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트르 크로포트킨

 



'''Пётр Кропо́ткин'''
표트르 크로포트킨

<colbgcolor=black> 출생
1842년 12월 9일
사망
1921년 2월 8일
1. 개요
2. 생애 초기
3. 아나키스트 활동
4. 그의 사상
5. 대표 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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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당신의 심장이 인류의 심장과 함께 박동하거나, 참된 시인으로서 인간의 숨결을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졌다면, 당신 주위에서 요동치는 이 고통의 바다 가운데서, 굶주림으로 죽어 가는 사람들과 광산에 쌓인 시신들, 바리케이드 둔덕 위에 쓰러져 있는 부상자들과 시베리아 벌판과 열대 섬 해안에 자신을 묻으러 가는 추방자들의 행렬 가운데서, 숭고한 투쟁이 전개되고 패배한 자들의 고통스런 신음 소리와 승리한 자들의 술판, 비겁에 맞서 싸우는 용맹, 숭고한 열성과 비열한 악의가 요동치는 와중에 당신은 중립인 채로 있을 수 없습니다. ​당신은 억압받는 사람들의 편에 설 것입니다. 당신은 아름다운 것이, 숭고한 것이, 그리하여 생명 자체가 빛을 위해, 인류와 정의를 위해 싸우는 자의 편에 서야 함을 알기 때문입니다.

- 청년에게 고함, p. 54

'''권위가 있는 곳에 자유란 없다'''.

표트르 알렉세예비치 크로포트킨 공작(Кня́зь[1] Пётр Алексе́евич Кропо́ткин[2])은 러시아 제국의 저술가, 지리학자, 아나키스트 운동가이다. 가명은 '보로딘(Бороди́н)'.
미하일 바쿠닌, 세르게이 네차예프와 같은 러시아인들과 함께 19세기 아나키즘 운동을 대표했던 인물로 19세기 서유럽에서 널리 인정받던 다윈주의에서 파생된 적자생존에 반기를 들고 "모든 만물은 서로 돕는다."는 상호부조론으로 크게 주목 받았다. 한국에서는 20세기 초반 독립운동가 신채호를 통해 아나키스트 사이에서 널리 알려졌다.[3]
그의 사상의 핵심은 인간은 경쟁이 목표가 아닌 상호부조하며 함께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이었고 일종의 노동조합 형태의 보험 제도를 핵심으로 삼고 있다. 사유 재산과 권위주의를 부정했으며 중앙 집권적 정치 형태가 아닌 자발적 참여에 기인한 지역 공동체적 사회 구조를 주장했다. 러시아 혁명 발생 후 러시아에 돌아와 새로운 사회에 대한 기대감에 한껏 부풀었지만 얼마 가지 않아 볼셰비키가 권력을 장악하자 전체주의적 볼셰비키를 비난하며 "이것은 혁명의 매장이다."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블라디미르 일리치, 당신의 행동은 지금 당신이 믿는다고 주장하는 원칙들과 완전히 반대편에 있소... 혹시나 변명이랍시고 정치인으로서 권력 그 자체를 추구하는 건 의무라는 둥 요즘 절대 군주들도 하지 않는 말 따윈 않길 바라오. 당신이 전 유럽 공산주의의 선구자로서 이런 추악한 방법으로는 당신이 추구한다는 원칙을 이룰 수 없다는 걸 모를 만큼 자신의 권위주의적 착각에 빠져있는 것이오? 전 세계 공산주의의 수호자라고 자처하는 이가 가장 기본적인 인간의 순수한 의사 표현조차 이렇게 짓밟으면 그 이념의 미래는 도대체 어떻게 되는 것이오?

- 레닌에게 쓴 편지, 1920년 12월 볼셰비키 당국의 사회혁명당 숙청 및 인질 사태를 두고

러시아 혁명의 주도권을 탈취한 볼셰비키가 권위주의적 행보를 보이기 시작하자마자 맹렬히 비판하였으며, 특히 모스크바와 페트로그라드 중심으로 아나키스트 및 사회혁명당, 멘셰비키 같은 다른 정파에 대한 박해를 두고 "동서고금을 들어 참 레닌만 한 혁명가도 없다. 다른 혁명가들은 어떠한 도덕적 이상을 위해 싸우는 반면 레닌은 그런 걸 전혀 신경 쓰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통렬한 비난을 가했다. 한편 그러면서도 외국의 친구와 동지들에게 "혁명이란 원래 결코 깨끗할 수 없고, 무질서는 변화의 필수적인 부분이다."라며 혁명과 민중의 자유를 향한 열정 자체는 옹호하였다. 이 시점 크로포트킨은 당파적 분열과 박해를 넘어 19세기 브나로드 운동과 러시아 혁명적 인텔리 전통의 살아있는 거두이며, 특히 개인적으로 제정 러시아 시절 좌파/자유주의 세력 전체의 큰아버지뻘 인물이라 볼셰비키 정권의 직접적인 박해는 받지 않았으나 말년에 소련 정권의 기계적이고 비인간적인 폭력성을 좌파 내에서 처음부터 통찰한 인물 중 하나가 되었다.
현대엔 아나코 코뮤니즘(무정부 공산주의)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다. 크로포트킨 이전까지 아나키즘은 마르크스가 철학의 빈곤이란 저서를 통해 지적했던바, 특히 마르크스주의 계열에 비해 이론적, 사상적 기반이 약하고 충동적인 테러리즘에 의지하는 경향이 강했으나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론은 프랑스의 엘리제 레클뤼와 엘리 레클뤼 형제의 지질학적 연구와 함께 본격적으로 인간의 노동, 사회적 관계를 '''생태학적 관점'''에서 파악하여 하부 구조로부터 자발적인 조직화를 통한 '''아래로부터의 대안 권력 구조 형성'''이란 노선을 주장하면서 국제 아나키즘 운동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이런 크로포트킨의 생태주의적 수평 연대 노선은 훗날 스페인 내전 당시 카탈루냐아라곤 중심으로 사회 혁명을 주도했던 CNT의 기본적인 조직 방침이 되었으며, 현대에도 멕시코사파티스타 혁명이나 시리아 인민민주당이 추구하고 있는 민주적 공동체주의[4]의 이론적 기반이 되었다. 간단하게 말하면 크로포트킨의 생태주의적 아나키즘은 '''19세기 말까지만 하더라도 유행하던 테러리즘 중심의 아나키즘에 종지부를 찍고 하부 구조로부터의 체계적이고 치밀한 자발적, 수평적 연대를 통해 장기적인 관점에서 사회적 인식 혁명과 정치적 혁명을 향한 역량 축적'''이라는 현대 아나키즘의 기본적인 이데올로기적 토대를 깔았으며, 이에 기반하여 동시대 네스토르 마흐노의 우크라이나 자유령과 훗날 CNT의 혁명 활동이 이루어졌다. 이에 따라 이론적 비중으로만 본다면 국제 공산주의의 역사가 레닌 전후로 나뉘듯 현대 아나키즘의 역사는 크로포트킨 전후로 나누어진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2. 생애 초기


리즈 시절
러시아 제국에서 알렉세이 페트로비치 크로포트킨 공[5]의 아들로 태어났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그 당시 귀족들만 다니던 수습 기사단의 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1867년 근위 사관 학교를 졸업하고 육군 장교로 시베리아에 전출되어 기병대 장교와 시종무관을 지내기도 했으며 이때 군 업무 이외에 동물과 생태 환경 등의 연구를 하며 전공인 지리학도 습득하게 된다. 이 시기에 그는 사슴, 새, 심지어 개인 생활을 한다고 알려져 있던 늑대까지도 상호 부조를 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또 이때의 연구를 기초하여 산맥 구조선 이론을 구상했고 지도 작도법을 수정케 했다고 하며 빙하 작용 현상에 대해서도 논문을 발표한다.
이러한 연구 성과로 과학자로서의 길이 열리고 지리학회 회장직 제안까지 들어왔지만 모든 봉건제적 귀족 신분을 부정하며 아나키즘 운동에 투신하게 된다. 신문 칼럼식 기고문 <청년에게 고함>에서 과학 일체에 대한 그의 뚜렷한 견해를 볼 수 있는데, 과학은 근본적인 목적과 방향성을 잃었으며 사회적 기성세력에 의해 잘못 사용되고 있다고 하였다.

당신이 참으로 당신의 학문에서 인류의 번영을 꾀한다면, 굉장한 질문이 야기될 것이다. 당신의 비판적인 정신이 아무리 작다고 하더라도, 우리 사회에서 과학은 소수의 삶을 더 기쁘게 만들 뿐이지 인류 전부에게는 미칠 수 없는 사치한 종목임을 당신은 단번에 관찰해야만 한다. 1세기 전에 과학은 우주의 기원에 관한 건전한 가정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섭렵하였거나 혹은 비판적인 참된 과학적 정신을 소유하고 있는가? 야만인 같은 편견과 미신을 소유하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몇천 명은 방향을 잃어버리고 종교적 사기꾼의 꼭두각시로서 봉사할 준비가 되어 있다. 혹은 과학이 신체적 도덕적 건강을 위한 이성적 기초를 세우기 위해 무엇을 했는가를 살펴보자. 과학은 우리에게 우리가 어떻게 신체의 건강을 유지할지를 말해 주고, 도덕적ㆍ지적 행복에 이르는 길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우리들 책 속에 사장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그것은 왜 그런가? 왜냐하면 오늘날 과학이 몇몇 특권층 사람만을 위해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사회적 불평등, 임금 노동자와 자본주의 주인들의 두 계층으로 나누어진 사회가, 이성적 삶의 원칙의 모든 가르침을, 인류의 10분의 9를 위해 아픈 아이러니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 청년에게 고함


3. 아나키스트 활동


펠릭스 나다르(Nadar, 1820 ~1910)가 촬영한 크로포트킨
1871년 지리학회 회장직을 거절한 후 1872년 스위스 쥐라 산맥의 시계 제조 공동체를 방문하면서 이들이 이루고 있던 노동조합 형태의 자발적인 상호 협동을 보며 신념에 대한 확신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 후로 러시아에 돌아와 상트페테르부르크 지역의 노동자 농민과 연계하여 혁명 단체 차이콥스키단에서 활동을 전개하나 러시아 정부에 진압당해 1874년 감옥에 투옥된다. 하지만 귀족적 배경이 있던 때문에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2년 뒤 재판 전 극적으로 탈출했고 이후 프랑스와 스위스를 오가며 제1인터내셔널 활동과 신문 편집인으로 활동했다.
1881년 혁명가들에게 알렉산드르 2세가 암살당하자 러시아 정부의 요청으로 스위스에서 추방되어 옆동네 프랑스로 건너갔다. 그러나 이 동네 상황도 마찬가지인지라 파리 코뮌 붕괴 후 생긴 특별법으로 1882년 붙잡혀 5년 형을 선고받았고 이후 프랑스 내 지속적인 항의와 반발로 인해 1886년 석방되어 1917년 러시아 혁명 전까지 영국에 거주, 아나키즘 운동과 연구 저작 활동에 몰두하였다.
러시아 혁명이 터진 이후 크로포트킨은 러시아로 돌아와 이때만 해도 상당한 세력을 자랑했던 모스크바 아나키스트들을 중심으로 정치 활동을 펼치려고 했으나, 볼셰비키들의 좌파 내 숙청 작업에 아나키스트들이 대러시아 내부 아나키스트 서클 탄압, 크론슈타트 봉기 진압, 우크라이나마흐노 흑군 탄압을 통해 하나둘씩 쓸려가는 꼴을 말년에 구경해야 했었다. 크로포트킨 본인은 이 시대쯤 오니 사상적, 계파적 분열을 초월한 러시아 혁명가 전체의 대원로 대접을 받아 직접적으로 해코지당하기에는 위상이 너무 높았으나, 갈수록 노골적인 볼셰비키 일당 독재에 관하여 블라디미르 레닌에게 지속적으로 한 항의는 묵살당하고, 결국 1921년 2월에 있었던 그의 장례식은 레닌의 특별한 허락 아래 소련 역사상 거의 유일하게 공개적으로 반볼셰비키, 반정부 구호, 플래카드, 선동 등이 동원된 '''페레스트로이카 이전까지의 최후의 반정부 집회'''이자 이때만 하더라도 마르크스주의만큼이나 러시아 혁명에 큰 역할을 했던 러시아 아나키스트들의 마지막 공개 집회가 되었다.[6]

4. 그의 사상


크로포트킨은 무정부 공산주의의 시초로 평가된다. 그는 생산수단의 공동 소유와 임금제 폐지, 자유로운 합의에 의해 조직된 공동체를 강조했고, 이러한 방식은 훗날 사회주의 운동가들에게 지역 단위의 조합 설립과 공동 작업에 대한 아이디어를 제공했다. 이는 마오주의 인민 공사에 고스란히 영향을 주었고,[7] 모택동주의의 영향을 받은 북한에도 지역 조합 설립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또한 시대를 뛰어넘어 노엄 촘스키에게도 영향을 주었으며[8] 또한 크로포트킨 당시 막 태동기에 있었던 스페인 전국 노동 연맹 소속 아나키스트들에게 큰 영향을 주어 훗날 스페인 내전 때 혁명적 노동 자치 코뮌들의 형성에 큰 기반이 되었다.
현대엔 아나코 코뮤니즘에 생태주의적, 성해방주의적 관점을 덧붙힌 미국의 아나키스트 사회 운동가 머레이 북친의 사상에 터키에서 장기수 신세에 있는 쿠르드족 독립운동가 압둘라 오잘란이 투신하여 벌어지고 있는 시리아 내전이 영향을 받은 셈이다.
임금제는 사회불평등의 기원이라 주장하였다.
직업에 따라 대가의 차등을 둔다는 것에 부정적이었다. 직업의 사회 기여도를 측정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한 직업의 복잡한 사회적 관계를 무시하고 명령을 내리는자와 명령을 받는자를 구분지어 신 노예제를 만드는 것이라 하였다.
분업에 대하여 부정적이었다. 분업은 한 사람이 평생 한가지 일만 하게 하여 그 사람의 사회 전체를 못보게 하여 우둔하게 만들고 자신의 일에 지루함을 느끼게 하여 생산성을 떨어뜨린다고 주장하였다.
게으름뱅이들은 잘못된 교육을 받아 자신의 적성과 재능을 발견하지 못한 사람들이므로 혁명 후의 세계에서는 이 원인을 제거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국가는 개인과 개인을 멀어지게하는 요인이라 주장하였다.

5. 대표 저서


  • Mutual Aids - 국내에는 수 차례 번역되었다. 일제시대부터 해방 후 까지 활동한 몇 안되는 아나키스트였던 허유 하기락 선생이 해방 후 최초로 1983년에 번역하였고(당시 제목은 상호부조론), 현재에는 "만물은 서로 돕는다", "상호부조 진화론"등의 제목으로 다양하게 번역이 되어 있다. 중국에서는 아나키스트 리스쩡이 <상호부조론>이라는 제목으로 소개하여 중국의 사상계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 A Memoir of a revolutionary - 국내에는 1985년 한겨레 출판사에서 하기락 선생에 의해 처음 번역되었고, 현재는 크로포트킨 자서전, 어느 혁명가의 회상 등의 제목으로 다양하게 번역되었다.
  • Fields, Factories and Workshops - 이 책은 국내에는 1993년, 역시 하기락 선생에 의해 "정원, 공장, 작업장"이라는 제목으로 처음 번역되었다. 아쉽게도 이 이후 번역된 바 없다. 도서관에나 가야 구할 수 있을듯.
  • In russian and french prisons - 크로포트킨의 옥중수기.
  • 아나키즘 - 크로포트킨의 논문 5개를 묶어서 번역해서 국내에 출간된 책의 제목.#
  • The Conquest of Bread - "빵의 쟁취" 라는 제목으로 행성B에서 출판했다. 좌파 서양 인터넷 포럼들에는 특히 아나키즘 사상의 소개용 교과서 취급을 하는 정도로, 으로서 신들린 인지도(...)를 가진 서적이다. "아나키즘은 너무 이상주의적이다"라고 말하는 무지한 성향을 띠는 네티즌에겐 "빵 책이나 읽어라(READ THE BREAD BOOK)"이라고 태클 거는 경우가 많다. 레딧을 중심하여 생긴 좌파 유튜브 동영상 크레이터들의 모임 /r/BreadTube 또한 이 책의 이름에서 가져왔다.[9]
  • An Appeal To The Young - 진보신당 대표를 역임한 홍세화가 "청년에게 고함"이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간했다.[10]
[1] 관용적으로는 '크냐지'로 알려져 있지만, 어말 음소가 무성음화된 러시아어 발음은 '[knʲæsʲ\](크냬시)'에 가깝다.[2] 관용적으로 '크로포트킨'으로 알려져 있지만 '무소륵스키', '차이콥스키', '캅카스', '뱟카' 등의 표기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국립국어원의 러시아어 외래어 표기법에 따른 표기는 '크로폿킨'이다. 비슷한 예로는 클라라 체트킨(Clara Zetkin)을 들 수 있는데 이 경우에는 독일어 인명이므로 독일어 외래어 표기법을 따라 자음앞에 오는 파열음에 대해 'ㅡ'를 붙여 표기하는 것이다.[3] 크로포트킨은 다윈이 인간들은 도덕성과 협동심으로 상호 투쟁을 완화시킨다는 말을 하곤 있지만 '''그래도 상호 투쟁은 진화의 주된 원인'''이라고 주장하며 경쟁 위주의 19세기 제국주의를 합리화한다 비판하였다. 실제로도 다윈의 글에는 이런 식의 표현이 많았다. 앞쪽에서는 도덕적 능력과 협동심이 뛰어난 생물이 생존에 적합하다고 하지만 뒷부분에서는 허약자나 경쟁에서 낙오된 사람들에게 베푸는 복지 정책의 비합리성에 대해 이야기한다(...).[4] democratic confederalism[5] 농노를 무려 2000명이나 가지고 있는 귀족이었다.[6] 이때 그들의 플래카드에는 그의 명언인 '''권위가 있는 곳에는 자유란 없다'''라고 적혀 있었다. 그리고 그 말은 곧 현실이 되었다.[7] 모택동도 시기가 시기인 만큼 신해혁명 직후에는 "나는 무정부주의자다"라고 이야기를 하던 시기가 있었으며, 실지로 아나키즘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8] 여담으로 국내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김일성도 크로포트킨의 저서를 읽었다고 한다. 해방 직후, 김일성의 집에서 가정부로 일하던 일본인들에게 마르크스와 크로포트킨의 책을 주었다는 일화가 있다(...). # 김일성이 일본 공산당 기관지 아카히타를 보면서 당시 당수 노사카 산조를 대단한 사람이라고 일본인 가정부들에게 설명했다. 그러자 일본인 가정부들은 "이제 일본도 공산 국가가 되었나" 하며 울었다고 한다(...). 그러자 김일성이 "공산당이 싫어요?"하고 물었고, 가정부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김일성은 허허 웃더니 며칠 뒤 일본인 가정부들에게 일어판 마르크스 책과 크로포트킨 책을 건네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출처로 제시한 일본어 위키에는 언급한 내용이 전혀 없다.실제 사실이었는지는 불투명...[9] 하지만 이 서브레딧 자체는 사회민주주의부터 정통 마르크스주의 등 좌파 사상에 대한 영상이라면 모든지 허용되는 편이다. 그래서 흔히 /r/ChapoTrapHouse같은 극좌중에서도 극좌인 서브레딧에서는 리버럴들이라고 까인다. [10] 역자 후기에 크로포트킨은 미국을 본따 연방제는 찬성했으므로 국가 그자체는 반대하지 않았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크로포트킨은 국가는 부르주아지들에게 힘을 실어주고 개인과 개인사이를 멀어지게 한다고 주장하는 등 참된 아나키스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