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영(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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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8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장석영은 1851년 10월 24일 경상북도 칠곡군 약목면(현 기산면) 각산리에서 1849년(헌종 15) 문과에 급제하여 종2품 형조참판을 지낸 아버지 장시표(張時杓)[4] 와 한강 정구의 후손인 정완(鄭垸)의 딸인 어머니 청주 정씨 사이의 3남 1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충정공 장안세(張安世)의 17대손이며, 의정부 우참찬을 지내고 영의정으로 추증된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의 9대손이다. 장석영이 태어난 각산리는 마을이 형성된 후 전통적으로 퇴계학(退溪學)을 받들었고, 그 역시 가문의 전통을 이어받아 퇴계학을 익혔다. 그는 어릴 때부터 남달리 총명했으며, 효제(孝悌)의 도리와 예의, 절도를 실행하여 보는 이가 기이하게 여겼다고 한다. 이후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의 문하에 들어가 곽종석과 더불어 한주학(寒洲學)의 계승자가 되었으며, 이단으로 배척받는 스승을 옹호하고 한주학이 퇴계학을 계승하고 있음을 인정받기 위해 온 힘을 기울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면서 대한제국의 국권이 일제에게 넘어가자, 장석영은 곽종석, 이승희(李承熙) 등과 함께 유생 3백여 명을 규합하여 '청참5적소(請斬五賊疏)’를 올려 을사오적을 참수할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1907년에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되자 칠곡군 지방보상 회장으로 추대되어 금연운동과 의연금 모집 운동을 주도했다. 이후 1912년 3월 3일부터 6월 9일까지 만주와 연해주 일대를 탐방하여 독립운동 적지를 물색하고 이 지역에 이주한 한인들의 실상을 견문한 뒤 <요좌기행(遼左紀行)>을 저술했다. '요좌기행'은 오늘날 독립운동사의 중요한 사료로 인정받고 있다.
1919년, 장석영은 곽종석, 김창숙 등과 함께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보내기로 계획하고 청원문 초안 작성을 담당했으며, 유림 대표 137명 중 1인으로 서명했다. 장석영이 작성한 독립청원서 초안을 '회당본'이라고 한다. 김창숙과 곽종석은 장석영과 김황이 작성한 초안을 놓고 고심하다 장석영의 글은 너무 장황하다고 여겨 배제하고 김황이 작성한 초안을 저본으로 삼고 부적절한 내용을 빼고[5] 필요한 내용을 추가하여 문안을 완성했다. 이를 곽종석의 호 면우를 따 '면우본'이라고 한다.
한편, 장석영은 3.1 운동이 전국에 확산되고 있는 것을 목격하고 고향에서도 만세시위를 벌이기로 결심했다. 그는 이기정(李基定), 성대식(成大湜), 송수근 등의 유림과 접촉하여 일정을 계획했다. 이때 유진성을 중심으로 한 기독교측의 독립운동 계획이 있음을 듣고, 이들과 만나 성주 장날인 4월 2일을 기하여 연합해서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정했다. 이윽고 4월 2일 오후 1시경, 성주면 경산동 관제묘 뒷산에 모인 기독교도들이 먼저 태극기를 앞세워 시장으로 행진하면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에 시장에 모인 유림들도 호응하면서 군중의 수가 3천명을 넘었다. 이때 일본 경찰이 주동인물을 연행하여 군중의 분노가 고조되자, 경찰이 발포했고 군중은 일단 해산했다.
그러나 이들이 재집결하여 일본인 가옥을 방화하고 경찰서를 습격하리라는 소문을 들은 일본 경찰은 일본인들을 경찰서내로 피신시키고 대구로부터 15명의 수비병을 증원받았다. 오후 11시 재집결한 시위군중과 일본 경찰사이의 무력충돌로 1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이후 일본 군경은 대대적인 검거 작전을 폈고, 장석영도 이때 체포되어 1919년 8월 2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2년형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그는 출옥 후 자신의 기억에 입각한 일기체 형식으로 1919년 음력 2월 4일부터 11월 1일까지의 292일간의 일을 기술한 <흑산록(黑山錄)>을 집필했다. '흑산록'은 장석영이 3.1 운동에 가담했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는 과정을 자세히 기술하고 있으며 그가 집필한 독립청원서 초안인 '회당본'이 게재되어 있어서 독립운동사 연구에 귀중한 사료로 인정받고 있다.
장석영은 출옥 후 고향에 은거하고 자신의 문집을 정리하다가 1926년 7월 17일에 사망했다. 아들 장우원(張右遠)과 문인 손후익은 그의 사망 후 문집 간행을 준비했고 일제의 검열을 거친 끝에 1930년 11월 7일에 <회당집>을 간행했다. 이때 일제는 검열 과정에서 총 4곳에 대해 삭제 조치를 요구했지만, 장우원 등은 이 중 1곳[6] 만 검열을 수용하고 나머지는 무시하고 그대로 수록했다. 이후 일제의 검열로 인해 함께 간행하지 못했던 필사 초고들은 집안 내에 몰래 보관되었다가 8.15 해방 직후 공개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0년 장석영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3. 회당본 파리장서
회당본은 당초 지금까지 전해지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2009년 6월 대구 MBC에서 파리장서운동 90주년 기념 특집으로 <붓의 투쟁>이라는 3부작 다큐멘터리를 촬영하는 과정에서 '흑산록'이 공개되었고, 그 안에 회당본이 들어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비로소 그 내용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장석영은 김창숙으로부터 파리강화회의에 보낼 글을 써달라고 부탁받자 글을 지은 뒤 조카인 장시원(張始遠)을 곽종석이 있는 다전(茶田)으로 보내 가부를 물었다. 하지만 곽종석은 그의 글이 너무 과격해서 외교 문서로 사용하기 부적합하다고 평가했다. 장석영의 파리장서는 곽종석의 지적 대로 언어가 시종 준절하면서도 과격했다.
또한 장석영의 파리장서는 국내 문제에 많은 지면을 할애했다. 다음은 그 일부이다.갑신년에 다케조에 신이치로(竹添光鴻)가 우리 황제를 겁박해 물러나게 하고, 우리 대신을 도살하였으며, 을미년에는 미우라 고로가 병사를 잠입시켜 대궐을 침범하여 우리 황후 민씨를 시해하였습니다.
이렇듯 장석영은 송병준과 이완용 등이 자행한 일들을 열거하면서 국내의 문제를 특기하고 이들에 대한 적의를 불태웠다. 곽종석은 그의 글이 부드러우면서 문제의 핵심을 드러내는 외교문서로 적절하지 않다고 봤다. 하지만 장석영의 파리장서에는 국내의 만세운동, 국제사회에서의 일본의 기만, 독립에 대한 강렬한 의지 등이 두루 나타나 있으며, 당시 한국이 처한 절박한 사정이 간결한 문체로 서슴없이 기술되었다. 비록 최종적으로 선택되지는 못했지만, 장석영의 파리장서는 이렇듯 한국의 독립운동사 연구와 장석영 본인의 사상 이해에 보탬이 될 사료로 인정받고 있다.을사년에는 이토 히로부미가 적신 송병준과 몰래 결탁하여 일진회를 만들어 일본이 우리나라를 보호하는 것을 국민이 원하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그해 10월에는 적신 이완용 등과 힘께 스스로 5개의 조약을 만들어 우리 황제를 협박하여 어인(御印)을 억지로 조인하려 하니, 우리 황제는 사직과 함께 죽겠다고 스스로 맹세했고 대신 민영환, 조병세 등은 모두 죽었습니다. 기타 모든 벼슬아치와 유생, 무사와 호위병, 초야의 서민들은 혹은 목숨을 끊고 혹은 구금되어 죽게 된 자가 천백에 이릅니다. 저 헤이그 평화회의 때는 이준 등이 배를 가르고 피를 뿌리며 본국의 사정을 밝혔으니 이것은 천하의 사람들이 함께 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