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본대한민국민단
1. 개요
대한민국 정부가 공인한 재일 한국인 단체로, 목적은 조총련에 대항하면서 재일 한국인의 권익을 옹호하는 데 있으며, 나아가 대한민국의 국시를 준수하고 국제친선을 도모하는 것도 주 임무이다. 약칭은 '민단'이며, 일본에서는 알아듣기 쉽게 '한국민단'으로 줄여쓰기도 한다.
냉전 시절에는 더 규모가 컸던 조총련과 극한 대립을 벌여왔지만 지금이야 조총련이든 민단이든 세력이 약해져서 싸우고 자시고 할 것도 없다(...)[1] 본부는 도쿄도 미나토구 아자부쥬반역 근방에 위치해 있으며, 그 건물에 주일 한국 대사관 영사부도 있다.
2. 상세
이 단체의 설립 배경을 파악하려면 해방정국 당시 혼란상황에 대해 이해해야 한다. 1945년 8.15 광복 후 20일에는 재일조선인대책위원회 같은 재일 한국인 민족운동단체들이 일본 전국에 우후죽순같이 생겼는데, 9월 10일에는 도쿄의 7개 재일 한국인 단체와 각지 대표자 60명이 모여 '재일조선인연맹(조련) 중앙위원회'를 만들고, 9월 20일에 정식 발족했다.
그러나 조련이 본래 취지와는 달리 북한 임시정부를 지지하게 되자 우익 재일 한국인 청년들이 11월에 '조선건국촉진청년동맹(건청)'을, 이듬해 1월에 박열 등을 중심으로 '신조선건설동맹(건동)'을 각각 조직했다. 이 두 단체가 10월 3일에 합쳐져 '재일본조선인거류민단'이 만들어져 현 민단의 기틀이 다져졌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따라 공인단체로 인정받아 '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으로 개칭했다. 그리고 1965년 한일기본조약에 따라 재일 한국인의 영주권이 허용되며 규모가 팽창했다. 1994년에는 '거류' 2글자를 빼고 현 명칭으로 변경했다. 약칭은 '민단' 또는 일본 내에서 알아듣기 쉬운 명칭인 '한국민단'으로 쓴다.
회원수는 약 60만 명 정도다. 하지만 재일 한국인 2, 3세들이 아예 일본으로의 귀화를 선택하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조직세가 점차 약해지고 있다. 그래서인지 이전까지는 대립이 심했던 조총련과의 교류도 조금씩 늘어나고 있다.
한국 현대사 속에서 민단의 역할은 컸다. 1950년 6.25 전쟁 때 재일 한국인들이 자원 참전한 걸 비롯해 1950년대 후반에는 일본의 재일 조선인 북한 이주사업에 반대하는 투쟁을 전개했고, 1964 도쿄 올림픽 때는 한국 선수단을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1975년부터 조총련을 포함한 성묘단의 모국방문사업을 전개하기도 했으며 1997년 외환위기 때 외화송금운동을 벌인 바 있다.
한국 경제발전에서는 민단의 역할이 더 컸다. 1974년에 이희건 간사이흥은 창업주 등 재일 한국인 경제인들이 '재일한국인모국투자기업협의회(현 재일한국인본국투자협회)'를 발족해 1982년 신한은행이 설립되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이 은행이 각종 은행과 증권, 자산운용, 할부금융업체 등을 인수/합병하며 현재의 신한금융그룹으로 성장해 올 수 있었던 것도 민단의 자본력이 뒤에 버티고 있기 때문이며, 이에 따라 지주사인 신한금융지주회사라든가 신한은행의 사외이사 중 3명을 진출시켜 놓고 있다. 공식 홈페이지 통계도 만드는 등 재일 한국인에 대해 애정을 많이 쏟는다. 직업통계, 민단일보.
어두운 쪽으로는 재일 한국인 야쿠자와도 관련이 있는데, 한국에서 훈장까지 받은 다카야마 도쿠타로(본명은 강외수)는 재일동포로 민단과 인연이 있다. 그리고 송진우의 암살범인 한현우는 최서면의 신원보증으로 일본에 입국한 뒤 민단에 들어갔다. 그리고 조총련을 상대하는 데 일조했다.# 그는 나중에 표창도 받는 등 정권의 비호를 받았다.# 물론 송진우의 죽음에는 조금도 반성을 안한다. 폭력단과의 문제도 발생했는데, 김용환은 폭력단을 민단에서 추방하고자 했다. 그래서 양원석(야나가와 지로)의 조직인 유천회(야나가와카이) 소속 최재수가 추방되었는데, 그 보복으로 회의장에 난입해서 김용환을 참살했다는 무서운 일화가 있다.[2]
민단과 조총련은 화해의 기류가 강했을 때 한국의 대표적인 골수 극우 논객인 조갑제의 저서가 이들의 화해에 찬물을 끼얹은 적이 있다. 이유인 즉, 조갑제는 한국의 반독재 민주 언론인[3] 으로 일본에 알려져 있었는데, 조갑제의 저서(김대중 전 대통령의 종북주의 의혹과 여러 카더라 통신을 엮은 것)가 일본어로 번역되어 출간되자 이를 읽고 깨우침을 얻은(?) 일부 민단 내 우파가 반공주의 정신을 다시금 가다듬었다나 어쨌다나..? 때문인지 지금도 햇볕정책 같은 대북 유화 정책에는 상당히 비판적이며, 일부 칼럼에선 종북 같은 단어를 쓰기도 한다.# 물론 개개인마다 어느정도 성향차는 있을듯. 2017년 1월 12일에는 오공태 당시 중앙단장이 부산의 일본 영사관앞에 세워진 평화의 소녀상을 철거해야 한다는 발언도 했는데, 반발이 거세지자 민단은 혐오발언 등으로부터 한일관계 개선을 바라는 재일 한국인들의 현실을 감안해달라는 뜻이었다고 해명했다.
현재는 민단 회원이라고 해서 다 우익 성향은 아니다. 심지어 민단 회원 중에는 중핵파 등 일본 신좌파 조직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3. 민단 강령
* 우리는 대한민국의 국시를 준수한다.
* 우리는 재일동포의 권익옹호를 기한다.
* 우리는 재일동포의 경제발전을 기한다.
* 우리는 재일동포의 문화향상을 기한다.
* 우리는 일본 지역사회의 발전을 기한다.
* 우리는 세계평화와 국제친선을 기한다.
4. 역대 중앙단장
1952년 4월부터 10월까진 의장단 체제였다.
- 박열 (1945~1949)
- 정한경 (1949)
- 조규훈 (1949~1950)
- 김재화 (1950~1951)
- 원심창 (1951~1952)
- 김광남 (1952)
- 김재화 (1952~1955/1958~1959)
- 정찬진 (1955~1958)
- 정인석 (1959~1960)
- 조영주 (1960~1961)
- 권일[4] (1961~1963/1964~1967)
- 김금석 (1963~1964)
- 이유천 (1967~1969)
- 이희원 (1969~1972)
- 윤달용 (1972(대리)/1974~1976)
- 김정주 (1972~1974)
- 조영주 (1976~1979)
- 장총명 (1979~1985)
- 박병헌 (1985~1991)
- 정해룡 (1991~1994)
- 신용상 (1994~2000)
- 김재숙 (2000~2006)
- 하병옥 (2006)
- 정진 (2006~2012)
- 오공태 (2012~2018)
- 여건이 (2018~ )
5. 산하 단체
- 재일대한민국부인회
- 재일학도의용군동지회
- 재일본대한체육회
- 재일한국상공회의소
- 재일본대한민국청년회
- 재일본대한민국학생회
- 재일한국과학기술자협회
- 재일한국인법조포럼
- 학교법인 백두학원: 건국학교 운영.
- 학교법인 금강학원
- 학교법인 동경한국학원: 동경한국학교 운영.
- 학교법인 교토한국학원: 교토국제학원 운영.
6. 문제점
조총련이 북한과의 연계로 인해 일본 공안당국의 중점 감시를 받았던 것과 다른 방식으로, 이들도 일본 공안당국의 감시 대상이었다. 앞서 말했듯, 일본 내 차별과 경제적 격차 문제로 인해 많은 이들이 야쿠자와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민단은 반공주의와 극우 민족주의에 입각하여 조총련의 대항마로서 출범한 단체이기 때문에, 반 조총련 테러 활동에 지나치게 많은 역량을 쏟아붓던 시절도 있었다. 앞서 말했듯 한현우와 최서면을 비롯한 백의사 출신의 테러범들이 민단 초기부터 유입이 되었기 때문에, 이는 피할 수 없는 노선이었다. 국내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조총련과의 투쟁 중, 직접 사무실에 쳐들어 가서 현피를 뜨는 일도 부지기수였고, 일본 내 재일 한국인들의 좌우합작 조직이었던 한민통(훗날 한통련이 되는) 사무실에 '''짱돌'''을 던지고 테러를 감행하는등, 여러모로 폭력적인 면을 많이 보였기 때문에 일종의 파시스트 단체로 언론에 알려진 시절도 있었다. 또 재일교포 출신 야쿠자들을 결집시켜 조총련을 견제하는데 쓰기도 하였다.
1950년대 말에는 조총련계의 재일 한국인 북한 이주 사업에 반대하여, 대한민국의 지원을 받아 니가타의 일본 적십자센터를 폭파하려 계획했다가 발각된 적도 있다. # 삼무사건에도 일부 관련이 있었다고 한다.
친일반민족행위자인 박춘금이 1950년대에 도쿄 민단 중앙본부 고문을 맡은 적도 있다. 1960년 4.19 혁명 때 곽동희를 중심으로 민단 민주화를 시도했으나 이듬해 5.16 군사정변으로 권일 단장에게 제명당했다. 이후에도 군사정권 지지파와 민주화 세력이 대립하다 1971년 김재권 중앙정보부 공사의 '녹음테이프 사건'으로 두 세력이 또 대립한 뒤 민주파 인사들과 한국청년동맹, 한국학생동맹 등이 제명당했으며, 권위주의 독재시기 내내 이러한 단체들을 반국가 세력으로 몰았다. 한국이 민주화된 이후에도 매카시즘은 여전하여, 2006년 2월에 취임한 하병옥 중앙단장이 서만술 조총련 의장과 5월 17일에 재일동포의 화해와 단결을 호소하는 공동성명을 냈으나 지방조직 등으로부터 반발을 사서 9월에 물러났고, 2007년에 제명당했다.
1980년대만 해도 반공 드라마나 영화에서 선한 세력(물론 조총련은 악의 축)으로만 나오고 이런 흑역사들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7. 기타
일본 내 위성방송 채널(SkyPerfecTV 계열)에 한국 프로그램을 수입, 방영하는 "KNTV(Korea Now TV)"를 운영한 적이 있다. 뉴스데스크, PD수첩이나 미니시리즈 드라마 허준 등 주로 MBC 계열의 프로그램을 수입했지만(물론 다른 한국 지상파 프로그램도 수입했다) 2004년 NHK에서 겨울연가를 방영하며 초대박을 친 이후로 일본 내 한국 TV 프로그램의 수요가 늘어났고, 보다 다양한 프로그램을 방영하게 되었다. 또한 자체적으로 뉴스를 제작하기도 했는데 민단 관련 소식을 주로 알려줬다.
8. 관련 문서
[1] 현재는 민단이 좀 더 규모와 한인 사회 내 영향력이 크다고 한다.[2] 이 김용환의 동상은 국립극장 근처에 있다.[3] 조갑제는 반독재 언론인으로서 박정희, 전두환 정권에 반하는 취재 활동을 벌여왔다가 민주화 이후 박정희빠가 되었다. 지금도 극우 언론인 중 5.18을 민주화 운동으로 인정하는 드문 인물이다.[4] 민주공화당 8대 국회의원, (사)일본문제연구소 이사장 역임.