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인박해
1. 개요
조선에서 천주교를 박해한 사건. 조선 최대이자 최후의 천주교 박해. 병인사옥(丙寅邪獄)이라고도 불리운다. 1866년부터 1871년까지 지속되었다.
2. 상세
이 사건은 1839년에 있었던 기해박해로부터 시작된다.
1831년, 교황청은 조선을 독립 교구로 설정하여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앵베르 범 라우렌시오 주교[1] , 모방 나 베드로 신부, 샤스탕 정 야고보 신부를 조선에 파견하여 몰락한 양반들을 중심으로 가톨릭을 전파해 갔다. 하지만 조선 조정은 벽파인 풍양 조씨가 시파인 안동 김씨 정권 아래에서 권력을 확보하기 위해 1839년에는 천주교 박해 사건 중 하나인 기해박해를 일으켜 3명의 프랑스인 사제들을 처형했다.
사실 흥선대원군은 가톨릭에 대해서 그다지 적대적인 입장을 취하지 않았다. 정순왕후 김씨의 죽음 이후 시파와 안동 김씨가 장악한 조선 조정이 세도 정치로 접어들면서 특정 정치 의리를 내세우지 않아 천주교에 그다지 관심이 없어져 내버려둔 것을 이어간 면도 있지만, 대원군의 아내 민씨를 비롯한 집안 여인들이 천주교 신자였고,[2] 관료이자 독실한 천주교 신자인 남종삼 세례자 요한[3] 과도 만나는 등 천주교에 우호적이진 않지만 그렇다고 적대적인 입장도 아니었다. 당시 조선 천주교 내부에서도 대원군의 집권을 낙관적으로 보았으며, 심지어 이제 조선에서 더 이상 천주교 박해는 없다는 소문이 퍼져 '''외국 선교사가 사제 복장을 입고 조선에 입국'''을 하려 들기도 했다. 그 전까지 외국 선교사들은 삼년상을 치르는 사람들과 같은 복장을 입고 다녔는데, 삿갓을 눌러써 외국인임이 보이지 않고 조선 예절상 상을 치르는 사람에게는 말도 걸지 않고 수색도 생략했기 때문에 신분을 숨기기 좋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놓고 사제 복장을 입고 조선에 입국하면 당연히 즉시 체포될 각이었고, 이는 조선에 이미 들어와서 몰래 활동하고 있던 선교사들이 말려서 실제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았다.
한편, 서유럽 열강들과 다른 방향으로 조선에 접근하는 열강이 있었으니 바로 러시아 제국이었다. 러시아는 1860년 베이징 조약을 통해 청나라에게서 연해주를 빼앗고, 두만강을 경계로 조선과 국경을 맞닿게 되었다. 러시아는 1864년에 함경북도 경흥부(慶興府)로 와서 통상을 요구하였고, 1865년 음력 9월, 러시아인 수십 명이 또 경흥부에 나타나 통상을 요구했는데, 일단 이들은 거부하고 되돌려보냈으나, 흥선대원군은 중국과 일본만큼 가까운 거리에 아예 자리를 잡고 들어오려 하는 러시아와 관계를 맺는 것에 부담을 느꼈다. 동양의 기본 외교 정책인 원교근공에 따라 그 대항마로 프랑스와 연결된 천주교 신자들과 접촉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그 와중 대원군의 부인이 자신의 유모인 박 마르타를 경유해 베르뇌 주교와 정부 내부의 천주교 신자인 도승지 남종삼을 설득해 프랑스와의 우호관계를 맺는 것을 추진하게 되었다. 1865년 약력 12월 말경, 남종삼은 "한불조약(韓佛條約)을 체결하여 프랑스 황제인 나폴레옹 3세의 위력을 이용하면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막을 수 있고, 그러기 위해서 한국에 체류하고 있는 프랑스인 선교사의 힘을 빌리는 것이 상책(上策)"이라는 요지의 청원서를 작성하여 직접 대원군에게 올렸다. 이것을 보고 대원군도 만족하고 베르뇌 주교와의 만남을 추진하게 되었다.
그러나, 무슨 이유인지는 알 길이 없으나 베르뇌는 대원군을 만나기 거부하였다. 함정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고 상부의 지시를 받지 못했을 수도 있지만, 이로 인해 대원군은 천주교에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이런 가운데 1866년 1월 청나라에서 천주교를 박해한다는 소식이 들리자 이에 영향을 받은 유림 세력에서 천주교를 탄압하라는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 시기에 맞춰 당시 러시아는 전 세계에서 그레이트 게임 때문에 신경쓸 거리가 많았기 때문에 조선 방면 남하정책을 타 지역 사정으로 잠깐 중단, 즉 러시아가 오질 않으니 프랑스의 힘을 굳이 빌릴 필요성도 줄어들었다. 거기에 천주교에 대해 부정적인 조 대비(신정왕후 조씨)와 좌의정 김병학 등의 척화세력의 목소리가 강해지고 "운현궁에 천주교인이 드나든다"는 소문이 퍼쳐 대원군은 입장을 바꾸게 되었다. 또한 몰락하지 않은 양반들은 가뜩이나 서원 철폐때문에 슬픈데 흥선 대원군이 천주교를 지지한다는 것까지 오해하면 내란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았다.
결국 고종 3년에 천주교 탄압의 교령(敎令)이 포고되자 2월 23일(음 1월 9일) 베르뇌 주교를 선두로 홍봉주, 이선이(李先伊) 등이 포청에 잡혀감으로써 박해의 서막이 올랐다. 프랑스인 사제 12명 중 9명이 체포되어 순교했다. 병인박해 때 순교한 프랑스인 사제 9명은 다음과 같다.
- 성(聖) 베르뇌 장 시메온 주교(1814-1866)[4]
- 성 다블뤼 안 안토니오 주교(1818-1866)[5]
- 성 위앵 민 루카 신부(1836-1866)
- 성 오매트르 오 베드로 신부(1837-1866)
- 성 브르트니에르 백 유스토 신부(1838-1866)
- 성 도리 김 헨리코 신부(1839-1866)
- 성 볼리외 서 루도비코 신부(1840-1866)
- 푸르티에 신 요한 신부(1830-1866)
- 프티니콜라 박 미카엘 신부(1828-1866)
이 와중에 페롱 권 스타니슬라오 신부(1827-1903), 칼래 강 니콜라오 신부(1833-1884), 펠릭스 클레르 리델[6] 신부만이 살아남았다. 살아남은 3명의 신부들 중 하나였던 펠릭스 클레르 리델 신부는 청나라로 탈출, 톈진 주재 프랑스 함대 사령관 피에르 구스타브 로즈에게 박해 소식을 전했다.
박해 당시에 관례에 따라 조정에선 약간의 융통성을 보이기도 했다. 신자들에겐 "배교(背敎, 천주교 신앙을 버림)한다면 죽이지 않고 석방해 주겠다"고 권고하였으며, "어린아이들과 노인은 죽이지 말라"고 대원군이 직접 명령을 하달하기도 했다. 또한 프랑스인 사제들에게는 "원할 경우 처벌 없이 본국으로 돌려 보내주겠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대부분의 신자들은 배교를 거부하고 순교했고, 프랑스인 사제들 역시 본국으로의 송환을 거부하고 조선인 신자들과 함께 순교하는 길을 택했다.
조정의 프랑스 사제 송환 제안은 일본의 가톨릭 박해에 비해서는 사제 한정으로 비교적 관대한 제안이었다. 일본의 에도 막부는 키리시탄 탄압 때 외국인 사제들에게도 '''본국 송환이라는 선택지 없이 배교하기 or 순교하기''' 중 택일을 강요하였다. 일본에서 천주교 탄압 당시에 배교하고도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일본에서 생을 마감한 예수회 사제들도 꽤 있었다. 그러나 평신도 대상으로는 일본이 비교적 관대했다. 일본의 천주교도들은 정부에 무력 저항을 한 역사가 있기도 해서 일본에서는 배교 없이 조용히 살기만 해도 묵인해 주기도 했다.
3. 영향
이 사건 때문에 같은 해인 1866년 11월에 프랑스 해군이 보복으로 조선을 침공하는 병인양요가 일어나게 되고, 피해를 입긴 했지만 프랑스군을 결과적으로 쫓아내는 데 성공한 조선에서의 천주교 박해는, 조선을 공격하는 외적과 한 편이란 이미지가 생겨 더 심화되었다.
병인박해로 순교한 신자들은 대략 8,000명 가량. 조선의 천주교 박해 중에서도 역사상 최대 규모이다.
한국 천주교가 일제강점기 때 독립운동 등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일 수밖에 없었던 원인을 병인박해에서 찾기도 한다. 조선 시대 최초 순교자인 김범우(토마스)가 1787년 희생된 이후 병인박해가 끝난 1871년까지 90여년 가까운 박해 기간 동안 권력에 저항한다는 것이 어떤 결과를 낳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 일제강점기 시절 활동했던 천주교 포교자들의 가정사를 보면 '''누구는 병인 박해 때 부모가 참수형으로 순교하는 걸 지켜보고, 누구는 병인 박해 때 조부모가 옥사했다더라'''. 같은 경우가 넘쳐나는 시기다 보니…
하지만 교회 사학자 천주교 서울대교구 최석우 안드레아 신부에 따르면, 일제강점기에 천주교가 독립운동에 소극적이었던 이유는 귀스타브 샤를 마리 뮈텔[7] 대주교가 친일 성향이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뮈텔 주교는 정치와 종교의 분리를 주장하면서[8] 독립운동을 탄압했다. 신실한 신자인 안중근 토마스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자 "그는 천주교 신자가 아니다"라고 했고, 사제들에게 명령을 내려 안중근 토마스에게 고해성사를 주지 말라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중근 토마스와 친했던 니콜라 빌렘 신부가 명을 어기고 고해성사를 집전해 주자, 뮈텔 주교는 빌렘 신부를 고국인 프랑스로 돌려보냈다. 또한 3.1 운동 때에 신학생들이 참여하자 퇴학시키도록 하는 등 탄압을 했다.
병인박해에서 신실하고 명망 있는 신자들이 너무 많이 순교해서 천주교의 교세가 크게 확장되지 못했다는 주장도 있다.
이후 한국에서 천주교는 교세가 아주 쇠퇴하여 개신교에 자리를 내주고 속된 말로 '''중심이 되지 못하고 주변을 맴도는, 비중이 적고 보잘것없는''' 신세를 면치 못하다가[9] 군사 정권 때 진보 진영 편에 서서 민주화 운동을 지지하면서 비로소 감소하던 신자들이 조금씩 회복되어 2명의 교황이 방한하기까지 했으나 아직까지 개신교를 넘어서지 못한 채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즉 병인박해는 오늘날 한국이 개신교 우세 국가가 되는 여러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11][12]
여담으로 병인년의 박해로 인하여 평범한 동네 뒷산이었던 마포구 합정동 잠두봉이 '''머리 자르는 산'''이라는 명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병인박해 100주년이 되는 1966년 즈음에 각 지역 교구별로 병인 순교 100주년 기념 성당이 건립·봉헌됐다. 서울특별시 절두산 성당(서울대교구), 대구광역시 신천동 복자 성당(대구대교구), 인천광역시 화수동 성당(인천교구), 수원시 서둔동 성당(수원교구), 전주시 다가동 복자 성당(전주교구), 창원시 상남동 성당(마산교구), 태백시 황지 성당(원주교구) 등이 병인 순교 100주년 기념 성당이다.
4. 관련 문서
[1] 천주교 서울대교구 제2대 교구장[2] 훗날 손자 의친왕(이강 비오)과 영친왕(이은 요셉), 손자 며느리 김덕수(마리아)와 이방자(마리아)도 세례를 받고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3] 한국 103위 순교성인 중 하나.[4] 천주교 서울대교구 제4대 교구장[5] 천주교 서울대교구 제5대 교구장.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다블뤼 주교를 처형할 때 집행하던 망나니들이 주교의 목에 치명상만 내고 숨만 붙여둔 채로 관리에게 임금을 올려달라고 임금 협상을 했다고 한다. 협상이 이루어져서 사형이 마저 집행되긴 했지만, 다블뤼 주교는 망나니들이 협상하는 동안 죽지도 못하고 지독한 고통에 시달렸다고 한다.[6] 천주교 서울대교구 제6대 교구장. 《나의 서울 감옥생활 1878》이라는 책을 남겼다.[7] 천주교 서울대교구 제8대 교구장. 한국식 이름은 민덕효. 그래서 흔히 '민 주교'라고도 불렸다.[8] 정작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고국인 프랑스에 협력하는 모순을 보임.[9] 그나마 남한(대한민국)은 해방 및 정부수립 후 천주교 교세가 나름 자리잡았지만, 북한에선 북한정권 수립 후 계속된 박해로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 모두 순교와 월남 등으로 전멸해서 공소예절조차 제대로 지키지 못한다.[10]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도 종교 수장이었던 두 교령이 월북한 대형 사건 때문에 교세에 큰 타격을 입었다. 다만 오익제 교령의 경우는 2008년 납북으로 밝혀진 점에서 차이가 있다.[11] 불교는 자신들을 탄압한 조선 왕조에 대한 반발로 적극적인 친일을 하여 한용운도 이를 개탄하였으며, 천도교[10] , 대종교 등 민족 종교는 일제 이전부터 조정에게 잔인하게 탄압받고 일제의 가혹한 탄압 대상이 되어 교세 확장에 한계가 있었고, 무속 신앙은 식민지 치하 조선인들에게 일시적 위로는 되었을지 몰라도 미래에 대한 비젼을 제시해 주지는 못했다. 유교는 사실상 나라를 망하게 한 원흉으로 인식되어 이미지가 최악이었다. 그 빈 자리를 결국 개신교, 특히 미국식 개신교가 비집고 들어간 것이다.[12] 다만 해방 직후, 한반도 전체 인구 중에서 기독교 신자의 비율은 고작 3%에 불과했고, 한국에서 기독교 신자의 비율이 급격히 성장한 때는 1950년 벌어진 한국전쟁을 겪은 후이다. 이를 미군들이 준 원조물자들을 기독교 교회가 분배하는 역할을 맡으면서 이를 통해 구호식량을 받은 사람들이 기독교를 접하게 되었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으나, 당시 해외단체의 구호물자의 72%를 천주교 구제회가 지원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무리가 있는 주장이다.링크이후 개신교의 성장은 당시 개신교의 교세가 제일 강했던 평양에서 공산주의의 박해를 피해 남하한 교인들이 전국에 퍼졌고, 이후 반공운동 및 정부가 주도한 새마을운동의 확산이 당시 교단 내에 성장하던 기복신앙과 이를 기반한 적극적인 전도활동이 맞물린 영향이 크다. 일부 진보에서는 개신교가 보수우파와 협력하여 교세를 늘렸다는 인식이 파장하지만, 진보 지지가 높은 전라도와 수도권의 개신교 신자 비율이 가장 높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일부 극우 개신교인들로 인한 선입견에 불과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