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채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2.1. 초년기
이경채는 1910년 4월 6일 전라남도 광주군 송정면 송정리(현 광주광역시 광산구 송정동)에서 이성륜(李成倫)의 3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유복한 환경에서 자라며 서당에서 글공부를 하다가 1920년 4월에 11살의 나이로 송정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다. 이후 1923년 4학년에서 6학년으로 월반한 뒤 이듬해 졸업하고 광주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광주고보는 1920년 5월 광주 유지들에 의해 설립되었다가 1922년 관립으로 전환된 학교로, 그가 입학할 당시에는 3백여 명의 학생들이 몰려들 정도로 경쟁이 치열했다.
1920년대 당시 광주에서는 한국인 학생들과 일본인 학생들 간의 사소한 충돌이 끊이지 않았다. 더욱이 일본인 교사가 대다수인 식민교육과 민족 차별, 비교육적 처사 등에 한국인 학생들은 적지 않은 반감을 가졌고, 동맹휴학을 통해 불만을 표출했다. 광주고보 또한 이경채가 입학한 지 얼마 안되어 동맹휴학이 벌어져서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이 동맹휴학은 광주고보와 일본 선발팀간의 야구 경기 도중 본인 의사가 광주고보 선수에게 모욕적인 언사를 하였고, 이에 격분한 광주고보 선수들이 그를 구타하는 사건에서 비롯되었다. 광주고보 교장은 경찰에 조사를 의뢰했고 학생들이 연행되었다.
이에 전교생 400여 명이 항의하자, 교장은 이들 모두에게 무기 정학을 내렸다. 이에 학생들은 교장 사퇴를 요구하며 동맹휴학에 들어갔고, 학부형들은 전남학부형대회를 개최해 무기정학 처분을 취소하라고 요구했다. 그래도 학교 측에서 별다른 태도 변화가 없자, 학부형회는 일반 시민들의 엄정한 비판에 호소하자며 도민대회를 개최하고자 했으나 일제 경찰이 이를 원천 봉쇄하면서 좌절되었다. 동맹휴학은 3개월이 지난 9월경 수습되었으나 주도 학생 4명은 퇴학 처분을 받았다. 이경채는 이러한 과정을 지켜보며 일제에 대한 반감을 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1927년 여름, 이경채는 4학년 재학 당시 동리 친구인 박병하(朴邴夏), 윤해병(尹海炳)과 동교생 양태성, 유병후(柳秉厚), 김무삼(金武三) 등과 함께 비밀리에 독서회(讀書會)를 조직했다. 독서회는 주로 사회과학 서적을 읽고 토론하는 비밀모임으로, 그는 이곳을 통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를 익혔다.
2.2. 광주학생항일운동의 도화선이 되다
1928년 4월, 이경채는 송정리 보통학교 사무실에 있는 등사판, 원지(原紙), 출판기, 인주 등을 몰래 빼내와 박병하와 더불어 문서 수십장을 인쇄했다. 이 문서에는 동등한 인간으로 계급이 있는 것은 모순이고 천황은 신성한 존재라는 것은 제국주의자의 논리일 뿐이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또한 그는 무산계급의 신 사회를 건설하면 일제의 횡포를 파괴할 수 있다며 이를 위해 생명을 바쳐야 한다는 내용을 문서에 담았다.
이경채는 인쇄한 수십 장의 문서를 광주역 앞 경찰관 파출소 게시판, 광주고보, 송정리역, 송정리 신사 등의 전신주와 판자벽에 붙였으며, 전남 각 중등학교, 경찰서에도 발송했다. 이러한 "불온 문서"가 시내에 뿌려지자, 경찰은 즉시 수사에 착수했지만 쉽사리 단서를 찾지 못했다. 이경채 등이 문서를 인쇄한 등사판과 남은 문서들을 모두 파기했기 때문이다. 이에 송정리 경찰관 주재소는 광주경찰서와 연합해 송정청년회 간부들의 집을 수색했고 광주 사회운동가 수십명을 체포했다. 또한 광주경찰서는 형사대를 출동시켜 광주소년동맹 위원 김판암, 김만년과 광주고보 교사 김재천 등을 연해 고문을 가하고 그 중 12명을 재판에 넘겼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이경채의 친구 박병하만 체포되었을 뿐, 이경채는 별다른 의심을 받지 않았다.
그러나 얼마 후, 이경채는 덜미를 잡혀 윤해병과 함께 체포되었다. 그러자 광주고보는 취조가 끝나기 전에 권고 퇴학을 시켰다. 이에 광주고보 4,5학년 학생 대표 11명은 학교 측에 이경채의 퇴학 이유에 대한 해명을 요구하고 학부형회에 진정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학교 측은 진정서를 제출한 학생대표들에게 근신 처분을 내렸고, 2~5학년 학생 300여 명은 동맹휴학에 들어갔다. 학생들은 교장에게 이경채의 무죄 방면 시 복교를 주장했고, 교우회의 자치 활동 보장, 교장의 기만적 행동 반성, 무자격 선생 사직, 일본인 교사의 양심적 반성 촉구, 무도장 신설, 조선인 본위의 교육 실현, 11명의 근신 처분 취소 등을 요구했다.
그러나 학교 측은 한 발도 물러서지 않고 동맹휴학 주동자 27명을 퇴학시키고 281명에게 무기정학 처분을 내렸다. 이에 퇴학생 보호자들은 학교 측의 호출에 불응했고, 광주농업학교 역시 동맹휴학을 감행해 광주고보 동맹휴학생과 연합하여 맹휴 중앙본부를 발족시켰다. 맹휴 중앙본부는 학부형들에게 통고문을 발송하여 맹휴의 정당성을 알리며 적극적인 지원을 호소하는가 하면, 학생들에게는 끝까지 투쟁할 것을 선언하여 결속을 다졌으며 학교장에게는 항의문을 보내기도 했으며, 학생들에게 경찰 취조 시의 답변 요령까지 열거된 실행 요목을 배포하기도 했다. 이에 일제는 맹휴 중앙본부 지도자에게 실형을 선고하는 등 탄압을 가했다.
동맹휴학은 1928년 9월 학부형회가 학교 당국과 타협하여 학교 측의 최후 통첩일에 자제들을 등교시키면서 종결되었다. 하지만 이 사건은 광주 한국인 학생들의 항일의식을 일꺠우는 계기가 되었고 1929년 11월에 발발한 광주학생항일운동의 도화선으로 작용했다. 한편 이경채는 50여 일 동안 예심을 받다가 1928년 7월 광주지방법원에 소환되었고, 그해 10월 광주지방법원 공판에서 지안유지법 및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 형을 선고받은 후 개성소년 형무소에 투옥되었다가 1929년 10월 20일 만기 출소했다. 이후 1929년 11월에 발발한 광주학생항일운동에 참가하지는 못했지만 비밀 회의에 참석해 사후 대책을 논의하다가 11월 말 광주경찰서에 체포되었지만 증거 불풍분으로 석방되었다. 하지만 그는 요시찰 인물로 지정되어 일제 경찰의 감시를 받아야 했다.
2.3. 일본 유학
이경채는 1931년 2월 일본으로 건너가 검겅고시를 거쳐 그해 4월 와세다대학 전문부 법률과 1학년에 입학했다. 그가 와세다 전문부에 입학한 이유는 분명하지 않지만, 와세다대학 조선유학생 동창회가 광주학생항일운동에 적극 호응한 것과 관련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 와세다대학은 자유분방하고 특권 의식이나 우월의식이 적었고 사회주의자들의 요람 같은 곳이었던 것도 하나의 요인이었을 것이다.
이경채는 낮에는 식문배달을 하고 지하철 공사장 인부로 일했고 밤에는 학교를 다녔다. 그러면서도 광주학생항일운동을 이끌다가 일제의 검거망을 피해 일본으로 건너와 활동하던 양태성(梁泰成), 윤창하(尹敞夏)와 일본에서 사회주의 활동을 펴고 있던 유동후(柳東厚), 문두재(文斗載) 등과 자주 모임을 갖고 독립운동 노선을 토의하곤 했다. 그러던 1932년 1월, 이봉창이 천황을 암살하려 했다가 실패한 사건이 벌어졌다. 이경채는 이 사건 이후로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연락해 독립운동을 꾀하면서 그동안 가지고 있던 사회주의 이념을 민족주의 이념으로 전환했다.
그러나 그의 독립운동 준비는 곧 도쿄 경시청 내선과에 발각되었고, 그는 이내 체포되어 가혹한 고문을 받은 뒤 6개월 후에야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내통했다는 증거가 부족해 풀려났다. 하지만 그 후에도 감시를 심하게 받자, 이경채는 와세다대학 전문부 2학년을 포기하고 고베항을 통해 상하이로 망명했다.
2.4. 중국에서의 독립운동
이경채는 상하이로 망명한 뒤 이름을 김판수(金判守)로 개명하고 선우혁과 함께 1933년 9월 인성학교 교사로 부임했다. 그는 남녀 아동 60여 명을 대상으로 민족 의식을 일깨우는 교육을 실시했고, 매일 밤 교사들과 함께 내일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칠 지를 토의했다. 또한 한글 신 철자법을 만들어 아이들에게 알려줘서 아이들이 한글을 쉽게 익힐 수 있게 해줬다. 그 결과, 인성학교는 어려운 환경에서도 제19회 졸업식에서 8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그러나 일본총영사관의 간섭과 통제가 강화되자, 인성학교는 힘을 잃어 1935년 폐교되고 말았다.
이후 이경채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활동하고 있던 항저우로 이동했고, 이름을 다시 이중환(李中煥)으로 개명했다. 이경채는 임시정부 국무원 비서장 김철의 추천으로 한국독립당 기관지 <진광(震光)> 간행에 관여해 이창세(李昌世)와 함께 중국 인쇄소에서 조판, 인쇄를 담당했다. <진광>은 4, 6배판 활판본으로 격월간 발행되었는데, 부수는 국문본이 약 500부, 중국어본이 약 1,000부였으며, 쪽수는 대략 20~50쪽 안팎이었다. 국문본은 구미교포들에게 임시정부의 정당성과 일제의 폭정을 선전하기 위해, 중국어본은 한국 독립운동의 실상과 일제의 야만적인 행위를 중국 식자들에게 알리기 위해 발행되었다.
그러나 1935년 8월 항저우의 일본영사관이 중국인 밀정을 통해 <진광> 기관지를 출판하던 비밀장소를 알아내자, 일본군과의 마찰을 피하고 싶었던 중국 국민당이 발행 중지를 권고하면서 상황이 악화되었다. 결국 <진광> 발행은 중단되었고, 이경채는 다시 상하이로 돌아갔다. 이후 그는 장고산(張孤山)의 소개로 1935년 10월 일본연구소에 들어갔다. 일본연구소는 겉으로는 민간 연구소였으나 실제는 중국국민당정부 군사위원회 직할로 장백리(蔣百里)가 주관했다. 장백리는 일본 육사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독일사관학교를 거친 군사학 이론가로서, 장개석의 군사고문으로 활약한 인물이었다. 장백리는 이경채의 이름을 이일휘(李一輝)로 개명시켰다.
이경채는 일본연구소에서 문구를 교정, 교열하거나 자료를 분류, 정리하는 일을 맡았다. 이후 일본 연구소에서 같이 근무하던 전직오(全職吳)와 더불어 중국 제3로군 초비(剿匪) 북로군 사령관 진성(陳誠) 장군 부대에 예속되었다. 진성은 국민당정부의 참모총장을 역임하고 대만으로 건너간 뒤에는 국민당 부총재 자리에 오른 인물이다. 이후 이경채는 1936년 9월 장백리의 추천으로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 13기생으로 입교했다. 그러다가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이경채가 속한 진성 장군의 상해방면군 적총사령부는 제3전구에 편제되어 난징, 상하이, 강소성, 절강성을 관할했다.
이경채는 1937년 10월 중국 육군 제11사단에 임시 배속되었고, 상하이 근처 가정현 외강 부근에서 일본군과 격돌했다. 제11사단은 일본군을 상대로 6일간 격전을 벌였 지만 병력 1만 명 중 이경채 등 2백명만 가까스로 생환하여 탈출하는 막심한 피해를 입었다. 이후 이경채는 1938년 1월 제15집단군사령부로 복귀한 뒤 중국군 소속으로 일본과의 전쟁에 참전했다.
2.5. 해방 후 경력
이경채는 8.15 해방 후에도 국민혁명군에 남았고 중교(소령)까지 승진했다가 1949년 10월 중국 국민당이 국부천대로 중국 대륙을 떠나 대만으로 후퇴한 직후 한국에 귀환했다. 고향에 돌아온 그는 주변의 정계 입문 권유를 물리치고 조용히 지내다가 1974년 경상남도 양산군 기장면 석산리로 이사해 양어장을 운영하며 살았다. 그러다가 4년 뒤인 1978년 3월 25일 불의의 사고로[1] 사망했다. 향년 68세.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이경채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1] 구체적으로 무슨 사고인지 확인하지 못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