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탁(18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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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이탁(李鐸)
본명
이제용(李濟鏞)
이명
이동우(李東雨), 이춘우(李春雨)

태연(跆然)

동우(東愚, 東禹)
생몰
1889년 3월 18일 ~ 1930년 5월 17일
출생지
평안남도 성천군 영천면 노동리
본관
전주 이씨
사망지
중국 상하이
매장지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
추서
건국훈장 독립장
1. 개요
2. 생애
2.1. 만주에서의 독립운동
2.2. 항일무장투쟁
2.3. 안창호의 신임을 받다
2.4.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의 활동
2.5. 국민대표회의에서의 활동
2.6. 이상촌 건설
2.7. 말년의 행적
3. 기타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2.1. 만주에서의 독립운동


이탁은 1889년 3월 18일 평안남도 성천군 영천면 노동리에서 대지주 이용규(李龍奎)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친 이용규는 성천군과 인근 개천, 강동 3개 군에 걸쳐 "소 쟁기로 다 가는 데 3년 3개월이 걸릴 정도"로 광대한 토지를 소유한 부농이었다. 이탁은 5살 때부터 한학을 배웠고, 14살 때인 1902년 대한제국 궁내부 주사를 지냈다. 1907년 성천군, 개천군 등지의 유지들과 협력하여 10여 곳에 소학교를 설립했으며, 1908년 평양 대성학교 속성사범과에 입학하여 안창호의 지도를 받았다. 이때 신민회에 가입한 이탁은 대성학교 재학 중 신민회의 지시를 받고 남북 만주 일대를 답사하며 독립군 기지를 물색했다.
1910년 8월 29일 한일병합이 선포되자, 이탁은 그해 9월에 만주로 망명하여 유하현 삼원포에서 이시영이 주도한 신흥강습소 설립에 참여했다. 1911년에는 공향으로 돌아와 가산을 정리하다가 순사들이 자신을 체포하려 들자 동생 이석과 함께 재차 망명하여 유하현 제1구 야저구(野猪溝)에서 토지를 매입, 개간사업을 수행했다. 또한 1912년에는 서간도에 거주하는 한인들의 자치기관인 공리회(共利會)와 부민단(扶民團) 조직에 참여했으며, 신흥학교유지회(新興學校維持會)를 조직해 신흥학교 운영기금을 모금했다. 이후 1913년에 국내의 가족들을 데려왔고, 유하현 소재 일신학교 교장이 되었다.
1914년 7월 2일 조선주차헌병대 사령부가 조선총독에게 보낸 기밀문서에 따르면, 이탁은 1914년 봄에 이동희(李東熙)와 함께 유하현 대사탄(大沙灘) 소재 한인학교(학생 수 30명)를 경영했는데, 그해 서리가 일찍 내려 흉년이 들자 미주 동포들의 구호금을 받아 한인들을 구제했다고 한다. 또한 1916년 상반기 일제 정보보고서에 따르면, 이탁은 부민단의 부회장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1917년 기밀 문서에는 "1917년 여름 무렵 유하현 대사탄을 중심으로 조선인 거주자는 3〜400여 명을 헤아리는 데, 그 중 야저구(野猪溝)에 거주하는 이탁(李鐸)이라는 자는 3천여 원의 자금으로 토지를 조차하여 많은 소작인을 가진 지방의 명망가로 두드러진다”로 기재되어 있다. 이는 이탁이 유하현 일대 한인사회에서 지도적 인물이었음을 암시한다.
이탁은 1918년 봄에는 유하현 삼원포 소재 남녀 180여 명의 신도가 다니는 교회의 조사(助社)를 맡았고, 6월 4일부터 7일까지 유하현 삼원포 대성중학교에서 36개 학교와 서당, 300여 명의 학생이 참가하여 열린 운동회를 치뤘다. 그리고 6월 10일, 이탁은 이원(李元) 등 26명과 함께 결사대를 조직하고 다음과 같은 사항을 결의했다.

1. 자단정신(自團精神)을 배양한다.

2. 남만주 내에서 (친일)조선인조합(朝鮮人組合)을 해방시킨다.

3. 이주한인 매호(每戶)로부터 1원(元) 5각(角) 씩을 징수하여 5연발총 및 탄약을 구입한다.

4. 중국관헌과 교섭하여 귀화 사무를 이용하여 조합에 가입한 자에게 압박과 손해를 가한다.

5. 일제 통화영사분관(通化領事分館)을 쳐부순다. 조선인조합의 직원을 모살한다.

6. 모처의 일본인을 쳐부수는 모험단(冒險團)을 결사대(決死隊) 안에 설치한다.

7. 유사시에는 한발자국도 물러서지 않는다. 만일 물러서는 자가 있으면, 내통자로 간주하여 일본인과 마찬가지로 살해한다.

이렇듯 이탁은 유하현에서 지도자로서의 면모를 보였고, 일제는 1918년 4월 11일 '반일 한인주동자 명단'을 작성하면서 이탁을 이동휘, 양기탁, 홍범도, 조성환, 이범윤, 유동열, 이장녕, 조맹선, 이상룡, 이시영, 윤세복, 신규식, 신채호, 김교헌, 허겸, 여준 등과 함께 요주의 인물로 기재했다.

2.2. 항일무장투쟁


1920년 봄, 이탁은 만주에서 상하이로 이동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가담했다. 이후 그는 만주의 항일무장세력과 연계하여 일제에 맞서 싸웠다. 1920년 일제 정보 자료는 이러한 그의 활동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서간도 방면, 특히 집안, 임강, 통화, 환인, 관전현 내의 각 불령선인단(不逞鮮人團)들은 금년 음 4월경 각 단체를 통일하기 위하여 동·서·남·북의 4로(路)를 설치하여 각 사령관을 두어, 동로는 자칭 정령(正領) 홍범도(洪範圖), 남로는 참장(參將) 이웅해(李雄海), 서로는 부령(副領) 최의경(崔義慶), 북로는 정령 이탁(李鐸)을 수장으로 하여 각 부서를 정하였다.

1920년 3월, 관전현 지역의 독립군단체인 의용단(義勇隊)은 광복단(光復團)으로 개칭했다. 한달 뒤 이탁이 상하이로 가서 안창호, 김희선과 협의해 1920년 7월 1일에서 12일 사이에 광복단 조직을 기반으로 하여 광복군사령부를 결성하기로 했다. 7월 26일과 8월 1일, 임시정부는「대한광복군참리부 규정」,「대한광복군사령부 규정」,「대한광복군영 규정」을 공포함으로써, 안동현을 중심으로 한 서간도지역 독립군단체의 통합체로서 광복군사령부를 상하이에서 결성했다. 일제 정보 자료에 따르면, 이탁은 광복군 사령부의 사령관이며 병력은 230명을 헤아렸다고 한다.
그러나 상하이와 안동현 사이에 정보 교환이 원활히 이뤄지지 못헀고, 뒤이은 일제의 토벌과 탄압으로 독립군 단체가 각지로 흩어지면서 광복군사령부안이 실제로 관철되지 못했다. 이에 이탁은 대한청년단연합회 서기보조 지웅진(池應晋)에게 폭탄제조 기술자인 이세방(李世芳)과 김성조(金成祚)를 소개시켜줬고, 다시 폭탄제조용 원료와 기구 등을 구입해 지웅진에게 준 뒤 본인은 구입한 권총 등을 휴대하고 선편으로 서간도로 돌아가기로 했다. 이후 지웅진은 7월 6일 선편으로 상하이를 출발해 서간도로 향했다. 또 이탁은 무기 구입을 위해 임정 군무부의 양해를 얻고 서면으로 서간도에 있는 오동진에게 권총 및 폭탄 구입 경비를 요청했고, 오동진은 동지들로부터 모은 680원을 지참하고 5월 19일 관전현을 출발해 안동현의 이륭양행을 거쳐 상하이에 도착, 이탁에게 자금을 전달했다.
1920년 5월 미국의원단 일행이 7,8월 중에 중국에서 한반도를 거쳐 일본으로 갈 예정이라는 소식이 알려졌다. 이에 임시정부는 독립에 대한 조선민족의 대결심을 내보임과 함께 민심을 격동시켜 독립 실현을 촉진시킬 수 있는 기회로 여기고 의원단의 방한에 맞춰 거사를 벌이기로 결정했다. 이탁은 7월 상순 경 광복군 소속 80여 명의 결사대를 조직해 조선에 잠입시켜 여타 암살단과 협력하여 이완용 등 친일파 및 일본 고관을 암살하고 총독부 등 주요 관공서를 폭파함으로서 미 의원단 목전에서 대대적인 무장독립투쟁을 전개하게 했다.
결사대는 서울특파결사대, 평양특파 결사대, 신의주 및 선천 특파대를 편성하고 이탁의 동생 이석이 제조한 폭탄을 받고 광복군총영 도장이 찍힌 "대일경고문", "군자금 출연을 권고하는 경고문", "관리 퇴직 경고문", "의거를 권고하는 경고문" 등을 함께 휴대하고 잠입했다. 그러나 8월 21일경에 거사 계획이 발격되어 전원이 체포되면서 이 모든 계획이 물거품이 되어버렸고, 이탁은 궐석재판에서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
한편 1920년 10월 31일 일제 정보자료에 따르면, 이탁은 윤창수라는 인물과 함께 관전현(寬甸縣) 부근에 잠복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1920년 10월 26일 밤 통화 방면으로부터 돌아온 한인 밀정의 보고에 따르면, 이탁은 상류 각 현에서 세력을 확대하고 있으며 10월 5일 러시아식 총 200정, 권총 100정, 폭탄 20개, 탄약 1만 발을 소지한 독립단원 400명을 이끌고 통화에 잠입해 상류 일대에서 일본 관민 및 부일한인을 격멸하고 각 단체와 결합하여 국내로 침입하는 계획을 수립하는 중이며 중국인들로 하여금 무기를 운반시키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1922년 초에 작성된 일제 자료에 따르면, 이탁은 광복군사령관으로서 국내 습격 방법을 강구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간도 참변자유시 참변으로 무장독립세력이 위축되면서 이 계획은 성사되지 못했다.

2.3. 안창호의 신임을 받다


1920년 4월 15일, 이탁은 상하이에서 안창호를 찾아가 그해 2월 8일에 폭탄 제조 혐의로 프랑스 공부국에 체포된 동생 이석을 구출하는 문제를 상의했다. 이후 그는 안창호가 8월 1일에 광동 및 홍콩 여행을 위해 상하이를 떠날 때까지 100여 일간 수십차례 만나 안동현에 임정의 군사조직으로 광복군사령부를 설치하는 문제를 논의했다. 또한 1920년 4월 30일, 이탁은 안동현에서 온 김동식을 안창호에게 소개했고, 김동식은 청년단연합회 및 안병찬, 김승만 등이 보낸 안태국 조위금을 전달했다. <이탁 항일투쟁기>에 따르면, 이날 이탁은 안창호에게 '비상한 비밀사건'을 이야기 했다고 한다. 이는 두 사람의 관계가 긴밀했음을 암시한다.
1920년 5월 13일, 서간도에서 온 최상봉(崔尙鳳)이라는 인물이 찾아 와 “자기와 몇몇 청년이 작탄행동(炸彈行動)에 관한 일로 왔는데, 선생의 고견을 듣길 원한다.”고 하자, 안창호는 “그런 사업을 단독으로 자의적으로 하지 말고 국가적 군인정신으로 정부방침에 의하여 할 것이며, 이에 관해서는 이탁 군의 지도하에서 행동하도록 하라."고 타일렀다. 이후 1924년 봄 어느 날 저녁, 안창호는 베이징 서산 밑에 사는 이탁을 찾아갔다. <안도산전서>는 이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서산 밑 적은 주막거리에 더 적을 수 없는 중국가옥에 이탁은 중국복을 입고 있었다. 그 부인과 딸도 중국인으로 차리고 있었다. 지사의 빈궁한 망명생활이었다. 이탁은 도산과 모씨를 맞아들여서 호국수와 배갈로 점심을 차렸다. 그는 키가 크고 뚱뚱하고, 눈이 가늘고 얼굴이 검고 말이 적고, 외양이 심히 온후하였다. 그러나 도산의 평에 의하면, 그는 한 몸이 도시 의(義)요, 담(膽)이었다. 그는 동지를 지극히 경애하고 무슨 일에나 저를 내세우는 일이 없었다. 그가 유자(儒者)의 가정에서 생장한 것은 그의 독실하고 예절답고 근엄한 태도로 알 수 있었다. 도산은 매양 돌아간 동오(東吾) 안태국(安泰國)과 아울러 동우(東愚) 이탁을 찬양하였다. 장차 흥사단(興士團)의 감독으로 청년 수양의 전형이 될 인물이라고까지 격찬하였다.

이렇듯 이탁은 안창호와 동지로서나 친구로서나 매우 두터운 사이였고, 안창호의 독립운동을 곁에서 도와주는 역할을 착실하게 수행했다. 한번은 상하이에서 안창호와 이탁이 중국 신문기자들을 상대로 기자회견을 가진 적이 있었다. 이때 중국 기자 한 사람이 두 사람을 가리켜 다음과 같이 평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쑨원을 보았고, 또 황싱을 보았다.

이는 안창호를 신해혁명의 지도자 쑨원, 그리고 이탁을 쑨원의 최측근이었던 황싱에 빗댄 표현이다.

2.4.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의 활동


1920년 봄, 임시정부는 간도 지방 독립운동의 통일을 위해 유동열김희선을 파견할 계획을 세웠다가 김희선을 이탁으로 변경하고 계봉우와 함께 파견하기로 했다. 임시정부는 안정근과 이탁을 '북간도 정부특파원', 계봉우를 '서간도 정부특파원'으로 결정했지만, 5월 17일에 최종적으로 북간도 및 노령에 파견할 정부특파원으로 안정근과 왕삼덕, 서간도 정부특파원으로 조상섭을 임명하고 이탁은 빠졌다. 또한 이탁은 1920년 6월 16일 임정 동삼성외무위원장(東三省外交委員長)에 임명되었으나 10월 하순 국무회의에서 '기타 소임의 관계'로 면임(免任)되었다. 기타 소임이 무엇인지는 기재되어 있지 않지만, 아마도 국내에 결사대를 파견해 거사를 벌이는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이탁은 1919년 11월 23일 대한적십자회 회원 대모집 경쟁회에서 회원모집 활동을 벌이는 독립대(獨立隊) 대원의 한 사람으로 선출되었다. 이어 25일에 열린 적십자회 총회에서 회장에 안창호가 선임되었고, 이탁은 송병조와 함께 감사에 선임되었다. 이후 1921년 9월 19일 대한교민단 선출투표 결과 한진교, 여운형, 김철, 김홍서, 선우훈, 김병조, 옥성빈, 송병조, 서병호, 김만겸, 조상섭, 안창호, 나용균 등과 함께 '본구(本區)' 대표로 당선되었다. 또한 1922년 8월 17일 대한교민단 정례 의사원 선거에서 김철이 사직한 이래 결원 상태였던 민단장에 여운형이 당선되었고, 이탁은 다시 본부 의사원에 선임되었다.

2.5. 국민대표회의에서의 활동


1921년 2월부터 임시정부의 지도력에 불만과 비판이 높아지면서 임시정부의 개혁 내지는 폐지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일었다. 이때 이탁은 1922년 3월 15일에 프랑스 조계 오흥리(吳興里) 67호에서 안창호, 김철, 박은식, 김보연과 함께 임시정부의 무기력한 행보에 대한 논의한 뒤 <대한국민대표준비속진회(大韓國民代表準備速進會)>를 결성했다. 그들은 현 임시정부는 박약하여 국민의 신용을 해치고 있음에 따라 도저히 우리 국민 대업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기에, 이를 신속히 개조하는 동시에 '정부'라는 명칭을 없애고 '위원제'로 조직을 변경해야 한다고 결의한 다음, 임정 측 미주, 러시아령, 북만주 및 상해고려공산당으로부터 4인의 대표롤 선발하기로 했다.
하지만 대표단이 충분히 모이지 않아 국민대표회의 개최가 수차례 연기되었고, 1923년 1월 31일 오후 2시 상하이 공동 조게에서 비로소 개막했다. 2월 5일, 이탁은 강구우, 이상호, 백낙현, 윤정현, 왕삼덕, 손정도와 함께 재정분과위원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3월 9일에 제출된 제의안의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조직, 헌법제도 및 기타 일체를 실제운동에 적합하도록 개조할 것"이라는 내용을 둘러싸고 '창조파'와 '개조파'의 갈등이 극한에 달했고, 결국 국민대표회의는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해산되었다.

2.6. 이상촌 건설


1923년 여름 국민대표회의가 별 소득 없이 종료되자, 그는 1923년 8월에 베이징으로 향했다. 이후 그는 이탁은 안창호가 구상하고 추진한 이상촌 건설 사업에 참여하기로 하고 안창호와 함께 베이징, 산해관, 남구, 서산 일대를 답사하여 인재 양성을 목적으로 하는 이상촌 후보지를 물색했다. 이윽고 베이징 근교 해전(海甸)에서 농장을 경영하며 독립운동 근거지 건설을 시도했으며, 안창호가 설치한 흥사단 북경지부의 소장을 맡았다.
한편, 이탁은 중국인 웅희령(熊希齡)과 협의해 한인 학생의 중국학교 유학 문제와 한인 구호책을 마련하려 했다. 웅희령은 신해혁명 당시 북경 정부의 재정부 총장과 국무총리를 지냈으며, 1920년 10월부터 1928년 사이에 베이징에서 향산자유원(香山慈幼院)을 창설했고, 천진 적십자회 명예이사, 중화 자선댄체 전국합회 명예정주임, 중화교육개선사 사장, 수재 구제회 회장, 상재 계획회 명예회장 등을 역임하며 중국 사회 구제, 구휼 봉사활동을 주도한 인물이었다. 이후 1924년 11월, 안창호는 미국으로 떠나기 전 이유필, 조상섭 등 측근들에게 만주지역 독립운동 단체를 임시정부에 편입시키고 이상촌 건설의 후보지 조사를 계속하도록 지시하면서, 이탁에게 주무(主務) 역할을 맡겼다.
일제 정보 자료에 따르면, 이탁은 1926년 1월에 논을 매입하기 위해 길림성 액목현 교하를 답사했다고 하는데, 이는 이상촌 건설을 위한 조사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다른 자료에는 흥사단 단장 안창호가 이탁과 공모하여 길림성 액목현 교하 부근에서 논을 매수, 경영하려 했고 이탁은 1926년 1월 중 실지 답사를 한 후 그 상황을 안창호에게 알렸다고 한다. 이후 2월 중순 영구(營口)에서 배를 타고 난징으로 가려 헀지만, 얼음이 얼어 배가 운행되지 않아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일제 정보자료는 이탁이 체포를 우려해 길림에 아직 머물고 있지만, 가까운 시일 내에 난징으로 가서 안창호를 데리고 액목현으로 가서 논 농사 경영에 착수할 예정이라고 파악했다.
<이탁 항일투쟁기>에 따르면, 이탁은 1926년 가을 만주 길림성 액목현에서 토지 1천 평을 매수하여 개간했다고 한다. 그는 많은 한인이 참여하는 주식형사 형태의 농임조합이나 농업공사를 조직하고, 이를 기반으로 농민들의 생활을 향상시켜 독립군의 활동에도 활력을 불어넣으려 했다. 이에 따라 1927년 4월 1일 이탁은 안창호, 김기풍, 김일병, 이유필, 오동진, 현정경 등 35인과 함께 농민호조사(農民互助社)를 발족시켰다. 그들은 산업, 교육, 위생 문제에 힘을 합쳐 신농촌을 건설하고, 토지 매수, 저축 운동을 일으키며, 경박호(鏡泊湖)의 물을 이용하는 수력발전계획도 세웠다. 그러나 일제가 만주 군벌과 '삼시협정'을 체결한 이래 독립운동세력을 탄압하고, 더 나아가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키면서 이 모든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2.7. 말년의 행적


1927년 1월 14일, 안창호, 유기석과 함께 길림에 도착한 이탁은 취선반점(聚仙飯店)에 체제하면서 길림시 동관(東關)에 비밀회합 장소를 마련하고, 분열된 만주의 각 독립단체를 통일하여 길림을 본거지로 하는 강력한 무력단체를 재조직학시 위한 활동을 개시했다. 이리하여 그해 2월 중순 길림성 대동문 밖 대동분점에서 재만 독립단체의 주요 인물을 비롯해 5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안창호의 연설회가 개최되었다. 그런데 오후 8시경 중국 경찰 100여 명이 일제의 사주를 받고 현장을 급습했다. 결국 안창호 등 200여 명이 검거되고 '독립단 수령' 42명이 구류당했다.
이때 이탁은 회의에 참석하지 않고 오후 6시경에 열차편으로 길림을 출발해 이튿날 새벽에 베이징에 도착했다. 그러던 중 길림경찰청에 근무하는 한인 오인화(吳仁華) 소교로부터 긴급 전보를 받은 그는 중국 정부 및 중국 신문사와 교섭해 석방 여론을 환기시켰고, 상하이에서 온 이유필과 함께 중국 정부를 통하여 만주 군벌에게 석방 지시를 내리도록 유도했다. 그 결과 안창호 등은 21일만에 모두 석방되었다. 이후 1927년 5월, 이탁은 안창호, 손정도, 김동삼, 김이대, 현정경, 현익철, 김유성(金有聲), 김영일(金永一), 이석(李沰), 고할신 등과 함께 길림 소백산에서 회합하여 통합 문제, 정치 및 경제 문제에 관한 기본 방침을 수립했고 정의부, 신민부, 참의부 3부의 통합을 종용했다.
1927년 12월 16일 길장선 장춘역 부근에서 정의부 군사위원장 오동진이 체포되면서 후임으로 지청천이 선임되었다. 이 과정에서 이탁에게 정의부 총사령관에 취임하라는 권유가 있었지만, 이탁은 이를 사양하고 지청천을 총사령관으로 선임하도록 주선했다. 또한 1928년 7월에는 평안도 지방에 잠입하여 30일간 머물며 국내의 독립의사들과 연락하고 토지를 팔아 길림으로 돌아갔다가 1928년 9월에 다시 상하이로 향했다.
이후 1929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의정원의 만주, 간도지방 대표로 선임되어 활동하다가 1930년 5월 17일 심장마비에 걸려 사망했다. 향년 41세. 그의 유해는 상하이 외국인 묘역에 안장되었다가 해방 후 국내로 이송되어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3. 기타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이탁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