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족산성

 


[image] '''대한민국의 사적'''
129호

'''130호'''

131호
울주 천황산 요지
'''강화 삼랑성'''
합천 영암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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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 '''대한민국의 사적''' '''제130호'''
'''강화 삼랑성'''
江華 三郞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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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산41번지
'''분류'''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 성 / 성곽
'''면적'''
260\,536㎡
'''지정연도'''
1964년 6월 10일
'''제작시기'''
삼국시대
'''위치'''


1. 개요
2. 역사
3. 바깥고리
4. 사적 제130호


1. 개요


인천광역시 강화군에 위치하는 조선시대의 산성. 사적 제130호이자 병인양요의 전투 중 가장 치열했던 격전지이다. 날씨가 좋은 날에는 산성 북쪽 면에서 황해도와 개성 일대를 조망해 볼 수 있다

2. 역사


원래 정족산성은 원래 이름은 삼랑성으로 단군의 세 아들이 정족산에 쌓았다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정족산성은 조그마한 산성으로 별로 유명하지 않다. 오히려 산성 안에 있는 전등사가 강화도 내에서 유명했다.
흥선대원군이 1866년 병인박해로 프랑스인 선교사 9명을 처형하자, 프랑스 정부는 화가 나서 해군 특전대 약 6백여 명을 조선에 파병하였다. 프랑스군은 문수산성에서 한성근이 이끄는 조선군과 맞서 사상자 27명을 내는 등 피해를 입지만 결국 강화도에 상륙했다.[1] 양헌수는 휘하 군사 120명을 이끌고 덕진진을 통해 유일하게 함락되지 않은 정족산성으로 들어가 수성장(守城將)[2]이 되었다. 프랑스군은 이를 알고 병력 60여 명을 보내었다. 양헌수는 사거리가 짧은 조총의 단점과 프랑스와의 전력차를 인정하고, 총을 잘 쏘는 포수들을 입대시키고 프랑스군이 성에 가까히 접근하면 쏘는 근접사격을 도입했다.
마침내 프랑스군이 성 가까이에 접근한 순간 근접사격을 가하자, 프랑스군은 전사자 6명에 부상자 35명이 생기는 피해를 입고 후퇴했다. 당시 프랑스 병력들은 놀러가는 기분으로 음식을 잔뜩 싣고 방심한 채로 정족산성에 접근하다가 당한 것. 프랑스 장교들은 빡이 쳐서 정족산성을 다시 공격하자고 건의하지만, 지휘관 로즈 제독은 정족산성을 함락하기에는 병력이 모자라다는 이유로 강화도에서 철군하라고 명했다.
정족산성 안에 전등사(傳燈寺)라는 사찰이 있는데, 당시에는 전등사에 정족산 사고가 있어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였다. 정족산을 지켜냄으로써 사고도 함께 지킬 수 있었다. 정족산성 전투의 공으로 양헌수는 승진하여 나중에는 공조판서까지 되었다. 조정은 이 전투를 기리기 위해 1873년 정족산성 입구에 승전비를 세웠는데, 훗날 인천시 기념물 제36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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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족산성 정해루 안쪽 전경
정족산 전투는 오늘날에도 근대사를 배울 때 꼭 나온다. 광성보와 더불어 병인양요를 대표하는 격전지였다.

3. 바깥고리



4. 사적 제130호


정족산성이라고도 하며 단군의 세 아들이 성을 쌓았다는 전설이 있어 삼랑성이라 부른다.

이 성이 만들어진 연대는 정확하지 않으나, 고려가 1259년 삼랑성 안에 궁궐을 만들었다고 하니 그 전에 이미 성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성곽이 쌓여져 있는 모습을 보면 보은의 삼년산성이나 경주의 명활산성처럼 삼국시대 성의 구조를 찾을 수 있으므로, 삼국시대에 만들어진 성으로 추측된다.

고려 때 보수공사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영조 15년(1739)에 성을 다시 쌓으면서 남문에 문루를 만들고 ‘종해루’라고 하였다. 조선 현종 1년(1660) 마니산의 사고에 보관되어 있던 『조선왕조실록』을 성 안에 있는 정족산사고로 옮기고, 왕실의 족보를 보관하는 선원보각을 함께 지었다. 그러나 지금은 둘 다 없어지고 전등사만 남아있다.

이곳은 고종 3년(1866)의 병인양요 때 동문과 남문으로 공격을 해오던 160여 명의 프랑스군을 무찌른 곳으로도 유명하다.

※(삼랑성 → 강화 삼랑성)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 (2011.07.28 고시)


[1] 이 과정에서 외규장각에 있는 도서가 프랑스군 손에 넘어가는 등 문화적인 피해도 크게 입었다.[2] 성을 지키는 장수란 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