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찬진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받았다.
2. 생애
정찬진은 1905년 6월 16일 경상남도 용남군 서면 서호동(현 통영시 서호동)에서 정병규(丁炳奎)의 세 아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어렸을 때 서당에 다니다가 12살 때 통영초등학교에 입학했다. 1920년 3월 통영초등학교를 졸업했으나 상급학교에 진학할 형편이 되지 못해 1년간 고향에서 독학했다. 1921년 봄 화물선에 몰래 들어가서 일본으로 밀항한 그는 도쿄의 노무자합숙소에서 지내면서 공사판에 나가 막노동을 했다.
노동자 생활을 하면서 어느정도 돈을 번 정찬진은 세이쇼쿠 영어학원에 입학하여 낮에는 노동판에 나가 일하고, 밤에는 학원에 나가 공부했다. 그러던 중 표트르 크로포트킨의 저서 〈상호부조론(相互扶助論)〉에 깊은 감명을 받고 아나키즘에 뜻을 둔 그는 1923년 니혼대학 사회학과에 입학한 뒤 아나키스트 오스키 사카에의 강론을 들으면서 아나키즘이야말로 조선의 광복을 위한 훌륭한 이상이라고 확신했다.
1923년 일본 도쿄에서 원심창 등과 함께 무정부주의 항일결사 흑우회(黑友會)를 조직하고 동흥노동조합(東興勞動組合)을 통하여 무정부사회의 실현을 꿈꿨다. 그러던 중 관동 대지진 때 일본인들이 조선인들을 무참하게 학살한 사건이 벌어지자, 그는 이에 분노하여 본격적으로 아니키즘 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심했다.
1924년 7월 일제는 동경에 유학중이던 한국인 학생을 기숙시켜 통제하기 위하여 동경 중야구(中野區)에 계림장(鷄林莊)을 세웠는데 이때 그는 많은 학생들과 이곳을 중심으로 무정부주의운동을 전개하였다. 1930년 5월 14일 흑기노동자연맹(黑旗勞動者聯盟)을 결성하고 재일한국인 노동자들을 결집하여 사회주의와 일본제국주의에 항거하는 한편 친일단체인 상애회(相愛會)와 투쟁하였다.
1932년 8월 동흥노동동맹사무소의 철거문제로 민흥규(閔興圭)와 함께 붙잡혀 1932년 11월 29일 소위 공무집행방해죄로 징역 10월형을 언도받아 옥고를 치렀다. 그 후 1937년 1월 소위 ‘무정부공산당사건’을 빌미로 일제는 사회주의와 노동운동에 철퇴를 가하기 시작했다. 1941년 12월 일본의 진주만 기습으로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항일민족주의자들에 대한 대검거선풍이 불었다. 이런 상황에서 정찬진은 제대로 된 활동을 할 수 없었고, 고향으로 갈 때마다 사복 형사 2명의 감시를 받아야 했다고 한다.
8.15 광복 후, 정찬진은 아내와 세 아들, 그리고 젖먹이 딸을 먼저 귀국시켰으나 자신은 귀국을 미루고 재일동포 문제에 전념했다. 조국으로 돌아가는 귀환동포의 수송대책과 잔류조선인의 생활보호문제 등을 주선하기 위해 아나키스트 항일운동가들을 주축으로「신조선촉진동맹(新朝鮮促進同盟)」을 결성하고 맥아더사령부와 일본당국을 접촉했다.
한편, 정찬진은 23년째 옥고를 치르고 있던 박열의 석방운동을 전개했고, 박열은 1945년 10월에 석방되었다. 박찬진은 아우 박원진을 아키다 형무소로 보내 박열을 맞이하게 했다. 이후 재일본대한민국민단에 가담하여 1955년부터 1958년까지 중앙단장을 역임했으며, 제일교포들이 조총련의 선전에 넘어가 북한으로 건너가는 것을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한편, 정찬진은 1954년 5월 제3대 국회의원선거에 출마해 고향에서 무소속으로 입후보했다. 러나「민단」관계자가 재일동포들에게서 모금해 온 선거자금이 외환관리법 위반으로 전액 압수되면서 손발이 묶였다. 그럼에도 그는 당시 집권당인 자유당의 부정부패를 지탄했으나, 결국 선거에서 5위로 낙선했다. 1958년 5월 2일 실시된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재도전했으나 입후보자 8명 중 3위로 낙선했다. 이후 1960년 7월 29일 실시된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 사회대중당 공천으로 다시 입후보했으나 또다시 낙선했다.
이후 일본으로 돌아간 그는 민단의 상임고문을 맡았고, 가족을 일본으로 불러들인 뒤 장남 정해룡으로 하여금 민단에 봉사하게 했다. 그러면서도 한국에서의 민단의 입지 강화를 위해 김재화를 지원하여 신민당 비례대표로서 제8대 국회에 진출시켰다. 그런데 김재화가 헌금한 정치자금이 조총련에서 흘러나온 자금이라는 루머에 휘말려 체포되고 말았다.
이에 정찬진은 분연히 나서서 자신이 재판의 증인으로 나서겠다고 밝혔다.「민단」의 모든 간부들은 찬진의 법정증언을 ‘섶을 지고 불로 뛰어드는 격’이라며 만류하지만 끝내 듣지 않고 재판에 선 그는 김재화는 독실한 천주교 신자이며, 따라서 근본적으로 공산주의자가 될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하고 그의 항일투쟁 경력과 해방 후「민단」창설과 발전에 끼친 공적을 역설한다. 또 그가「민단」단장 시절에 벌인조총련과의 투쟁을 생생하게 증언하고 그가 헌금한 정치자금의 모금내역을 하나하나 제시했다. 그 후 그는 검사를 향해 다음과 같이 일갈했다.
이에 재판장은 그를 조용히 불러서 "정 선생님의 명함은 익히 들었습니다만 과연 이름이 헛되이 전해지는 것이 아니군요. 그렇지만 증언만 해야 할 증인이 기소검사를 법정에서 그렇게 호통치면 재판을 어떻게 합니까?"라고 달랬다고 한다. 이후 김재화는 증거불충분으로 무죄 선고를 받았다.“당신의 오늘이 있게 된 것도 지금 피고석에 있는 저 분 같은 애국지사들의 항일운동과 반공투쟁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 아닌가? 그런 은혜 속에서 입신한 당신이 평생을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고난의 길을 걸어온 분에게 감사하고 도와주어야 마땅하거늘 도리어 없는 죄를 만들어 씌우려고 그 아까운 머리를 어쩌자고 헛돌리고 있는가?”
1980년 이후 모든 직위에서 물러난 그는 국내와 일본을 왕래하며 조용히 지내다 1992년 9월 2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정찬진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했다. 그리고 1995년 그의 유해를 국내로 봉환하여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