30] 비슷한 사례로 신라의 애장왕, 고려의 헌종, 조선의 단종이 있다.[31] 위의 초 성왕과 반복이 아니다. 위의 초 성왕은 시호가 成(이룰 성)이고 이 초 성왕은 시호가 聲(소리 성)이다.[32] 역사적으로 고증하면 초 고열왕의 아들이 맞다. 진시황의 사례를 생각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