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호(1891)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정재호는 1891년 2월 7일 경상북도 영천군 임고면 우항동에서 정용우(鄭鏞禹)의 아들로 태어났다. 자는 건중(建仲), 호는 춘산(春山)이다. 그는 1919년 3월 김창숙, 곽종석, 장석영 등이 주도한 파리장서에 서명하여 파리 강화 회의에 제출해 한국의 독립을 청원하게 했다. 이 일로 일제 경찰의 감시를 받게 되자 가족을 데리고 만주로 망명했다.
1920년 함경북도에 돌아와서 임시정부 연통제를 조직하고 윤태선(尹台善)·이상호·전재일 등 수십명의 조직원과 함께 활동하다가 일경에게 체포되어 징역 2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후에는 다시 만주로 건너가 1925년 길림성 화전현(樺甸縣)에서 이탁·지청천·김이대(金履大) 등이 조직한 정의부(正義府)에 가입하여 무장항일투쟁을 계속하였다.
특히 1926년 4월부터 정의부 검무감(檢務監) 고인섭(高仁燮)과 함께 봉천(奉天), 개원(開原)등지에서 군자금 모집, 일경의 밀정 처단 등의 활동을 하다가 1927년 2월 12일에 개원성 동문밖에서 체포되어 신의주로 압송되었다.
결국 1927년 12월 5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받고 다시 옥고를 치렀다. '연일 정씨 족보'에 따르면, 1943년에 함경도 지방에서 군자금 모집 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용정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1943년 12월 27일에 옥사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이를 입증할 공식 기록은 현재까지 발견되지 않았으며, 국립현충원 자료에는 그가 1945년 12월 27일 만주에서 사망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정재호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16년 국립서울현충원에 그를 기리는 위패를 세웠다.
3. 여담
2014년 9월 11일, 정재호의 아들 정춘석 씨가 영남일보와 인터뷰했다. 그는 어릴 적부터 짚신을 팔아 생계를 연명하다 고경면 도암리, 하양 등 남의 집을 전전하며 노동 일을 해주는 대가로 쌀을 받는 머슴살이 생활로 청년기를 보냈다고 한다. 워낙 가정 형편이 좋지 않아 학교를 다니지 못해 평생 문맹으로 지내야 했지만, 부친이 독립운동가라는 걸 위안삼으며 지냈다고 한다.
16년간 영천시청 환경 미화원으로 근무하다 5년전에 퇴직한 그는, 10년전 근무 도중 쓰레기 차에서 떨어지는 사고로 다리를 크게 다쳤으나, 치료를 제대로 하지못해 지금도 그 후유증으로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게다가 부인과 일찍 사별해 생활고로 가정을 제대로 챙기지 못해 하나있는 아들마저 사회생활을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교도소에 들락거리는 것이 늘 가슴아프다고 안타까워했다.
하지만 늦게나마 선친이 독립유공자로 선정되고, 고향에 선친의 독립유공을 기리는 비석까지 세워진 것에 자부심을 느낀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