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우채

 


성명
정우채(鄭瑀采)
생몰
1911년 11월 6일 ~ 1989년 9월 23일
출생지
전라남도 나주군 반남면 신촌리
사망지
서울특별시
매장지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정우채는 1911년 11월 6일 나주군 반남면 신촌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공산보통학교 4학년 재학 중이던 1926년경 일본인 교장 배척운동을 하다가 1년간 휴학을 당했다. 그 후 광주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여 1학년 때 항일학생독립운동의 모체인 성진회에 가입하여 비밀결사의 주역으로서 활동했다.
당시 그는 장재성왕재일 등 광주고보생, 광주농고생 15명과 함께 조국의 독립, 사회과학연구, 식민지노예교육체제반대 등을 강령으로 하는 성진회를 결성했다. 또한 문예운동에도 참여하여 '단결하자'라는 시제(詩題)로 조선일보 학생문단에 당선되기도 했다.
1928년 6월 정우채는 광주고보생 이경채에 대한 학교측의 퇴학처분에 항의하며 복교운동을 주도했다. 동교생 김기권, 임주홍, 최규창 등 2, 3, 4학년생들과 합의하여 학교측에 진정서를 제출하는 한편 동맹휴학투쟁을 지도한 것이다. 그는 이 동맹휴학의 주모자로 지목되어 퇴학처분을 당했다.
그 후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항일운동이 발발하자, 정우채는 성진회 운동과 관련하여 일경에 피체되어 광주경찰서(현 충장로 2가 옛 무등백화점 부근)에 수감되었다. 1930년 1월 11일자 동아일보는 다음과 같은 기사를 실았다.

'반남면 신촌리에 사는 정우채(19세)를 지난 6일 당지 주재소에서 검거하여 광주경찰서로 호송한 일이 있다는데(중략), 사건내용은 광주학생사건에 관계가 있다하여 그와 같이 검거한 것이다.'

그는 1930년 10월 광주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형을 언도받았으며 1931년 6월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그 뒤 고향에서 어린이잡지「아히생활」의 동인으로 활약하고 '자미사(紫微社)' 라는 써클을 조직하여 계몽잡지를 발간하다가 나주 일경에 체포되어 반년동안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광복 후 호남신문 논설위원, 세계통신사 전남지사장 등을 역임했고 광주학생독립운동사 편찬위원, 광주학생독립운동지회 이사를 지냈다. 1989년 9월 23일 서울에서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3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89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